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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인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갖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가치명제와는 다르게 타고난 '조국'은 사실명제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서경식은 이 두 나라에 속하면서도 두 나라 모두에서 '주변'과 '경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도구가 바로 글쓰기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객관하여 바라보는 것, 그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디아스포라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갔던 두 형들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자 저자의 정체성은 더욱 혼미해진다. 일본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고 있던 저자에게 형들에게 내려진 무기징역과 징역 7년의 의미는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시도를 하게 한 신호탄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프레임의 역사를 새롭게 그려야 한다. 저자는 '동아시아'란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 전쟁 혹은 식민지 지매를 했던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는 없다. 따라서,일본은 근현대사에서 대외 침략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도 없기에 동아시아와 함께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저자는 시가 시대와 궤를 같이하여 왔다는 방증으로 시와 현대사를 반추한다.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 시들은 김수영의 [고궁을 나오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와 같은 저항시들이었고 글쟁이로서의 숙명을 깨우쳐 주었던 시인들이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산이라는 현실에서 저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 그것은 글쓰기였다.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지배층의 이야기에 대한 , 재일조선인이라는 마이너리티 입장의 대항적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넓은 강과 호수에 둘러싸여 살던 조선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여 있는 물이 되었다.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남겨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였던 저자는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밝히듯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붕어의 간절함으로 글을 써왔다고 한다. 루쉰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비평을 통해 저자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보았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시대의 힘이자 '시'가 가진 본질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3부 <조선의 시인들>은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더라고 결코 평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식민지 탄압에서도 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고 저항시를 쓴 시인들- 이상화, 윤동주, 김지하-에 이어 2000년대의 정희성까지 시에 담긴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은 침묵해서는 안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아스포라와 연대할 수 있는 감성의 토대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해 줄 수 있는 단초이다.
디아스포라는 말에는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재일조선인을 설명하려면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한 페이지였던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민족의 비극은 조국 분단과 민족 이산이라는 디아스포라들의 탄생이었다. 저자는 역사가 낳은 민족 이산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 전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며 근대사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권고한다.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일본인들이 지향해야 할 점등을 문학에서 찾는 시도가 무척 신선했던 비평집이다. 역사와 문학을 외올실로 엮은 서경식만의 에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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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방인이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죽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그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그는 경계 위에 사는 자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경계다. 그는 서 있는 그 곳에서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이 맞부딪힌다. 국가는 평평한 대지다. 고정되고 동일한 정체성이라는 롤러로 밀어버린 포장도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 외국인은 언덕 혹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내리누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빈틈이 되어 균질된 국가에 불균질을 가져온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하나의 인위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힌다. 외국인이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란 존재로 인해 국가가 재정립 되기에 그렇다. 외국인의 정체성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힘은 거꾸로 흐른다. 국가는 외국인에 대한 반정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세공해 나간다. 외국인에겐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뽑도록 강제하면서 거꾸로 국가 자신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 한다. 자기 정체성의 부유함을 위해 외국인을 흡혈하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게 외국인은 더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반대 명제로써 차용해야 할 특수한 맥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외국인이 가진 존재 본연의 모습이 어떤 지에 대해선 국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누가 되었던 외국인은 국가에게 그저 백지다. 그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쓰기가 가능한, 인위적으로 산출되는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국인은 문학이다.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존재 규정이 주로 증언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통신사의 증언으로, 미국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증언으로 우리에게 도래했다. 