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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작가의 웅숭깊은 목소리
"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작가의 웅숭깊은 목소리 " 내용보기
10개의 단편이 묶여 있는 이 소설은 한 편 한 편 공들여 정성껏 차린 음식상을 받은 기분이다. 어느 것 하나 치우침이 없이 균형된 시선과 인물들의 세밀한 스케치는 감히 이혜경 소설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5년 전에 읽을 때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어떤 장면이나 글귀들이 시간이 지나 곰삭여 보게 되고 곱씹게 되며 새로이 해석되어 내게 오는 글들이 수두룩했다. 아
"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작가의 웅숭깊은 목소리 " 내용보기
10개의 단편이 묶여 있는 이 소설은 한 편 한 편 공들여 정성껏 차린 음식상을 받은 기분이다. 어느 것 하나 치우침이 없이 균형된 시선과 인물들의 세밀한 스케치는 감히 이혜경 소설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5년 전에 읽을 때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어떤 장면이나 글귀들이 시간이 지나 곰삭여 보게 되고 곱씹게 되며 새로이 해석되어 내게 오는 글들이 수두룩했다.

아마 더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여전히 많은 갈피들 속에서 난 울고 웃고 망설이고 주인공과 그 주변의 인물들과 내 현실 속 사람들을 대입해 보게 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로 인해 많은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

삶이 지리멸렬하다던가, 위무를 받을 수 없을 때 여기 실린 소설들은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사람에 절망하고 있다면 ‘꽃그늘 아래’를 맨 먼저 읽기를 권한다. 귀기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세대이지만 이 단편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가족과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있다면 ‘고갯마루’와 ‘멀어지는 집’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서서히 머물다 흩어지는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연민, 가만 가만 들여다보는 내 생에 대한 작은 성찰들을 발견하고 싶다면 ‘대낮에’나 ‘검은 돛배’를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공들여 쓴 문장, 사람에 대한 밀도 깊은 애정, 주변을 탐색하고 발견하는 작가의 눈,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글귀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차분한 소설집이다.

인생이 이것이다...라고 정의하지 않고 삶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잔잔하게 혹은 강렬한 ‘일식’을 보아버려 눈 멀어 버린 사람과도 같이 명멸하는 어두움에 나를 푹 스며들게 했다 다시 밝은 세상으로 이끄는 것은 모든 얼개의 이야기가 다음으로 이어지거나 흩어지지 않은 채 여백으로 남겨 두는 작가의 필력 때문인 듯 하다.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그 텍스트는 변형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기에.


명문장이 너무 많아 줄을 쳐 가며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얼마나 깊은 내면을 가진-마치 여러 개의 자아의 방을 가진 독백의 자, 소리없이 말하는 자- 사람이기에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해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우리 국어의 아름다움을 이 작가만큼 자유자재로 그 문장에 어울리게 쓰는 작가가 드물다는 것이다.

‘잘박잘박’ ‘다다귀다다귀’ ‘어둑발이’ ‘들까부른’‘밍근하게’ 거뿟해지는’‘던적스럽게’.... 등등의 많은 아름다운 우리말들을 이 책에서 알았다.


나도 어느 날 어느 때 ‘고갯마루’에서의 선애처럼 내 인생의 고비에서 만나게 될 어려움에 직면할 때 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성숙되고 차분하게 내 주위의 사위스런 사람들과 상처를 주었던 이들, 타자화된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되기를 바란다.

‘명재’가 스며들었을 그 어둔 한 켠을 응시하는 선애의 그 깊은 눈빛을 되새기며,  밝은 빛의 신발을 신고 따뜻한 이들과 같이 고갯마루를 넘을 수 있을만큼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지기를 바래 본다.

그래서 몇 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펼치더라도 다른 해석, 다른 방식들이 내게 전해져 올 것 같은 ‘끊임없이 말 걸어 오는’ 생명을 가진 소설집이다.




