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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이제서야 마지막 장을 넘겼다.. ^^ <마지막 수업> 167페이지의 얇은 책이었는데, 담겨있는 내용만은 색다른 내용인것 같다. 엄마가 딸에게 "10월 17일로 정했단다." 라고 자신의 자살날짜를 알려주고, 되새기게 해주면서 죽음을 가르쳐 주는 눈물겨운 마지막 애도 수업..
어느 인디언 부족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첫눈이 내리는 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책에서 나와있다. 그 이야기가 왜 그렇게 슬프게 다가왔던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수도 없을것 같은 이야기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렇다치고. 그 자식은 슬프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도 내내 엄마가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가르쳐주고, 딸은 그것에 슬프도록 상처를 되새기게 되는데.. 엄마의 죽음에 덜 상처입히기 위한 엄마의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딸의 마음이 내내 걸렸다...
하지만 인상깊었던 점은.. 엄마의 죽음을 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그 과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구절은, 엄마의 자살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날, 엄마와 딸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가 딸에게 말한다. 자신의 자살일날 입을 잠옷으로 이것이 어떻겠냐고.. 너무 낡지는 않았냐고. 이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너무 낡았다고 생각할까? 좀 이상하겠지? 어때 보일 것 같니? 라고 딸에게 묻었을때는 정말 기분이 약간 이상하면서도, 야릇했다. 자신의 자살일에 입을 잠옷을 두고, 딸과 나누는 대화.. 이 책은 왠지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것 같다....
자유로운 여자였던 엄마에게 독립은 삶의 첫 번째 원칙이었고, 존재 이유였죠. 엄마는 나이로 인한 속박을 견딜수 없다면서, 만일 이 속박들이 엄마 외의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된다면 엄마의 존재 자체를 박탈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지요. "이해하니? 절대 너희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구나..."
"엄마, 왜 짐을 정리했어요? 엄마를 위해선가요? 아니면 우리를 위해선가요? " "둘 다지."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죽게 되면..." "그게 훨씬 좋겠지...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면서 생각한단다." "뭘 말이죠?" "모든 걸." 모든걸... 좋았던 일과 그렇지 못했던 모든 일을. 엄마는 그렇게 아흔두 해의 삶을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들여다보고, 기쁨과 고통의 순간들을 더듬어볼 수 있었던 거예요.
내가 엄마에게 물었어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죽음을 더 잘 다독일 줄 아는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그래, 네 말이 옳아, 여자는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음을 살아내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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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앞에서 초연해지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권리와는 먼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갑작스런 죽음에는 어떤 대처도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두눈 뜨고있는 시감 이 상황에서 내일 당장 죽는다는 통보를 받으면 우리는 어떤 기분일까? 아니 어떤 기분이전에 앞서 말한대로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지 모른다. 만약 누가 여러분에게 "죽음도 길들일 수 있다가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죽음을 길들인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앞에서 초연해지는 것이 아닐까? 죽음과 친밀해지고 죽음을 길들일 수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노엘 샤틀레의 <마지막 수업>은 바로 죽음을 앞둔 노모와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자와 저자의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 형식의 산문에 가깝다. 이 책 <마지막 수업>의 첫 장면은 바로 아흔두 살 노모가 사랑하는 딸에게 자신의 마지막 날을 통보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10월 17일로 정했단다" 아마 이 장면은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자살할 날을 미리 정하고......"라는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 세상을 떠나 먼 여행을 할 날을 임의로 정해놓고 딸과의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는 이야기쯤으로 해석했다. 노모는 딸에게 죽음과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홀로 등장해 자신의 앞에 놓이게 될 질곡들을 이겨내야하는 딸에게 노모는 큰 가르침을 주고 그 딸은 이렇게 회상한다.
