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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사과냐, 썩은 상자냐
몇 해 전 인터넷과 뉴스에 공개된 사진 몇 장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앳되 보이는 여군이 남자 포로를 발가벗겨 놓고 목에 줄을 묶어 개처럼 끄는 모습,
알몸의 포로들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흐믓한 표정으로 웃고 서 있는 남녀 병사,
한 남자를 꽁꽁 묶어 판 위에 눕혀 놓고 그 등위에 득의양양하게 앉아 있는 남자 병사...
엽기적인 장면이 연출된 이 사진들은 이라크전이 한창일 때,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풍경이었다.
이 사진이 공개된 후 관련 군 당사자들은 처벌받았고, 미국 정부는 "미국의 의도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넘어갔다. 즉, 미국군의 포로 고문이 아닌 몇몇 개인 병사의 학대, 일탈행위로 간주해 처리한 것이다.
사실 이런 장면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포로들에게 가해지는 고문과 약탈, 학살이 행해진다.
멀지 않은 과거, 독일군의 유대인 대학살,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 난징 강간 사건 등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특수한 상황 하에서 저질러지는 것을 역사를 통해 너무 많이 보아왔다.
대체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질까.
한 인간이 악마로 돌변하는 것은 기질 탓일까. 그들은 좋은 상자 안에 든 썩은 사과일까?
이 책에서는 먼저 "평범한 인간이 악을 행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시스템, 상황"이다. 즉 문제는 사과가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상자라는 말이다.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과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30년 전만 해도 이런 사태를 개인의 기질 탓, 즉 썩은 사과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가 강했다.
그래서 범죄자를 감금하거나 사형하는 등의 방법으로 썩은 사과를 도려냄으로써 악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고, 이로써 조직이나 국가 전체에 면죄부가 주어졌다. 필립 짐바도르 박사는 이에 의문을 품고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주관했다.
시민을 대상으로 인원을 모집해 모의 교도소라는 격리된 장소에 두고 그 현황을 지켜본 것이다. 선정된 사람들에게는 일당을 주는 조건이어서 꽤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최종 선정자들 가운데 교도관 역할을 맡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역할'은 누구도 하고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부득이 동전 던지기로 역할을 정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말 그대로 신체, 정신 건강한 사람들이 아홉 명은 수감자로, 아홉 명은 교도관으로 배정 받고 실험은 시작됐다.
수감자들은 먼저 옷을 모두 벗고 알몸에 수감자복인 원피스만 걸치고, 머리를 깎는 대신 여성용 스타킹을 머리에 둘러썼다. 교도관은 제복에 선글라스가 제공됐다.
그리고 점호, 식사, 취침 등 교도소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은 일정한 규칙이 정해졌고, 교도관들이 이를 감시하고 실행하도록 했다. 또 교도관 사제나 변호사, 가족과의 면회, 고충처리위원회, 가석방 위원회 설치 등 모의 교도소지만 약식으로라도 실제와 같은 절차들을 두었다.
이때 수감자들이 정신착란 증상을 겪고, 교도관들은 악랄한 학대를 행하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5일이다.
그리고 당초 2주를 계획했던 이 실험은 5일만에 중단됐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책의 3분의 1은 이 스탠포드 교도소에서 5일 동안 벌어진 일들을 상세히 그렸다. 수감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 그 원칙 안에서만 복종하는 사람도 있었고,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며 반항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교도관에게 순응하고 복종했다.
교도관들 가운데도 존 웨인이라 불리는 만큼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 수감자들을 괴롭힌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착한 교도관이라 불릴 정도로 덜 괴롭힌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건 어느 누구도 수감자들에 대한 학대와 모욕을 적극 말리지 않았다는 거다. 과연 방관했다는 것만으로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섬뜩한 건, 이게 실제 상황이 아니라 실험의 일환이었고 수감자든 교도관이든 누구나 언제든 이 황당한 교도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거다. 계약을 파기하면 되지 않나.
실제로 시간이 하루이틀 지나자 수감자는 전원 밖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따위 엉터리 실험 집어치워!" 하며 스스로 나가겠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거짓으로 꾸며진 가석방위원회에 자기가 얼마나 모범적인 수감자인지를 밝히는 탄원서를 꼼꼼하게 적어 제출하는 등, 밖으로 나가더라도 실험 안에서 허용되는 방법만을 추구했다.
