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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선생의 타계 소식으로 인한 허망한 마음에 두문불출하다 <행복한 책읽기>에 대한 게으른 리뷰로 슬며시 세상 밖을 내다본다. 최근 들어 나의 책읽기는 오래 전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마음이 끄는 대로 다시 읽기 중이다. 이윤기 선생의 타계소식을 들었을 때 마침 읽고 있던 책이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였다. 거의 15년 만에 다시 꺼내 보는 책이다. 어찌 보면 이윤기 선생의 타계소식에 이렇게 마음 아파하며 일상의 일들에서 손을 놓게 만들어버린 이 끝없는 상실감에 빠지게 된 그 처음은 김현 선생이었다. <행복한 책읽기>를 통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알았고 자연스레 번역가 이윤기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었다. 에코뿐이더냐... 밀란 쿤데라,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소포클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희비극들, ‘천일야화’와 ‘데카메론’까지 내 독서 영역을 넓히는 데 바로 이 책 한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고 고백한다. 지금 내 책장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문지사 시집들과 한동안 빠지지 않고 사 모았던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집들도 다 이 책 한권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난해함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품들에 대한 도전의 용기 또한 이 책에서 얻었다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책읽기는 김현 선생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셈이다. <행복한 책읽기>를 읽었을 때 이렇게 멋진 분을 유고작으로 처음 만났다는 사실에 너무나 아쉬워했었다. 훗날 알게 된 이야기지만, 김현의 빈소에서 문인들이 모여 “앞으로 백 년 동안 야만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며 김현 선생의 죽음을 두고 한 사람의 문인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 문단의 커다란 상실로 받아들였다 한다. 또 김현 선생의 제자인 시인 황지우는 김현 선생이 등단한 1962년부터 타계하신 1990년까지의 한국 문학은 김현 비평에 의해 축복받았다고 했다 한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김현 선생의 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느낌 하나. 김현 선생과 동시대를 살며 글줄 깨나 쓴다는 혹은, 작가의 길로 막 접어들려는 신참들은 대단한 행운의 시대를 살지 않았나 싶다. 그의 절제된 칭찬에 창작 욕구는 마구 솟아났을 테고 그의 혹평은 날카롭고 아팠으리라. 하지만 작가라는 타이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열렬히 자신의 작품을 읽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었으리라. 엄청나게 방대한 독서량이 눈에 띈다. 한 해 동안 쏟아져 나오는 거의 모든 저작물들을 챙겨 본 듯하다. 대가나 신참을 가리지 않고 그만이 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충고도 아끼지 않고 쏟아낸다. 몇 가지 옮겨보면... 황동규의 <악어를 조심하라고?>(문지,1986)도 활달하지만 직관의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성숙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명료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깊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숙은 두터움이 더 강조되는 어휘이고, 명료성은 논리성 사상성이 더 강조되는 어휘이다. 직관의 깊이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어우러져 있다. 그의 그 깊이는 "계단을 기어 올라가 옥상 난간에 뜨거운 배를 대고"있는 악어의 시선의 깊이이다. 그 높이 있음이 별을 향한 초월적 바람의 의지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는,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하강적 바람의 의지라는 데 그의 시의 특징이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엘리트주의일까? (52쪽) 정호승의 <새벽 편지>(민음사,1987)는 애절하게 아름답다. 피 묻은 별의 그리움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시는 절제된 슬픔 때문에 애절하다. 피 묻은 별의 그리움이란 자유를 향한 그리움에는 피가 묻게 마련이다는 정치적 상상력의 시적 치환이지만, 그 치환이 경직화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 그의 시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 세계의 폭과 깊이는 좁고 얕다. (117쪽) 최하림의 <겨울 깊은 물소리>(열음사, 1988)를 공들여 읽었으나 깊은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리듬하고 별 관계없어 보이는 전라도 사투리며, 라이 보리 같은 외래어도 눈에 설었다. 시, 말, 새, 바다 등의 어휘들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그의 사유가 어디에 가 있나 짐작이 가지만, 그렇다고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산물 <말과 현실>이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결국 초기시의 세계로 되돌아왔는데, 초기시의 가난은 없어지고, 그렇다고 그 다음의 정열도 없어져, 기교만 남은 느낌이다. (131쪽) 최성각의 <잠자는 불>(민음사, 1988)은 읽힌다. 그러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울림이 옅어서, 재치도 재치 같지가 않고, 고통도 고통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마르셀 에메처럼 가볍게 날지도 못한다. 우화적이지도 않다. 그럼 뭣일까? 지루한 가벼움이랄까. 가난도, 사랑도, 데모도....다 둔하게, 지루하게 가볍다('잠자는 불' "앞으로 가는 고기"......'모르는 사람들') 악마 같은 고통이 더 필요하다. 김선학의 <현실과 언어의 그늘>(민음사, 1988)도 마찬가지다. 꼼꼼히 읽어보면, 별로 틀린 소리 같지 않은데, 지루하다. 모범 답안 같은 비평을 보는 지루함이다. (198쪽) 안도현의 <모닥불>(창비,1989)은 재미없다. 체험의 폭도 좁고(평교사의 지루한 체험), 사유의 깊이도 없다, 아니 없어 보인다.