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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읽다 보면 영화화의 경우 이런저런 배우들이 이 인물들에 캐스팅되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상상하며 즐기는 수가 있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블랜쳇이란 배우에 대해 별 인상이 없었을 때라 '연기파고 영국식발음이 좋아(호주 출신) 발탁되었나 보다'하는 정도였다. 영화를 막상 보고 놀란 건,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여 주는 너무나도 놀라운 연기. 처음에는 메리 여왕 역의 케이시 벌크(누군지 잘 모르는 배우였음)가 펼치는 모습이 너무도 근사해서 넋을 놓고 보았는데(멋있었다는게 아니라, 확실히, 아둔하면서도 고집불통이고, 완고한 신앙 외에도 선량하게 타고난 천성 탓에 결국 이복동생을 죽이지 못한 캐릭터를 참 잘 소화했음), 엘리자베스가 드디어 나오는 대목에서는, 아직은 얼굴의 틀이 잡히지도, 별 지성미도 보이지 않았던 저 배우가 뭘 제대로 보여줄까 하는 게 첫인상이었다. 결과는 완전 뒤통수를 치는 것이어서, 그녀의 연기에는 어떤 판에 박인 스테레오타입이나 사극적 과잉연기 요소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은, 차분히 섬세하게 풀어 나가되 할 말은 다하는 식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책에서 읽기로 '어떻게 그 곤경, 난관(그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관점에서라면)을 헤쳐 나갔을까'에 대한 답을, 이성과 학문적 증명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아니 그런 번거로운 건 다 초월하겠다는 듯, 확실하고 끊김 없으며 자연스럽고 생생한 답을 비주얼로 보여 주었다. 경우에 따라(정말로 드문 경우이겠지만) 영화가 책보다 더 확실한 인스트럭션을, 높은 차원에서 보여 주는 경우가 있다는 걸 깨우쳐 준 거의 유일한 케이스였다. 신들린 연기라고 해도 좋고, 아예 그 헨리 8세의 영민했던 막내딸이 빙의한 게 아닌가 싶게, 경탄과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장면들로 가득 차 있는데, 특히 여왕이 주재하는 의회 토론 ,표결 씬은 완벽 그 자체였으며 블랜쳇의 표정, 말투, 손짓 등은 거의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꼭 한번들 보시길). 하여간 모든 캐스팅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배우들이 배치된,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해야 하며, 하나 알 수 있었던 건 영미의 배우들이 액팅 스쿨에서 얼마나 탄탄한 기본기를 배워서 나오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극은 커리큘럼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 다루는 교과라서, 이걸 시켜 보면 우연의 매력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 개인 역량이 고스란히 측정되어 나오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건데, 참 한국의 '주몽'이나 '태조왕건'따위에서 볼 수 있는 그 한심한 초딩연기들과 비교하면 너무도 수준 차이가 느껴짐을 실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고 할까. 마치 마카레나 같은 단순한 춤동작도 동네 아줌마가 하는 것과 올림픽 체조 갈라쇼에서 펼쳐지는 연기의 차이를 보는 그런 느낌. 나아가 문화의 레벨 차이를 실감할 수 있는, 대중예술이라기보다 차라리 고급 대학 교재라고 해 줘야 맞을 듯한, 영화가 아닌 일류 석학의 멀티미디어 강좌를 듣고 난 소회와도 같았다.
여담: 이 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은 그녀를 제치고 기네스 펠트로가 받았는데, 그저 분위기와 집안 덕을 보지 않았나 싶었다. 그전까지 그녀는 브래드 피트의 전여친 이상 별 존재가 없었는데 그 이후로 갑자기 주가가 상승해서 나는 항상 (목소리만 좋을 뿐이었던)그녀를 평가절하해 왔다. 생각이 바뀐 건 '아이언맨(2008)'을 본 후였는데, 척 보고 느낀 건 '전 그저 별볼일 없는 인생이었는데 여태 운이 좋았을 뿐이었던 거였어요'란 돈오(頓悟)가 느닷 새겨진 얼굴선, 표정을 보고서였다. 그런 게 멍텅구리에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니까(걍 내 느낌이 그랬다고. 그녀 같은 세계적 스타가 실제로 뭔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야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음). 여담2: 뱅상 카셀이 앙주 공으로 나오는데...(그 다음 말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그 장면들에서 나는 바로 FF누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