그럼 어떻게든 끝까지 실험에 참가해 일당을 받고자 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다. 수감자 중 대부분은 여태까지 일한 보상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밖으로 나가게 해 준다면 기꺼이 나가겠다고도 했다.
그 가운데 연구자이자 감독관 역할을 맡은 필립 짐바도르가 보기에 정신적 한계점에 다다른 사람은 따로 불러서 가석방 형식으로 내보내졌고 또 그 인원을 채우고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단 5일 만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걸 목격하고 실험이 끝난 후 개별 피험자들과 면담, 토론을 통해 그 안에서 얻게 된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또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썩은 상자 안에서 좋은 사과가 썩게 되는 과정을 보인 대표적인 실험 사례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0년 대, 필립 짐바도르는 티비에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건을 보게 된다.
짐바도르의 머릿속엔 30년 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면에서 상황과 결과가 너무 같았다. 실험에서 나타난 결과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에 필립 짐바도르는 스탠퍼드 교도소 연구에서 얻은 결론을 토대로 해 조지 부시 정부와 럼스펠트 국방장관을 공개적으로 고발하고자 연구를 마무리하며 이 책 <루시퍼 이펙트>를 집필한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의 진술과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슷한 학대 사례를 들어 꽤 촘촘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악의 평범성-나도 그럴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수백만 유대인 학살을 직접 주도한 나치의 주요 인물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분석했다. 아렌트의 설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히만이 정상인이었다는 점이다.
아이히만뿐만 아니라 대량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정상이었고, 법 제도나 도덕적 판단 기준에서 볼 때 이런 정상성은 모든 가혹행위를 합친 것보다 훨씬 두려운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필립 짐바도르는 "나는 다를 거야."라는 생각을 버리고 겸허해져야 한다고 당부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사태를 바로 보지 못하고, 시스템이 요구하는 바대로 행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하고도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거다.
필립 짐바도르는 정상인이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주체가 되기까지 작용하는 심리적 기재를 여러 실험 결과를 토대로 설명한다. 이는 내집단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권위에의 복종, 두려움 등이다.
이는 보편적인 심리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심리를 체제나 시스템이 이용해 한 개인을 살인자로 만들 수 있다.
루시퍼 이펙트로부터 벗어나기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는 온갖 학대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됐지만, 이에 호루라기를 불어 멈추게 한 내부 고발자도 있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그런 사람이다. 같은 조건 하에 처해 있으면서도 학대에 가담하기보단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중단시키는 데 힘을 들이는 사람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흔하지도 않다. 그러나 우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필립 짐바도르가 이 책을 집필한 건 부시 행정부를 고발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루시퍼 이펙트를 제대로 바라봄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악에 휩싸여 가지 않고 자기 철학에 맞는 균형 잡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을 알리려는 의도도 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든지 "시스템 탓이다."라는 말로 변명하거나 악이 행해지는 현장을 방관하는 건 악에 동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런 주체들이 모여 거대한 악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사는 게 가장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자기만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다수의 행동에 휘둘리지 않을 만한 줏대를 가져야 한다.
루시퍼 이펙트는 비단 전쟁 등 특수한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백인의 인종차별, 교실이나 직장 내에서 왕따, 인터넷 상에서의 마녀 사냥 등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악의 한 구성원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다르다, 난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망상을 버리고 현실과 나 자신을 제대로 직시하는 게 필요하다.
+ 7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에 도저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인간이란 이런 것인가'하며 환멸이 느껴지기도 했다. 필립 짐바도르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시종일관 '나는 다를 거야'란 생각으로 철저히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사례를 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희망도 보았다. 필립 짐바도르처럼 자기 실험의 비윤리성과 그에 감독관으로 참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또 자국 정부에 대한 내부고발자로서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면서 우리 시대 지식인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고, 악을 실현하는 반대쪽에 이런 착한 사마리아인이 존재한다는 데 위안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의 요구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는 선한 행동을 선택하게 될 때 이 책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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