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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은 사서 읽기 아까워 아끼고 아끼다 읽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괜히 샀다 싶어 미루고 미뤘다가 읽게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후자의 경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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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에서... 문득 누군가를 생각한다.
함께 했었다면,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장소와 시간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제 3자가 되어 그 순간을 기억하고... 함께 하지 못했더라면, 그 장소와 연관하여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 상상해 보곤 한다. (마치 어린왕자의 여우가, 밀밭을 보며 금빛머리카락을 생각하는 것처럼.)
추억이라는 것은 가물 가물해야하는데, 짜증날정도로 선명한 기억력때문에 종종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내가 항상, 줄창 가는 곳만 가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다.
한 남자가 지나간 신문의 기사를 보고 '도나 브루더'의 흔적을 추적한다. (독일의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내용을 은근 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것 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의 임팩트가 훨씬 크다.) 몇 십년전, 그녀가 보았던,걸었던, 존재했던 어떤 공간을...이제, 아무런 이유없이 그가 보고, 걷고, 존재한다는 것에 대하여...읽는 내가 쓸쓸해진다. 그럴 이유도 없는데.
책을 읽고 나니..뭔가 말하고 싶은데, 꼭 집어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뭔가 줄창 설명해야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
다른 시대,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의 추적의 의미... 서류위에 한 줄 문구로 남은 삶의 흔적은 얼마나 허무한지... 150페이지 남짓한 소설인데...읽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또 읽고 하다보니..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함께 거닐던 교정, 손 흔들며 만났던 거리, 함께갔던 영화관...혹은 그 집 앞까지 나홀로 찾아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나겠다.
이 작가의 작품을 몇 개만 더 읽어보고 싶다.
*마음에 드는 문구*
'뭔가 지워졌던 것들이 빛 가운데로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공간들이란, 아주 희미하게나마 거기 머물렀던 이들의 각인을 간직한다고. 각인이라....안으로 파이거나 바깥으로 돌출된 자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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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브루더』 파트릭 모디아노 / 문학동네 잃어버린 기억의 발자취를 찾아서
세계대전, 전쟁, 나치, 유태인 한 소녀, 실종신고... 그리고 소설. 나는 이것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을까. 전쟁의 폐해가 잔뜩 담긴 장면들, 잔혹하고 무자비한 일들, 희생되어가는 유태인들, 어찌 됐든 전쟁 문학에서 나올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상했다. '도라 브루더'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녀의 단순한 실종신고로 시작되는 끈질긴 시간의 추적은 마치 무성영화의 필름이 돌아가듯 고요했다. 시대의 잘못을 꼬집고 반성의 의미를 되새기고, 잔혹한 장면들을 통해 연민을 유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실종된 소녀가 간 과거의 길을 살피며 쫓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한 기록이 아무런 감정 없이 건조하고 담담하게 전쟁과 그 시대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주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 아니다. 유태인이 잡혀가고,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신분표를 달아야 했고, 불안 없이 길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꿈이라고 여겼던 시대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도라 브루더'라는 소녀는, 아주 자그마한 증거와 불확실한 가정을 통해서 아우슈비츠로 갔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느닷없이 발견된 한 소녀의 실종신고를 통해, 우리는 그녀의 일생에 약간의 상상을 더해서, 그녀가 왜 그곳에 갔는지, 기차를 탔는지, 어딘가로 도망을 갔는지 궁금해하며 그 속에 비어있는 공백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역사에 큰 풍파가 있었을 때 한 개인이, 세계 속에서는 엄청나게 작을 뿐인 한 인간이 얼마나 무섭게도 조용히 흩어져버릴 수 있는지 생각하며 통탄했다. 아니, 무서운 시대를 타지는 않았더라도 천천히 시간이 흘러 사라지게 된 한 인간의 존재와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아련하기만 할 뿐인 듯하다.