그와 똑같이 중국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허다한 선교사들의 증언으로 유럽에 소개 되었다. 돌연한 외국인과의 첫 만남은 먼저 텍스트의 매개, 즉 문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외국인은 문학으로 존재한다. 문학이 허구의 생산물이라고 한다면 외국인도 그러하다. 본질은 상관 없다. 그런 외국인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시를 썼다. 열 다섯의 나이였다.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했던 곳을 방문한 뒤다. 고향의 실체를 움켜쥐고 싶어서 떠난 여정이었다. 거기는 일본에 의해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늘 뭔가 모자란 존재감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충만한 존재감을 주리라 기대되던 곳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증언자'가 되려 했다. 존재 본연의 모습을 헤아리려는 노력 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단편의 인상만을 말할 뿐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항해 그들이 외국인으로 규정하는 타자 본연의 모습은 어떠한 지를 증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에 문학으로 대항한 셈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나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란 존재자에게 은폐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그것이 그의 시였다. 시란 고유한 존재의 증명, 국가에 의해 탈취된 존재의 회복이었다. 그러한 시 앞에서 외국인을 만들고 그 경계가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는 국가는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공선'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고바야시 다키지가 1933년 2월 20일,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을 때 중국의 루쉰은 적국 일본의 사람이었던 그를 서슴없이 '동지'라 불렀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 안내'란 책에서 루쉰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고바야시 다키기자 1933년 2월에 살해되었을 때, 루쉰은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 고바야시 다키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일본과 지나의 대중은 원래부터 형제이다. 자산 계급은 대중을 속여 그 피로 경계를 그었으며, 또한 지금도 긋고 있다. 그러나 무산 계급과 그 선구자들은 피로 그것을 씻어내고 있다. 동지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 실증의 하나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히 동지 고바야시의 혈로를 따라 전진하여 손을 맞잡을 것이다. 루쉰" (p. 100) 루쉰에게 다키지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국적은 아무 의미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같은 신념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 뿐이었다. 루쉰에게도, 다키지에게도 시가 있었다. 그도 결국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통해 자신이 싸워야 할 현장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편의 개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편으로 여겼던 것은 특정 체제와 국가가 중심이 된, 사실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것이 고통을 가져온다면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권력 아래 가둬둔다면 이제 우리는 다른 특수를 찾아야 하고 그 특수가 보편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세계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석권하고 있는 와중에 인간 해방을 위한 대안이 없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쪽의 세계적 보편성을 찾아야만 한다. 이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세계문학에 요구해야 할 보편성이다. (p. 166) 사실 특수와 보편이 생각만큼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이란 존재가 자의적이듯, 보편과 특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선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은 누군가 명확히 금긋기를 하고 있던 탓이다. 그 금긋기가 국가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국적 때문에 서로 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가없이 자의적임이 밝혀진 이상, 서로를 나와 다른 얼굴로 여길 필요는 없어졌다. 재일 조선인인인 나,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는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 우리는 서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쉽게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 근대 식민주의자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인 이상, 식민지주의와의 부단한 투쟁 과정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 만나고,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향해 자기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보편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167) 시는 국가를 분쇄한다. 그들이 나누는 인위적인 경계, 그리하여 디아스포라를 자유가 아니라 결핍으로 만드는 모든 획책을 허문다. 시는 모두를 외국인으로 만든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불균질의 영토로, 그 자신이 저항의 거점이 되도록 호명한다. 요즘들어 갑자기 애국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애국이란 말이 사용되는 것은 대부분 국가가 국민에게 뭔가 요구할 때이다. 최근엔 애국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 피크제를 수용하라고 한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렵고 물가는 올라서 쓸 돈이 적은데 이제 노동자더러 보장되지 않는 정년과 갈수록 적어지는 임금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애국은 늘 약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에게만 강요되는 것일까? 왜 재벌에겐 애국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일까? 애국이라는 게 이토록 일방적이라면 도대체 애국의 대상이 되는 국가는 무엇일까?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마우리치오 비롤리는 패트리어티즘과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패트리어티즘은 몇 세기에 걸쳐 하나의 집단 공동의 자유를 지탱하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 요컨대 공화정 전체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거나 환기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국민의 문화적, 언어적, 민족적 통일성과 동질성을 옹호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공화주의 패트리어티즘의 적이 폭정이나 독재정치, 억압과 부패였던 것에 반해 내셔널리즘의 적은 타문화에 의한 자문화 오염, 이종 잡교, 인종적 불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지적 불통일이다.