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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은 휴식을 즐기러 간 외딴 나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들른 오래된 가게에서 발견한 진귀한 보석과도 같은 책이었다.
최근 책과는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향기를 지닌 책이었고, 읽다 보니 글쓴이의 매력적인 글색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수업시간에도 수업이 어떻게 흐르는 지도 모르는 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인 '자기만의 방'은 작가가 모든 여성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동시에 작가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자유를, 낭만을 누릴 권리를 함축하고 있다.
책을 쓴 이 당시만 해도 여성들은 아이를 길러내며, 빨래를 하며, 음식을 짓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남자들의 작은 하인에 불과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은 아예 꿈도 못 꿀 시기였으며, 부모님 아래에서 음식, 살림 배우며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해서는 남편 밑에 들어가 남편의 시종과도 같은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었다.
요즘 같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 되겠지만, 이 책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진심을 담아 여성이라는 인간의 권리 찾기를 위해 특유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발랄한 필체로 여성들도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하며, 자기 수중의 돈을 가져야 함을 목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여성이 내 이름으로 된, 내 앞으로 된 돈을 갖게 되자 나를 짓누르던 그 모든 상황들로 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평생 누군가에게 의지만 하면서 살아 오다가, 아무에게도 구애 받지 않는 내 것을 가지게 되자 자존감이 피어나고, 모든 것에 당당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성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꾸지람을 들었던 이 시대. 여성들의 자유를 위해 힘썼던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이 시대 이후에도 여성 문학의 대모로서 꾸준히 사랑받을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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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해하려면 이 책의 쓰여진 시기의 시대적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예전에 읽었던 사건에 대해 듣는다는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를 앞서서 살아간 버지니아 울프의 사간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현재의 사고방식은 잠시 지워주길 바랍니다.
여성이 지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했다. 돈은 경제적인 것, 다른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걸 할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는 말일테고 자기만의 방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걸 할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말하는 것같다. 좀더 줄여서 이야기 하자면 자유는 주어진다고 해서 누릴수 있는것이 아닌 조건의 충족되어야 지만 누릴수 있다는걸 말하고 있는듯 하다.
책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참 독특하게 쓰여져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서술되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냥 작가의 시선이 머무리는곳을 쭉따라다니면서 작가의 설명을 듣고이다보면 어느새 페이지가 끝나있다. 이야기흐름을 놓치거나 집중하지 못한다면 빠져들기 힘들수도 있겠지만 그냥 연속된 필름을 보듯 본다면 책속으로 빠져들어갈수 있을거같다.
책을 다 읽으면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불평등한 세상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불평등속에서도 정도를 찾아서 자신만의 길을 가신분...여성성에 치우친 글을 쓸수도 있었지만 참된 문학은 남성과 여성의 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셨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이런게 아닐까 한다. 무조건 자기만이 주장, 여성이 우월하다는 식이 주장이 아닌 자기만의 뜻을 갖고 양성모두 화합할수 있는 정도의 길을 주장하는 것..이것이 진정한 패미니즘이 아닐까.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저사람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먼저 앞서가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현재사회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점점 역사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는 한층더 발전할수 있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 남기고가 작은 불씨가 서서히 커지면서 결국엔 세상을 태울 큰 불꽃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 ...그분은 역사속으로 사라지셨지만 그분이 남기신 책과 정신, 사상은 오늘만 큰 불꽃이 되어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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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자기만의 방이 가져다 줄 지적 자유.
자연과 사물을 의식하고 기술하는 감성적인 그녀의 사고를 뒤따르고 있자니, 바삐 좇아가는 나의 눈길도 어느새 기쁨의 빛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잠긴 문 밖에 있는 것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를 생각'하다가 '잠긴 문 안에 있는 것이 더욱 나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울프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실은 나도 당신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고 읊조리는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최근에 본 적이 있던가? 나도 모르게 꼭 원어로 다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적당히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울프의 필력은 조심스럽게 느껴지리만큼 풍부한 감성에서 우러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의 여성은 성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 포프나 '여성은 극단적이다. 그들은 남성보다 우월하거나 또는 저열하다'라고 말한 라 브뤼예르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옮겨놓고선 자신의 복합적인 또는 감추어진 분노를 상냥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2장에 이르기까지 울프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자신의 강연 주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러다가 3장에 다다르면 우리는 시대적으로 배제되고, 내동댕이쳐졌던 여성의 처지를 이야기하던 중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그의 누이를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으로 탄생시키는(물론 그녀는 허구의 인물이다) 재치를 발휘하는 울프를 만날 수 있다.
