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입니까?> -우리가 경계해야할 교사상과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교사상에 관하여 프레이리의 패다고지 2장을 중심으로 <수유연구실 +="" 연구공간‘너머’="">의 공동대표인 고병권 씨의 말로 시작해보자. “프로이트도 지적한 바이지만 근대 교육학과 정치학은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하는 학문들처럼 보인다. 교육학은 아이들에게 기존의 가치들을 주입하면서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치학은 억압받는 민중들을 잘 지도하고 이끌어 자율적인 존재로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그렇다...” 프레이리는 그의 책 패다고지에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와 정의를 1장에서 피력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2장을 시작한다. "교사-학생과의 관계를 학교의 안팎에서 다방면으로 주의깊게 분석해보면, 근본적으로 설명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관계의 양 축은 설명하는 주체(교사)와 인내심을 가지고 그 설명을 듣는 객체(학생)이다. 설명의 내용은 가치관이든, 현실의 경험적 차원이든 상관없이 설명되는 과정에서 생명력을 잃고 무미건조해지는 경향이 있다. 교육은 그와 같은 ‘설명병’을 앓고 있다." 기존 교육구조 시스템의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그는 “이러한 설명식 교육의 뚜렷한 특징은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말의 반향(反響)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교사가 설명자인) 설명은 학생들이 설명된 내용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도록 만들고, 더 나쁜 것은 학생들을 교사가 내용물을 ‘주입’하는 ‘그릇’이나 ‘용기’로 만든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더 완벽하게 그릇 안을 채울수록 그 교사는 더욱 유능한 평가를 받는다. 또한 내용물을 고분고분 받아 채울수록 더욱 나은 학생들로 평가된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을 프레이리는‘은행 저금식’교육개념으로 정의를 내린다. 지식이란 것은“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속에서, 세계와 덜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행 저금식 교육관에서의 지식이란,“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에는 억압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있는데, 억압이데올로기의 한 특징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부정하고, 교사와 학생은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교사는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무지하다고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나감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곤고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억압이데올로기를 깨는 해방교육의 시작은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는 데에 있다. 교육은 교사-학생 모순을 해결하는 데서 시작되며, 이 모순의 양측을 화해시킴으로써 동시에 교사와 학생이 더불어 존재하게 됨. 은행 저금식 교육관에서는 그러한 해결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은행 저금식 교육은 그 모순을 온존시키고 더욱 강화해서 억압적 사회를 전체적으로 반영하는 다음과 같은 태도와 습관을 낳는다. 1.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운다. 2.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3. 교사는 생각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생각의 대상이다. 4. 교사는 말하고 학생들은 얌전히 듣는다. 5. 교사는 훈련을 시키고 학생들은 훈련을 받는다. 6. 교사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고 실행하며 학생들은 그에 순응한다. 7. 교사는 행동하고 학생들은 교사의 행동을 통해 행동한다는 환상을 갖는다. 8. 교사는 교육 내용을 선택하고 학생들은 (상담도 받지 못한 채) 거기에 따른다. 9. 교사의 지식의 권위를 자신의 직업상의 권위와 혼동하면서 학생들의 자유에 대해 대립적인 취치에 있 고자 한다. 10. 교사는 학습 과정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단지 객체일 뿐이다. ☹은행 저금식 교육자의 특징 1. 의도적이든 아니든(자신이 비인간화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선의의 은행원식 교사들도 많다.), 그렇게 저축하는 지식 자체가 현실에 관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2. 비대해진 자신의 역할에 진정한 안전성이 전혀 없다는 것,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은행 저금식 의식 개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 세계가 학생의‘안으로 들어가는’방식을 규제하는 것이 곧 교육자의 역할이다. 또한 교사의 임무는 이미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조직화하는 것이며, 교사 자신이 참된 지식이라고 여기는 정보의 저축물을 구성해서 학생들에게‘주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의 사고가 참된 것이어야만 교사의 사고도 참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을 위해서 사고할 수도 없고,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참된 사고란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사고다. 따라서 그것은 고립된 상아탑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의사소통 속에서만 생겨난다.” 프레이리는 앞에 언급한 예금식 교육의 대체물로‘문제제기식 교육’을 주장한다. 이는 억압자의 교육(예금식 교육)에서 학습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혁명적 교육이다. 참된 해방은 사람들 속에 또 다른 저축물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해방은 하나의 프락시스이다. 