(p. 257) 그들의 애국은 패트리어티즘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인 애국, 즉 패트리어티즘엔 보다시피 국가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소수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부르조아의 집행위원회(최근 대법원의 한명숙 판결은 지금의 국가가 이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으로써의 국가는 없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러한 패트리어티즘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시는 국가만이 전유하고 있던 문학적 쓰기에 수많은 가필로 그 언어와 용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저자가 어머니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다. 처음에 그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다. 하지만 시로 인해 현상이 아니라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의 문맹이 일본 식민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결과였음을 받아들인다.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역사나 사회구조의 반영'(p.182)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무려 네 개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젠더(가부장제), 경제(빈곤), 민족(식민지 지배), 정치였다. 장벽이 무려 네 개나 되었으니 그녀는 정말로 갇힌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굴하지 않는다. 설령 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두 아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조국에서 수형자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승복하지 않고 탈주와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일본에는 '다노모시코'라는 재일 조선인만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일본 국가의 권력을 교란시키며 한국에서는 비전향범의 어머니라는 신분이 국가 권력과 맞서게 한다. 국가화의 산물인 언어는 몰랐지만 오히려 비언어가 줄 수 있는 더 큰 자유로 권력이 만든 모든 장벽을 초월한 어머니는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머니와 같은 존재(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언설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께름칙함에 시달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어머니는 이러한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받고 지식을 몸에 익힌 다음, 그 필터를 통해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상대에게, 특권을 지니고 있기에 갖게 된 권력을 자각하게 만들었달까. 나아가 그 특권을 지닌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겸허하게 응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어머니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p. 194) 아마도 그 겸허한 응시가 '시의 힘'이 최종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 힘은 우리 모두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파리아'로 만드려 한다. 파리아는 원래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회, 제도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킨다. 모두가 파리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시의 힘은 그것을 갈구하며 그가 쓴 책, '시의 힘'은 그 갈구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서경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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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갖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며 언제까지 연연해할 거냐고.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그의
소망은 비근한 것이고 내 소망은 아득한 것일뿐. (중략)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고향」
흔히 루쉰의 이 문장은 희망, 혹은 미래에 대한 낙관을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된다. 그러나 서경식은 나카노 시게하루를 인용하며서 이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루쉰의 이 문장(강조는 글쓴이)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은
없지만 걷는 수밖에 없으니, 걸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고 서경식은 강조한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 것, 이것은 기실 절망이요 암흑이지만, 루쉰은 이것이야 말로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나카노
시게하루는 이러한 루쉰의 태도를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부른다.
거기에 거의
서정시 형태로 된 그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 있었다. (중략) 루쉰의
문학이 문학으로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러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에 있다.
이것이 서경식이 이 책에 ‘시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시에는 힘이 있을까 ” “문학에 힘이 있을까 ”라는 질문 앞에서 서경식은 루쉰의 이 문장으로 답을 하는 셈인데, 인간을 끝없이 비인간화하는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시와
문학의 힘이라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인가?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 것, 요컨대 승산의 유무나 유효성, 효율성 같은 원리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즉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 그것이 바로 시이며, 시의 힘이다.
절망 밖에 읽을 수 없는 루쉰의 문장에서
희망을 읽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누구보다
예민하게 식민지주의와 조국의 분단, 민족의 이산 문제에 천착했던 서경식은 자신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1930년대 중국 해방 운동에 헌신했던 루쉰과, 1950년대
루쉰에게서 깊은 위로와 격려를 받은 일본 작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문장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고 어떻게 힘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이 나라에서 ‘돌멩이를 움켜쥐듯이’
쓰인 수많은 시—한용운, 이상화, 윤동주, 김수영, 김지하, 정희성, 양성우, 박노해의—들이 자신에게 가졌던 의미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이러한 시들은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는 것이 서경식의 주장이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시이며, 이렇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시의 작용이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떤 구제책이 될 수 있을지 내내 자문하던 서경식은 끝내 이렇게 자답한다.
