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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흑백사진들을 보고 책의 저술연대를 다시 보았다. 1956년부터 시작된 이투리 숲에 사는 밤부티 피그미와의 3년간의 생활을 쓴 것이었다. 이미 50년 전의 일이다.
* 책 속의 인상깊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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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자연에서 그들, 피그미족을 만났습니다.
피그미족, 그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문명을 이기를 자랑하며 우리의 어머니이자 친구인
미개하다는, 진부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자연과 사회를 어떻게 대하고
이 책은 피그미족의 삶을 수박 겉핥기로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삶에 대한 회한을 느끼는 많은 현대인들이 이 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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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은 초록빛을 넘어 시커멓게 보인다. 그 숲의 바다는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조용하고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다.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둬달라고, 정 들어오겠다면 조용히 움직여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어두운 숲은 이방인에게는 멀찍이 물러나 있으라 경고하고 위협을 가한다. 하지만 숲을 아는 이라면 기꺼이 환영한다.” (본문 40쪽)
턴불이 카메룬의 거대한 산맥의 급경사길 정상에서 숲을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사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간 저 숲속에서, 그 중에서도 이투리 강이 흐르는 곳이 바로 밤부티 피그미의 터전이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라는 존재 자체를 신화로 치부하던 수천 년 동안 피그미들이 바로 거기서 살아왔다. 이 책에는 흑인과 피그미의 비교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피그미는 흑인에 종속되는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고 판이하게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갖고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
평균 신장 140cm. 날렵한 몸과 거침없고 솔직한 얼굴 표정. 아픈 정도를 표현할 때는 ‘뜨겁다, 아프다, 죽었다, 완전히 죽었다, 영원히 죽었다’ 등으로 나누어 말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완전한 상실감에 슬퍼하며 ‘좋은 죽음’은 축제를 열어 마음 속의 추억을 노래함. 깔끔한 성격으로 땅바닥에 앉는 것을 싫어해 의자를 만들거나 통나무나 나뭇잎에 앉아 있음.(인정받는 사냥꾼임에도 젊은이들에게 의자를 양보받지 못하는 것을 최대의 모욕으로 생각하는 장면도 있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함. 또한 웃음을 참지 못함. 피그미들의 웃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특히 인상깊었다.
“피그미들이 웃을 때 굳은 표정을 유지하기란 아주 힘들다. 피그미들은 너무 재미있어 몸을 가누지 못하겠다는 듯 서로에게 기대로 옆구리를 철썩철썩 치거나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내는 등 온갖 동장을 다 동원한다. 아주 우스울 때에는 바닥을 뒹굴기도 한다.”(본문 59쪽)
이렇듯 피그미들은 천성이 낙천적이다. 숲을 찬양하는 노래 가사 중에 “어둠이 숲에서 왔다면 그 또한 좋은 것임에 분명하네.”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숲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흑인들이 두려워하는 악령이나 마법 따윈 가볍게 무시하지만 공상을 하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나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소년, 소녀들의 성인식과 결혼식을 보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전통을 유지하는 유연한 사고방식도 엿볼 수 있었다. 숲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만족하며 아이들을 너나할 것 없이 자식처럼 돌보고, 남녀구별이 거의 없이 평등하게 일을 나눠서 하고, 개인의 권위는 싫어하지만 공동의 책임으로 나름의 법을 지키는 방식 등 개발과 잇속 차리기에 혈안이 되어 다투며 살아가는 숲 바깥 사람들보다 더욱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진보적인 면모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방인 독자의 눈엔 그저 낯설고 시끄럽고 분주하게 사는 사람들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단절감이 아닌 새로운 이해로 이어진다.
탐험기나 소설을 읽을 때처럼 흥미롭게 빠져들어 버렸지만 이 책의 정체성은 분명 인류학 연구를 위한 탐사 보고서이다. 치밀한 관찰력과 깊이있는 분석력도 단연 돋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연구 대상인 밤부티 피그미에게 진심어린 형제애와 우정을 바탕으로 다가간 콜린 M. 텀블이라는 인류학자의 태도에 있다. 문명에 물들어있는 배타적인 시선으로 두려움과 어둠으로 가득 찬 적대적인 공간으로 오해받아온 숲속 세계와 피그미라는 낯설고 독특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스스럼없는 이웃처럼, 티격태격 다투며 정붙이는 가족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아이가 덩굴 그네를 타고 노는 친구들 옆에서 부러운 눈길로 구경만 하다가 아무도 없을 때 성한 다리로 있는 힘을 모아 덩굴을 잡고 똑바로 서보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목발 짚고 걷는 법을 알려주고, 이제 두달 후면 피그미 캠프를 완전히 떠나야 한다며 쓸쓸해하는 인류학자의 내면까지 솔직담백하게 드러나 있다.
