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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토지]는 총 5부로 되어있다. 1부에서는 평사리 최 참판댁이 몰락하고 무남독녀인 최서희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간도로 떠난다. 2부는 서희 일행의 간도에서의 생활이 주를 이룬다. 곡물장사로 부를 축적한 서희는 길상과 혼인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3부는 진주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서희와 지리산의병, 만주 독립군들의 삶이 그려졌다. 길상은 사회주의자로 용정에서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이다.)
[토지] 4부는 1929년 원산노동자 파업부터 만주사변, 남경대학살에 이르는 역사적 상황을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을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그려진다고 4부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말한다.
환국이 동경에서 잠시 귀국한다. 윤국은 가두시위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지만 학교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방황한다. 환국이 광주에서 피신 차 찾아온 김제상을 데리고 쌍계사로 떠나자 서희의 가슴에 그늘이 진다. ‘한 가닥의 불안은 있었다. 이제는 이래라저래라 하기 어려워진 아들, 품 밖에 나가버린 아들에 대한 어미로서의 외로움도 있었다. 어두운 현실과 찬란한 삶을 마주하여 저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투쟁의 채비를 차리는 윤국도 서희에게 외로움을 재촉했다. 남편의 존재,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출옥하게 될 김길상은 실감할 수 없게 멀기만 하였고, 얻는 과정에서 잃어가는 과정을, 아니 얻었기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과정을 서희는 시시각각 느낀다. 팽창에서 위축의 과정으로 들어선 육체적 자각과 더불어!’(127-128쪽) 서희의 욕망은 무엇일까? 처음엔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재산을 모으고 길상과 혼인했지만, 그것들이 모두 이루어진 지금은 여느 어미들처럼 아이들을 키우고 축적했던 부를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여느 지어미들처럼 남편 길상과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일까? 서희와 길상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추석이 지난 후 석이를 데리고 간도로 길을 떠났던 한복이 섣달 그믐날 평사리로 돌아왔다. 진주농고에 다니던 아들 영호는 맹휴계획의 주모자로 경찰에 연행되었고, 그런 영호를 두고 마을에서는 거의 영웅대접을 한다. 한복을 대하는 마을사람들의 시선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한복은 이제서야 마을사람들과 화해가 진정으로 이루어졌음을 느낀다. ‘한복의 부자가, 또 안사람 모녀가 아무리 성실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도 결코 회복할 수 없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마을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권리, 이제 그 존엄성을 찾았고 동등한 권리를 얻은 것이다. 진정한 뜻에서 한복이 일가는 마을사람들과 화해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긴 세월 핍박한 몫까지 합쳐서 사람들은 한복의 일가를 인정하려고 서둘며 과장하기까지 하는 것이다.’(77쪽) 새해아침 제사를 지내며 한복은 죽어서도 결코 아버지만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평사리 최 참판댁 당주 최치수를 죽인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비난속에서 살아온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설을 쇠러 평사리에 와있던 홍이가 한복을 찾아와 용정소식을 듣는다. 조만간 생활을 정리하고 용정으로 갈 생각이다. 마을에서는 오서방과 우가의 싸움이 벌어졌다. 홍이가 말리러 갔다가 우가가 휘두른 낫에 허리를 베인다. 진주병원으로 옮겨진 홍이는 보름간 치료를 받고 거의 한달여를 요양한 끝에 몸을 회복한다. 보연은 마침 진주에 와있던 장이를 보고 홍이가 부른 것으로 오해를 한끝에 한바탕 난리를 친다. 홍이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서 보연에게 말한다. 간도로 가기전에 장이를 한번 만나야 한다고.. 그런 홍이를 바라보는 보연은 마음이 심란하다. 홍이는 장이를 만나 어쩌려는 것일까? 아비인 용이의 전철을 밟으려는 것일까
명희가 강선혜의 생일에 초청받아 갔다가 친구인 여옥을 만나고 여옥을 서울역에 데려다 준다. 식당에서 얘기를 하고 여옥이 떠난 후에도 명희는 혼자 식당에 앉아있다. 식당에서 대련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시동생 찬하를 만난다. 찬하를 바라보는 명희의 눈이 투명하다. 찬하는 명희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조용하가 임명빈에게 식사를 하자고 청한다. 식사를 마친 후 용하는 명희와 이혼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명희와 찬하가 알 것이라며.. 순간 찬하는 제 형의 멱살을 잡고 별장으로 가서 부모님을 만나자고 한다. 별장 앞에서 찬하는 용하에게 말한다. 용하가 명희와 이혼하면 자신도 이혼하고 명희와 결혼하겠다고. ‘이튿날 용하는 데리러 온 자동차를 타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하룻밤 사이 그는 늙은이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철저한 참패였다. 생애에 한번, 그것도 철저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명희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아니했다. 자아, 네가 좋아하는 물건을 나는 이렇게 버린다. 잉여상태에서 오는 유희, 용하는 유희가 완벽하게 진행될 것을 믿었다. 강한 자극을 즐기려 했었다. 그런데 심각할 것도 없는 장난이 자신을 송두리째 뽑아 내동댕이치는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209쪽) 평생을 두고서 명희를 학대하면서 찬하를 괴롭히겠다고 마음먹는 용하. 그러나 집에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명희가 아니라 이혼에 동의한다는 글이 쓰여진 쪽지 한 장이었다.