언젠가 중고책에 쓰여있던 작은 글귀를 발견했을 때가 기억이 났다. "사는 게 별거냐, 잘 웃고 잘 먹고 잘 살자"라고 적혀있던 글귀, 그것을 보고 누군가의 삶과 그것을 받았던 누군가의 기분과 펜을 눌러 적었을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또한 어딘가 흐려져있을 기억의 발자취를 밟고 생각하는 것이었던 것 같았다. 내게 온 이상, 다시 전해지지 못할 그 책의 기억, 그리고 감정, 삶..... 『도라 브루더』는 이렇듯 띄엄띄엄 비어져 있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되짚어갔고, 그것들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몇 조각이 빠져있는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막막하지만, 막연한 호기심과 관심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기억이 충분치는 않지만 여러 가지 연상을 통해 만들어진 퍼즐의 그림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이 책을 통해 아주 작은 소녀의 발자취는 조금이나마 그 자국을 드러내며, 기억의 퍼즐을 조금씩 맞추어 갈 수 있게 되었다.
▒ 담아둔 문장
▒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공간들이란, 아주 희미하게나마 거기 머물렀던 이들의 각인을 간직한다고. 각인이라...... 안으로 파이거나 바깥으로 돌출된 자국. 세실과 에른스트, 도라, 그들의 자국은 아무래도 움푹하다고 말해야 하겠지. 그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를 다시 찾을 때마다 나는 움푹 파인 상태로 남아있는 부재와 공백의 각인을 느꼈다.(33p)
▒ 아버지와 그녀가 서로 스쳤기를 어쩌면 나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무척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부류였다. 그해 겨울, 그들은 배척받는 자들로서 같은 범주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도 1940년 10월의 유대인구조사에서 자기 이름을 빠뜨렸고 도라 브루더처럼 '서류번호'를 소지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에게는 더이상 합법적인 삶이란 게 없었다. 누구나 직업, 가족, 국적, 생년월일, 거주지 따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그는 모든 닻줄을 끊어버렸다. 이제 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디론가 도망친 후의 도라와도 같았다. (75p)
▒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태도에 놀랐다. 나치 강점기에 그가 겼은 것은 분명코 그가 겪은 것일진대, 잊었는가, 그는 채소 씻는 바구니가 나를 실어가도록 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바구니 안에 있었다. 내 앞에 앉아서 태연스레, 약간은 지겹다는 표정으로, 내가 무슨 페스트 환자라도 되는 양 나를 모른 체하면서, 경찰서가 가까워옴에 따라 나는 두려웠다. 그로부터 어떤 동정심도 기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부당했다. 나는 또한 그 책을, 내 첫 소설을, 나치 강점기에 그가 겪었던 불안을 이제 내 몫으로 떠맡겠다는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터였기에 더욱더 부당함을 느꼈다. (82p)
▒ 나는 1960년 1월의 도주에서 느꼈던 그 열광적 기분을 아직 기억한다. 너무 강렬해서 내 인생에 거의 그 비슷한 것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단칼에 모든 포박들을 잘라내는 도취감, 거칠고도 자발적인 결렬의 순간. 강요된 규율 체계, 기숙사, 선생들, 동료들, 당신은 이제 그들과 아무 관계도 아니다. 단절, 그렇다. 부모와도 그렇다. 이날 이때까지 당신을 사랑해준 적도 없었고 앞으로 더 기대할 것도 없는 부모와 당신은 결렬되었다. 반항과 고독의 감정이 활활 타오르고 마구 숨이 가빠지면서 당신은 무중력 상태로 돌입한다. 내 삶에서 진정 나 자신으로 돌아가 내 걸음으로 걸었던 희귀한 순간들의 하나였다. 황홀경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 미래도 없다. 당신은 눈부시게 비약하다가 갑자기 뚝 날개 부러지는 소릴 듣는다. 도주는 그런 것 같다. 살려달라는 일종의 구조 요청이자 때로는 자살의 한 형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짧은 순간 영원의 느낌을 맛본다. 나는 단칼에 세상과의 끈들을 잘라냈을 뿐 아니라 시간의 끈도 잘라냈다. 어느 아침의 끝에 하늘은 맑은 푸른빛이고 나를 짓누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튈르리 정원의 시계바늘은 영원히 멈췄다. 그런데 개미 한 마리가 태양의 흑점 위로 꾸준히 기어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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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모디아노가 1997년에 내놓은 소설로, 이번 노벨문학상 수여 근거이기도 한 '나치강점기의 파리 생활'을 다룬 작품이다. 아니 '다루다'고 말하기엔, 역사의 기록에 가깝다고나 할까. 만약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그의 책에 옮겨놓지 않았더라면 잊혀질 뻔 한 어떤 역사의 기록을 모디아노 자신의 어떤 필연과 같이 느껴지는 우연의 끌림에 의하여 작가 고유의 강박적인 포착 욕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여 시대적 증언으로 완성한 전기적 소설이 바로 이 <도라 브루더>이다.