울프는 남성이 속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재능있는 여성의 삶이 무성히 자란 잡초와 가시나무로 뒤덮여지는 것에 유감을 표할 따름이다. 그리고 여성의 글쓰기에 만연한 적대감이 여성이 글을 씀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나, 자기만의 방에서 쓰여지지 않은 여성의 글이 더 큰 혜택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점도 애석히 여긴다. 어쩌면 '결핍'이 여성의 글쓰기에 필요악은 아니었을까?
울프의 책읽기, 상상력, 글쓰기에 대한 신념에 부러움의 시선을 던지며 삶의 기록 또는 예술적인 기록으로서의 여성의 글쓰기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까짓 한 번 믿어보자. 돈과 자기만의 방이 가져다 줄 지적 자유와 무엇을 쓰더라도 그것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임을.
좋아요! : 좋은 작품을 예쁜 표지의 양장으로 간직할 수 있다는 점, 들고 다니며 보기에 적당히 작은 책이라는 점, 글자크기와 본문편집 등이 수월한 읽기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럽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
검푸르고 망막한 하늘에는 수천 개의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어요. 헤아릴 길 없는 사회를 상대로 홀로 서 있는 듯했어요. --- 본문 45쪽 중에서
[다른 이의 번역]'푸르고 광막한 하늘에는 수천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불가사의한 사회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삶은 남성, 여성 모두에게 - 나는 길을 따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어요. - 고되고 어려운, 끊임없는 투쟁이에요. 엄청난 용기와 힘을 요구하지요. 우리처럼 환상을 지닌 피조물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필요한 듯해요.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 속의 아기 같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헤아릴 수 없지만 무한한 가치를 지닌 특성을 가장 신속하게 창출해낼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본문 65쪽 중에서
[다른 이의 번역]어느 성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측정할 수 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질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그렇긴 해도,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첫 번째 문장은,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생각하면 치명적이라는 거에요. 나는 책상을 향해 가로질러 가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이 적힌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어요. 순전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일은 치명적이에요.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만 해요. 여성이 어떤 불만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또는 정당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변명하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임을 의식하고 말하는 행위는 치명적이에요. 치명적이란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에요.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쓴 글은 모두 소멸될 운명에 처해져요. 풍요롭게 될 수가 없지요. 하루 이틀 정도는 빛나고 효과적이며 유력하고 걸작처럼 보이나 해질녘이 되면 시들어 버려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자라날 수가 없어요. 창조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하지요. ----본문 191쪽 중에서
[다른 이의 번역]내가 여기에 쓰게 될 첫 번째 문장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여기서 '치명적'이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의식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쓰인 것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옥해질 수 없지요. 그런 작품은 당장 하루 이틀 동안은 빛나고 효과적이며 강력한 걸작처럼 보일지 모르나, 해 질 무렵이면 시들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날 수 없는 것이지요.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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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와 19세기를 살았던 그녀와의 시공간의 차이는 얼만큼일까? ‘돈과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와 ‘알파걸이 대세’라며 여풍(女風)의 위력(?)을 보도하는 사회와의 차이는 얼만큼일까? 결혼한 후 자신의 일을 계속하겠다는 여성과 꿈이 현모양처(현모양처의 원래 뜻보다 남편 내조를 잘하겠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됨으로)라는 여성,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 혼자 살겠다는 여성과 혼자 살기는 힘겨우니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야겠다는 여성. 남자의 첫째는 능력이고, 여자의 첫째는 외모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고, 절반은 남자다. 그들의 이야기가 인간의 역사이며 모든 예술이다. 서로 필요한 존재이며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경계한다. 물론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나온 극단적인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치 않은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간다.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라. 맞는 말이다. 