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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렸지만 곧은 길로 걸어간 외로운 일탈자
"비틀거렸지만 곧은 길로 걸어간 외로운 일탈자" 내용보기
이 책은 정말 읽기가 힘들었다.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번역상의 문제인데, 직역된 문장이 국어 문장 구조와 달라서 해석이 잘 되지 않았고, 비문처럼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문장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져 여러 번 책을 놓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책을 다시 들게 된 것은 평소 신뢰했던 출판사와 역자를 통해 책이 나왔고 서문에서부터 보이는 보석처럼 빛
"비틀거렸지만 곧은 길로 걸어간 외로운 일탈자" 내용보기
이 책은 정말 읽기가 힘들었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번역상의 문제인데, 직역된 문장이 국어 문장 구조와 달라서 해석이 잘 되지 않았고, 비문처럼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문장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져 여러 번 책을 놓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책을 다시 들게 된 것은 평소 신뢰했던 출판사와 역자를 통해 책이 나왔고 서문에서부터 보이는 보석처럼 빛나는 ‘살아있는’ 문장들 때문이었다.
책의 처음 부분에서 저자(리 호이나키)가 자신을 향해 던진 질문이 곧장 내게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목적을 위해 준비해 왔던 것을, 어느 한 순간
 새로운 가치 추구를 위한 확고한 결단으로 미련없이 털어버릴 수 있을까?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던 사람이, 어떠한 결단과 행동으로 자기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지 한 사람의 긴 호흡이 무척 궁금했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는 나(당신)의 삶이 실은 얼마나 왜곡되고 튀들려 있는지 아는가?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던 길을 멈추어 잠시라도 돌아볼 줄도 모른 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며 자기만족에 빠져 살고 있지는 않는가?
-엄청난 풍요와 소비와 자기만족적인 안락 속에서 정신없이 일에 쫓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삶은 아니었던가?
리 호이나키가 한평생 실천적 삶 속에서 얻게 된,
다시 규정되어야 할 것들, 새로운 진실들은 결국 나를 끝까지 사로잡게 만들었다. 
내게 남은 삶의 방향이나 목표를 다시 점검해야 되지 않을까, 착잡한 성찰을 하게 했다.
호이나키는 누군가에게 내가 빚진 것을 되돌려 주는 습관을 '정의'(正義)라고 명명하며 자기만족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나 역사에 적합한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얻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당연시했던 제도권의 길들여진 삶을 벗어나 어떻게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는지 구체적 삶을 증언한다.
또한 혼자의 삶이 아닌 아름다운 공동체의 삶을 주장한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있듯이 참다운 관계 속에서 진정한 나도 발견할 수 있으며, 내가 중심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겸허함에서 출발하여 더욱 큰 연대를 꿈꾼다.
국가 권력 및 모든 부정 부패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적극적인 참여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근대화, 산업화 속에서 개인이 철저히 부정되며 죽음조차도 자율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자율적 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히여,
더 이상 배움이 없고 논리적 사고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기대하기 힘든 실패한 대학 교육에 대하여,
지식욕이 아닌 몸으로 행하는, 전인적 참여를 요구하는 진정한 독서활동에 대하여,
이웃과 좋은 것을 함께 하며 더불어 배울 수 있고 몸을 통한 구체적 체험 속에서 진실을 깨닫게 되는 농촌 공동체에 대하여, 그러한 공동체들이 모여 가장 진정한 기억으로 후세에 남겨 준 문화에 대하여, 그는 끊임없이 신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당연시했던 것을 다시 고쳐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할 줄 아는 진정한 ‘근대적 인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전문화된 지식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뿌리뽑힌 지식인’이 되어선 안 된다며 매섭게 질책한다.
그는 특히, 사람이 타자를 시간을 들여 인내심을 갖고, 서로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려는 진정한 관계 맺기에 대해 반복하여 역설하고 있는데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하고 따뜻한 메시지로 다가 온다.
흙을 볼 줄 아는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사람,
자기가 속한 사회와 정부의 부패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아니오’라고 말한 사람,
자기가 이해한 것에 따라 행동 · 선택하고 선택한 것과 더불어 살면서 죽는 날까지 헌신했던 ‘거룩한 바보’를 통해 나는 삶의 진실과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걷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자녀들과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도 배운다.
자녀는 부모 소유의 고급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학생)들이 자신의 배움을 통제하고 관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움의 자유는 사고의 자유의 일부이며, 언론의 자유보다 더욱 기본적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 책의 매력은 저자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이나 사람들의 살아있는 언어들인데, 진정으로 연대하는 공동체의 삶의 자세를 보여준, 로스엔젤레스 가톨릭노동자센터의 제프 디트리치의 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주류에 합류시키거나 개종, 기금, 건물, 자기 확대의 욕망을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불가피하게 고통을 주는 상처들을 폭로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용기를 갖고 결단력 있게 행동한 외로운 일탈자이자 ‘거룩한 바보’였던 리 호이나키의 삶은
책을 덮어도 나의 마음에 넓게 넓게 파문을 일으키며 질문을 던진다.
-역사의 이 순간 이 장소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언제쯤 믿음의 땅에 발을 굳건히 디디고 서서 욕망의 고리를 끊고 자발적인 가난한 삶으로 살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내게 비수가 되어 꽂히고 나는 마음이 많이 무/겁/다.
b*****i 2008.05.31.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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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바보'로 산다는 것!