“시에는 힘이 있을까?”라는 질문은 시인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것이며, 시에 힘을 부여할지 여부 역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고, 시의
힘을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 싶다고 밝힌다.
부정의가 이기고 있기에 정의에 관해 묻고, 허위로 뒤덮여 있기에 진실을
말하려고 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이며, 이것이야 말로
절망의 시대를 구원하는 시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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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본지 오래 되었습니다. 혁명의 시기, 투쟁의 시기에 온 몸에 들어와 세포 하나 하나를 깨우던 언어들의 생동감. 온 몸을 울리던 전율의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제 몸의 세포들은 기억 속에 그 단어들을 숨기고 있었나 봅니다. 여기에 소개된 '타는 목마름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별 헤는 밤', '서시', '노동의 새벽',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의 시를 되새기는 동안 제 마음이 예전의 그뜨거움으로 채워지는 걸 느낍니다. 아마도 시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저자가 경계인의 위치에서 방황하던 시기에 쓴 시들에서 힘겨운 시기를 살아가는 그의 고민과 열정이 느껴집니다. 남북으로 갈린 조국에도 속할 수 없고,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도 속하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그가 가진 냉철함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국가가 아니라 혹은 사회가 아니라 나와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국경이나 인종을 초월하여 혹은 시간마저 넘어서서 연대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생각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으로 해서 그가 갖는 균형감은, 이미 한쪽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제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자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올 3월에 시사IN 인터뷰 기사가 있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하는 내용입니다. ------------------------------------------------------------------------------------------- 시사IN 인터뷰(2016.3.16) 서경식 “희망을 말하는 자를 의심하라”후쿠시마, 세월호, ‘위안부’ 문제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권력은 망각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걸 잘 안다. 서경식 교수는 기억의 투쟁이 권력투쟁의 핵심이라고 말했다.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서경식 도쿄 경제대학 교수(65)의 어린 시절 주된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위태로움·불안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다. 영어수업 시간에 ‘I am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우다가, 한 명씩 따라 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긴장이 고조되어 입을 열지 못하다 겨우 “하지만 저는 일본인이 아니라…”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그에게 ‘국민’이라는 존재의 명징함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서 교수는 다수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에 저항하고 그것의 본질을 끝까지 추궁했다. 사회적 소외와 고통에 대한 연대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기록한 책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경계에서 만나다> <언어의 감옥에서> <디아스포라 기행>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등 30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시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지 사유한 책 <시의 힘>은 지난해 ‘작가들이 사랑한 2015년 올해의 책(한국작가회의)’으로 선정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살고 외국어인 일본어로 글 쓰는 사람을 국내 작가가 동료로 인정해줬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라는 그의 소감에서도 ‘경계인’을 느낄 수 있다.
지난 2월 말, 일본 외무성이 서울에서 후쿠시마 피해 지역 생산물을 홍보하고 판매하려다 시민의 저항에 부딪혀 취소했다. ‘후쿠시마는 안전하다’는 선전이 경계를 넘는다. 재앙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언제나 ‘기억할 것’을 강조해왔다.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다. 결국 질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역사는 비극적이다? 1966년 고등학생 때 이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뭐라고 생각하나? ‘12·28 위안부 합의’와 박유하 교수에 대한 논란을 어떻게 지켜봤나.