비단 돈과 자기만의 방은 글을 쓰고자하는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돈은 말 그대로 경제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경제적인 자유가 있어야만 비로소 삶의 여유가 생기니깐 말이다. 그 여유 속에서 자아 찾기도 가능하고, 꿈에 대한 생각도 해보며 책도 읽을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지 않는가. 그럼 자기만의 방은 뭘까? 여기서 ‘방’이란 공간적인 방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책이 가득하고, 멋진 책상이 있는 방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방’이란 자아를 돌아볼 수 있는 ‘방’일 수도 있고, 존재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방’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방’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건 인간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글쓰기도, 여성으로의 삶도 시작될 수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위의 주장에 덧붙여 그녀는 여성적인 것 혹은 남성적인 것만 추구한다고 옳은 것은 아니라 말한다. 여성이 남성적이며 남성이 여성적일 때 더 풍요로워 질수 있다고 말이다. 앞에서 말한 알파걸이나 새롭게 대두되는 베타보이들이 그녀의 주장을 증명하고 있으니 맞는 말일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과연 버지니아 울프란 사람은 누구일까란 생각을 수없이 해봤다. 혹자는 그녀를 페미니스트라고도 하고, 사회를 앞서 간 사람이라고도 하며 근대 여성문학의 선구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신경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마지막 유서에서야 비로소 밝힐 수 있었던 아픔의 진실이라던지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글을 쓰는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녀는 의식의 흐름으로 글을 썼다지만 그 글을 읽은 나의 의식은 자꾸만 단절되는 듯하니.. 하지만 잊을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녀와 같은 여자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공감대. 그 순간만큼 ‘여자라서 행복’한 것 같았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녀를 만난 시간. ‘나의 방’에 그녀의 자리가 만들어진 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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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영국의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와 16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그들의 시인과 소설가, 그들의 작품을 떠올리면 보다 명쾌한 버지니아 울프의 단상에 가까이 접근 할 수 있다. 상징적 표현처럼 보이는 제목‘자기만의 방’은 직설적 의미 그대로이다. 물리적 공간, 즉 물질적으로 독립된 여성 그 자신만을 위한 재산적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이 저술이 당시 여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과 픽션(Fiction)"이란 주제의 강연 자료로서 준비된 것이라 하나 상당한 준비가 동원된 문학비평 에세이로 보인다. 버지니아 울프식의 다양한 싯적(詩的)은유와 그녀가 앓아온 정신과적 질환으로 인한 프로이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에 대한 동경이 잠재된 듯한 심리적 나레이션(Naration)의 형식이 어렵지 않은 문장과 의미를 비틀어대고 있다. 오늘의 독자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은 낯설기만 하다. 다만, 그녀가 저술 내내 진지하고 심각하게 16세기에서 19세기 말에 이르는 남성중심의 사회와 여성들의 열등적 지위, 재산권의 부인, 사회적 제약 등에 대한 설명은 ‘페미니즘’의 출현에 대한 당위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렇듯 온전히 남성과 평등한 여성적 지위와 사회적 권위를 위해서 여성이 자신만의 재산권을 확보하는 것은 정신적 안정과 사회적 피해를 배제할 수 있는 중요하고 근원적인 수단으로 인식한 듯하다. 이러한 결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입증키 위해 그녀는 ‘제인오스틴’,‘브론테 자매’의 작품을 비교 평가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여성이 시인 또는 소설가로서 온전히 일어서기 위해서 보유하여야 하는 매년 500파운드의 안정된 소득과 자기만의 방의 논리를 떠나서 작가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아주 매혹적인 내용들로 펼쳐진다. “오만과 편견”의 ‘제인오스틴’은 ‘샬럿 브론테’가 넘지 못한 남성에 대한 의식의 한계와 시대적 여성의 시각적, 경험적 경계를 인식치 않은 자유로운 진정한 문학작품이라고 극찬을 하기도 한다. 이는 19세기 초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남성중심의 외부 권위에 복종하여 비켜난 마음으로 짜여져 있을 수 밖에 없음을 통해 여성의 물질적 독립이 작품의 온전함으로 이어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으로 연결짓고 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성(性)에 대한 인식의 구분은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콜리지’의 말을 통해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이다”라는 인용을 통해 남성이나 여성의 단성적인 구별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가장 완전한 행복을 준다는 이론을 지지하려는 불합리하지만 심오한 본능”이라고 까지 설명하면서 성의 구별에 대한 인식을 해소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생명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책은 당시 20대 여성들에 대한 지식인(문학도들)으로서의 자각에 초점이 맞추어 있기는 하나 작가로서의 갖추어야 할 자질과 태도, 사고와 시선, 물리적 환경적 최소 조건등에 대한 풍부한 지적 향연은 물론 이거니와 ‘쉐익스피어’에 대한 색다른 해석, “제인에어”, “미들마치”, “빌렛”, “폭풍의 언덕”등의 작품들, ‘로버트 번스’, ‘에밀리 브론테’, ‘브라우닝’, ‘키츠’, ‘테니슨’같은 