턴불의 현지 직원이자 친구였던 피그미 켄게와의 유쾌한 에피소드들은 재미를 더했다. 백인 인류학자와 피그미 청년의 ‘바깥 세상’ 여행기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이것은 정말 신선한 감동이었다. 어둡고 축축한 숲속에서 낯선 문화를 향유하는 피그미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연구와 더불어 생활을 한 턴불의 용기와 성실성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날 수 있었구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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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읽으며 난 두 가지 사실에 지적 충격을 받았다. 난 피그미라하면 그저 흑인들 중에서 키가 작은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 같아 또 한 번 놀랐다. 그들의 놀라운 지혜와 체구답지 않은 몸놀림은 상상만으로는 부족할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말이다. 피그미와 마을 흑인과의 관계를 조금 들여다 보니 어릴 적 자주 보던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가 떠올랐다. 몸집은 작지만 영특한 제리, 그리고 어리석은 건 아닌데 번번히 제리에게 골통을 먹는 톰의 관계가 마치 피그미와 마을 흑인처럼 연상되어 읽는 내내 즐거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마을 흑인들의 성인식인 <은쿰비>를 치를 때 흑인들은 피그미들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피그미들 중 성인식을 치를 나이의 소년들을 강제적으로 치르게 한다. 하지만 피그미들은 그저 잠깐 숲을 떠나 마을 소풍 갔다 오는 것인냥 흑인들의 잔치에 참가에 먹을 것만 축내고 돌아와 자신들만의 <성인식>을 치른다. 물론 <은쿰비>를 치르고 돌아온 피그미 소년을 성인 대접을 해주지도 않는다. 비록 자신들의 성인식이 따로 마련되지는 않았지만(이를 두고 흑인들은 피그미가 자신들에게 의존한다고 주장하지만) 숲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으로 그들만의 성인식을 치른다.
결국 피그미들은 억압받지도, 종속될 수도 없는 자유로운 종족인 것이다. 단지 평균 신장이 140cm로 작을 뿐, 그들은 마을 흑인들처럼 멍청하지도, 마을 흑인들처럼 겁쟁이도 아니다. 겁쟁이가 아닌 증거는 마을 흑인들은 코끼리나 다른 동물을 사냥할 때 함정이나 덫을 만들지만, 피그미는 창과 화살을 들고 직접 사냥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 자그마한 체구로 동물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를 사냥한다는 아이러니는 피그미가 용맹하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존중받아야 마땅할 존재라는 것을 각인 시킨다. 그러니 숲을 떠난 최초의 피그미가 백인사회에서 다름 아닌 <군대>에 복무했다는 사실도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2 또 피그미는 진정을 숲을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는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라는 말도 있는데, 피그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초기 인류가 숲을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숲에서 살아 남은 후손임에 틀림없다.
여기서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난 숲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공기 맑고, 물 깨끗한 청정지역이라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좋은 곳인 줄로만 알았다. 유럽이나 북미의 전원 풍경을 보면 끝없이 펼쳐진 숲 속에 오두막집에서는 따뜻한 난로와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것만 보아왔던 나에겐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숲에선 정착생활에 필수요소인 <농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애써 개간한 농경지는 채 3년이 되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고, 숲이 집어 삼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숲 속에 열매가 풍부한 곳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마을 흑인들은 숲을 악마가 깃든 곳이라 하여 무서워 한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도 피그미들은 이런 척박한 숲에서 오랜 세월을 생존했고, 숲을 벗어나 산다는 것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는 삶. 인류는 배고픔을 그토록이나 싫어했는데, 어째서 피그미들은 그곳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피그미들이 진정으로 숲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숲은 항상 어둡다. 울창한 숲은 햇빛을 차단하고 항상 음습하고 썩은 내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피그미들은 그런 것조차 숲이 준 것이라며 좋아한단다. 우리들에게 좋은 것만 주는 숲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불편할 뿐이니 나쁜 것이 아니란다. 진정 사랑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이들에게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만이라도 배운다면 <지구온난화>나 <환경파괴>같은 말은 쏙 사라질 텐데...
3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피그미들에게서 한 가지를 더 배웠다. 그들의 교육관이다. 그들은 어른들 모두가 아이들의 부모요, 아이들 역시 모든 어른들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내 아이, 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면 엉덩이를 때려 훈육 시킨다. 이런 사회에서 범죄가 일어날 수 있을까?