후쿠시마, 세월호, ‘위안부’ 문제의 공통점이 있나? 비주류의 삶에서는, 주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보인다고 했다. 소수자를 인식하는 일은 불안을 마주하는 일일 테다. 소수자로서 경계해야 할 일이 있나? 서 교수는 ‘성공’한 재일조선인인가? 본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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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새로 나오는 책을 다 만나지 못하지만 우연히 어떤 책이 나오는지 보기도 한다. 제목을 보고 마음에 들면 어떤 책일까 조금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몇해 전부터 시를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선지, 많은 사람이 나처럼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선지 시를 말하는 책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얼마 전에도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을 보았다. 그 책과 이 책 좀 다르다. 이 책 제목이 《시의 힘》이어서 그 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이 글을 쓴 서경식이 재일교포라는 것만 알고 다른 건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미술 이야기도 써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했는지도. 책은 못 봤지만 다른 책 제목은 결코 부드럽지 않은데 왜 그랬을까. 내가 시를 그런 것만 보려 해선지도 모르겠다. 변명한다면 지금은 모두와 함께 싸워야 할 커다란 무엇이 없어서다. 아니 있는데 내가 잘 못 보는 거겠지. 나는 단순하게 살지만 그게 내 삶이다. 지금은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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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봐서는 전문 문학서적인줄 알았다. 과연 시에게 어떤 강력한 힘이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디아스포라(이산민)라는 독특한 위치에 존재한 학자로써 그의 눈으로 바라본 시와 문학은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이미 문필가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내에서도 이미 알려진 저명인이지만 나의 무지한 탓으로 이렇게 늦게나마 책으로 만날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첫 문학 에세이라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부모님에 의해 어쩔수 없이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재일동포로써의 삶속에서 오히려 더 한국인다운 필체로 읽는이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감동을 더해준다. 두형은 조국을 더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70,80년대의 군부시대였던 탓에 오히려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고 만다. 아직도 나라에 대한 정체성도 제대로 확립되자 않은 상태하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에 놀라워하고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중일전쟁, 러일전쟁, 일제강점기등 어두운 역사속에 쓰여진 글들에 작가는 반응한다. 특히 중국의 루쉰에 가장 감동을 했고 윤동주, 이상화, 한용운등 저항시인들의 시와 더불어 시인들에 대한 부연 설명까지... 더 나아가 김지하, 박노해시인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던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나라 시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본내의 시인들까지 다루며 그 어둠의 시대를 지탱해줄수 있던 시들을 보듬어 준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의 정체성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모국어와 모국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경계선은 과연 어디까지 인지... 일제 강점기와 전쟁중에 저질러놓은 일본의 만행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으며 아직도 반성할줄 모르는 일본의 행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견주어 가며 분석해준다.
또한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시가 주는 힘이 어떤것인지를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주고 거기에 부응하는 시인들을 함께 열거해준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후를 거쳐 군부독재에 이르기 까지, 그때마다 등장하는 저항시들... 원전사고에 관련된 일들,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등등... 특히 어머님의 뒤늦은 글배움으로 인한 한국전반적인 여성차별과 시대적 상황의 피해에 대해 너무도 실감나게 전달이 된다. 과연 글이라는것이 무엇인지 말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전달이라는것이 무엇인지... 결론적으로 문학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재일한국인으로써 오히려 더 편견없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8월15일 광복절을 앞두고 그 시대적 시와 시인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 이었다. 오늘부터 할일은 이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글을 찾아보는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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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시와 친하지 않아 고군분투 읽힐 거라 생각하고 붙든 책이었는데 지루하지 않고 단번에 끝까지 읽어내려갈 정도로 책 주제라든지 저자의 문체에 반했네요.
