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듯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금방 서로를 알아보고, 또 끌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 같은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신원보증이 된다. '저자는 나와 비슷한 족속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투르니에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 전에 <방드르디>를 비롯한 투르니에의 다른 책들의 독자이기도 했지만, 이 작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다. 이 사람은 정말로 책을 좋아하는 구나... 우리는 흔히 '날카로운 시선'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너무 남용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 의미가 다소 퇴색해 버린 감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투르니에의 시선은 정말이지 '날카로움' 그 자체이다. 자신도 작가이면서 문학의 고전을 앞에 두고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사실 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 중에서 읽지 않은 책이 삼분의 일 가량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내가 이 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분석을 읽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정신적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일견 무용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위안을 준다. 방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장소에 놓아두고, 틈틈이 친구처럼 들여다보고 싶은 책이다.방드르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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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비상/미셸 투르니에/이은주/현대문학 한달 가까이 걸쳐 다 읽고 나서는 시원섭섭한 허탈감이 몰려왔다. 몇 년 전 저자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을 읽고서 혼란스러워 했던 『로빈슨 크로소』의 프랑스판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책과 같은 선례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저자가 문제의 책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인용한 것은 자긍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내가 그 책을 출판했을 때, 한 미국인 비평가가 곧 그 소설에 대해 이렇게 썼던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드, 월트 디즈니, 그리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서 다시 쓰여진 로빈슨 크루소이다.”-589p 저자는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는 작가로서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출판될 수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놓은 책이 질이 좋고 제값을 하는 상품이어야만 내 잠자리는 편안하다. -12p 책이 가진 자연스럽고 억누를 수 없는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라는 말로 정의한 책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신념은 확고하였다.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14p 책의 효능을 말하고 있는 이 글에서 공포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저자는 소설가로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나는 이따금 초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곤 하는데, 그들은 소설이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당신 이야기에서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내게 종종 던진다.(중략) 이 끔찍한 질문에,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다”라는 장 콕토의 말만이 완벽한 대답이 될 수 있다.-16p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가들이 소설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깜빡하고 소설 같은 제목만 보고 구입하였다. 저자의 독서노트였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구입했으니 읽어볼 밖에는. 작품의 내용과 그 속에 담긴 철학과 당시의 시대 상황, 작가의 온 생애까지를 망라하는 작가론에 버금가는 글들이어서 단순한 독서기를 예상했던 나로서는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다 읽기는 했다. 