요즘 우리 사회를 보고 있으면 한심한 장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청소년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훈계하는 어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되려 지나가는 어른에게 당당히 불을 빌리고, 청을 받은 어른은 아무 말없이 불을 빌려 준다. 청소년에게 담배를 파는 건 불법이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은 당당히 담배를 피고, 그걸 본 어른은 적절한 훈계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상관하고 싶지 않고, 내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피그미 사회였다면 이런 일이 만연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현실이다.
4 이 책을 덮으며 책이 쓰여진 시기를 살펴 보았다. 5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 왜 이제서야 지금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일까? 조금 더 빨리 볼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좋은 책이 왜??? 물론 <인류학>이란 장르가 굉장히 읽기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마가릿 미드의 말처럼 정말 수려한 문장이라서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는 데 공감하였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 속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고,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해줄 것이다. 숲을 사랑하는 피그미도, 피그미를 사랑한 턴블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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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마음 따뜻한 보고서가 또 존재할까?
'인류학의 지형을 획기적으로 넓힌 피그미 탐사 보고서'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형식은 보고서이지만, 글쓰는 문장이 매우 매끄러워 피그미족과 함께 생활한 수기를 보는 느낌이다. 이방인으로 눈으로 본 객관적인 시각과 피그미족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깃들어 상상과 신화속의 신비주의의 안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 던 피그미족을 좀 더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3년간의 그들과 함께한 희노애락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한 뒤, 탐구의 대상을 넘어 자연과 함께 하는 한 부족의 삶을 인간적인 애정을 가득 담은 흔적이 느껴진다. 숨쉬기 힘들정도로 어둠이 내려앉은 무서운 숲의 모습까지 어둠이 숲에서 왔다면 그것도 즐거운 일이라며 노래를 부르는 그들은 정말 숲과 함께 인생을 걷는 공동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동체 생활과 농장에서 생활하는 흑인마을 사람들은 피그미족의 일손을 필요로 한다. 피그미족은 필요할 때 그들을 돕고 그들에게서 필요한 물건을 얻는다. 흑인들은 '마스터'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규범적이고 의식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고 성년식과 결혼식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의식보다는 자유스럽고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피그미족의 특성이 그리고 흑인과 어느정도 함께하는 삶의 부분을 소년들의 '성년식'과 결혼식, '소녀들의 초경의식'을 통해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공동체의 우선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풍습과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엿보다 보면, 그들의 풍습을 통해 지금 우리의 문화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자신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살필 수도,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낯선 문화의 불편함과 새로움을 겪다보면서, 그들 또한 우리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죽음을 맞이하고, 작고 소소한 분쟁으로 다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해결방식을 통해서 그들만의 문화적 특색을 살피고, 그에 비해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건강성을 살펴보게 된다. 의식적 틀로 얽매인 '흑인'과 마법 주술, 죽음의 공포와 고난의 단련을 통해 성장해 가는 흑인만의 성인식과 숲과 함께하며, 숲에서 나온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숲을 축하하고 찬양하는 피그미족과 성인식을 이겨내야 할 고통이 아닌,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도와주는데 인색하지 않는 모습, 소녀들의 초경을 축하하며, 축복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모습이 옳고 어떤 모습을 버려야 하는지 판단하는 판관이 아닌,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매우 작기만 배울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여인들이 회초리로 남자를 때리면, 남성이 여성에게 다가올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예전에 TV에서 영상으로 보긴 했었지만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그미족과 함께 한 저자의 삶을 마치고 나니, 그들만의 구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 그건 옳고 그름이 아닌, 그들의 특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내가 가진 기준이 정당하다는 독선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켄게처럼 좋은 벗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면 여행도 두렵지 않을꺼라라고 생각한다. 숲안에서 숲의 위대함과 편안함을 느꼈던 그가 이샹고 야생공원을 경험하고 느낀 문화적 충격, 그리고 또다른 세상을 인정하는 모습도 멋졌다. 같을 수 없다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모습, 그리고 그가 공원에 떠날 수 있고 불안해하지 않게 충분히 배려해준 저자가 있었기에 그 또한 용기내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멋진 우정은 두 사람을 기쁘게 했고, 멀게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우정이 낳은 따스한 책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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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쌍둥이라도 다른 성격을 갖는데 내가 있는 곳과 전혀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 특히 주변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을 때 거의 고립되어 있다시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했다. 