이 작품은, 부모님이 구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넘어온 유대인인 15세 '프랑스' 소녀 도라 브루더의 실종을 보도한 짤막한 옛날 신문기사를 모디아노가 그가 살고 있던 80년대에 우연히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15세란 나이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상황, 아마도 그 나이에 매우 답답했을 종교 시설의 여학생 기숙사에서 탈주하려 했던 소녀가 만난 시대는 그러나 지금과 같이 가출하는 것이 일탈의 방황으로만 치부될 시기가 아니었다.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똑같은 나이의 그가 도라와 같은 상황을 살았던 시대와 도라가 살았던 상황이 놓여 있던 시대를 넘나들며, 특정 민족을 말살했던 어떤 민족의 강점과 전쟁이라는 시대에 의해 자신을 충족하게 살 수 없었던 잃어버린 시대의 기억을 들추어 재구성하고, 그 시대를 다시 망각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즉 그 시간을 현재에 붙들기 위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가 그 시대의 불안과 책임을 그 인생에 떠맡는다. 도라는 '채소 바구니'라고 불리우던 경찰 호송차에 실린 후,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같은 유대인인 파트릭 모디아노가 20년 후 경찰 호송차에 실려도 바로 풀려났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그의 공쿠르 상 수상작이자 노벨문학상 지정에 큰 역할을 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여운이 짙게 깔려있는 듯했다. 그 소설에서 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질이 아니라 양으로 독을 채워 넘치게 하려는 강박이 보였다고나 할까. '넘치는 것'이 그 시대의 잃어버린 기억과 시대 속에 잃어버린 자아의 정체성을 겨우 획득하여 세상에 확실한 빛을 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볼 때, 아직 그 독은 다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이야기가 그게 그거다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반복과 복제의 행위 그 자체에 그가 추구하는 진실과 목표가 있고 책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축적되는 것 같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으니 마치 나치점령기 파리를 사는 것 같고, 또 지금 현재 시대에 그 파리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는 것 같다. 이중 시대에 놓여 있는 기분이랄까. 과거가 현재속에 있고(사실 그 과거는 현재를 만들어낸 근거이자, 우리가 간과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본질이고), 그 과거 속에 우리가 놓인 현재를 읽는다. 그 속에서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그 시절 파리의 이야기를 보면서 다음 편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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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들의 친절한 권고(?)에 혼자서 은근한 협박의 기운을 느끼며 읽기 시작한 파트릭 모디아노의 글들. 일단 분량이 많지 않아서 읽기 전의 내 마음을 가볍게 하기는 했는데, 읽는 중에는 역시나 가벼운 마음이 유지되지 않았다. 소설은, 소설가는, 전생에 사회로부터 입은 은혜가 있어서 갚아야 할 채무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어딘가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 것인지.(지금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받은 은혜로움의 하나인데)
도라 브루더는 한번도 생생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도라 브루더의 이야기. 나는 도라 브루더 대신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찾고 싶은 사람, 나더러 찾으라고 하면 내 일상을 저버리고 찾아 나서고 싶은 사람,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는지 또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고 싶은 사람. 한두 명이 아니다. 좀 더 된다. 이 무슨 결핍인지. 나에게 이런 허전함이 있었단 말인지.