절망의 나락 끝에서 듣는다는 게 다를 뿐. 예전에는 엄마가 딸에게 내리는 명령처럼 들렸어요. 그때는 효력이 있었죠. '두려워하지 마'는 딸의 모든 두려움을 향해 외치는 치유의 주문과도 같았어요.(23쪽)
죽음은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영원한 삶은 이 세상에서 끝이며,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삶의 이제는 자식들에게 짐이되거나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지 않길 바란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마도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든가 아니면 심적으로 외로움과 쓸쓸함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모들의 마음이다. 자식들의 삶속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부모들.죽음이라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부모의 권리이며, 떠날 시간이 되었기에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부모들이다.
엄마는 우리의 일상을 흩트리지 않길 원했어요. 아흔 두살이나 된 엄마가 어떤 권리로 너희 생활을 방해할 수 있겠니? 떠날 시간이 되어 떠나는 것뿐이란다. 그게 다야. 얘야. 그게 바로 자연의 순리란다.(33쪽)
이 책 <마지막 수업>은 이런 부모자식간에,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와 딸 사이에 절대적인 시간을 정해놓고 대화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그리면서 살아가는 모녀간의 따뜻하고 애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울지마라,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하는 엄마앞에서 세상 모든 것에 용기있기 맞서는 법을 배웠다는 주인공, 즉 저자의 이야기다. 엄마와 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단호하다. 특히 엄마는 젊은 시절 투쟁해왔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죽을 권리'를 선택한 것이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포크 잡는 법을 일러주고 , 만년필로 글자쓰는 법을 알려주었듯이 이제 죽음도 평범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딸이 엄마의 죽음과 친밀해지고 익숙해지기를 바라며, "죽음은 길들일 수 있는 거란다"라고 속삭인다. 아무래도 이 부분이 즉 '죽음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은 자신이 개척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에 귀결된다.
엄마의 선언 앞에 때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 때때로 내비쳤던 강인함은 어쩌면 어릴 때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된게 아니었을까요.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끝까지 엄마의 뒤를 따라가며 견뎌야 했던 마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어요. 어린 소녀가 품었던 성스럽기까지 한 신뢰를 배반하지 않고 따라가야 했으니까요. 어릴 적 자아를 배반할 수 없는 없는 법이잖아요.(45쪽)
이 책 <마지막 수업>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문학에 대한 또 한번의 놀라음을 발겨할 수 있었다. 예전 프랑스문학을 접했을 때 이 같은 책을 두권이나 접한 적이 있다. 두권 모두 '어머니'를 주제로 한 책이었다. 사랑, 낭만, 웃음 등으로 점철될줄 알았던 프랑스 문학에서 이러첨 부자, 또는 모자, 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의외로 많았다. 저자는 물론 프랑스문학 전반에 깔려 있는 이런 감수성 예민한 모습들이 참 아련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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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작은 책, 부담없이 펼쳤다. 하지만 다 읽어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차례, 이런 작품은 처음이다. 르노도상을 수상했다더니 그 수상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분히 실험적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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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까지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이 없다. 30대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내가 없다면 저 아이들 불쌍해서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한 분 두분 죽음을 맞이하는걸 보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아흔 두살의 엄마는 어느 날,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책은 시작된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때문에, 멀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 수 있는것인데,어느 날 갑자기 그런 선전포고를 듣고 그 날을 기다려야 한다면 과연 어떨까? 그것도 자신의 엄마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결정 짓는 경계선에서,후회없이 떠나고 싶어하는 엄마. 엄마의 뜻을 받아들이고,엄마와의 추억을 더듬고 삶을 짚어 나가는 딸의 모습이 애잔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나에겐 아흔 두살의 시 외할머니가 계신다.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맑으셔서 오래 오래 사실거라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새해가 되면 꼭 하시는 말씀이 있다. <올해는 약 먹고 죽을끼다.> 우리는 그냥 농담으로 받아 넘기지만,할머니는 그 말씀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계실까? 딸 집에 계시는것이 마음이 불편하셔서일까?
죽음을 선택하는 소설 속 엄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위해서,자신의 해방을 위해서라고 말씀은 하시지만 거기에 따르는 고통도 만만치 않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걸 받아들여야하는 딸의 마음도......
한발자국 잘못 내딛으면,삶과 죽음이 나뉜다. 난 아직 소설속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겐 정말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삶이기에. 하지만,어느 순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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