4부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막집 주모 영산댁은 병든 사내가 맡기고 간 숙이를 수양딸 삼는다. 숙이는 아비와 동생 몽치를 그리워하며 매일 같이 눈물 짓는다. 병든 아비가 죽으면 어린 동생 몽치가 어찌 살아갈지 그것이 서럽기만 하다. 어렸을 때 집안에서 정혼한 사이인 민지연과 하기서. 혼인할 날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기서가 출가한다. 십년을 한결같이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지연은 기서가 있다는 절을 알고서 이종사촌 오라비인 소지감을 졸라 지리산 도솔암으로 간다. 소지감은 자리를 피해 해도사에게로 가버린다. 지연이 중 일진을 만난다. ‘잊었던 이름, 잊었던 여자,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사람 앞에서 일진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아까처럼 우두커니 지연을 쳐다본다. 아내가 될 사람이었는데, 사랑했던 여자였는데… 당혹함도 아니었다. 반가움이라 할 수도 없었다. 아픔, 비애 같은 것도 아니었다. 뭐라 할 수 없는, 그러한 감정이었다. 밑바닥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것을 일진은 느낀다.’(278쪽)
‘이유나 알기 위해 이곳에 온 건 아니다. 희망이 없는 내 나머지 인생을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그걸 찾아서 왔다! 십년동안 쌓인 고통을 어떤 것으로 든, 아아, 가련한 나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꼬. 비로소 지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새로운 절망, 법의에 싸인 하기서는 눈앞에 있어도 유령이었기 때문이다.’(283쪽) 산에서 내려가라는 기서에게 싫다고 말하는 지연. 절에서 살겠다는 지연에게 그러면 머리를 깍고 출가하라고 하지만 그것도 싫다는 지연. 지연과 기서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다음 권이 궁금해진다.
4부가 시작되면서 또 다른 삶들이 엮이기 시작한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어떨지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삶이란 것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기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멀쩡하게 서있는 강쇠를 일본인이 자전거로 뒤에서 받는다. 그리고 난리를 치며 강쇠를 끌고 파출소로 간다. ‘강쇠는 귀를 잡힌 채 파출소까지 끌려갔다. 조선놈의 새끼가 일본인한테 대항했다! 조선놈의 새끼가 자전거를 부수고 술병들을 박살냈다! 일방적으로 당코바지는 왕왕댔다. 강쇠가 순사에게 쥐어 박히고 걷어차이는데 당코바지는 계속 왕왕대며 반주를 했다. 강쇠의 개진 따위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조선말을 아는 바로 그 조선인 순사였다. 일본 순사보다 강쇠를 많이 때린 것도 조선인 순사였다.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아서는 안되겠기에 더욱 더 때렸을 것이다. 자식 데리고 개가한 계집같이, 남편 자식을 두둔해야 하며 데려간 자식의 말은 무조건 들으려 하지 않고 남편보다 앞장서서 제 자식을 때려야 하는 개가한 계집같이. 피의 배반, 제 피를 부정하고 배반한 자에 대한 분노는 핏줄을 부르는 감정보다 더욱 격렬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혈흔같이 지워지지 않는 원한이 되는 것이다.’(24쪽) 이런 강쇠가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들은 또 얼마나 많은 원한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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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1권 제 1편 생존의 본능 ( 1~17)
박영규의 <일제강점실록>을 읽고 만나는 토지는 다르게 읽혔다. 3부까지 읽어오는 동안 만났던 정치적인 이야기,특히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저 책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4부에서는 처음 알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아니기에 더 집중을 하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설움이 내 설움인양 한없이 연민의 정에 빠져들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면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 환국의 눈으로 자세하게 서술이 되고 있었다.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서희의 둘째 아들 윤국은 유치장에 잡혀 들어 갔다 나왔다. 유치장에서 일본인 형사는 잡혀온 학생들에게 말했다.