m*****a 2007.12.09. 신고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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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들...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들..." 내용보기
'길 위의 집'이라는 작품으로 작가 이혜경을 알았다.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40대 초반의 나이보다 훨씬 성숙함을 느낄 수 있다. 그녀 또래의 작가들에게 보이는 섬세한 감정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고 그냥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이책을 읽고 커다란스토리 안에 섬세한 표현이 녹아버렸음을 느꼈다. 소극적이고 섬세한 예전의 주인공에 비해 꽃그늘 아래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들..." 내용보기
'길 위의 집'이라는 작품으로 작가 이혜경을 알았다.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40대 초반의 나이보다 훨씬 성숙함을 느낄 수 있다. 그녀 또래의 작가들에게 보이는 섬세한 감정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고 그냥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이책을 읽고 커다란스토리 안에 섬세한 표현이 녹아버렸음을 느꼈다. 소극적이고 섬세한 예전의 주인공에 비해 꽃그늘 아래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은 얌전하면서도 강인함을 갖춘 인물들로 등장한다. 전업주부이든, 직장을 가진 커리어우먼이라고 해도 자신만의 생활을 꾸려나가려는 생활을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거기에 충실하고자 하는 여자들...거기서 소설은 출발하였고 그녀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간의 군상들의 모습을 한땀한땀 수놓아 가는 작가의 글솜씨가 한층 더 소설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상처받은 여성들에게서 연민의 정 이상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인상깊은구절]
이제 당신 없는 세월은 더 더디 흐르겠지. 빨리빨리 늙었으면 좋겠어. 빨리 늙어서...내 꿈은 그저...그냥, 가만히 앉아서 해바라기하는 거야. 그 옛날 당신 집을 지날 때면, 나는 언젠가 내가 거기서 그렇게 한세월 보낸 것만 같아서, 그 할머니 곁을 지나 불쑥 그 집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지. 그처럼 나는 그냥, 차 소리가 멀리 들리는 한가한 공원, 볕 바른 곳에 가만히 앉아 먼데 눈을 주고 깜박깜박 조는 거야. 잠깐 눈을 뜨면 나무 그림자는 저만큼 옮겨가 있고, 또다시 자울자울 졸다가 모이 쪼던 비둘기떼 후르륵 날아가는 소리에 반짝 깨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후딱후딱 시간을 건너뛰었으면. 끌탕하던 마음도 저며들던 아픔도 그때쯤엔 사위어 고운 재로 날리는데, 나는 그 희부연 속에 앉아. 당신 태워간 그 배 언제 오려는지 먼데 바라보다.
i****3 2002.08.11.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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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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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의 작품 속에서는 날카로운 단면과 추상적인 내면 같은 것들을 별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주인공들이 한데 모여 익숙한 이야기의 맥을 이루었고 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집어든 이 책 는 이제껏 내게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했던 이혜경이란 작가의 존재와 또 그의 작품을 맛볼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소설은 꼭 거창한 이야
"소박한 밥상." 내용보기
이혜경의 작품 속에서는 날카로운 단면과 추상적인 내면 같은 것들을 별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주인공들이 한데 모여 익숙한 이야기의 맥을 이루었고 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집어든 이 책 <꽃그늘 아래="">는 이제껏 내게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했던 이혜경이란 작가의 존재와 또 그의 작품을 맛볼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소설은 꼭 거창한 이야기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주위에서 있을법한 그리고 늘 우리 주위에서 머물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누가 더 오목조목 맛있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재질이 정해질 수 있는 듯 하다. 그러한 면에서 내가 맛 본 이혜경의 밥상은 소박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아마도 이혜경은 이번 작품집에서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게 아니었을는지도.
m****m 2003.09.2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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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경계에 선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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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경계에 선 존재들- 이혜경 소설집 『꽃그늘 아래』       아버지에 대한, 혹은 (시)어머니에 대한 저항은 가족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가족의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가족의 외부를 지향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가족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저항의 방식은 항상 가족의 내부에서 그 해결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족과의 싸움이 가족의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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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계에 선 존재들

- 이혜경 소설집 『꽃그늘 아래』

 

 

 

아버지에 대한, 혹은 ()어머니에 대한 저항은 가족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가족의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가족의 외부를 지향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가족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저항의 방식은 항상 가족의 내부에서 그 해결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족과의 싸움이 가족의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는 경계의 장소에서 펼쳐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편소설 『길 위의 집』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저항했던 윤기가 아버지의 그늘에 포섭되는 과정은 실상 가족의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저항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시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대낮에에 등장하는 남편의 삶 역시 본질적인 면에서는 이런 윤기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남편은 내 아버지의 피가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대물림할까봐아이 낳기를 꺼려할 정도로 아버지를 증오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든 채 나타난 아버지와 대면하기를 꺼리고,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주민등록을 다른 곳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에게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늘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한다. 공황장애까지 발병한 남편이 과연 아버지의 그늘진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상처는 상처를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상처와 대면하지 못하는 주체가 갈 길은 한없이 덧나서 고름 진 상처의 장소일 뿐이다. 남편의 공황장애는 가족에 대한 상처가 그 상처와의 대면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 속의 상처는 이처럼 그 상처와 대면하지 않는 주체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 이혜경 소설에서 기억 속의 상처와 대면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집을 떠나는 행위, 다시 말해 가족의 외부로 탈출하는 행위로 표출된다. 멀어지는 집의 주인공 선영은 어머니의 집과 멀어짐으로써 기억 속의 상처와 맞서려 한다. 뇌물사건에 연루된 아버지가 자살하자, 어머니는 세 딸을 놓아두고 봄바람에 실려 떠나간다. 세 딸이 성장한 후 나타난 어머니와 선영은 한 집에서 살게 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딸들에게 너희끼리 얼마나 고생 많았니, 라든가 혹은 미안하다는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그 말이 딸들의 마음속에 도사린 기억의 땟자국을 씻어줄 수 있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부끄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딸들을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 떠난 어머니의 삶은, 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이기적인 그래서 부끄러운 삶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머니와 거리를 둠으로써 선영은 어머니의 집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한 발짝씩 멀어진다. 집에서 멀어지는 행위 자체가 어머니에 대한 저항을 완성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저항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또한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체화의 과정이 시작되는 장소일 따름이다. 저항 대상의 부끄러움을 일깨우는데 초점을 둔 저항의 방식은 이로써 이혜경의 소설의 한 전범을 이룬다. 고갯마루의 주인공 선애가 낡은 혈연과 인습으로 얽힌큰오빠의 전횡에 저항하는 방식 역시 이러한 부끄러움의 시학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마지막 말은 빨리 돌아가세요, 라고 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난데없이 왜 큰오빠에게 명재가 살아있더라는 이야기 따위가 하고 싶어졌을까. 우리보다는 명천 출입이 잦은 큰오빠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보다, 큰오빠에게 명재는 그냥 고장난 시계탑이나 다름없는 사물, 미친데기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 옛날의 명재가 이 풍진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남아, 허기지면 먹을 것을 찾고 뭇사람 앞에선 추레함을 부끄러워할 줄도 알더라고. 나는 왜 그 이야기가 꼭 하고 싶었을까. 도무지 내 마음을 알 길 없어져서, 나는 명재가 스며들었을 밤거리 한 구석에 오래 서 있었다. (90)

