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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이유의 억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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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의 지도교수님이신 유기환 교수님의 번역에 경의를 표합니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과 사디즘과 죽음과의 관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앞부분은 에로티즘과 종교와 죽음과의 관계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추적하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유럽 회화의 역사를 훑어내려 가면서 자신의 이론을 적용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근본은 철학적이라고 생각된다. 철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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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의 지도교수님이신 유기환 교수님의 번역에 경의를 표합니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과 사디즘과 죽음과의 관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앞부분은 에로티즘과 종교와 죽음과의 관계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추적하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유럽 회화의 역사를 훑어내려 가면서 자신의 이론을 적용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근본은 철학적이라고 생각된다. 철학이란 본래 가설로 세워진 사고의 틀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바, 바타이유의 철학도 일종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섹스를 “작은 죽음(la petite mort : 프랑스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부른단다)”이라 부르는 것, 에로티즘의 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 금기는 유예된 욕망에 다름없다는 것에는 물론 나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런데 중국 ‘백각형’의 사진을 논하면서, 그 희생자의 표정이 황홀에 차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희생자는 일종의 공포에 의한 황홀을 맛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억지 논리이다. 그는 종교에서 제시한 금기란 본래 위반을 전제로 하고 있고, 신성함에 대한 공포에서 종교가 생겨났으며, 부두교의 공희나 백각형에서 보이는 새도매저키스틱한 황홀은 공포에 대한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닉 버그와 김선일씨의 죽음을 바타이유 식으로 설명해보자. 닉 버그도 그의 식도와 성대 속으로 식칼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 이슬람교에 대한 신성한 공포와 알 카에다 요원들의 폭력적인 태도에 대한 매저키스틱한 황홀감을 느끼면서 죽어갔을까? 바타이유가 아직 살아있어서 닉 버그와 김선일씨의 참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면, 자신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그 동영상을 인용하게 될까? 나는 정말 바타이유에게 묻고 싶다.
s******0 2004.10.2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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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의 역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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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이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의 기원은 신석기 시대의 라스꼬 벽화에서부터 출발한다. 방금 사람이 던진 창에 맞은 짐승 앞에서 새의 머리를 하고 발기한 남근을 가진 남자가 죽어가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동물을 살해함으로써 삶을 연명할 수 있었던 인간이 동물에게 갖는 죄의식이 자신의 죽음을 그림 안에 표현하게 했다는 것인데 이때 바타이유가 주목한 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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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이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의 기원은 신석기 시대의 라스꼬 벽화에서부터 출발한다. 방금 사람이 던진 창에 맞은 짐승 앞에서 새의 머리를 하고 발기한 남근을 가진 남자가 죽어가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동물을 살해함으로써 삶을 연명할 수 있었던 인간이 동물에게 갖는 죄의식이 자신의 죽음을 그림 안에 표현하게 했다는 것인데 이때 바타이유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죽어가던 사람의 '발기한 남근'이다. 이것은 당시의 인류가 성적 행위를 통해 느끼는 '황홀경'과 '죽음'을 가깝게 여겼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것으로 보았을 때 '에로티즘'에 대한 인식이 신석기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존재했을지 모르나 그것을 증명하는 역사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듯 하다.)



라스꼬 동굴벽화



인간의 '성'은 인류가 남긴 많은 예술활동을 통해 기록되고 표현되어 왔으나 그것이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에 의해서부터였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부터 생산을 위한 '성'은 신성한 것이 되지만 '쾌락'을 위한 '성'은 저속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그래서 - 어찌 보면 좀 억지스러운 이분법에 의해- 전자는 생명과 연결되고 후자는 (또다시) 죽음과 연결된다. 이후 이 책은 인류가 남긴 많은 예술작품 속에 드러난 '죽음'과 '육체'를 열거하며 인간의 에로티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우리가 잘 아는 '뒤러'와 '루벤스', '고야' 등을 거쳐 '중국의 사형수' 사진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이미지 자료들이 나열되어 있다.) 

결국 바타이유는 -비록 미술이라는 한정된 장르를 통해서만 바라본 '에로티즘'의 흔적이긴 하지만) '에로티즘'은 단순히 성행위와 관련된 어떤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사회의 인습을 뛰어넘는, '금기'에 저항하는 모든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내가 말하는 화가들의 본질적 특징은 인습을 증오한다는 데 있다. 오직 그 점만이 그들로 하여금 에로티즘의 열기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 나는 지금 에로티즘이 끌어내는 숨막히는 열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내가 말하는 그림은 끓고 있다. 그것은 살고 있다... 그것은 불타고 있다... 나는 판단, 분류 등이 요구하는 냉정과 더불어서는 그 그림에 대해 말할 수 없다..."