"'거룩한 바보'로 산다는 것!" 내용보기
이 책의 저자는 대학의 종신교수 신분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환하여 농부의 삶을 살아던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그 이전에는 수도사로서의 활동을 하다가, 사제직을 포기하고 결혼을 한 이후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당시 벌어진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박사논문을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베네주엘라로 자발적 망명을 떠났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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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대학의 종신교수 신분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환하여 농부의 삶을 살아던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그 이전에는 수도사로서의 활동을 하다가, 사제직을 포기하고 결혼을 한 이후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당시 벌어진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박사논문을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베네주엘라로 자발적 망명을 떠났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돌라와 일리노이 주립 생거먼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7년 동안 재직한 후 정년보장 교수의 자리를 포기하고 농부의 삶을 선택했다. 이러한 저자의 이력만으로도 주체적 삶을 위해 적지 않게 고민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자연에 순응하는 농부의 삶을 택하여 살았던 저자의 자전적 기록이 책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삶의 역정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오디세우스적인 여행’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묘한 시대를 사는 특권‘을 누렸지만, 저자는 물질만능의 삶이 아닌 ’하나의 근원적인 통찰‘을 위한 ’진실의 탐구‘의 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제적 조건과 함께 인간의 삶이 점점 좋아진다는 ’진보에 대한 약속은 거짓이며, 끔찍하고 잔인한 덫‘이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토로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이러한 저자의 관점이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조건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화폐경제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 농부로서의 삶을 택한 이유라고 이해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비록 그 체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끊임없이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를 자각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하고자 한 이유를 “근대적 제도와 관행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내가 과연 올바른 문제의식을 갖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왔는지, 심히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번역후기'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아울러 저자가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이반 일리치의 ‘친밀한 벗이자 동지’였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성격을 ‘어떤 의미에서 일리치의 근본 사상을 한 개인의 자전적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낸 뛰어낸 이야기체의 담론’이라고 설명하는 ‘역자후기’의 구절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 자신의 삶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던 고민의 흔적 그리고 ‘자본과 국가의 압도적인 논리’에 저항하는 문제의식에 독자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자는 안정된 삶을 버리고 농부의 삶을 선택한 저자를 ‘거룩한 바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거룩한 바보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어 오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벌써 끝났을지도 모른다’라고 단언한다. 더욱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크고 작든 체제에 순응하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거룩한 바보의 예들을 풍부히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역자후기’의 구절이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저자의 삶을 절대적으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느리고 불편한 삶’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i*****n 2025.06.22.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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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의 길>과 권력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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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많은 책을 읽지 않지만) 근래에 보기 드문 책 제목이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인구에 회자되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 제목도 이 책을 번역 출판한 역자의 치열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正義가 사라지고 正義感이 발동되지 않는 삭막한 精神의 시대다. 비록 진보의 이름으로 정의의 몸짓을 해보지만, 정의감의 발로이기보다는 '권력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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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많은 책을 읽지 않지만) 근래에 보기 드문 책 제목이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인구에 회자되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 제목도 이 책을 번역 출판한 역자의 치열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正義가 사라지고 正義感이 발동되지 않는 삭막한 精神의 시대다. 비록 진보의 이름으로 정의의 몸짓을 해보지만, 정의감의 발로이기보다는 '권력의 길'로 나가기 위한 몸짓에 불과한 것이 지난 시대의 반성이다.