멍텅구리 같은 놈들, 제 나라 지킬 능력이 있었으면 시초에 합병 같은 것은 없었을 것 아닌가. 지금에 와서 왕왕거려도 소용 없어, 현실을 직시해라, 현실이 소리로 해결되나? 소리란 힘이 아니야. (중략) 방안에 요강을 들여놓고 긴 담뱃대 물고서 팔자걸음으로 걷는 너희들 조선인은 도시 위생 관념이 없고 게으르다. 그같은 민족성과 문명에 동떨어진 미개한 상태에서 언제? 백년이 걸려도 안 될 발전을 우리 대일본제국이 실현시킨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 p 116
침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배를 선심쓰듯 내뱉는 저 말은 소설 속의 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억울한 노릇이지만, 소리도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벌써 역사 속으로 살아진지 오래지만, 여전히 불씨는 지속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세대를 이어 이어서... 윤국도 유치장에서 나온 후 더 강하게 의지를 불태웠다. "장래가 약속된 수재같이 얌전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난 그렇게는 안 살아! 폭탄을 안고 살테다." (_p 115). 자신의 눈에는 우유부단해 보이는 형이지만, 환국도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살인자였지만 한복은 만주로 군자금을 나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들 영호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잡혀 갔다. 동네 사람들의 인식은 한복이 살인자의 아들이라 멸시하던 시선을 조금씩 거두고 있었다. 평생 살인자의 아들이란 굴레 속에서 살아야 했던 한복은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어가고 있었다.
홍이는 아버지 용이가 죽은 후 만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일본군에게 잡혀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온 후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깊숙히 묻어두고 있는 홍이지만, 그 감정을 묻어두기만 할 수는 없을듯하다. 석이도 만주로 도망가 있는 상태라 남은 가족들은 고초를 겪고 있었고, 서희도 형무소에 있는 남편 길상과 아들들 때문에 마음 앓이를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 그의 가족들의 아픔은 쌓이고 쌓여서 나라 잃은 현실을 직시하고 내는 소리에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터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네 명의 대표적인 신여성을 만났다. 일본에서 유학을 한 것은 같지만 가는 방향은 모두 다른 그녀들. 역관의 딸로서 귀족 조용하와 결혼했지만,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이 사는 임명희. 조국을 배신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일본인 오가다와의 결합을 거부한 채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유인실. 한번 결혼에 실패하고 사랑만으로 전처의 아들을 키우며 사는 강선혜, 전도사의 삶을 살며 종교적인 문제와 현실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여옥이란 인물.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신여성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여다 보는 것도 흥미를 더하고 있었다.
평생 농사 지어오던 땅을 빼앗기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제대로 된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등 열악한 조건 때문에 노동쟁의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의 이야기,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일본인에게 학대 당해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 상황들을 얼마나 끝내고 싶었을까? 끝이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고달픈 삶이었지만,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만 700명 이상이라고 한다. 매 권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을 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간단히 언급을 해보자면, 읍내 주막 영산네에 들어온 숙이, 결혼을 앞두고 나타나지 않고 중이 되어 지리산 도솔암에 있는 하기서와 그의 파혼녀 민지연, 지리산으로 들어와 해도사로 불리는 남자 (김환이 죽고 마음둘 데 없는 강쇠의 벗) · · · · · · 이들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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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의 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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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장을 넘기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도돌이표 안에 있는 음표처럼 되풀이 되는 운명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열심히 유행을 쫓아가지만 결국은 돌고 도는 유행처럼, 더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지만 운명은 이들을 놓아주지 않고 세대에 걸쳐 되풀이 되고 있었다.
아버지 용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무나 잘 아는 홍이. 그렇기 때문에 홍이 만큼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줄 알았다. 가문 좋고 성격 좋고 생각이 깊은 아내를 얻어 잘 살고 있는 홍이었기에 더 그랬다. 물론 홍이가 결혼 전과 결혼 초에 장이와 벌린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그 상황 때문에 생겨났다고 여겨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운명과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평생 동안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아파하다 간 용이. 홍이에게도 그 운명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한 여자와의 사이에 서게 된 홍이. 그는 과연 이 운명을 어떻게 풀 것일까.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졌다.
