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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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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용 목사님의 지난번에 읽은 책, 에 대한 졸속의 독후감을 썼을 때, 한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그 책 말미에 성경영성을 말할 때 '삼위일체의 영'에 대해 서술하신 바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런데 이 책의 큰 목차 세 개가 바로 '성경으로 만나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다. 그리고 독자가 이 책을 다 읽고나서 혹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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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용 목사님의 지난번에 읽은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성경영성입문)>에 대한 졸속의 독후감을 썼을 때, 한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그 책 말미에 성경영성을 말할 때 '삼위일체의 영'에 대해 서술하신 바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런데 이 책의 큰 목차 세 개가 바로 '성경으로 만나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다. 그리고 독자가 이 책을 다 읽고나서 혹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할까봐 친절한 안내까지 해 놓았다. 독자가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데 이 책은 아마도 저자가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그 후속편으로 저술하신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입문단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 성경영성론을 펼치고 계신듯 하다. 지난번 책도 읽어내기 쉽지 않았지만 이 책 역시 쉬운 문체 안에 진중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두고 두고 애독해야 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딸애에게 읽혀주었던 우화가 생각났다. '해와 바람'이라는 우화말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한 것은 거칠고 힘센 바람이 아니라, 은근한 가운데 지속적인 따뜻함을 내리비춘 해였다. 저자의 글에서 그런 '해님'같은 인상을 받았다. 종교와 세속문화 앞에 거룩한 영의 해를 오래 내려 비침으로써 결국 승복하고야 말게 될 것 같은 온유로 옷입은 내재된 힘을 가진 글이다. 또 마치 긴 글 형태의 잠언집을 읽는 듯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버릴 게 없는 속이 영근 글이다. 그래서 한번 읽는데 그치지 않고 음미하며 책 이곳 저곳을 몇번이고 읽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꾸 옮겨적기도 했다. 문체나 영성이 끼치는 온유로 감추어져 있어서 그렇지 이 책 안에는 많은 대조법적인 문장과 대비되는 명제들 속에서 세상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접전이 보인다. 바로 영적으로 바라보기와 육적으로 바라보기의 접전이다. 바른 영성관을 드러내고자 할 때 결국 어쩔 수 없이 세상 문화에 굴복하고 속아있는 거짓되고 왜곡되어 있는 거짓 영성들과 대결 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 역사는 어찌 보면 언제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변절하는 역사같아 보인다. 바로 인간 바벨탑을 쌓아올려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망상 때문에 저질러지는 죄악말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손해가 아니라, 인간에게 치명적인 손상만 가져왔다. 바로 하나님이 안 계신 세상, 하나님이 안 계신 공동체, 하나님이 안 계신 나의 빈 성전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저자는 이 하나님이 안 계신 마당에 '개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이럴 때에는 예언적이고 종말적인 기다림의 소망밖에는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성전을 믿음으로 다시 세우고 회복하는 회개와 기다림밖에는 없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회복해 주시는 것이지 인간적인 작위와 노력으로 온전과 거룩을 회복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의 믿음생활이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의 원인을 추적하여 잘잘못을 따지고 있기보다는(인과관계론적 해결 발상) 보다 잠잠히 복음에로 돌아와야 할 것 이다.(예언적, 구원론적 입장에서의 회개). 놋뱀을 올려다 본 자는 살아났듯이 바로 십자가를 올려다 보아야 사는 것이다. '계시'라는 제목의 글은 성경을 읽는데 지침이 될만한 글로 여겨져 반가웠고 개혁과 관련하여 저자가 간간히 간접적으로 지적하신 부분들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호소력이 있다고 사료된다. 바로 영적인 일을 영적인 눈을 뜸으로써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과 작위로 해결코자 하는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점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예언'이라는 제목의 글과 '사도들의 글'이는 제목의 글도 내 마음에 남겨 놓고 싶은 내용이었다. 이 책의 제목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성경"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주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로 그 함께 해 주시는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란 하나님과 어울림을 말한다. 이 어울림은 단순히 관계라기보다 맺음이라고 해야 한다. 관계란 어떤 것 사이에서든지 외형적으로 혹은 내면적으로 만들 수 있다. 서로 싸우는 관계도 관계이다. 그러나 함께란 어울림만을 의미한다. 불화된 관계는 있을 수 있지만 불화된 함께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람 쪽에서 하나님과 존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사람과 어울리시려는 은혜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모든 글들이 귀했지만, 혹 저술하신 동기의 소망이 담겨 있는 듯 싶어 '화해'라는 제목의 글을 옮겨와 본다.

[인상깊은구절]
"화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죄를 전제로 해서 말하면 하나님과의 화해가 된다. 죄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과 함께하려고 하실 때 일어난다. 화해는 인간의 죄 된 상황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의 함께 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상황이란 죄를 떠나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상황을 문화적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문화란 근본적으로 인간의 타락으로 빚어진 것이므로 인간의 상황이란 죄를 떠나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함께함을 말하려고 한다면 화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간이 죄 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 된 상태에 있는 인간과 화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인간이 임의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으로부터 인간은 죄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다. 죄 속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려고 접근해 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사건이다. 그것이 극명하게
j*******i 2002.05.2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