세계에 관해 인간이 행동하고 성찰하는 목적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다. 진정으로 행방의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빈 그릇과 같은 기계적 의식 개념을 취하지 않아야 하며, 해방의 이름으로 지배적 은행 저금식 방법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문제제기식 교육에 관하여 1.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인식행위로 구성된다 2.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교사-학생 모순의 해결이 필요하다. 3. 문제제기식 교육의 성취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대화 대화관계가 성립되면‘학생들의 교사’와‘교사의 학생들’은 존재하지 않고, 교사-학생인 동시에 학생-교사라는 새로운 관계가 탄생한다. 교사는 단순히‘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며, 그 자신도 학생들과의 대화 속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된다. 학생들 역시 배우면서 가르친다. 따라서 그들은 양측이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진다. 이 과정에서 ‘권위’에 기반한 주장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권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자유에 맞서지 않고 자유의 편에 서야만 한다. 여기서는 누구도 타인을 가르치지 않으며, 누구도 혼자 힘으로 배우지 않는다. 다만 민중이 세계와 인식 대상들의 중재를 통해 서로를 가르칠 따름이다.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일을‘독점’했던 것과는 큰 차이다. 4. 문제 제기식 교육 방법은 교사-학생의 행동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교사가 어떨 때는‘인식적’이고, 어떨 때는‘설명적’인 일이 없다. 즉 교사는 학습안을 준비할 때나 학생들과의 대화에 참여 할 때나 똑같이 늘‘인식적’이다. 교사는 인식대상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학생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식 교육자는 항상 학생들을 벼려하여 자신의 성찰을 재형성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더 이상 유순한 강의 청취자가 아니라 교사와의 대화 속에서 비판적인 공동 탐구자가 되는 것이다. (인식이란 의미의 구성주의적 접근에서 인식이라는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5. 문제제기식 교육은 인간이 변화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즉, 인간은 미완성의 현실 속에 그 미완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미완성의 존재다. 이러한 불완전함과 더불어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인간만이 가능한 교육의 뿌리가 있다. 인간존재의 미완성적 특성과 현실의 변화적 특성으로 인해 교육은 항상 진행중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육은 언제나 프락시스 속에서 재창조된다. 즉 존재하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교육의‘지속’은 항구성과 변화라는 두 대립물의 상호작용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은행 저금식 방법은 항구성을 강조하지만 반동적이다. 문제제기식 교육은 역동적인 현재에 뿌리박고 있으며, 혁명적이다. ☀2장을 마무리하며... <문제제기식 교육은="" 억압자의="" 이익에="" 기여하지도="" 않고="" 또="" 기여할="" 수도="" 없다.="" 억압적="" 질서는="" 피억압자가="" “왜?”라는="" 의문을="" 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가="" 되어야만="" 가능하지만,="" 혁명="" 지도부가="" 그="" 교육방법을="" 실행하는데="" 반드시="" 완전한=""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 과정에서,="" 나중에="" 참된="" 혁명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도에서="" 당장="" 편리하다는="" 이유로="" 지도부가="" 잠정적으로라도="" 은행="" 저금식=""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은="" 처음부터="" 혁명적-다시="" 말해="" 대화적-이어야만="" 한다.=""> 혁명적 교육을 준비하는 학교에 있어서 프레이리의 위의 말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시작하기도 전에, 혁명의 대상인 교육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 아닐까? 프레이리의 교육학은 억압자들을 위한 교육학이고 기존의 교육체계를 무너뜨리는 혁명으로서의 교욱학이다. 패다고지가 출간된지 30년이 지난 지금의 교육현실에서도 패다고지가 필요한 이유는 무얼까? 프레이리는 이러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아닐까...? 세상을 배운 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제기식>수유연구실>교사입니까?> |
|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인문학여행’을 떠나기 위해 설립된 성프란시스대학(이하, 대학)이 운영된 지 어느덧 1년이다. 지난해 9월 출발했던 1기 강좌가 올 5월 첫 수료생 13명을 배출했고, 다시 올 6월부터 2기 강좌가 시작돼 매주 다양한 삶의 문제를 놓고 구성원 모두 머리를 맞댄 채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작년여름 임영인 신부(대학 학장)로부터 뜻밖의 강의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일이 우리네 모듬살이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장차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질곡의 삶을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다양하고도 색다른 반응과 의견들을 접하면서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 있다. 대학은 그 누군가를 위한 어떤 ‘행위’이기 이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장이다. 