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의식이 무의식을 완전히 억압하고 있다. 좋은 교사, 좋은 시민. 옳다고 알려진 것만을 사유하는 젊은 시인의 그 순응주의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의 재능이 이 정도였는가? (218쪽) 지금은 한국문학의 대가의 위치에 올라있는 김훈에 대한 글도 인상적이다. 한국일보 기자 시절의 김훈의 풋풋한 글에 대한 평이 절로 웃음 짓게 한다. 한국일보 사보(1987년 봄호)가 갑자기 내 손에 들어왔다. 웬일로 한국일보가 그것을 보내줬나 모르겠다. 천천히 읽어나가다가, 김훈의 '문학기행 유감'을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은 기자의 글로서는 거의 파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한 찬반이다, 그의 남의 글에 대한 찬반은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의 글을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애정/증오가 그의 글쓰기의 밑바닥에 있음을 알겠다. 그는 깊게 사랑하거나 짙게 미워한다. .......그의 글은 거침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으나, 그 생각난 대로 씌어진 것들은 훌륭하게 이음새 없이 붙어 있다. (96쪽)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 1989)은 김훈 특유의 화려한 수사의 모음이다. 그의 글은 이상하게도 일상적인 삶을 그가 묘사하고 있을 때에도 화려하다. 그 이유는 그가 "업과 더불어 짜증과 더불어 모자람과 더불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는 데에 있다. 자기 삶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글은 어떤 경우에도 수사쪽으로 기운다. 소박도 그때에는 하나의 수사이다. 그 수사가 남의 감정을 뒤흔든다. 그 수사에는 흔히 삶의 진수가 숨어 있다. "판소리의 바탕은 한국의 산하와 한국의 자연, 그리고 거기서 벌어진 삶의 내용 전체"(269)라든가 북을 만드는 데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죽은 늙은 황소의 가죽이"(286)좋다. 라고 그가 쓸 때, 그의 수사는 수사 이상이다. 그의 책-세상 읽기는 사람 읽기에 다름 아니다. (266쪽)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김현의 비평을 통해서 시적 신분증을 얻었다 하는 송욱 선생의 글을 보면서 아마도 그 시대 문인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되돌아가는 진로>(문예중앙, 1986년 겨울호)를 보니, 박태순이 내 글을 괴팍하다고 했다고 한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 (57쪽) 책상을 뒤지다가 송욱 선생의 글을 한 편 발견했다. 아, 그런 글이 있었지. 학장을 그만둔 뒤 너무 쓸쓸해해서, 그의 시선집을 만들자고 말해, 거기에 해설을 썼는데, 책이 나온 뒤에, 중국 그림 전시회에서 복사판을 한 장 사다주면서 이 글을 주셨다. 과분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김현의 '말과 우주'를 읽고 사람의 몸은 거울이 없고 보면 제 눈으로는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는 아마 우리 존재가 실존적이라는 뜻을 드러내는 사실이리라. 그의 글을 일고 나는 대중탕에 걸려 있는 큰 거울을 생각한다. 내 온몸을 비추어주는 겅루을, 그러나 그의 글은 그러한 거울과 흡사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매우 다른 측면이 더욱 중요한 아주 희귀한 거울이다. 이십대에서 사십대에 이르는 시인으로서의 내 전신상을 드러내주는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 시의 독자들에 있어서랴! 나는 그의 글에서 내 시적 신분증을 얻었다. 하물며 독자 여러분들에 있어서랴! 그의 이 글에서 내 시론인 시적 평전에 없는 방법을 보여준다. 하물며 내 시론의 독자들에 있어서랴! 우리는 그의 글을 읽고 비로소 시가 실존의 표현임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제 눈으로는 자기 시의 온몸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는 아직 젊다. 그에게 장차 눈부신 변신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1987년 3월 16일, 송욱 마지막 몇 해의 일기에서는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처럼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 눈에 띈다. 삶의 순간순간이 죽음과의 싸움인데 그것을 모르고 희희낙락 지낸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면 죽음의 실감도 없으리라. 많이 아프라, 죽음이 너를 무서워하도록. (232쪽) 어떻든 한 젊은 시인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남아 그를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231쪽) 젊고 재능 있는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김현은 그의 유고시집의 해설을 썼다. 바로 그 젊고 재능 있는 시인이 기형도다. 기형도의 누이를 만나 기형도의 살아생전의 이야기들과 가족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일화도 이 일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요절한 시인을 안타까워하더니 기형도가 세상을 떠난 그 다음해 김현도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천재는 요절을 하는 건지, 요절이 천재를 만드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재능의 수혜를 오래도록 받고 싶어 하는 평범한 독자인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29세의 기형도, 48세의 김현, 63세의 이윤기. 이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이들이 쏟아낼 미지의 글들을 손에 만져보지도 못하고 빼앗겨 버린 것 같은 애달픔이다. 그것들은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