저자가 섭렵한 작가들이 어디까지이고 내 지식의 바닥이 어디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은 처음 몇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거론된 약 30여명의 작가 중에 이름이라도 들어 본 사람은 몇몇에 불과 하였고 앙리 드 캉피옹, 노발리스, 제르멘느 네케르 드 스탈, 카스파 하우저, 가브로슈, 쥘 발레스, 이자벨 에버하르트, 콜레트, 아치볼드 조셉 클로닌, 클라우스 만, 에밀 아자르, 모리스 주느부아 등 듣도 보도 못한 생경한 인물들이 한없이 로맹 가리가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여 작품을 발표하고 콩쿠르 상까지 수상하게 만들었던 에밀 아자르 정도가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의 작품 《튤립》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구절을 쓸 수 있는 작가였으니 세상을 완벽하게 속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울 줄 알아요?” 비들이 물었다. - 내 눈물들은 모두 죽었어. - 죽었다니, 무슨 소리예요? 왜 죽어요? - 눈물들은 부잣집 애들이거든.(하략)-560p 최근에 읽었던 『마담 보바리』의 창작 배경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소득이었다. 노르망디의 큰 마을인 리에서 일어난 젊고 아름다우며, 열정적이고, 몽상적인 의사 부인의 자살에서 착상을 얻어 보라고 매우 완곡하게 제안한 사람이 부이예이다. 플로베르의 제일 유명한-그리고 아마도 프랑스 문학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소설인 이 작품이 이러한 기원들에서 유래한다-242p 그동안 얼마나 책들을 얇고 쉽게 읽어 왔는지에 대한 자성이 뼈저리다. 책의 마지막을 “다섯 스승의 짧은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마무리한 것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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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루니에는 1967년에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에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글을 발표해오고 있다. 우리는 그를 소설과 수필의 작가로 주로 만나왔으나, 동화를 비롯한 다른 문학 장르, 사진을 비롯한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그의 관심은 고르게 퍼져있다. 그리고 특히 책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는 작가가 된 이후 꾸준하게 다른 작가들에 대한 비평과 서평들을 발표해오고 있는데, 1981년에 프랑스에서 그런 글들을 묶은 한 권의 책이 나왔다. 그 책에서 40여 편 정도의 글이 실렸고, 문학잡지에 기고했던 글, 서평, 다른 작가들의 책에 실린 투르니에의 권두언 등 그 출처는 다양하다. 그리고 권말에는 투르니에가 자신의 스승으로 소개하는 다섯 가람에 대한 회상을 덧붙였다. 그 책이 <흡혈귀의 비상>이다. 이 책에는 독서노트라는 부재가 붙어 있는데, 이 부제는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글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 있다는 점에서는 비평서에 가깝지만, 비평가가 할 수 없는 자유로운해석과 상상이 있다. 치밀한 비평가와 분방한 소설가가 함께 있다고 할까. 본격적적인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글들조차도 딱딱한 방식은 아니다. 투르니에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거의 언제나 일관되게 '그 사람은 누구인가'이다. 그래서 투르니에의 비평에는 공허한 말이 없다. 우리는 이따금, 하나의 비평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해석을 요하는 난해한 텍스트로 머물러 있는 글들을 만나게된다. 투르니에에게는오류와 극단과 과장이 있을지언정, 말이 말을 지칭하고 마는 공허함은 없다. 그것은 그의 관심이 언제나 작품을 통해서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투루니에와 함께 하는 읽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특이한 경험을 준다. 가령, 우리에게 괴테나 노발리스, 샤르트르, 스탈부인, 토마사 만같이, 책에서나 그 이름을 보아온 작가들은 그 얼마나 먼 데 있는 사람들인가. 사실 그런 사람들은 우리보다 그렇게 먼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우리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도 할 수 있는 데도, 왠지 그들은 백악기의 공룡 이름만큼이나 우리에게서 멀다. 그런데 투르니에는 그런 사람들과 한 식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우리 앞에 바싹 끌어댄다. 그것은 그가 투르니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우선, 투르니에는 192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나이로 여든을 바라보는 그는 유럽의 한복판에서 20세기의 격변을 몸으로 체험한 20세기의 증인이다. 그리고 투르니에의 집안은 유복한 부르주아였다. 유럽의 부르주아로 태어나 자라면서 그가 받은 교육은 우리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그는 작가이기 전에 소르본느와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한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철학적인 눈길이라는 마술'로 문학을 바라본다. 미셸 투르니에라는 사람은 그래서,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교양있는 교육을 받은 세련된 심미가이자, 20세기의 증인이다. 이 말 속에는 투르니에라는 한 사람 안에 엄청난 양의 시간이 새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살아있는 유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우리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지만 21세기의 인간만은 아니다. 그는 긴 시간을 통찰한 하나의 두께있는 시선이며, 유럽의 정신사를 담고있는 지성이고, 인간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애정이다. 