아울러 대학은 우리네 모듬살이에서 나날이 퇴색되고 있는 ‘함께’ 혹은 ‘관계’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1년 대학은 뜻하지 않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런 사회적 관심의 반영으로 곳곳에서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를 찾아나서는 인문학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와중에 나는 대학 2기강좌와 또 다른 대학(관악인문대학)에서 문학과 작문강의를 맡게 되었다. 시쳇말로 보따리장사가 된 셈인데, 은근슬쩍 기대하기를, 1기의 경험과 준비해둔 자료를 이용하면 2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강의할 수 있으려니 싶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보통의 강의라면 경험을 쌓을수록 요령도 붙고 그만큼 편안해지게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선은 워낙 다양한 조건(학력·연령·성·의식수준)과 환경(주거형태·가족관계·경제활동여부 등)에 놓인 사람들을 교육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강의의 목표와 기준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극단적인 현실에 놓인 분들에게 자칫 한가하게 들릴 수 있는 옛이야기나 단편적인 지식나부랭이를 주전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는 언제나 새롭고 시의성이 있으면서도 공감할 만한 강의와 토론의 주제를 선정해야 하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강의에 임하는 마음가짐일 터다. 인문학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재미있는 강의를 진행한다한들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궁구하기 힘들다. 딴엔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순간 느닷없이 비판의 칼날을 맞닥뜨릴지 모른다. 그런 중압감과 불안감을 극복하면서 강의를 진행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이 아닌가. 섣부른 치기와 감상적 사고로 덤벼들 일이 아니다. 강도 높은 긴장과 헌신성을 요구하는 일인 것이다. 이즈음, 일찍이 민중교육의 철학과 방법론을 제시한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다시 읽는 일은 필연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페다고지(pedagogy)는 “관념이 아닌 철저한 실천(praxis)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는 프레이리의 교육이념이 담긴 책이다. 프레이리의 신념과 의지는 다음의 말로 압축된다. “사람들은 세계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 교육한다. 모든 인간은 ‘무지’하든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든 간에 상관없이 대화를 통해 타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페다고지>의 핵심은 세계를 매개로 ‘서로 교육한다’이며, 그러한 상호교육을 통해 ‘비판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프레이리의 신념에 기대어 다시금 강조하건대, 대학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교육의 매개이자 내용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공통의 인식기반에서 세계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즉 성찰적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천적 민중교육의 근간이다.페다고지>페다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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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렇게 작은 책에 이토록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놀랐다.
교육학에 대한 내용이라 짐작하여 방법론에 치중할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인류학, 사회학, 철학 등등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작가의 풍부한 사유가 담겨져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목적이 바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인간화"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방법으로서 [대화] [의식화] [문화운동(혁명)]을 내세운 점에 대하여 새삶스러운 표현은 아니면서도 깊은 감흥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기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돈 것은 바로 [민중]이다.
참다운 인류해방, 인간화를 위해서 혁명지도부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바로,
오직 민중과 더불어 함께 대화를 통해 비판의식을 갖도록 의식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은 바다이며 지도부는 그 바다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더불어 나는 과연 내 주위사람들과 얼마나 대화적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 또한 지배자들의 방식으로 내 주위사람들을 구호로서 설복시키고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았을까?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 내용과 방법들을 현실에서 쉽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까닭은 그만큼 이 사회가 여전히 이윤만을 추구하는 인간형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더욱 더 대화식, 문제제기식 교육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교육이 먼저일까, 혁명이 먼저일까?
올바른 교육만으로 혁명을 완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교육뿐만이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수 많은 노력들이 객관적인 조건과 마주하였을때 혁명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혁명과정에서 인간화(대화적)교육은 필수적이고 핵심적이다.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낡은 사상과 기술, 문화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과 혁명은 언제나 함께 진행되는 것이며, 때로는 양자가 일치할 수도 있다.