나에게 작가와 같은 거창한 사명감이 있어서 찾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회나 국가나 역사에 대해서는 지극히 겸손하고 평범한 사람이어서 내 힘 하나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내가 찾는 사람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니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도라 브루더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자신을 찾는 사람으로 인해 이십 세기 초 유럽과 이후 세계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우리들 중에는 도라 브루더처럼 그렇게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아무도 찾지 않아도 좋을 사람으로 살다가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 그렇게 이름 지워져도 그다지 서러워하지 않을 사람들, 내게만 소중했던 사람들을 찾아 나서보고 싶다는 생각. 작가는 나를 이해해 줄까?
책을 보는 내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장면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대인'은 나에게는 늘 해결하지 못한 탐구 과제이다.
(아직도 파트릭 모디아노 책이 세 권 더 꽂혀 있다. 히히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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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여자 아이를 찾습니다. 도라 브루더. 15세. 1미터 55센티미터.
갸름한 얼굴, 회갈색 눈, 회색 산책용 외투, 자주색 스웨터, 감청색 치마와 모자, 밤색 운동화. 모든 정보는 브루더 부부에게로 연락바람. 오르나노 대로 41번지, 파리
팔 년 전 어느 날, 1941년 12월 31일자 <파리 수아르> 3면에서 작가는 우연히 이 기사를 발견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나라면 대충 훑고 지나갔을...평범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기사. 도라 브루더는 과연 누구였을까?
작가는 도라 브루더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브루더와 그녀의 가족들, 그녀가 살던 곳, 그녀의 기숙학교 등....그녀가 머물렀던 곳을 직접 거닐어보기도 하고, 지도에서 명칭들을 찾아보기도 하며 그녀의 삶을 하나하나 찾아간다. 도라 브루더와 동시대를 살았던-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녀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를 얻기도 하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몇 달, 몇 일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브루더 가족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가 재조명된다. 끔찍한 전쟁, 독일군의 점령, 수많은 빈민들, 그리고 유태인들....프랑스를 독일군이 점령하면서 유태인들에게도 점점 포위망이 좁혀온다. 경찰서에 거주지를 신고하고, 가슴에 노란별을 달아야하고, 거주지밖을 이탈할 수도 없으며 저녁 이후에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진다.
브루더의 부모 역시 유태인이였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그들은 딸을 기숙학교에 넣지만 타고난 기질이 독립적이고 방탕한 그녀는 기숙학교를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녀 스스로 기숙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에 폭설까지 더해진 가혹하고 암울한 겨울. 그 겨울을 도라 브루더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어쩌면 작가는 도라 브루더와 자신을 동일시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처럼 기억 상실에 걸린 사람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회상하며 도라의 삶 역시 재조명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도 도라 브루더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는, 역사라는 커다란 그림 속에서 한 부분도 차지하지 못한 채, 조각조각 바스러졌다. 끔찍한 역사의 진실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져야 할 문서처럼 파기되었다. 그런 그녀를 파트릭 모디아노는 자신의 글로 되살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지워버리고 싶은 옛 기억(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도라와 함께, 그리고 끔찍한 역사와 함께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월이 지나도, 억만년의 세월이 지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한다. 모두가 잊더라도 나만은 기억해야 할 진실과 추억들...그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도라 브루더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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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속에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걸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도 그랬고 '작은 보석'에서도 그러하다. '도라 브루더' 역시 작가는 옛날 신문을 들추다가 1941년 12월 31일자 <파리 수아르>에서 우연히 3면 기사에 난 열다섯 살 소녀 실종기사를 읽게 된 후의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서게 된다.