| 김현 선생님은 천재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는 그의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이 남겨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말은 선생님의 연구가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를 우상화하는 발언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연구는 탁월하다.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황금의 비평가로 알려진 김현 선생님의 연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특히 그러하다. 김현 선생님은 한국에서 좀 더 사셨어야 했다. 그렇게 짧게 세상을 떠나시기엔 너무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내가 국문과 학생이거나 불문과 학생이 아니면서 김현 선생님의 전집을 모두 소장하고 있고, 그가 번역한 책이라든가 유고집, 그리고 이 일기를 소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전범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적어도 선생님이 보통 사람의 수명을 사셨다면 한국에 인문학은 훨씬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시집에서 때로 만나는 그의 해설이나, 서점에 몇권은 꼽혀 있는 그의 책은 나에게 반갑다. 존경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전공자는 아니여도, 김현 선생님의 해설은 나에게 많은 공감을 주었고, 날카롭다. 그가 해설을 써준 시집은 단번에 급부상한다는 이야기도 그런 의미이다. 물론, 이것은 선생님께서 당시 출판된 소설이나 시는 거의다 읽어보셨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학자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이것은 장정일씨의 독서일기과 같은 책이 아니다. 여러 영역을 아우르면서도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깊이를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이란 것은 이렇게 아이러니컬한 것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학문과 일치시켰던 이 학자의 삶도 빼앗으려 했으니... 이 일기를 읽고 있으면, 사적 영역에서도 학자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진정한 학자의 모습이란 이런 열정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학자가 한 평생 하지 못할 것을 40대의 나이에 하고 가버린 선생님을 추모하며, 그를 애도한다. 아울러, 그의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나의 전공과 겹치는 지라르나 푸코에 대한 연구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감사한다. 이 일기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 그 자체이다. 사람이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에 도취해 있다는 것. 이 책은 가장 뜨겁고 강렬하게 그것을 보여준다. 김현 선생님을 私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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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의 사유에는 각자의 방향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동시에 사유는 얼마만큼 깊어지며, 깊어지다 자신만의 것으로 굳어지는 관념적 지점은 어디일까?'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며 접한 철학이 자신의 사유에 많은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여러 생각의 근간들이 일기의 곳곳에서 보인다. 때로 보이는 나의 생각과 살짝 갈등을 일으키는 지점에서는 사유의 방향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내가 전공한 것과는 다른, 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사유의 바탕은 단지 스스로의 노력으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어디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인가? 마주한 사유의 바탕을 통해 나는 바른 방향으로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일기의 주인공은 과연 어떤 곳에서 그런 사유의 바탕들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일기는 저자가 사망하기 전 몇 년간의 기록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 수록 생각이 굳어진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생각은 마지막 숨이 멎을때까지 유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저자의 까칠하기까지 한 판단과 비평에서 그런 굳어진 생각을 느낀다. 물론 아집이라기 보다는 견고하고 단단한 바탕이다. 스스럼없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판단력은 시간과 관념적 깊이의 어느지점에서 굳어지는 것인가, 또는 완성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동시에 좀 더 조심스럽고 유연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에는 주로 시에 대한 비평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시를 잘 모르기에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는 부분이고, 소설에 대한 비평에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평이나 분석, 그리고 작가에 대한 생각을 풀어낼 때에는 서슴없는 판단과 비판이 시원시원하다. 그런 판단과 비판의 근원은 어디에서 완성된 것인가. 나도 스스로의 판단에 있어 이런 시원시원함을 언제쯤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삶의 순간순간에 나오는 생각의 편린들은 판단과 비판의 모습들과 어떤 연계를 가지는가.. 때로의 아집도 보이지만 부족하지 않게 채워진 생각의 바탕을 느끼며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는 책이었다.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이란 나를 돌아보는 일인가보다. |