"페다고지"를 통해 프레이리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 깊이있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지만
정작 프레이리 자신은 민중과 대화하기 위한 이 책에 어려운 개념들을 많이 사용하였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그것은 나의 무지를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희망을 함께 노래하기 위해 서로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실천을 거듭하는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전국의 학생들을 12년 동안이나 좁은 건물에 가두어 놓고 모두가 똑같은 내용을 달달 외우게 하는 식의 교육은 끝장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모두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이다.
스승과 제자는 함께 배우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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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교육론이 제 3세계나 민중을 위한 교육이라고 알고 있거나 혹은 그가 말하는 '의식화'나 '대화'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이런 일은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없을까?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이 어렵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어려운 것일까? 사람들이 어렵다고 혹은 쉽다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일까? 난 나도 모르게 권위 앞에서 사고를 닫은 채 의심 없이 세상의 지식을 혹은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1) 지난 몇 십 년간, 세계화로 시작된 자본과 사람의 '이동'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 지구를 휩쓸면서 새로운 시장의 확보를 위한 상품의 '이동'과 값싼 노동력을 찾기 위한 자본의 이동은 국가 내에서 또 국경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일상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본은 더욱 싼 노동력과 부지를 찾아 멈추지 않는 여행을 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궁극의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 결과 자본에 예속된 노동력의 '이동'역시 당연한 것이 되었으며, 이런 노동력의 '이동'은 앞으로도 계속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자본의 위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평가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교육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사람다운 사람'만들기이다. 하지만 서구사회에서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학교'라는 제도가 시작된 이래 학교교육의 목표는 '틀에 맞춘 인간'이었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은 기계의 한 부품처럼 취급을 받게 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기 가치관의 확립이나 정신적 풍요로움을 기르기는 어렵다. 자본가들이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교'는 등장했으며, 우리는 이런 '학교'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착각하며 부르고 있다.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의 주체성을 뺏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일 것이다.2) 개토의 지적처럼 현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의 창출유무로 판단하고 있다.3) '인간'을 자원으로 여기는 '인적자원론'이 시대의 대세인 이때야말로 프레이리의 사상은 관념적인 교육에 대한 생각으로 막연하게 입으로만 인간교육을 외치며 '대화'를 도구적인 방법으로만 보는 기능적 교육론이 세상을 휩쓰는 현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이론적 근거이며 실천적인 방법이다. 그의 사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며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론이다. '교육'은 세계를 읽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교사는 늘 전향적인 자세로 세상에 열려 있어야만 세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닫힌 교사는 닫힌 교실과 닫힌 교육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교사의 가치중립적인 태도는 학생들로 하여금 침묵의 문화를 수용하게 만들며, 지배담론을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진리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교육을 통해 자기 삶의 방식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기존의 가치체계를 이식하는 현재의 교육을 바탕으로 '억압'되지 않은 교육적 존재로 인간을 각성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현재는 과거의 재현이며, 미래는 현재의 다른 모습이라고 믿는 '우익'이나 미래는 예정된 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던 이를 바꿀 수 없고 이에 도래를 기다려야 한다는 '좌익'과는 달리 프레이리는 미래는 예정되지 않고 우리는 흘러가는 역사 속의 '객체'가 아닌 역사를 끌어가는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즉,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어 맡기고 이를 기다리면서 현실에 체념하고, 순종하며 억압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통해, 또 이렇게 무력한 우리를 만들게 된 세상의 이념과 지식에 대해 저항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할 때에 자신도, 세계도 역사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전설한 것처럼 억압에서 풀려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억압에서 풀려난 사람이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억압에서 풀려나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비판적인 자기의식을 필수적이다. 현존하는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의 의식'을 넘어설 수 있는 자기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때 진실된 '자신'과 대화할 수 있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으며, 세계를 바라보고 읽을 수 있고 그때서야 비로소 'praxis'를 이해하고 실천적 성찰과 성찰적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praxis'를 경험하지 않은 인간은 결코 변화될 수 없으며 변화되지 않은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나'는 내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힘에 의해, 즉 외부로부터 부여된 '내'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규정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참된 '나'는 역사적인 존재가 되며 인류문화의 부분이 된다. 