재일조선인 2세로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온 서경식 저자의 책 <시의 힘>. 요즘 세대에게는 재일조선인이라는 말 자체도 낯설듯 합니다. 이 책은 재일조선인의 삶을 사는 그에게 시와 문학이 어떻게 단단한 자아를 형성시켰는지, 그의 경험을 토대로 시와 문학의 역할을 이야기합니다. 80년 전의 루쉰, 60년 전의 나카노 시게하루, 그 외 한국의 시인들이 남긴 시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구제책이 될 수 있을지를 알려줍니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설명하는 글에서는 그의 자의식 성장 과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고3 때 필명으로 자비 출판한 시집 「8월」에는 1960년대 재일조선인의 정신사를 알 수 있는 시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일본어로 한국이라는 조국을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와 모국어로 쓰기엔 너무 일본인이라 양자 사이의 경계에서 재일조선인만의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게다가 한국 유학을 갔던 두 형이 정치범으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조선의 평화통일을 위해 스스로 도약을 원하지만, 맘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일본에서 한국시인들의 저작물을 읽으며 민족 문학과의 만남 이후 그에게 시와 문학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저항의 무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자아 탐구 자세가 보입니다. 자의식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말이지요. 그는 일본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재일조선인이라는 소수자 입장의 대항적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 인간은 승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가 이기고 있기에 정의에 관해 묻고, 허위로 뒤덮여 있기에 진실을 말하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자로서 가져야 할 도덕의 이상적 모습이다. 』 - p55
일본 국민의 사고방식, 일본 현 정권의 모습을 이야기할 땐 속이 터지기도 했네요. 동아시아 근대사에 대한 엄청난 시각차를 보여줍니다. 메이지유신 이래 청일, 러일 전쟁부터 이어진 침략사와 그로 인해 추진된 근대화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이 없었던 일본이잖아요. 윤동주의 시가 일본에서는 어떻게 인기를 얻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도 화가 치밀더군요. 일본에서 조선의 시인을 이해하려면 고통, 고뇌, 굴욕을 생략하지 말아야 하건만 윤동주의 시는 그저 감미로운 서정시로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합니다. 게다가 문화적 식민지주의 심성의 고의 번역으로 의미를 퇴색시켜 안타깝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한국인도 크게 다를 바는 없을 겁니다. 이제는 잊히고 있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먼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여기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서경식 저자는 중국 시인 루쉰과 여러 민족 시인을 소개합니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시를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정치와 문학의 결합이 돋보였던 루쉰과 조선인으로서 근대적 자아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이상화 시인 이야기가 특히 인상 깊었어요.
그들의 시를 통해 서경식 저자는 시와 문학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바로 시와 문학의 역할이라고요.
그런 시는 차곡차곡 쌓여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고 합니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와 문학은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거죠.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인 겁니다.
『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 』 - p155
동아시아 근대사의 역사관과 관련한 시와 문학의 힘을 이야기하는 책 <시의 힘>.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새겨들을만한 말이 많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삶을 살며 겪은 자의식 변화와 성장을 통해 시와 문학의 힘은 바로 우리를 끝없이 비인간화하는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합니다. 사회적 의제를 다루면서도 쉽게 읽히는 책을 만났습니다. <시의 힘>을 읽는 내내 그가 쓴 다른 책도 꼭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 있는 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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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시의 힘>, 시… 그 구원의 힘 Written by. DdAm* 책<시의 힘>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사상가인 서경식의 에세이다. '시의 힘'이라는 제목 때문에 나는 꽤나 감성적인, 수채화를 닮은 듯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책을 편 후 나는 이 책의 제목에서 '힘'이라는 단어가 더욱 또렷이 다가왔다.
이 책은 시대상황이 많이 반영돼 있다. 재일조선인인 저자의 삶은 상상 그 이상으로 잔혹했다(복수의 아이덴티티를 끌어안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야말로 분열된 상태다. 그 복수의 아이덴티티가 서로 대립하는 것일 때 자기 분열의 고통은 한층 심해질 것이 뻔하다. 구 식민지에서 시작된 디아스포라는 누구나 이러한 자기 분열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 p. 54)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지내온 저자는 고립과 패배로 점철된 현실 위에서 자신을 위로해줬던 '시의 힘'을 설파한다. 이 책은 철저히 저자 개인의 삶이 배어있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개인과 사회를 진단하고 나아가 문학의 힘까지 덧붙인다. 한마디로 '무게 있는 에세이'다. 그저 좋게 좋게 흘러내려가기보다는, 반성하고 진단하고 파헤치는 걸 겁내지 않는 이 저자의 책은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책이 전하는 '시의 힘'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허위와 부정의가 뒤덮여있는 현실이지만 신념과 진실을 향한 외침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무너질 수 있는 정의로운 신념자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 '시의 힘'이라고 말한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p. 110)." 