요즘에 tv등의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여지고, 인터넷을 이용하면 손쉽게 지구 반대편 나라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과거에 단절되어 거의 숲에서만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저자가 책을 냈다는 시기에 본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그들도 인간으로서 갖춰야할 의식주는 모두 갖추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프리카하면 그냥 키크고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만 떠오랐는데, '숲사람들'의 저자가 만나본 밤부티 피그미 족의 사람들은 피부는 검지만 보통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키가 작고 활동력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숲'이라는 안식처를 거의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숲에서 나온것은 어둠이라해도 좋다는 노래를 불러가며 살고 있었다. '숲'을 숭배함과 동시에 그가 나눠주는 동물을 사냥할 줄도 알고, 벌꿀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인류학 학자라해도 저자는 그들과 잘 융화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기에 이런 책도 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며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삶을 강요하거나 가르치려고만 드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자는 그 부족 속에 동화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랬기에 피그미족들에 대해 상세히 관찰하고 오랜 시간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밤부티 피그미족들에 대해 써놓은 내용들을 보며 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성인식을 치르는 것,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장례식처럼 죽은 자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것, 집을 짓고 사는 것 등 삶을 살면서 겪는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행사같은 것들을 챙긴다는 것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부분적으로 몰리모 노래를 부르며 죽은 자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 남녀 관계 등 다른 점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희한하고 놀라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요즘 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한 사실은 없었다. 그저 싸우다가도 다시 금세 협동하며 사는 그들, 숲의 고마움을 알고 열심히 사는 그들을 보며 각박한 요즘 세상에 바로 옆에 있는 주변인과의 벽이 조금은 낮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흑인들을 마스터로 부르며 그들 밑에 있는 듯이 살아가는 피그미 부족이었지만 분명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는 꿈과 의지가 있다고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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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미라는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지만 피그미는 누구에게나 이름뿐인 존재이다.
이 책은 삼 년동안 피그미들과 동거동락을 해 온 저자의 노고를 통해
나쁜 일이 있어도 결국 선한 숲은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 놓을 것이라 믿었으며
사람들 사이의 분쟁은
입신양명, 부귀영화 등의 이유로만 종교를 바라보거나
밤부티 피그미 족의 가계도가 있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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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전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라 믿으며 주위의 모든 것이 숲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분쟁이나 증오도, 불필요한 절차나 규범도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가슴 벅차게 숲을 사랑하는 콩고 이투리 숲의 작은 사람, 피그미. 이 책은 그들의 사냥방법, 떠돌이 생활, 사랑과 연애, 축제, 성인식 등을 개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과학적 연구 성과물이 아닌 한 편의 소설처럼 전개되면서도 놀이로 시작된 사냥 연습, 한 집안의 사소한 문제 해결을 위해 온 부족이 동원되는 것, 흑인들과의 상호부조를 통한 공생,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 가는 과정, 성인식을 치르기 위한 준비와 과정 등의 생활방식 하나하나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낯선 문화에 대한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다. 피그미들과 흑인들과의 관계는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닌 같은 대륙의 같은 피부를 가진 흑인들과의 삶과 문화에 대한 비교는 새롭기도 하면서 서글픈 마음이 든다. 낯선 이가 아닌 가까운 이들과의 고립감이 들어 슬프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방식과 서로에 대해 자신들이 영리한 지배인으로 생각하는 것도 흥미롭다. 특히나 철학과 인도 종교학을 전공한 저자의 객관적이되 인간미와 정이 담긴 내용들은 탐사 보고서가 아닌 생활보고서의 감동으로 피그미가 먼 이국의 한 종족이 아닌 이웃으로 느끼게 되니 예전 전설 속의 존재였던 피그미들을 유인원의 한 종류로 해석했던 해부학자의 만행을 척결할 결정적 문헌이 될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충만하며 감사하게 사는 사람들과 그동안 파괴적 본능으로 그들의 존립을 힘들게 만들던 주변인들이 그들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세계가 하나로 모두가 형제로 살아가야 됨을, 서로 잘 살기 위해서는 공생이 최선의 길임을 자각하게 된다. 결국 유토피아는 그리 거창하고 먼 것이 아님을 재차 확인한다. 내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눈동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힘겨운 발디딤이 시작되는 것임을..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것의 완결이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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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년동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살아왔다. 문명 세계는 그들 피그미를 전설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로 보기도 했고 심지어 유인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콜린 턴불이라는 인류학자의 헌신적인 애정과 관심에 의해 그들은 숲의 사람들로 우리들 앞에 살아있고 실재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우연히 떠났던 아프리카 탐사 여행에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을 느끼게 위해 직접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 무리의 일원으로 생활한다. 직접 턴불이 지은 이 책 <숲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3년간의 자신의 경험과 생활을 엮어낸 책이다. 이 책은 1961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책 속의 글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진실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턴불이 이 책을 통해 담아내려 했던 의미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전달되는 듯하다.