정의의 길의 종착점이 권력의 심장부를 향하는 정의감이라면 이런 길은 비틀거릴 필요도 없다. 의심과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산업문명과 이 문명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길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특권적 교수로써 살아가는 것에 죄책감을, 자기 집단 이익에 골몰하는 노조운동의 정당성에 회의감을 느끼고,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여행하는 것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죽음을 다루는 의료기술에 거부감을 느끼는 등 저자는 비틀거리며 하나의 습관적 행동경향, 하나의 깊이 뿌리박힌 활동방식인 <德行>의 실천방식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정신의 본령인 정의감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라면 올바른 정의를 위해 숙독할만한 가치가 넘치는 책이다.

무지막지한 소비주의에 맞서 가난을 택하고, 기술주의 추상화에 맞서서 자신의 이웃과 친밀한 사귐을 택하고, 풍요와 성공을 구가하는 사회에 맞서 남루한, 멸시당하는 자들 곁에 서 있기를 원하는 덕행의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많은 책을 읽기 보다는 좋은 책을 여러번 읽기를 고집하는 나는 이 책을 지침삼아 '좋은 삶'의 덕행을 향해 비틀거리며 가고 싶다.

 

n****1 2008.03.2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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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65279;&#65279;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내용보기
제목마저 비장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면서 가다>를 선택한 건 이 책이 법정스님의 필독 추천서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학교수직을 관두고 시골 농부가 되어 평생을 '경제주의, 화폐중심 사회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를 실험했던 미국인 리 호이나키의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변두리 삶'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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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마저 비장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면서 가다>를 선택한 건 이 책이 법정스님의 필독 추천서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학교수직을 관두고 시골 농부가 되어 평생을 '경제주의, 화폐중심 사회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를 실험했던 미국인 리 호이나키의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변두리 삶'속으로

 

호이나키는 교수직을 관두고 미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저개발 된 지역을 찾았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 어둠에 잠긴 두메를 정착지로 선택해 달랑 천막 하나 치고 가족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도 어찌어찌하여 귀농을 해 시골마을에 살고 있지만, 호이나키처럼 극단적인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번듯한 집에, 차에, 도시에서 떨어진 곳이다 뿐이지 도시적 삶에서 누리고 살던 문명의 이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불멸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발적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며 숲속 오두막 생활을 했다. 소로우는 불필요한 삶의 열매는 '사치'라고 했는데, 호이나키는 "끊임없는 소비와 거기에 뒤따르는 지겨운 오락물들로 구성된 삶을 위한 훈련체제에 우리의 아이들을 집어넣어 둔다는 것은 고의적인 잔학행위로 보였다"고 쓰고 있다.

 

 

날이 갈수록 기막히 어리석음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한 사람의 대학교수로서 지내는 삶의 안락과 특권을 누려오면서 나는 눈을 들어 또다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의 일상을 어떻게 조직하고, 내 마음에 어떻게 자극을 줄 것인가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찾고, 내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내 감각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p71)

 

진실로 삶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커다란 배움의 길. 변두리의 삶은 호이나키에게는 일상의 진보를, 그 자녀들에게는 서구 근대식 아동기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선사했다.

 

호이나키는 두메산골 생활에서 마을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는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귀 기울여 듣는 것, 즉 그들의 삶, 그들의 믿음, 그들의 신화, 그들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우주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p75)로 삼았다.

 

기존 경제의 바깥에서 베풂과 나눔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 호이나키는 이웃들과의 교섭이 무한히 풍부한 교환관계, 상호 증여의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며, 무지렁이 농민들 속에서 자본주의 상품경제를 대체할 대안경제의 모습을 읽어낸다. 그는 농사를 짓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모든 것이 순환적으로 움직이는 농촌 공동체의 삶 속에 그 어떤 '우주적 정당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아동기'라는 중독 현상에 대해

 

호이나키가 변두리 삶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로 아이들의 삶을 서구 근대식 '아동기'에 머무르게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는 이 책의 한 장을 '아동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할애했다.

 

호이나키는 부모님으로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를 들은 기억은 없지만, 모든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의 표현에 선행하는 진리, 즉 '육체 노동의 가치'를 배웠다며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또한 '좋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육체노동의 경험은 전통적으로 덕있는 삶으로 이해되어온 것의 바탕을 이루는 독립적 인격과 자신감의 원천'이라는 웬델 베리의 글에 절대적 공감을 표시한다.