천재 작가들에 대한 평가와 작품의 비평들이 흥미롭게 펼쳐져 있어 작가를 희망하는 독자들이나 영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 그리고 여성들에게 심심한 문학세계를 채워줄 것 같다. “영국의 가난한 아이가 위대한 글을 탄생시키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이 자유를 누릴 희망만큼이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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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화자는 허구적 인물이며, 그 허구적 인물은 마음의 강물 깊숙이 드리운 사색의 낚싯줄에 걸려든,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의식意識이라는 물고기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허구적 인물은 또 하나의 허구적 공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허구 속에 『 자기만의 방 』이 들어 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은,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여성과, 여성이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성과 여성이 쓴 픽션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여성과 여성에 관해 쓴 픽션이 될 수도 있어요. 이 책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픽션'을 거론하면서 여성과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본질 탐구를 목적하고 있는데, 여성의 본질을 향해 항해하는 배의 이름은 ‘자기만의 방’이다. 여성이 글을 쓰면서 살아가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기만의 방’은 사회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만의 방에 ‘나’라는 물고기를 풀어놓고 마음껏 헤엄치도록 하고 있다. 그 물고기를 따라가다 보면 16세기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와 그들 개인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문학 작품들과 만날 수 있다.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등 여성 문학가들의 작품, 사상과 셰익스피어, 괴테, 볼테르, 존 키츠 등의 남성 문학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를 읽을 수 있다. 그 편견이란 ‘약한 도덕의식’, ‘이상주의’, ‘작은 크기의 두뇌’, ‘보다 적은 몸의 털’, ‘정신적, 도덕적, 신체적 열등함’, ‘강한 애정’, ‘더 긴 수명’, ‘허영심’ 등이었다.
그토록 불합리한 시대에 자기만의 방이 결여된 여성들의 글쓰기는 ‘헤아릴 길 없는 사회를 상대로 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개성이 전혀 없다’는 포프의 말에 반하여 자신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내야만 했던 그 시대 여성 문인들은 그래서 ‘실성하거나, 총으로 자신을 쏘거나, 반은 마녀로 반은 마법사로 두려움 속에 조롱을 받으며 외딴 오두막에서 외롭게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말까지도 여성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의 양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부당한 사회적 조건은 그녀들에게 익명성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만하고도 탐구적인 자세로 진실을 찾아나섰던’ 그녀들 대부분은 그리하여 그토록 쓰디쓴 좌절을 맛봐야 했다.
부당한 사회적 조건이라 함은 앞서 제시한 편견이나 관습과 같은 관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결혼, 출산, 육아라는 현실적인 조건 또한 여성의 자아개발과 창의적 글쓰기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현실은 오늘날의 그것과도 맞물려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게 마련이고, 그 변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가 여성 고유의 역할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전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일은 치명적이에요.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만 해요. 여성이 어떤 불만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또는 정당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변명하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임을 의식하고 말하는 행위는 치명적이에요.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쓴 글을 모두 소멸될 운명에 처해져요. 풍요롭게 될 수가 없지요.
나는 열렬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들으면 불편하다. 그들의 굳센 주장에서 여성적, 남성적 편견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의 편견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 자기만의 방 』은 여성과, 여성의 글쓰기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그러한 페미니스트들을 대할 때의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제시하는 ‘자기만의 방’은 남성을 몰아내고 여성 혼자 들어앉은 방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된 양성적 존재의 자유,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 그리고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역설力說 은 새로운 것은 못 된다. 그렇지만 그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이성이 어우러진 글맛은 그 식상함을 상쇄시키고 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 창작 기법은 옮긴이도 인정했듯 다소 ‘산만하게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한 문장을 좋아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하겠다.