이런 투르니에라는 사람의 '읽기'는 하나의 작품 속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작품과 작가를 동시에 아우르고, 그 작품을 태어나게 만든 한 인간의 영혼을 염탐하며, 그 영혼이 살았던 시간들을 바라본다. 작품이 작가와, 작가가 시대와 맞물리는 깊은 '읽기'는 독서의 본질적인 부분이지만, 이런 독서를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을 통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셰익스피어와 만나는 것을, 독일 시인의 자살에 얽힌 내적 고백들을, 뜨거운 낭만주의로 재해석되는 보바리 부인을, 헤세에 대한 유리알 같은 해석을, 토마스 만이라는 거대한 산맥에 대한 통시대적 고찰을, 샤르트르에 빠져 있던 젊은 시절의 투르니에를, 아랍 소년 모모의 비밀들을 만나다. 또한, 페로의 동화들이 사뮤엘 베케트와 나란히 서기도 하고, 새로운 괴테를 만나며, 스탈 부인과 콜레트 같은 여인들은 일생을 지켜봐온 친구들처럼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투르니에가 '글쓰기'에 머물지 않고 다른 '책들' 속으로 파고든 또 다른 문학적 참여이다. 투르니에라는 이 두꺼운 프리즘을 통과하는 '책들'은 감추어놓았던 미지의 지평을 드러내면서 '책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자부를 준다. 이것이 대가와 함께 읽는 기쁨이다. |
| 최근 들어 독후감 내지는 독서 일기, 또는 서평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기획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책들의 가치에 의문을 가지기 이전에 왜 우리는 남들이 책을 읽은 것에 대해 궁금해하고 또 읽고 싶어하는지 먼저 의문을 가져야 될 것이다. 독서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굳이 이런 류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작품들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독서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다양한 해석의 방식을 보완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대가들의 독특한 독서법과 관점을 아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독서란 어디까지나 내가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내는 창조의 행위이기에 이러한 참고방식은 부차적인 것이고, 독자는 구경꾼이거나, 한발 물러서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직접 참여해서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낫고 옳을 것이다. 미셀 투르니에의 독서노트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사실은 미셀 투르니에의 독서노트라기 보다는 그의 뛰어난 다른 에세이집과 같은 단상과 생각을 정리한 책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미셀 투르니에를 좋아하는 내게는 그가 다른 책과 작가들과 이야기한다는 것이 못내 질투가 났다. 그의 새로운 바라보기 방식을 알게 되어 기쁘기도 하지만. 미셀 투르니에의 책을 거의 읽어보았지만 이 책을 읽기가 가장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게 미셀 투르니에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하나의 깊은 주제를 가지고 몰두해서 쓰여지거나 자유로운 사고와 연상으로 다가오는데 이 책은 투르니에가 읽은 다른 책들의 작가들과 대화하거나 집중하는 정도가 강해서 내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은 구경꾼이 된 듯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곳곳에 내가 읽은 책들을, 투르니에만의 독특한 해석으로 풀어쓴 것들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하거나 좀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셀 투르니에는 자신이 흥미롭게 읽은 책에 대해 자기만의 독특하고 깊은 관점으로 여러가지 해석을 풀어놓는데 사실 이 내용의 비중은 조금이고 많은 부분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적어놓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이 내게는 되려 더 재미나고 좋았다. 거대하고 크나큰 독서방식, 투르니에 특유의 신화적인 지식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방식은 매력적이면서도 조금은 난해하다. 그러니 이 글은 독서노트라기 보다는 일종의 비평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 <흡혈귀의 비상>은 책이 다른 독자들을 찾아 날아다니며 새롭게 해석되고 변화한다는 것의 은유적 표현인데 관점을 달리해서 독자를 흡혈귀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듯 싶기도 하다. '또한 한 번 쓰인 작품이라도 후세 사람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했다. 그러니 미셀 투르니에를 지나쳤던 흡혈귀들을 우리들이 만날 때 그 존재는 이미 다른 흡혈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흡혈귀에게 밤새 피를 빨리고 창백하고 깊은 표정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노닐며 헤매는 경험은 중독증세를 불러올 만큼 강력한 쾌락이다. 내 DNA를 머금은 책이 새롭게 신선한 피를 찾아 날아갈 때 나는 다시금 결핍으로 아득하고 아찔하고 위험한 흡혈을 다시 갈구할 것이다. 이 책의 정가는 1만 5천원인데, 이 책의 가치보다는 좀 높게 책정된 느낌이 있다. 투르니에의 책 중에서 제일 읽기가 껄끄럽고 거북한 책이다. 같은 값이면 미셀 투르니에의 <예찬>이나 <외면일기>를 추천해주고 싶다. 미셀 투르니에라는 작가를 맨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가장 나중에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