 

그는 근대적 아동기는 인간으로서 '자립'을 가르치지 못한다고 개탄한다. 일정한 나이가 되어 근대적 교육제도인 학교라는 시스템에 편입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면 한번쯤은 다른 시각에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와는 단절된 채 또래집단에 강하게 의존하면서 각종 일탈행위에 노출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되짚어볼만 한 내용이다. 혹시 근대 이전에는 없었던 아동기, 사춘기라는 시간을 별도로 설정하고 마을공동체, 가족공동체의 삶과 동떨어진 집단 속으로 아이들을 밀어넣은 불행한 결과는 아닐까. 호이나키의 주장을 옮겨보자.

 

오늘날 중산계급 속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아동기의 삶에서 아이들은 실제로 '연관관계'를 체험하지 못한다. 밭에서의 일과 자신이 먹는 것 사이의 과녜, 사고와 건축일과 집 사이의 관계, 인간활동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 사이의 관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삶에 있어서의 어른들 사이의 관계 등등.
대부분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일상적인 체험, 즉 집안일이 자기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못하면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절연된다는 것, 즉 자신의 온전한 자아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절연된다는 것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p231)

 

농장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일을 할지를 배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한 일'이라고 간주하는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들의 '마음대로 놀'수 있는 장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진실로 필요한 존재로 간주되는 가정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p236)

 

사람은 자기의 장소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는 그만큼 그는 강하며, 반면에 꼭 돈이 들어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필요한 그만큼 그는 약하다.(p236)

 

오늘날 아동기는 소비주의에 대한 중독성 의존증을 일찍부터 기르고, 직업적 전문가들과 정부기관들에 의한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에 기대는 것을 배우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놀이터로서 기능한다. 이런 종류의 아이들 키우기는 거의 틀림없이 나이는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인간을 산출한다. 그런 인간에게는 계속해서 장난감이 필요하고, 만족감이 없으며,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느낌이 드는 법이 없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을 추구한 소로우의 이상이 내포하는 지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생 동안 한 장소에 머물면서 그 장소가 제공하는 경이로움을 갈수록 더 깊이 느끼는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 (p238)

 

나는 내 부모님이 그들 자신의 지혜로써 자신들의 삶을 좋은 삶으로 만들고, 그들의 아이들에게 매일매일의 덕행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아이들을 '아동기'라는 수렁으로 빨아들이는 시대적 흐름에 조용히, 그리고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p239)

 

사람이 살면서 후대에 대해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줘야 할까.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고민들을 너무나 쉽게 학교와 제도교육에 의탁해 버리지는 않았나. 아마 내가 지금 도시에 살고 있었다면 학교 교육에 부분적인 불만은 있을지언정 패러다임 자체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시골마을에 살면서는 그렇다. 마을의 시각, 땅의 시각, 관계의 시각에서 기존의 관념들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이들 교육이야 더 말해 뭣하랴. 호이나키와 같은 극단의 결단 수준은 아니겠지만, 새로운 배움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필요성 만큼은 갈수록 절실해진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x******0 2012.05.22.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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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길로비틀거리며가다)미끄덩~ 비틀
"(정의의길로비틀거리며가다)미끄덩~ 비틀" 내용보기
정의롭지 않은 길로 미끄덩거리며 가고 있을 내 모습을 돌아보기 위해 오래전에 미뤘던 책의 힘을 빌린다. 정의, 공정한 사회가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어쩜 모두 다 손을 뻗어, 그리고 시간을 부러 내어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개인적으로 정의로워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지금. 언제나 시대상의 상황들이 맞물려 간
"(정의의길로비틀거리며가다)미끄덩~ 비틀" 내용보기

정의롭지 않은 길로 미끄덩거리며 가고 있을 내 모습을 돌아보기 위해 오래전에 미뤘던 책의 힘을 빌린다. 정의, 공정한 사회가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어쩜 모두 다 손을 뻗어, 그리고 시간을 부러 내어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개인적으로 정의로워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지금. 언제나 시대상의 상황들이 맞물려 간다만 절대적, 보편적 정의나 선은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먼저 굳이 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정의 역시 나은 외적인 편리의 삶, 나만의 삶을 위해 미뤄지고 있을 뿐이고 행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 않을까 현실의 상황과 생각하는 옮음과 정의가 반反하기에 현실은 언제나 비틀거리며 내가 살고 있다. 그게 정의로운 길이건 정의롭지 않는 길이건 이런 성찰을 하고 인식한다면 미끄덩~비틀거리는 행보의 연속이다. 이는 곧 내게 진정성을 물어오는 상황이다.