‘실재實在를 찾아내고 수집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 작가의 몫’이라고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허구적인 글쓰기의 세계, 그 방으로 들어가 보자. 그 방은 우리 모두를 위해 열려 있다. 우리 모두의 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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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나아 울프라고 하면 "페미니스트",<목마와 숙녀>정도 떠오른다.여성인 나는 페미니스트(여성해방운동가)에게 감사한다.그녀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정권도 없었을 것이고,교육의 기회 또한 부족했을 것이다.그녀들의 희생위에 현재의 여성들이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을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대중 운동으로,19세기 중반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여성의 참정권 획득 운동과 결부 발전하였으면 1960년대 이후 전 세계로 확산 되었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의를 부탁받고 여자 대학에서 강연한 논문 을 토대로 하고 있다.그녀가 살던 시기에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없었다.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생긴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다.자기만의 방은 사적인 공간이다.사적인 공간에서는 자기를 위한 사유,창작등을 할 수 있다.요즘의 여성들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허용된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처럼 자유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과 자기만의 방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그녀가 태어나서 자란 1800~1900년대의 글이라고 보기엔 그녀가 상당히 진취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시기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대학교에는 여성이 진학 할 수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문학속에 등장하는 많은 진취적인 여성을 예로 들고 있다.셰익스피어의 누나가 그처럼 글을 쓰는 것이 허락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셰익스피어가 여성처럼 문명의 결핍속에 있었다면 그와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오스틴은 자기만의 방이 없는 상태에서 명작을 탄생시킨 대표적인 여성이다.
남성위주의사회에서 남성은 안정과 번영을 누렸고 여성은 빈곤과 불안에 시달렸다.남성들은 여성을 폄하했으면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었다.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 한 성 만으로는 풍요로워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양성이 서로 보완해야만 모든게 더 창조적이라고 말한다.
이 첵은 여성문학비평의 정전이다.상당히 세련되게 잘 쓴 글이지만,읽기가 쉽지만은 않다.216페이지 분량으로 읽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기 때문에 여성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아직까지도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큰 깨달음을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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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봤지만 그녀의 책은 한 번도 안 읽어봤었다. 페미니스트, 의식의 흐름 등의 설명으로 어려운 책일 것이라 단정짓고 책을 한 번 봐야지라는 생각만 했을 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어떻게 쓰여지는 건지 알게됐고, 이 기법때문에 다른 책보다 짧은 책이었지만 웬지 산만하기도 했고, 시원하게 읽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제목에 쓰여진 대로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 방과 함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도 필요하다고 했다. 아직도 사회에 나가면 남녀불평등이 심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버지니아 울프가 살던 시대와는 많이 다르게 남성들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기에 만약 그녀가 지금의 여성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출산문제 등과 같은 제약이 있긴 하지만 남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능력있는 여성들이 많고, 그런 여성들을 위해 전업주부를 맡아서 하는 남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 엄청 놀라지 않을까?
자기만의 방이 없어서,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그리고 주변 환경이 여자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할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던 그 시대에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들도 자기들만의 방과 돈을 가져야한다고 하면서도 꼭 여성스러움만을 강조하는 여자가 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남자든 여자든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 모두를 이해하고 글을 써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여성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임과 동시에 그녀가 작가라는 직업을 바탕으로 한 여성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인식됐다. 여자가 여자를 대변한다고 해도 너무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같은 여자가 보더라도 반감을 가질 수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요점만 정확히 짚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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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성의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돈과 자기만의 방 소유해야 한다는 점이예요.”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마음에 들었던 한 문장을 가지고 왔다. 문장력이 너무 아름답고 표현력이 훌륭하다.