그에게 있어 '진정한 시'란, 비록 현실이 패배로 향할 걸 알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는 운명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외침'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 외침이 실질적인 결과를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고립자·패자들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렇다. 우리는 문학을 포함한 예술을 통해 위로받을 때가 많다. 공감의 창구가 없을 땐,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작품을 찾을 때가 많다. 문학의, 예술의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비단 <시의 힘>에서는 시들이 주인공이지만, 나는 이 책이 비단 시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 에술 전반계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인들은 그의 '일'을 통해 사람을, 시대를 구원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문체는 다소 냉소적이다. 나이 지긋한 대학교수라는 이미지가 문체에도 고스란히 배어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길 끝에는 '따스함'이 배어있다. 다분히 인간적이다. 자신의 과거사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반성하고, 겪어왔던, 그리고 지금 서 있는 환경에 대해서도 냉철한 판단을 한 점에 있어서는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일' 또한 문학의 힘(이렇게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도 문학이 지닌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p. 25.)이라 강조한 저자는, 그 힘을 제대로 확인시켜준다. 책에는, 윤동주, 신동엽, 김지하, 신경림 등 '국내 시대 시인'들의 작품들과 저자의 (고백이 담긴) 시들이 소개돼 있다. 그 시들을 감상하며 근현대사를 짚어보는 것도 책<시의 힘>이 지닌 여느 문학 에세이와는 '차별적인 힘'이다. 여전히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산이라는 아픔 위에 놓인 우리들에게 이 책은 충분하 위로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 p. 110~111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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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을 넘어서 연민의 정까지 느끼게 하는 기형도의 시, 발람함 속에 감춰진 슬픔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신현림의 시, 시골소년의 순수함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는 김용택의 시...짧은 문장 속에서 강렬한 느낌을 주고, 그 느낌을 되새김질하면서 얻은 영감을 곱씹을 수 있다는 게 시가 주는 매력이자 본인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다. 많은 시인의 시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절망의 메시지가 좋고, 마지막에 가서 내 마음을 흔드는 울림이 좋다. ‘즐거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슬픔이나 공허함은 숨긴 채 행복하게 노래하는 삐에로를 보면 시인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의 몸속에선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데 갈 조국은 없고, 말하고 싶은데 그의 말을 들어줄 상대가 없다. 저 바다만 건나면 갈 수 있는 곳을 그는 갈 수 없다. 내 조국을 총과 칼로 짓밟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고통 또한 그가 짊어지고 가야할 역사이고, 삶이다. 재일조선인의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을 서경식 시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책의 글들엔 이산(離散)의 아픔을 간직한 디아스포라의 슬픔도 있고, 조국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마음도 들어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늬만 조선인이라는 슬픔을 간직하면서 살아온 그를 지탱해준 것은 시와 문학이었다. 시를 통해 저항했고, 시를 통해 그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리움이 《시의 힘》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루쉰의 절망에 가득찬 시들 속에는 앞이 보이지 않은 암흑이 우릴 가로막을지라도 그 깜깜한 어둠을 향해 걸어가게끔 만드는 희망이 들어 있고, 정치적인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갈등 너머에 있는 경험을 통해 시를 쓰고자 하는 열정이 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렇다. 시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희망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의 빛을 찾고, 루쉰의 시에서 감동을 받은 나카노 시게하루처럼 나라마다 정치적으로 얽혀있는 문제들이 시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헤아린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코코아 한 스푼>이라는 시에서 한 테러리스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중략)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본문 109~110쪽 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역사적 사건의 희생양이 됐다. 그 역사적 진실 속에 많은 것들이 희생됐지만 시詩 만큼은 시대의 폭력에 저항하면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빛을 안겨준 고마운 존재였고, 지금도 많은 시들이 절망에 빠진 마이너리티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고, 소외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지금의 시대에서 시가 주는 힘은 더 클 것이고, 그 힘은 바로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침묵하지 않는 시인의 손에서 나오는 만큼 많은 시인들의 분발을 바란다. 덧붙여 서경식 시인의 이 책《시의 힘》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의 역할이 되었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