 

이런 자신의 내적으로 지향하는 옳음과 정의에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들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나는 내가 어디에 서있고 또 어디에서 있어야 한지를 알기위해서는 나의 사고가 두 가지 자실, 즉 거리와 질서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될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P19

 

이제 막 이 시험을 통과하면 약속된 편안한 직업으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창밖의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풍경이 기어코 리 호이나키는 눈을 돌리고 마음을 배반하지 말라는듯 그에게 선택을 하게 한다. 무조건적 요구하는 국가의 애국심, 국가의 정체성의 모호성과 위험성을 생각하고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이끌어 내는 그의 갈등과 고민, 사고, 행적의 과정이 참으로 인간적이다.

 

이 나라가 도덕적으로 하나의 괴물로 변해버렸다면 내가 어떻게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가 P21

 

망명의 길을 떠나 타국의 삶을 살게 되지만 리 호이나키는 자신을 포함해 가족 모두 뼛속까지 미국인이고 그곳에선 외국인,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국가의 도덕성의 부패, 부정으로 도망치고 외면하지 않았나 하는 자성을 하고 다시 귀국하여 진정한 애국을 묻는다. 내가 비록 국가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빚을 지고 있고 그 빚은 갚아야 하는 당위성이 주어진게 보편적인 인간사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로부터 부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래야만 하는가? 리 호이나키는 실제적인 애국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하는것 같다

 

-나는 내가 한 사람의 애국자로서 다시 말해서 내가 속한 사회와 정부의 부패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상황에서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P34

 

-제도적 기관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주된 명분의 하나는 그러한 기관이 어떤 덕행을 실현하는 인간적 실천을 지지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P47

 

사회적으로 또한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전문직업으로 생각(아이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기에)하는 교수라는 위치에서 그가 실험하고자 했던 것들과 동료교수들 자체의 모순을 맞닿으며 리 호이나키는 정교수가 되는 그날 농경으로 전환한다. 리 호이나키라는 인간이 정말 인간적인것은 끊임없이 반하는 내적과 외적의 상황들과 갈등하면서 간신히 힘겹게 그러나 결국 내적에 반하지 않는 행보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불편해하며 멈추어 누가 되는 삶이 아닌 이타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한 부정한 사회의 가운데서 한 엘리트 그룹의 한 일원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나날의 고통속에서 기진 맥진해 있는 동안에 어떻게 내가 특권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인가?P51

 

수없이 자문하고 의문을 가지며 시스템을 들여다보는 그의 사고와 삶의 방식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 의심없이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학의 산물과 사회적 시스템이 자립적인 인간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들었는지를,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단절시키며 아름다움을 앗아갔는지를. 우리가 자율성을 가지고 선택을 한다고 말 할 수 있는게 몇 가지나 되는지를.

 

-자기라는 것은 지각하고 상상하고 사고하고 알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주체가 타율적이 아니라 얼마나 자율적인가에 따라 그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P201

 

나 역시 너무 많이 가지고 누리는 혜택입은 자이다.  끊임없이 갈등과 모순으로 정의롭지 않은 길에서 미끄덩거리며 허우적 되며 있어야 할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기에 진정성을 가질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리 호이나키처럼 비틀거리며 저기가 된 여기에 있으려고 현상황속에 속해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내외를 서로 배반하지 않는 진정성을 위해 비틀거리며 용쓴다.  나는 오늘도 많은 것들이 불편하다

 




e*****e 2010.12.05.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옳게 사는 것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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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책은 반전 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한 대학 캠퍼스의 강의실 안에서, 저자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기 위한 시험을 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상아탑 안에서 벌어지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하게 된 저자는, 전쟁을 일으킨 조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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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책은 반전 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한 대학 캠퍼스의 강의실 안에서, 저자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기 위한 시험을 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상아탑 안에서 벌어지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하게 된 저자는, 전쟁을 일으킨 조국을 자발적으로 떠나 베네수엘라의 한 도시로 이주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불의의 모순적 상황을 맞닥뜨리고 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일리노이 주의 한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그러나 정년이 보장되는 종신교수가 될 즈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제도권 안에서의 안주와 다름없음을 깨닫고, 대학을 나와 가족들과 함께 시골로 들어가 농부의 삶을 시작한다.

 

     이 책은 저자의 지난 행적들의 기록이자, 자유로운 상태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삶으로서의 저항과 사상적인 변론을 담고 있다.

