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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심처 궁궐에서 왕과 왕족들의 수발을 들어주며, 궁궐의 살림을 해야 했던 내시와 궁녀들. 대중들의 머리 속에 이들은 왕이나 왕비, 후궁의 심부름이나 하고, 권력의 언저리에서 왕이나 왕비의 눈치나 보는 존재로 여겨질 법 하지만 그건 사극이 주입한 이미지였다. 내시와 궁녀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엄면히 공무원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방송됐던 ‘대장금’에서는 수라간 나인으로 일하는 장금의 모습을 통해 궁녀 선발이나 교육 과정이, ‘왕과 나’에서는 처선을 통해 내시의 선발, 훈련과정이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들에게는 업무를 분담하는 소속이 있었고,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하면 승진을 하고 품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이들의 최고 품계는 생각보다 높았다. 내시부 최고 관직은 종2품 상선이었고, 상궁은 정5품이었다. 최고 상궁인 제조 상궁은 대신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였다고 한다. 임금 혹은 왕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던 이들에게는 품계이상의 힘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왕을 가까이 모시다보니, 공신이 된 내시도 여럿 있었다. 그만큼 내시에 대한 왕실의 예우는 각별했기에 내시 또한 자부심이 있었다. 이렇게 권세를 누리다 보니 거세하고 내시를 장원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내시와 궁녀들은 시험을 치러야 품계를 올려줬기 때문에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았다. 글씨로 이름을 떨친 내시도 있었고, 문학적 소양이 높은 궁녀들이 많아 궁중문학을 생산하는 주체가 됐다. 특히 왕을 가까이 모시던 지밀상궁의 수준이 가장 높았는데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산성일기 등은 궁녀들이 남긴 작품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궁궐 안 삶이 늘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할 때나, 소현세자 등이 심양으로 떠날 때 내시와 궁녀도 함께 떠나야 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으로 끌려간 궁녀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된 막센시아 같은 궁녀도 나왔다.
특히 김처선이나 김손순 같이 왕에게 직언을 고하다 참형을 당하는 내시도 있었다.
가뭄이 심하면 결혼 못한 여인의 한이 하늘에 닿아 날이 가물어졌다고 생각해서 궁녀들을 출궁했고, 아파서 나을 가망이 없어도 사가로 출궁했다.
궁녀에 비하면 내시는 비교적 사생활을 누렸다. 궐 밖에서 생활하며 부인과 자녀를 둘 수 있었고,치부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첩을 두기도 했고, 이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은 그 동네에 효자가 많이 나서 그렇게 붙여진 거라고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시의 별칭인 화자가 살던 동네라 해서 화자동이라고 하던 것이 음이 변해서 효자동이 된 것이라고 한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내시나 궁녀의 업무 분담이나 소속, 인사 고과를 평가하는 방법 등을 보면 놀랄 정도로 체계적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별로 뒤지지 않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궁녀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을 누그러 뜨릴 수 있었다. 후궁 자리를 노리며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서 암투와 시기를 일삼는 여인쯤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궁녀의 전부는 아니었다. 궁녀는 단지 '왕의 여자'로만 존재했던 여인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주로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아쉽기도 했다.필자의 시각이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그래서 좋게 말하면 객관적,나쁘게 말하면 좀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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