 

 

큰오빠가 세상의 중심을 마음껏 활보할 때, “나머지 식구들은 그 펄럭이는 꿈의 자락에 쓸려 거듭 엎어져야 했다.” 나머지 식구들의 희생을 담보로 펼쳐진 큰오빠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하지만 그에 대한 부끄러움을 망각한 큰오빠의 삶으로 하여 더욱 추레한 모습으로 부각된다. 선애는 큰오빠의 이러한 삶을 타성바지인 명재의 삶과 대조하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명재는 선애의 당고모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당고모 집안의 사람들에게 얻어맞아 머리가 돈 사람이다.

 

선애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그는 미친데기라는 별명으로 고향 땅에 살아남아 있었다. 새로 개업한 노래방에서 떡을 얻어먹으려다가, “입구에 사람들이 보이자 더 들어오지 못하고 몸을 슬며시 외로트는 명재의 태도를 보며, 선애는 그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삼가는 태도를 발견한다. “미친데기가 되어서도 삼가는 마음을 잃지 않은 명재와, 핏줄이 지배하는 세계(고향)에서 다른 식구들의 희생을 대가로 마음껏 살았으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큰오빠의 삶은 얼마나 다른가. 큰오빠라는 핏줄(운명)을 향한 연민과 큰오빠의 이기적인 삶을 부정하는 마음의 경계에서 선애는 명재의 삼가는 태도를 떠올리고, 그것을 큰오빠의 삶을 판단하는 척도로 적용한다.

 

『길 위의 집』의 은용이 치매에 걸려 길을 떠돌다가 집에 돌아온 어머니의 안식은 생각하지 않고, 거실에서 소리 높여 싸우는 아버지(길중 씨)와 오빠들(효기, 윤기)개새끼들로 호칭하는 까닭도 그들 역시 부끄러워해야 할 상황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외부에서 가족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의 시선은 이렇듯 타자에 대한 윤리가 사라진 가족의 삶에 드리워진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끄러움의 시선은 가족을 주체에게 부여된 운명으로 생각하는 한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로 개인의 삶에 각인된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큰오빠를 고발하는 고갯마루의 선애 역시 현실에서는 큰오빠에게 명재의 이야기를 못하고 있지 않은가. 큰오빠에 대한 연민과 비판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선애의 모습은 가족의 경계를 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반증한다.

 

선애 뿐만이 아니다. 언덕 저편의 주인공 에게 경계는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혼한 그에게 결혼 후에야 운명적으로 만난 그 여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의 저편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 여자 없는 세월을 견디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그의 생각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가족이라는 제도는 가족의 외부로 넘어서는 삶, 이를테면 불륜과 같은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족(제도)과 불륜의 경계에서 가족을 선택하고, 그것을 운명으로 생각하며 살겠다는 의 생각은 그러므로 제도(가족) 속에서 살아가야 질서에 편입될 수 있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한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운명이라면 가족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삶을 주체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그가 선택한 운명은 그의 삶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제도의 굴레로 편입되는 그의 삶은 과연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작가 스스로 던지는 이러한 질문 속에 새로운 관계를 애타게 갈망하는 이혜경 소설의 인간학이 담겨 있다.

 

 

o*****s 2017.11.1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