 

 

2. 감상평 。。。。。。。   

 

     많은 사람들이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이론들을 내어놓는다. 공리주의적 해석이나 자유주의적 해석들처럼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이론들만이 아니라, 사실상 철학의 전 분야가 결국은 어떤 것이 정의로운 삶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뼈대를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만 보면 이 책도 그런 약간은 따분할 수도 있는 이론에 관한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저자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논의를 더하기 보다는 그냥 어떤 것이 옳게 사는 것인지,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지를 실제 삶으로 보여 주려고 애쓰고 있다. 정년과 각종 혜택들이 보장된 교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시골의 전통적인 농부가 되는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의 도피나 인간의 삶과 가치를 돈과 숫자로 환원시켜버리는 물질주의적인 압제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평생에 걸쳐 고민해 온 한 사람의 대답이기도 했다.

 

     물론 저자의 선택만이 질문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해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책상 앞에만 앉아(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놓고는 이게 옳으니 그르니 하며 지식자랑하기 바쁜 사람들보다는 강한 울림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배기가스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자기 자신도 자동차를 몰고 있거나, 운송하는 데 막대한 화석연료를 태워내는 상품들을 별다른 고민 없이 사용하는 식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인류의 미래는 어쩌면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치 거머리처럼 주변의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다가 쪽쪽 빨아먹은 뒤 껍데기만 내뱉는 도시라는 문화는, 단지 이용 가능한 자원의 급격한 감소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비인간화를 초래한다는 면에서도 위험해 보인다. 도시의 편리함을 사랑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꽤나 아픈 말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지만,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p*********n 2013.03.2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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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면서도 꼬장꼬장한 서양의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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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는 별로 재미가 없다 .뭐, 세상을 바르게 사는 건강한 사상의 꼬장꼬장한 영감께서 당신의 생활신조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글이 뭔 재미가 있겠나?그런데, 읽다보니... '어? 이건 좀 심상치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더라. 호이나키의 인생은 정말 하나하나 세상의 그리고 인간의 삶의 문제요소들을 부정해가는,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란 인상이 남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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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는 별로 재미가 없다 .뭐, 세상을 바르게 사는 건강한 사상의 꼬장꼬장한 영감께서 당신의 생활신조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글이 뭔 재미가 있겠나?


그런데, 읽다보니... '어? 이건 좀 심상치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더라. 호이나키의 인생은 정말 하나하나 세상의 그리고 인간의 삶의 문제요소들을 부정해가는,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란 인상이 남는 것이다. 내가 간혹 이야기하는 '아닌건 아닌거다'라는 주장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니... 결국 의의 사상은 아나키즘으로 기우는데, 그것도 결코 정치적이진 않다.


현대의 다양한 올바름의 사상과 정치을 비꼬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저자는 참으로 박력이 느껴지는 사상의 인물이었다.


"죄의 세계는 부드러운 세계였다. 거기에서 하느님은 동정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오늘 생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는 빡빡하고 가차없는 세계이다. 미래세대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욕구의 구조는 경직된 논리를 따라왔다. 그 구조 속에서 '나'는 제거되고, 오직 압도적인 '우리'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보에 밝아야 하며... 우리는 세계를 구해야 하며..."


저자는 서양의 사고와 생활전통에 대한 성찰로 부터 이러한 결과에 도달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도의 철학(힌두, 불교)의 '자아'관과 연결되는 듯하다. 너무도 철저하게 현대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대책이 없기도 하지만, 뭐 실천을 해버리니...자신의 신념에 대해, 현대인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비판과 그로부터 극복하기 위한 도움을 주어야 할 교사들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일갈을 날린다.


"... 공공선의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자아를 넘어서고, 나르시시즘의 문화를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서, 사람은 한 사람의 공적 인간으로서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공적인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 더욱이, 좀 더 많은 고용혜택에 길들여진 교사들은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자기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모범을 구현하기 위해 좀처럼 일어설 용기를 갖지 못한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제도화된 교육의 담당자들의 주저함이 올바름의 공공성과 그 속에서의 개인들의 적응/조화를 어렵게 하는 현실의 단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주 정독을 하지 못한 셈인데, 언젠가 다시금 손에 잡아보고 싶은 책이다. 