이는 교육이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는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는 해방활동이면서 동시에 인류문화로서 체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와 '현장'을 연구하는 '연구자'는 모두 동일한 사명을 갖는다. 이들은 정치적이어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이들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지배담론을 수용하고 이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육이 기능한다면 기존의 체제와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억압과 피억압의 지배체제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교육의 본질적인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페다고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다. 1)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심 없이 세상의 정보를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자 지적한 것이다. 2) 이러한 학교의 폐해에 대해 존 테일러 개토는 "바보 만들기"는 그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 그는 교사의 7 가지 죄를 나열하면서 '교육'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부제인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는 사실 "우리는 왜 학교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 가" 혹은 "우리는 왜 학교교육을 받을수록 인간이 될 수 없는가"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3) 이는 학문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실용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논쟁을 통해 학문을 공장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처럼 규격에 맞게 생산되는 무엇이기를 바라는 현상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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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먼저 시작하는 측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으로서 승인하지 않는 억압자들이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아니다. 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1. 줄거리 。。。。。。。
교육학 관련 책인 줄 알고 꺼내든 책이다. 남미에서 태어난 저자는, 유럽의 침략 이래도 오늘날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억압적 사회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을 다룬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이론서’나 ‘혁명지침서’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저자가 교육의 타깃으로 삼은 사람들은 주로 ‘무식한 농민’이나 ‘근시안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무시하는 ‘억압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그저 빼앗기고, 모든 기회를 봉쇄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자의 관심대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억압자들은 교육을 통해 그러한 사회구조를 ‘자연스럽고’,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바른 교육’, 즉, ‘억압자를 위한 교육’(이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형식은 ‘은행저금식 교육’이 아니라 ‘대화식 교육’이다. 피교육자를 단순히 입금되는 돈을 저금해 두는 통장으로만 여기고 계속 교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을 쏟아 넣는 방식의 교육으로는 사회비판적, 사회변혁적 시각을 갖기 어렵고, 반대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내용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대화식 교육’이라는 생각이 또 하나의 핵심주장을 이루고 있다.
2. 감상평 。。。。。。。 확실히 남미 쪽 상황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하지만 꼭 남미에만 국한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비록 그 형태나 겉모습은 약간 다를 수 있겠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꽤나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자유와 평등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근본적 신념이긴 하지만, 경제적 ․ 사회적 불평등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힘 있고 가진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 어이없게도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구조는 상당히 많은 못 가진 자들에게 지지되고 있다. 이 책의 첫 판이 나온 지 벌써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책의 유용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착잡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목표’에는 상당부분 공감한다. 현실과 유리된 교육은 결국 죽은 교육일 수밖에 없고, 그런 교육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다시 말해 모순된 구조를 강화시키는 교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어를 많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화식 교육’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는 상황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교육이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교사의 수급, 교육 환경의 구성, 예산 문제 등) 당장 프레이리 식의 교육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남는다. 또, 이럴 경우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인 ‘혁명’을 통한 해결방식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우려가 든다.(저자의 생각에도 언뜻 이런 생각이 묻어 나온다) 결국 폭력을 통해 또 다른 질서를 세우겠다면, 그 질서의 정당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문제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에의 어려움이라는 말이다. 체 게바라의 투쟁이 아무리 아름다운 목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부군을 죽였다. 