홍이 뿐만이 아니었다. 최참판댁의 서희 역시 자신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할머니 윤씨부인처럼 최참판의 여인으로 가문을 지키고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 별당아씨처럼 집안의 하인으로 있던 이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당차지만 외로운 여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남편이 있고, 아들들이 있다는 것이지만, 그녀의 아들들은 남편 길상처럼 나랏일을 위해 뛰고 싶어 할 뿐 가문이나 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더 외로운 서희. 서희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하동 마을에서 일어난 악연에 의한 기묘한 살인 역시 도돌이표를 따라 돌아온 음표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최치수의 살인을 연상하게 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흔치 않은 일이었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시대가 그러했고 상황이 그러했다고는 하지만, 하동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일은 과거를 곱씹게 하고 또 미래를 두렵게 하는 일이었다.
큰 마음을 먹고 읽기 시작한 책 <토지>. 대하소설이라는 말 그대로 21권에 달하는 장편이었다. 그중 이제야 13권을 읽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대단함을 느끼게 된다. 책에 나타나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 그리고 정리된 생각.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장편의 소설을 쓴 것도 대단하지만, 그러기 위해 작가가 읽었을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조금이라도 가늠하게 되는 구절이었다. 짧기만 한 나의 독서량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일인다역을 하게 되는 작가.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의 생각을 조리 있고 분명하게 표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다 왠지 억울한 마음에 ‘하지만.. 하지만...’ 이라고는 외쳤지만, 그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 지 몰랐다. 순발력이 약하고, 생각을 잘 정리해놓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역사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왔다는 말에 달리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 우리 조국이 조금만 더 발 빠르게 세계 정세를 따라 움직였다면, 조금만 더 힘이 세었더라면 우리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고 지배를 받지 않았을 테니까. 역사 속에서 우리의 억울한 역사는 하나의 단편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억울했지만, 역사 속에서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었을 뿐이니까. 일본이 잔인하고, 냉혹했지만 역사라는 틀 안에서 그들은 자유로웠다. 우리만 억울한 뿐이지.
과연 역사는 강자와 약자의 논리 속에서 되풀이되는 것일까. 하물며 외교나 정치를 모르는 아이도 사탕과 과자를 가지고 강자의 지배 논리를 펼치는데, 덩치 크고 머리 굵은 나라야 말해 무엇 할까.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 될 것이다.
참으로 명쾌한 비유였다. 일본은 갑충, 딱정벌레고, 우리나라는 나비, 학이다. 같은 동양권이고 그저 바다를 하나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도, 일본과 우리는 참 많이 달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오묘함 때문에 서로에게 더 끌리기도 하고, 서로를 더 미워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을 떠올릴 때마다 일본의 문화를 접할 때마다 나는 이 비유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일본처럼 잘 아는 이들이 또 있을까 싶다. 나라를 위해 자기 한 목숨은 쉬이 버리는 이들. 자결을 거룩하게 여기는 이들. 혼자는 약하지만 나라는 강한 이들. 뭉치는 힘이 강한 일본이기에 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거라는 예언은 들어맞았다. 물론 소설 속에서 만의 예언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동감이 가서 인상이 깊은 구절이었다. 크게 성을 내는 것보다 소리 없이 내는 성이 더 힘이 있는 법이다는 것. 크게 성을 내는 것은 잠시 그때만 기분을 푸는 것이지만, 소리 없는 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더 효과적이다는 말이 왜 이리 귀에 들어오던지. 앞으로 아이를 키우려면 아마도 이 소리 없는 성을 내는 법을 익혀야 할 터인데 싶어 더 가슴에 와닿는 듯 하다.