문명인이 쉽게 그들에게 다가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들이 생활하는 숲속세계는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명인들에게 폐쇄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피그미들이 자신들을 '숲의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는 것처럼 그 자신역시도 '숲의 아들'임을 자처했다. 그러한 그의 진실된 마음은 그가 무리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생활할 수있는 바탕이 된다. 또한 그러한 결과는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들이 느끼는대로 기쁨과 슬픔을 겪게 되었으며, 그들처럼 숲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턴불의 시각을 통해 우리는 문명인이 바라보는 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접하기도 한다. 발레키미토 노파의 죽음을 통해 바라본 피그미 사회의 애도와 슬픔은 전통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형식적인 차원과는 달랐다. 그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가슴뭉클한 진실한 애도였다. 또한 죽음이라는 두려움보다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실감에 대한 인식이기도 했다. 그저 터져나오는 슬픔을 어린아이, 늙은이 할것 없이 모두가 겉으로 표현해내는 애도의 장이기도 하다. 또한 가장 관심있게 보여지던 몰리모 의식 역시도 불이라는 생명의 선물을 주었던 숲을 기억하고 그 선물을 거두어갈 수 있는 숲의 권리와 힘을 인정하여 삶과 죽음 모두가 자기들의 신인 숲의 권한 아래에 있음을 받아들인 셈이기도 하다.
피그미는 개인이 가지는 권위를 싫어하고 멀리한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무리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책임감을 공동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 것이다. 턴불 역시 그러한 그들의 일원으로서의 생활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저 각박하고 힘들다고만 생각되어지는 현대 문명인의 시각에서 어쩌면 그들의 그러한 생활이 욕심없는 보편타당한 인류의 옛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돌아가는 곳, 아마도 그곳이 자연이고 숲일 것이다.
"숲은 우리집이네. 우리가 숲을 떠나면, 혹은 숲이 사라지면 우리도 죽는거야. 우리는 숲의 사람들이네." 그들이 신령처럼 떠받느는 몰리모 소리와 그들의 축제와 함께 그들의 노랫소리는 그렇게 아직도 그 숲속에서 들려오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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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인 턴불이 3년간 밤부티 피그미들과 함께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담아놓은 것이다. 그들의 사냥법과 그들의 의식주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시간들의 기억인 것이다.
19세기 말엽까지 피그미의 존재는 전설 속에서만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존재가 인류학자들에 의해 드러나긴 했어도, 오류투성이의 정보였다고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는 것만큼,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턴불은 그렇게 행동했고, 그러하기에 피그미를 형제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애정까지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턴불 덕분에 우리 역시 피그미의 존재와 그 생활들에 대한 진실들에 눈 뜨게 되었다.
피그미들은 농사를 위해 나무를 베거나 숲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들은 숲속에서 사냥하는 법을 알고, 야생 과일을 거두어 먹을 줄 알며, 벌꿀을 찾아낼 줄도 알고 있고, 어느 나무 아래 버섯이 자라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숲속의 사람들이기에 이방인들은 알 수 없는 숲속의 언어를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숲의 자식이라면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나요? 우리는 숲 바깥의 것만 두려워합니다. 110쪽 ]
지역 행정관이 피그미를 마을 흑인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로 숲을 베어 만든 개간지에 피그미들을 정착시키고 농사를 짓게 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피그미들은 숲그늘이 없어직사광선을 견디지 못해 병에 걸리고, 정착생활에 수반되어 오는 질병에 저항력이 없어 흑인들이 마시는 물에 복통과 소화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결국 숲사람들은 숲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시선으로는 그들이 숲에서 사는 것이 불행이고 불편으로 보일 지라도 실상 그들은 숲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행복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문명화되는 것이 진정 모두의 행복은 아니며, 또한 그것이 진리이고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숲은 우리집이네. 우리가 숲을 떠나면 혹은 숲이 사라지면 우리도 죽는 거야. 우리는 숲의 사람들일세. 328쪽 ]
무엇이든 변화시키고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대로 있어서 좋은 것도 있다. 우리가 숲을 그림 속이나 동영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혹은 전설이나 역사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대면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게 된다. 숲도, 그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며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진실이 모두의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너의 진실 그래서 우리의 진실들에 소리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