p. 18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이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이미지들이 '악마적'이라고 느낀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나역시 근대 이후 각종 사회적 관습과 윤리 체제에 물들어 있으며 지나치게 정상적인 정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잔혹한 이미지의 '사형수의 황홀경' 대목에 이르러서는 죽음 앞에 직면하는 순간 폭발하는 감정과 무의식 상태인 '열반(nirvana)'이 거의 '공포'와 '폭력'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책에도 나와있듯 "고통이 고통이 아니기 위해서는, 죽음이 죽음의 공포가 아니기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은 현실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에로티즘의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하지 않던가. '죽음'에 너무 가까이, 진지하게 다가서지 않되 사회 안에서 나를 구속하는 것들에 대한 관습, 통념에 저항하는 인식을 가져보고자 하는 '에너지'와 '상상력' 정도로 '에로티즘'을 수용해 보고자 한다면 그건 바타이유와 사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못난' 독자의 모습일까. 


그들이 뭐라고 하든 난 그저 한낱 '낭만주의자'에 불과하니까. ;;



Femmes damness (MASSON Andre 1922)



+ 좀더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에로티즘'에 대한 이해를 기록해 두자. 바타이유는 '천국'이 기독교가 조작한 상업적 이미지라고 매도하는 한편, 동양에서 말하는 '열반'은 육체적 생명의 소멸 상태이자 '작은 죽음(오르가즘)'에 가까운, 훨씬 인간적인 사상이라고 평한다. 쇼펜하우어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에로티즘'이라면 '에로티즘'은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유한적 삶을 한 차원 벗어나게 만드는 어떤 정신적 경지를 열망하는 상태를 말하는, 굉장히 '광의적' 의미를 가진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 용어가 성적 욕망에 연결된다면, 그것은 과장을 원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나 그럴 것이다." 

P.186 '마니에리슴'에 대한 설명 중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 가닿을 수 없는 차원(죽음)에 대한 상상과 지적 호기심은 왜 항상 뒤틀린 이미지를 동반하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을 갖고 있는 나는 역시 근대 정신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인가... ㅡㅡ;)


+++ 마무리가 약하다. 이 책. 바타이유가 건강이 쇠약해져서인지, 시대적 상황의 한계 때문인지, 바타이유가 원래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인 건지. 뭐 꼭 반드시 결론을 내야 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아, 역시 난 너무 고리타분한 정규 교육의 수혜자... ;;) 




 

s*****e 2014.03.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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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죽음의 그 기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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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따이유의 글은 참으로 묘한 매력을 지녔다. 결코 쉽지 않은 책이건만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의 전 저서를 통하여 일관되게 에로스 속에 숨겨진 ‘작은 죽음’을 거론하면서 그는 에로스와 죽음의 기묘한 만남을 성취해내고, 이를 통해 철학적 사유 속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던 성의 역사를 다시금 작성하고자 한다. 이것이 푸코가 그를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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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따이유의 글은 참으로 묘한 매력을 지녔다. 결코 쉽지 않은 책이건만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의 전 저서를 통하여 일관되게 에로스 속에 숨겨진 ‘작은 죽음’을 거론하면서 그는 에로스와 죽음의 기묘한 만남을 성취해내고, 이를 통해 철학적 사유 속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던 성의 역사를 다시금 작성하고자 한다. 이것이 푸코가 그를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치켜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인 <에로티즘>에서도 그의 직관을 효과적으로 떠받치는 철저한 고증을 앞세워 논의를 전개시켰던 것처럼, 이 저서에서도 바따이유는 책의 반 이상을 서양 회화를 곁들이면서 자신의 논의를 좀더 과학화 한다. 또한 이 책은 <에로티즘>보다 더욱 압축적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기에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시화집을 읽은 듯한 느낌이다. 그는 이 책에서도 여체의 나신상과 그림 속에 오묘하게 둘러쳐진 베일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그가 그토록 추구하고자 했던 금단의 열매을 따먹으려는 듯이 말이다. 바따이유는 이러한 금기 위반을 통해서 노동과 기독교적 공리주의 속에서 종교성을 상실한 성에 대해 그 종교적 신성성을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의 지적처럼 신성한이라는 단어의 sacred라는 음절들은 “고뇌로 가득 차 있고, 이 음절들에 가리워진 무게는 공희 sacrifice에 있어 죽음의 무게 바로 그것”(p.63)이며, 작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에로티즘은 그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 즉 공포의 전율이다. 이 때 바따이유의 말처럼 위반함으로써 유지되는 종교의 성격을 복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과잉이요, 희생이요, 축제인데, 그 절정에는 황홀경”(p.70)이 있으니까 말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i******o 2002.12.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