| 우리나라 문학 비평계의 사라지지 않을 큰 별이라는 김현 선생의 유고 일기 원고로 구성된 이 책은 진정한 책읽기의 매력을 진지하고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다. 책을 접하며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차례 부분의 문구였다. <해제>라 표시된 곳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 죽음을 응시하는 삶-읽기와 삶-쓰기 ... 문학 비평을 업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죽음 앞에서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듯 해 숙연해진 마음으로 선생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생활에 대한-특히 등산에 대한-사적 기록들이나 단상들이 간혹 눈에 띄였지만 이 책의 대부분은 시, 소설, 비평서, 철학서, 사회과학서, 고전 작품 등 방대한 독서에 대한 꼼꼼한 사유의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그냥 읽고 지나가기 아까운 날카로운 지적들이지만 그 중에 몇몇 인상깊은 비평들을 떠올려 본다.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서점가를 장식하고 있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대해서는 왜 사는가 하는 문제를 실존적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삶의 의미가 단일하고 영원하다는 광신주의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길 중의 하나이며 광신주의가 문화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는 교훈을 끌어내고 있다. 황동규의 시집 <악어를 조심하라고="">에서는 그의 시선의 깊이를 논하면서 지식인의 하강 의지를 지적하고 있으며, 장정일의 첫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대해서는 재치·유머가 극적 구성 속에 넘쳐흐른다고 칭찬하면서도 그가 섹스 과잉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그런다면 그는 아마 성공하는 순간에 무너지기 쉬울 것이라는 날카로운 비평을 펼친다. 이 글이 10년 전의 것임을 생각한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구속 사건으로 그의 예감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실현된 지금, 정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삽화들>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롤랑 바르뜨의 깔끔한 단문의 매력을 높이 사고 있고 푸코의 여러 책들에 대해서는 주로 권력에 의해 제공되는 이데올로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전원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의 <꽃산 가는="" 길="">을 읽으면서는 제스처의 왕성함이 아니라 감정의 절실함만이 독자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이긴 사람의 기록은 너무 많이 선전되고 홍보되기에 지식으로 들어오며, 지식이 된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고 지적하고, 패한 자의 기록은 증오를 낳지 않고 패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낳는다고 밝힌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일종의 해체소설이라는 소감을 피력하고는 흥미있었던 성찰 몇 개를 옮겨놓고 있다. 백 쇄를 넘어선지 오래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인물들, 특히 빨치산들에게 살아있는 성격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토지>나 <장길산>을 훨씬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외에도 문학에 대한 선생의 소견이 나오는데,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까닭을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쓰고 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 지를 우선 알아야 하고 그 앎에 대한 요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는 것이다. 꽤 타당성 있는 의견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야단치는 비평가들의 당당함은 자신들은 진리를 쥐고 있다는 사제적 권력의 한 전형적 모습이라며 안타까워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 부분을 대하고 보니 정말 선생의 글은 자기 과시나 독설, 말장난이 결코 아닌 진정한 비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방식에 있어서도 괜한 멋을 부리지 않은 단장 형태의 정련된 문장들이 담백한 사유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느낌이다. 늘 공정한 판단에 근거한 좋은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있곤 했는데, 아직까지도 우리 나라 최고의 비평가로 평가되는 김현 선생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독서 의견은 앞으로 읽을 책을 선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정적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가치나 통념을 한번 뒤집어 생각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평은 물론이고 모든 창조적 활동의 원동력이 아닐까. 다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것은 반드시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진지한 자기 반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은 부정적 상상력은 깊이가 없는 위선적 행위가 될 것이다. 김현 선생의 이 유고 일기는 진정한 비평가의 자세와 책읽기의 매혹을 일깨워 주는 보석같은 글임을 느끼며, <행복한 책읽기="">란 제목이 이 책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생각해 본다.행복한>장길산>토지>태백산맥>참을>남부군>꽃산>삽화들>내게>햄버거에>악어를>장미의>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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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멘토도 알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도 없이 근본없는 책읽기를 해온 탓에 알아야 할 것의 대부분을 모르고 지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그의 일기이며 또한 독서 기록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그 시기에 문학을 추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수도 있겠으나 그 시기에 활동한 많은 한국작가들의 전성기가 80년대를 넘어 내 대학시절과 겹쳐진다는 걸 생각하면 변변한 문학잡지 한권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내 게으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에는 그당시 발표되었던 수많은 작품들과 전성기를 보내던 작가들.. 박경리, 고은, 조정래, 황석영, 김지하, 김원일, 이청준, 김주영 등의 이름이 가득하며, 게다가 실시간으로 - 태백산맥이 한권씩 발표되고 있으며, 김지하는 감옥에 드나들고, 87년의 항쟁까지 - 펼쳐지고 있다.