e****s 2012.06.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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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나도 함께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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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리 호이나키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을,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통찰하며 함께 보여준다. 1960-90년대 미국 및 라틴아메리카의 운동사와 다양한 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의 사상적/체험적 성장에 도움을 준 배경을 공유하거나 이해하는 독자일수록 이 책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면, 아는 만큼만 보이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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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리 호이나키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을,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통찰하며 함께 보여준다. 1960-90년대 미국 및 라틴아메리카의 운동사와 다양한 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의 사상적/체험적 성장에 도움을 준 배경을 공유하거나 이해하는 독자일수록 이 책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면, 아는 만큼만 보이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결코 친절한 책은 아니다. 또 대중보다는 지식인을 공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책에서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 자기 모순적 삶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자기갈등을 겪은 사람일수록 공감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적 노동-한국어로 서술된 문장을 머릿속에서 영어 원문으로 변환하고 다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 친절하지 않은 책은 기꺼이 수고를 감내하며 읽을 가치가 있다. 나는 책을 두 번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두 번 읽을 정도로 대단했다. 곧바로 내 가슴에 치고 들어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읽을수록 문장을 곱씹고 의미를 되새기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마치 성장을 위해 한 계단씩 오르는 과정과도 같았다.

 

저자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기술지상주의라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지구 위에서 인간다운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게 과연 가능”할까, 라고 물으면서. 모든 신기술은 당대의 정서에 어느 정도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기술 중에는 인간의 편리를 도모하는 것도 있고, 생활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도구의 발명은 육체노동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인간노동력을 대체하는 자동화 시스템은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나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저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으나 그의 고민에는 동참하고 싶다. 그렇다면 기술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으면서 인간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을까.

 

저자는 그래서 개인적 단위에서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그 방법을 제시한다. “거룩한 바보”,“한 사람의 혁명”, “덕행의 습관적인 실천”듣기만 해도 사명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말이다. 그만큼 이 책은 한 개인이 택해야 할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이런 태도는, 구조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결국, 일상생활에서의 명상과 자기혁명으로 돌아오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구조 개혁과 사회변화를 추진하는 이들은 알았을 것이다. 혁명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물론 이 의미가 오늘날 잘못 사용되는 측면도 있다. 여러 활동가나 혁명가들이 주장하고 실천한“한 사람의 혁명”을 많은 이들이 개인적 성찰에만 매몰되는 것으로 곡해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책에서 주목할만한 운동을 소개했다. 바로 카톨릭노동자운동이다. “카톨릭노동자운동은 부랑자와 매춘부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한다. 억압받은 자들의 지위 향상이 결코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운동가들의 삶이 “자기확대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나 뻔뻔스러운 사회사업 전문가주의로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어리석다고? 결코 아니다. 실제 이 운동은 미국 내에서 지역사회조직운동(CO)으로 발전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주민운동의 든든한 뿌리를 이루고 있다.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밑바닥에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장 강인한 자가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이것만큼 효율적인 게 있을까. 불합리/부조리에 던져 놓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 라고 말하는 지배자들의 사상교육.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에게 부여하는 ‘사후적 정당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 과정을 마비시킨다. 이 책은 사고가 마비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한다.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기른다. 안일하게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말라고 격려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밑줄 긋고 싶은 내용으로 가득찬 이 책, 사회변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o********s 2008.06.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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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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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필요 없다. 단지 ‘읽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꼭 리 호이나키가 자신이 알고 있던 바를 성실하게, 혹자가 보기엔 무모하고 철없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이 책의 독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카페테리아의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메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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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필요 없다. 단지 ‘읽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꼭 리 호이나키가 자신이 알고 있던 바를 성실하게, 혹자가 보기엔 무모하고 철없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이 책의 독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카페테리아의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메뉴들 ... 이런 것이 저 학생반란과 운동들의 주된 결과인가? 나는 궁금했다. ... 대학개혁을 위한 요구들은 어떠한 좀더 심각한 변화를 초래했는가?
- 11쪽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논리적으로 따라가면서, 그것과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경험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개선시켜나갈 뿐이다. 실은 성실한 휴머니스트라면 매우 당연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대학은 오직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뿐이며, 교수들은 오늘날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질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아는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다고 나는 느꼈다. 캠퍼스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치적 의도는 한 가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행해지는 교육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태평양 연안의 아름다운 숲 속에 자리 잡은 캠퍼스의 저 세련된 휴머니스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직 보여짐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일은 필연적으로 자기패배적일 수 밖에 없었다.
- 13쪽


리 호이나키의 저 지적은 미국 대학 사회가 아니라 전 세계 대학 사회에 공통되는 사항일 것이다. 실은 코미디다. 말해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aid)과 보여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hown)에 대해서 무수한 이들이 떠들지만, 이를 실천하는 이는 거의 없다. 리 호이나키의 눈에는 대학 사회를 떠도는 담론은 유령이며, 죽은 자이고,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는 대학 사회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마치 중세적인 어떤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탐욕스런 도시 자본주의와 만나게 된다.