그렇다고 정부군에 속한 사람들이 억압자들과 동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혁명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피델 카스트로나 스탈린 식의 권력독점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프레이리가 꿈꾸는 세상이 과연 어떤 모습일 지 나로서는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무지를 ‘게으름’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들은 비단 개인적인 요인들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단결되지 못한 노동자는 언제나 고용주들의 만만한 상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느슨한 농민들의 연합체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결합해 있는 거대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이길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프레이리 한 명 만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점이라면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좌파 빨갱이니 극우 꼴통이니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념적 분쟁만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정작 중요한 ‘인간’이 소외당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인간보다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누가 심어 놓은 것인가! 내가 속한 기독교적 전통의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은 ‘혁명적 상황에서의 폭력의 정당화’라든지, ‘궁극적인 사회 구원의 동력으로서의 인간’ 등의 주제가 그런 예이다. 하지만 저자도 책에서 말했듯이(“나는 그리스도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나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으로 확신한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불의를 그냥 두고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저자의 이력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WCC에서 일했다고 한다. WCC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약어), 현실에 대한 진단에 기독교적 용어들이 몇몇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특히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주제어로 설명하는 부분(“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은, 마치 ‘자기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를 설명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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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프레이히의 저작을 처음 만나게 작년인 것 같다. <프레이리의 교사론>이란 책을 접하면서 그의 사상에 깊이 매료 되었다. 앞의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은행 저금식 교육'과 '문제 제기식 교육'의 비교에서 보여지는 오늘날 교육의 현실이었다. 그러던 중 프레이리의 많은 저작들과 만나고 싶어 찾던 중 사실상 프레이리의 저작 중 가장 핵심이 바로 오늘 읽은 <페다고지>라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처음 펼쳐 든것은 올해 초였는데 지금에서야 완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쉽지 않았던 내용들과 그로인해 집중해서 읽어 나가지 못했던 이유가 큰 것 같다. 일주일동안 집중해서 결국 다 읽어 내었지만 프레이리가 전하고자 했던 자신의 교육학의 사상을 내가 다 이해하고 받아 들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직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이해되지 않은 내용들도 많지만 큰 줄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을 이해하는데 몇가지 key ward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의식화 (conscientization)'라는 개념이다. 그의 교육론을 '의식화 교육론'으로 대변할 수 있을만큼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만들어 내었는데 의식화란 억압적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순종의식에 눈을 뜨고 각성하게 되는 의식이다. 이런 '의식화'의 개념은 단순히 관념론적인 탁상공론에만 그치지 않고 이론적 실천으로 설명되는 '프락시스 (praxis)'를 통한 해방으로 나아간다. 행동만을 내세우면 행동주의의 오류를 낳게 되고 성찰만을 생각하면 탁상공론에 머물 수 있지만 프레이리의 '프락시스'는 행동과 성찰의 이분법적 한계를 넘어 서로 상호소통하며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프레이리는 저축식 교육과 상대되는 프락시스를 위한 학습양식으로서 '문제제기식 교육(problem posing education)'을 제안한다. 문제제기식 교육에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대화'인데 학생과 선생님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공동탐구자로서 '겸손', '사랑', '신념', '희망', '비판적 사고' 가 전제된 진정한 '대화'로서 기술적 교육방법론을 넘어 변혁을 지향하는 해방적 교육을 지향한다. 이 대화는 근본적으로 억압적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있는데 혼자가 아닌 둘 이상의 존재가 만남을 통해 대화하여 현실을 드러낸다.
이처럼 프레이리는 문제제기식 교육을 통한 프락시스의 구현으로 피억압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화하여 진정한 인간화(인간해방)를 생각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번 강조하지만 이런 '억압'이니 '억압자'니 하는 용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우리에게 다시 되묻는다. 가장 초보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보다 높은 차원의 진보적 자유는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는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눈에 보이는 억압과 폭력, 비인간적인 행위들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물론 이것도 아직 다 사라진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억압과 폭력, 통제...