파리 여자 아이를 찾습니다. 도라 브루더. 15세. 1미터 55센티미터. 갸름한 얼굴, 회갈색 눈, 회색 산책용 외투, 자주색 스웨터, 감청색 치마와 모자, 밤색 운동화. 모든 정보는 브루더 부부에게로 연락바람. 오르나노 대로 41번지, 파리
작가는 짤막하게 난 실종기사를 토대로 자신의 과거와 도라 브루더의 과거의 좌취를 따라가며 그녀가 걸었던 파리의 거리, 자신이 젊은 시절 걸었던 거리들을 다시금 걸어보며 그녀의 행적과 자신의 흔적을 함께 찾아 나선다. 1941년 1943년에 파리에 있던 유대인들은 독일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의심받고 추격을 받게 된다. 그 시기에 유대인 소년, 소녀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짐짝처럼 끌려다니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가야만 했다. 도라 브루더 역시 기숙학교에서 여러번 가출을 감행 후 길가에서 독일인들에 의해 붙잡혀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녀는 아직 생존해 있을까? 아님 많은 유대인들처럼 수용소에서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기록은 철저하게 지워졌고 그녀가, 그들이 살아왔던 흔적들은 바람에 사라져 버린 듯이 몇 조각의 짧은 문서로만 존재하게 된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그들의 슬픔 운명이었을까...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나라의 이권에 따라, 인종차별에 따라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리는 삶을 살아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을 말이다. 전쟁에 휘몰아쳤던 그들의 젊음도 희망도 고통도 모두 다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한 개인의 기록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그린 '도라 브루더'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되돌아보면 출생부터 지금까지의 삶의 문서 몇 페이지로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다 사라진 후의 기록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도라 브루더'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나치 점령시기에 실종된 어린 소녀의 기사를 보고 추적해나가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읽고 있는 중에도 읽고 난 후에도 자꾸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기억하고 있는 내 과거의 모습들이 정말 맞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몇장의 사진과 짧은 기록으로 남겨진 도라 브루더의 모습은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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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잃어버린 거리>에 이어 세번째로 만난 파트릭 모디아노.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 아닌 기록이다. 1941년 파리 스와르 신문에 실린 유태계 소녀 도라 브루더의 실종 기사를 읽고난 모디아노가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갔다.
학교에서 도주한 이후 파리를 헤맸을 도라. 그녀의 자취를 따라 파트릭 모디아노도 파리의 거리를 헤맨다. 문서의 기록을, 사진을 찾아 내기도 한다. 그러나 호송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를 향해 떠난 이후의 도라의 삶은 전혀 추적할 수 없다. 그렇게 책은 끝나버린다. 왜일까?
책을 읽고 리뷰를 쓰다보면, 다른 이들의 감상과 내 감상이 많이 다를 경우가 종종 있다. 나에게는 파트릭 모디아노가 공간과 시간, 기억의 복구에 매달리는 작가여서, 이 글을 그냥 그렇게 전작들 읽듯이 읽어치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유태인 소녀가 아우슈비츠 이후 겪은 일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작가의 사회적 책임을 들어 모디아노를 몰아 붙이고 싶지도 않다. 또한 내가 그의 문장을 읽으며, 머리에 띵하도록 와닿는 부분도, 다른 이들이 지적하는 시간과 공간, 실존에 대한 미문이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아래의 문장.
그들을 추적하여 다시 찾아내는 임무에 봉사하는 자들은 파일을 만든다. 그들을 보다 잘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실종시키도록. - 91쪽
같은 호송차로 같은 경찰서에 실려갔지만 그들은 결코 나처럼 두 발로 걸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109쪽
그러므로, 나는 도라 브루더의 추적이 파리 시가에서만 이루어지며 아우슈비츠를 고발하지 않고 모디아노의 기록이 끝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어둠의 역사 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당'했던 과거의 사실을 오히려 더욱 현실감있게 보여주기 때문에.
* 기타 생각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발표 순으로 읽고 있는데, 이 책을 처음에 읽었더라면 <어두운 상점~><잃어버린~>의 이해가 더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렴풋이 모디아노의 과거의 기억과 공간에 대한 집착이 나치가 파리를 점령한 2차대전의 경험과 관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말이다. 난 모디아노가 유태계인 것도 모르고 모디아노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고, 책 뒤의 해설을 읽고 나니, 이미 평론가들이 다 지적한 면을 나 혼자 처음 발견한 사실인양 <어두운 상점~> 리뷰쓸 때 뒷북을 치며 썼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