책은 리 호이나키의 경험, 그 경험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혹자는 저자의 박식함을 높이 평가하겠지만, 이 책이 미덕을 가진다면, 그 박식함이 아니라 저자의 일상 경험에서 지식의 의미를 구한다는 데에 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이 현실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의미나 가치도 구하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리 호이나키는 그것(지식)을 실제 경험을 통해 검증하고 가치를 구해나간다.

하지만 리 호이나키의 실천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실천의 방식이 아니다. 그도 지식인이며, 지식인 사회에서 성장했으며, 그가 의지하고 있는 어떤 앎의 체계, 또한 전문가적인 것이다. 한국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쯤 될까? 책을 다 읽고 사소한 실천이라도 감행하는 사람은?

이 책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결국 지식인 사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다. 리 호이나키가 대화의 상대로 가정하고 있는 이 또한 지식인이며, 그가 변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지식인 사회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예부터 있어왔던 어떤 방식대로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리 호이나키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앞으로도 소수일 것이다.

한국의 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이상하게도 젊은 고학력의, 고수익의 사람들에게선 낮게 나오고, 나이들고 저학력의 저수익의 사람들에게 높게 나오는 이치와 비슷하다. 후자의 사람들이 리 호이나키같은 저자가 쓴 책을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런 저자를 만나 시몬느 베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가능성도 없다. 사회를 이미, 오래 전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어떤 이론이나 학설은 현실의 경험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누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 지식의 트렌드만 따라가는 학자와 지식인들만 있을 뿐, 그것을 경험 속에서 검증하고 실천하는 이는 없다. 리 호이나키의 책이 지식인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탐욕'이라든가, '정치적 올바름', '환경 문제, '지속가능한 성장' 따위는 그 다음 문제다. (실은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의 근본 주제는 아니다.)



YES마니아 : 로얄 s***s 2011.07.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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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호이나키 "비틀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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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호이나키...역시 낯설은 이름이다. 하지만 적어도 생태근본주의나 기독교적 아나키즘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웬델베리와 함께 다정하게 다가올 이름이다. 풍속사를 쓴 에두아르드 훅스는 진리는 극단에 있다라고 책에 쓴 바 있다. 극단의 진리...진리의 극단 적어도 이런 말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앎과 삶이 하나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일게다. 그리고 그 정점에 리 호
"리 호이나키 "비틀거리며..."" 내용보기

 리 호이나키...역시 낯설은 이름이다.

하지만 적어도 생태근본주의나 기독교적 아나키즘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웬델베리와 함께 다정하게 다가올 이름이다.

풍속사를 쓴 에두아르드 훅스는 진리는 극단에 있다라고 책에 쓴 바 있다.

극단의 진리...진리의 극단

적어도 이런 말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앎과 삶이 하나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일게다. 그리고 그 정점에 리 호이나키같은 사람들을 올리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애국심에 대한 생각, 배움과 가르침과 삶의 관계, 아이들에 대한 생각, 현대문명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까지 그의 앎은 반듯하고 삶은 치열하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깊은 통찰은 나의 머리를 감싸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책을 내려놓고 싶다면 햄릿형 삶을 사는 나같은

나약한 샐러리맨에겐 이 책이 너무나 멀게 느껴지게 때문일까

국가는 변화시킬 수 없어도 나는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은 더 이상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의 자조는 아닐까..

특히, 그가 도미니크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칠층산이라는 책이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모든 사고의 바탕은 하느님의 종교이고

은둔에 대한 열망을 현대문명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꾼 것은 아닐까..

김수영에게서 감동한 삶의 모습이 리 호이나키로 옮겨갈 수 있을까

물론 나도 공양희씨의 삶을 동경하며, 나 역시 여전히 어린시절부터 서울서 샐러리맨의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나의 뿌리는 나의 고향인 전라도 김제라는 것을 뼛속 깊이 잊어본 적이 없다.

과학보다 시에서 감동하는 인문학도의 감성도 여전하고,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도 긍정한다. 그럼에도 머레이 북친의 비판을 외면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식인들이고 중산층이상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며 계급적 관점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린 진정 오디세우스가 될 수는 없을 것인가?

y***1 2008.01.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