10월의 어느 날 강을 보는 느낌을 이렇게 표현 하고 있다. “좌우의 금빛, 진홍빛 여러 관목들은 그 빛으로 후끈 달아올라 불처럼 타오르는 듯했어요. 저 멀리 강둑으로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버드나무들이 끝없는 탄식 속에 눈물 흘리고 있었고요. 강물은 하늘과 다리, 타오르는 나무 무엇이든 간에 잡히는 대로 비추었고, 한 학부생이 보트를 타고 반사된 풍경을 가로질러 노 저어간 뒤에는 그가 언제 지나갔냐는 듯이 다시 완전하게 맞물렸지요.” 여성과 픽션을 대해서 100여 년 전 가까이 쓴 에세이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사회와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 했다. 아직도 남성과 여성의 차별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들이고, 여성들은 집안 일 밖에 모르고 사는 시대에 이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학교도 갈 필요 없고 15/16살 정도 되면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지방 일만 하면 끝이라는 문화가 있는 영국 1900년대 까지만 이라도 여자들의 활동 금지였다. 글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없으며 자기만의 방도 없었다. 글을 쓴다 해도 그것이 무명이나 남자의 이름으로 출판해야만 팔렸다. 작년쯤에 읽었던 작은 책이 기억이 난다. 그 책이 바로 Tim Vicary가 쓴 “The Bronte Story"다. 출판사에 몇 번이나 책을 출판해달라고 부탁을 해도 여자들이 쓴 책이라고 그냥 돌려보냈다. 나중에 그 책의 저자를 남자 이름으로 보내고 출판을 했다. 아버지가 왜 다른 이름으로 책을 냈냐고 묻자 사람들이 바보 같다며 여자들도 얼마든지 좋은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 했다. [Charlotte Bronte said, "Let me introduce you, papa. These young ladies(Anne Bronte and Emily Bronte) are not your daughters- they are Acton Bell and Ellis Bell, brothers of the famous writer Currer Bell!" Because people are stupid, papa, Anne said. 'No one thinks women can write good books, so we have used men's names instead. And now they say that Currer Bell is a writer who understands women very well!' She laughed again.] 이렇게 남자들의 이름을 빌리거나 무명으로 책을 낸 경우가 많았다고 울프는 주장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 이라고 말 하는 것은 물론 책을 읽고 쓰는 공간도 이겠지만 자유를 말 하는 것 같이 느꼈다. 누군가가 방해받지 않고 나만의 생각 또는 이야기를 쓰려면 나만의 방이 필요 한다. 이렇게 말 하면 남성과 여성 차이가 느끼겠지만 이 책은 여성들에게 많은 용기와 도전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책이라고 말 하고 싶다. 문장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뜻이 있고 훌륭한 표현이라서 밑줄을 계속 긋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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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고시에서 여성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여대생의 비율이 높아진 대학은 상아탑의 여성화를 걱정하고, 초등학교 교사의 경우는 여성의 비율이 높은 나머지 남성 교사 할당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까지 제기되고 있다. ‘여성 상위시대’, ‘신 모계사회’ 등의 말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사회가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하지만 때론 빈 수레도 요란한 법, 객관적인 것마냥 보이는 수치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저 여성 인력의 수를 놓고 본다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수 있겠지만, 특정 직급 이상의 여성의 수를 본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내린 결론을 철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변화하되 그 속도가 더딘 것이 바로 남성과 여성의 영역이고, 변한 듯 변하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지금껏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왔다. 그렇지만 그 많고 많은 이름 중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2006년 어느 날 읽었던 <여성 철학자>라는 책에 수록된 여성의 이름이 나에게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삶을 살고 있는 내게 낯선 여성들과의 조우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왜 나는 여성인데 여성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니, 지금 내가 내뱉고 있는 언어도 어쩌면 여성 아닌 남성의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한참을 앓았었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나와 흡사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그녀의 방에 놓인 책장은 얼마나 거대했으며, 그 책장 안에 놓인 책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시대 순으로 잘 정돈되어 있을 것만 같은 책들은 여성에 의해 쓰여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여성에게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고. 교육의 혜택은 전혀 누릴 수 없었을 그녀들, 일정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야만 했던 그녀들에게 허락된 삶은 얼마나 단조로웠을까? 현실에선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을 향한 원망 그리고 자신을 가둔 가부장적 사회를 향한 비탄. 그녀들의 글은 태생적으로 쓰라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로 발랄한 노래를 하고 싶었을지라도 삶이 원체 암울했기에… 물론 제인 오스틴은 환경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외이자 역사가 기록하는 특별한 사례일 뿐이다. 전적으로 남성적 혹은 여성적인 인간은 우리 사회에 존재치 않는다. 생물학적으로는 남, 녀의 구분이 가능할지 모르나 남성도 섬세할 수 있고 여성도 털털할 수 있다. 남성에게 눈물이 금기가 아니듯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도 불가능은 아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은 남성과 여성, 이 두 개의 힘이 주재하고 있었어요. 남성의 두뇌 속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세했고, 여성의 두뇌 속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세했어요. 존재의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는 두 성이 영적으로 협력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 때 이루어지지요. 남성일지라도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이 영향을 미쳐야 하며 여성 역시 자신 안의 남성과 소통해야만 해요. (p180 중에서) 마음은 양성적이라는 콜리지의 말을 인용하며 버지니아 울프는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촉구한다. 이는 지금껏 추구해온 여권 신장의 흐름을 멈추라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이 남성을 적대시하는 흐름 속에서는 그 어떤 위대한 것도 탄생치 않는다. 남성에게 남성의 목소리가 있듯 여성에게도 여성의 목소리가 있음을 인정해준다면,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듯 남성 역시 그와 같은 욕망을 지녔음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토대 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살아가고 하나의 글이 탄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린 지금보다 훨씬 풍성한 작품들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삶 역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