이번 책에서는 그냥 읽고만 넘기기에는 아쉬운 구절들이 많다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을 옮겨놓게 되었다. 책을 통해 떠나보는 과거로의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 연필과 지우개 -
제4부 1929년의 원산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만주사변,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주로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되고, 농촌붕괴와 도시유랑민들의 증가 등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예술, 사상, 민족성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전편을 통해 폭넓게 제시된다. 서희의 아들 환국과 윤국의 성장, 길상의 출옥, 군자금 강탈사건 이후 만주로 도피하는 송관수의 갈등, 명희의 이혼과 새로운 삶, 유인실과 일본인 오가다의 사랑, 그리고 인실의 도피와 변신, 색소폰주자로 떠도는 송관수의 아들 영광의 모습 등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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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3권> 이제 토지 4부의 막이 올랐다. 1929년을 기점으로 1930년대의 일제시대, 많은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참혹했는지, 많은 이들의 삶을 통해 옴팡지게 느낄 수 있었다. 숨 고르기를 하듯, 시대의 풍경, 그 예리한 묘사는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4부는 강쇠의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싸움, 잘못이 없는 강쇠에 강한 봉변은 진정 일제시대의 비극, 그 처참한 울분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그저 조선인이기에 일본인에게 당하는 수모, 하지만 그것을 참아내야 했던 많은 이들의 삶이 강쇠에게 투영되었다. 그럼에도 용팔이 홍이에게 한 ‘그래도 길게 살아남아라’라는 말이 나지막히 들려온다. 그렇게 숨죽이며 살아낸 시간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삶 속에 내재된 희생의 참 뜻을 또 한 번 가슴에 새겨본다. 12권, 용의 죽음으로 홍의 만주로의 이주는 확정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가와 오서방의 묵은 감정이 폭발하면서 홍은 생사를 오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다시금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듯했다. 어느 한 순간도 긴장을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홍의 만주행은 기정사실이었기에 만주에서의 홍의 모습만을 기대하고 그렸던 내게는 진정 용팔의 말처럼 마른 하늘에 날벼락, 그 자체였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할수록 <토지>라는 거대한 우주를 만난 듯한다. 그저 탄성이 절로 터진다. 앞선 이야기들, 평사리를 배경으로 많은 마을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이야기 중에서 간혹 등장했던 우가와 오서방의 앙금이 또 다른 이야기의 물꼬가 되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혀 예상 밖으로 흘러든다. 각각의 많은 인물들이 제 나름의 목소리는 찾는 듯, 허투루 지나칠 수가 없게 된다. 여하튼 홍의 부상으로 만주행은 지연되고, 그러다보니, 장이가 돌아온 시점과 맞아떨어지면서 다른 갈래의 이야기꽃이 활짝 만발한 느낌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만주에서 넉 달 만에 평사리로 돌아온 한복의 이야기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역사적 사건이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데, 한복의 아들 영호가 진주에서의 학생 만세 시위에 주모자로 연행되면서 평사리 마을사람들과 한복의 화해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복의 지난 숨죽인 삶이 순식간에 사라지듯, 마을사람들의 마음이 한복의 지난 설움을 녹여주는 장면, 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역시 길게 살아볼만한 삶이란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친다. 13권에도 역시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일제의 참혹한 폭압의 실상이 오롯이 그러지고 있다. 지난 이야기들 속에서 그려진 좌절과 번민, 혼란과 방황은 성장한 다른 이들의 삶에 녹아들었다. 환국와 윤국의 이야기가 특히 그러했다. 반면, ‘민지연’, ‘해도사’, ‘하기서’이라는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과 조용하와 명희, 송광수, 유인실과 오가다 등의 이야기들은 다른 국면을 맞게 될 것이라 예고하고 있어, 여지없이 기대에 들뜬다. 우국열사들의 삶이 아니기에 오히려 많은 이들의 치열한 삶은 이야기가 더해갈수록 진정으로 다가온다. 홍이 아비, 용을 그리면서 생각했던 이야기가 끊임없이 <토지>를 통해 되새기게 된다. “뇌리를 스쳐가는 간도땅에서의 수많은 우국열사들, 흠모하고 피가 끓었던 그 수많은 얼굴들, 그러나 홍이는 아비 이용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내였다고 스스럼없이 생각한다. 열사도 우국지사도 아니었던 사내,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한 사나이의 생애가 아름답다. 사랑하고, 거짓 없이 사랑하고 인간의 도리를 위하여 무섭게 견디어야 했으며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그 감정과 의지의 빛깔, 홍이는 처음으로 선명하게 아비 모습을, 그 진가를 보는 것 같았다.” (93) 무섭게 견디었던 삶, 그리고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삶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요즈음, 끔찍한 사건 사고들을 보다보면,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무섭게 견디어내는 삶의 진정한 가치, 그 숭고함을 다시금 온몸으로 느껴본다. 결코 만만치 않은 삶, 거미줄같이 끈적끈적한 인연들 속에서 숱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지만, 나 역시 무섭게 견뎌내고, 나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또한 ‘제 앞만 쓸고 사는 인간’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거듭 <토지>를 통해 제 빛깔을 잃지 않고, 사람 냄새 진동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기를 다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