등등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아니 오히려 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의 사상이 비록 현실에서 많은 한계를 가진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건 교육에 관한 많은 통찰과 인간해방의 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그의 삶을 생각할때 우리 교육의 현실과 교육의 주체인 학생과 선생님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책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교육의 분명한 한 축으로 '의식화 교육'이라는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이 더 많은 연구와 발전으로 우리 교육의 현실에 자리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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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영어원제는 'Pedagogy of the Oppressed'으로 번역하자면 '억압받은 자를 위한 교육학'이다. 이 책은 꽤나 오래된 교육학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1971년에 브라질에서 프레이리에 의해 씌여진 이 책은 2002년 <페다고지>가 출판된 지 30주년이 되어 미국에서 30주년 기념판을 찍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크게 달라질리는 없고 단지 '30주년 기념판 발간에 부쳐' 정도가 더 덧붙여진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30주년 기념이라는 타이틀을 이용해 좀더 눈길을 끌고 팔아먹으려는 출판사의 상업적인 전략도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본래 10주년이네 20주년이네 100주년이네 하면서 10단위로 기간을 쪼개어 기념을 하는 것이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페다고지>는 상당히 유명한 책인가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조차도 이번에 처음 접했지만 뭔가 있어보이는 학문적 냄새를 풍기는 제목이 일단 나의 눈길을 끌었고, 30주년 기념판은 부차적인 부분이었다. 교육학 쪽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저서로 생각되는 이 책의 저자 프레이리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상당한 마르크스 주의자로 추정된다. 나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마르크스는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유독 기독교 학교여서 그런건지 우리네 철학 커리큘럼에는 유물론에 관한한 별로 다루고 있지 않았고, 나 홀로 읽은 책은 <마르크스 평전>쯤이다. 그러니 내가 마르크스에 대해 알아봐야 그의 가족사나 생활부분 말고는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그는 책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수시로 언급하며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저 그렇게 추정해볼 뿐이다. 또한, 프레이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제외하고도 실존철학자로 분류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카를 야스퍼스도 언급하며, 훗설, 베르그송, 헤겔, 에리히 프롬 등의 철학자들도 등장시키고 있다. 더불어 마르크스 만큼이나 자주 나오는 체 게바라와 마오쩌뚱, 피델 카스트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짬뽕되어 프레이리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가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 <페다고지>다. 그는 교육에는 중립이란 없으며, 모든 교육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억압자가 피억압자를 교육시키는 방법을 말하며, 피억압자가 억압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찌해야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억압받은 자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의식화 과정을 통해서 억압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현재의 우리네 교육은 모든 것을 알고 행위하고 명령하는 교사와 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과의 관계로 성립되어 있으며, 이는 양측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 아닌, 교사 성명을 발표하고 예탁금을 만들면, 학생은 참을성 있게 그것을 받아 저장하고 암기하고 반복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벗어나지 못한다. 프레이리는 "인간화 교육의 방법은 교사가 학생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표현하는데 있"으며,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양자가 대화하며 함께 행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세계에 관한 개념과 견해를 형성함으로써 이 구조를 타파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방안이 바로 문제제기식 교육이며, 이 교육의 골자는 '대화'이다. 30주년 기념판 <페다고지>의 해제를 쓴 부산교육대학교 심성보 교수의 글은 프레이리의 대화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의식화 수단이다. 대화적 의식화는 억압사회를 해방시킨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 동일시하는 존재, 사회의식을 가진 존재로 발전시킨다. 진정한 대화는 세계와 인간을 이분하지 않고,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대화는 의사소통, 협동, 일치, 투쟁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요구된다. 대화 자체가 사랑이다. 대화는 사랑하고, 겸손하고, 소망을 가지고, 신뢰하고, 그리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생소한 마르크스식의 단어 사용으로 소설 읽듯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끈기있게 읽어나간다면 프레이리가 주장하는 바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며, 그 구조만 익힌다면 나머지는 부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오늘날의 교육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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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내게는 아스투르드 질베르토의 '흑인 올훼'와 '걸 프롬 이빠네마'가 먼저 떠오른다. 리오 데 지네이루.. 살아 생전 꼭 가보고픈 美港.. 그리고 '제제'의 라임 오렌지 나무 한그루 쯤 어느 촌동네에든 반드시 있을 것만 같은 곳! 그러나. 이 모든 걸 합쳐 놓는다 해도 [페다고지] 한 권만도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내 생애 놓쳤다면 두고두고 한이 됐을 것만 같은 책 한권!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해방임을 알리고, 평생을 통해 이를 실천한 20세기의 대표 적인 교육사상가..... 중략..... 프레이리는 경제적으로 무력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의 상태를 '침묵의 문화'라고 규정하고, 이를 영속화 시키는 역할을 하는 교육제도 대신 인 간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존의 교육을 사회의 질서에 순응케 만드는 '은행 저금 식 교육'이라고 비난하며 '문제제기식 교육'을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책을 선물하는 누군가가, 더우기 날 가르치려 들 수 있는 선배가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충분히 자랑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