그는 궁금해한다. '역사가 87년을 기억할까?'
당시에는 욕망이라는 주제가 주류였던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욕망이라는 단어가 계속 보인다. 의외로 사적인 일기장에서조차 이데올로기에 중립적인 모습이 의아하다.
▶ 기억에 남는 글
-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 [25]
-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28]
- 포크너의 기억할 만한 말 : "가장 서글픈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계속 밥을 먹을 수도 없으며, 또 여덟 시간씩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할 수도 없지요.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지요" [31]
-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다는 소설 기법의 기원 중의 하나가 '천일야화'라는 것도 분명하다 [46]
-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음알음의 알음, 앎의 대상이다. 아는 물건 같다가 아름답다의 어원이다 [50]
- 조정래의 태백산맥 1,2,3 : 정치 의식의 깊이에선 김원일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스케일의 크기에선 박경리를 따르지 못하고, 낭만적 사랑의 울림에선 김주영을 못 따른다.... 그러나 읽힌다. [51]
- 그 작가는, 바다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다. [55]
-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 [57]
- 천국의 여인에게 마음은 끌리지만, 몸도 끌리지는 않는다 [57]
- 사제 목에 걸린 철십자가에 못박힌 노동자 나의 안락이 너를 못박았다 이 짐승들아 가슴을 친다고 그게 뽑혀지느냐 (황지우의 시 중에서) [69]
- 구멍의 공에 제일 깊게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노자이다. 그는 항아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항아리의 텅 빈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빈 곳이 있어야 채울 마음이 생겨난다. 공은 행위, 욕망의 행위의 밑바닥이다 [71]
- 재미있는 루카치의 비유 하나 : "마르크시즘은 철학적 개념의 히말라야 산맥이지만, 히말라야에서 뛰어노는 꼬마 토끼가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76]
- 샤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욕망이다. 욕망은 인간을 관계 속에 집어넣으며, 그 관계의 의미들 속에 집어넣는다. 그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샤르트르는 앞의 것을 실존적 정신분석이라고 부르고, 뒤의 것을 사물과 그것의 질의 정신분석이라고 부른다 [78]
-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다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79]
- 도스트예프스키의 재능 중의 하나는 인간이란 두껍고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혼합물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데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인간은 단순하고 명료하지가 않다 [81]
-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사람의 혼자 있고 싶어하는 욕망과 같이 있고 싶어하는 욕망 사이의 갈등이며, 잘난 척 옆 사람을 관찰하고, 옆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촌평을 하는 - 그것도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빈 공책에! - 글쟁이의 버릇이다 [82]
- 난 감잡고 있지, 이 삶에 대해, 감잡고 있지, 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잘 안맞아 돌아가는 것을.... (김경란의 시중에서)[86]
- 무애지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초연한 척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는, 기쁘면 뛰어놀고, 슬프면 울고, 가슴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지르는 활달함이 아닐까 한다 [94]
- 욕망이 부재의 현존이라는 것의 예를 코제브는 목마름으로 들고 있다. 물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물의 부재라는 것이다 [95]
- 김지하의 '애린'은 1971년 10월 이후부터 해남살이의 일기이다. 형태는 서정시이지만 각각의 시는 일기의 한부분으로 읽혀야 한다. 그것은 그 시들이 자의적인 시간 끊음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느 날 쓰고... 어느 날 안쓴다. 그것이 그의 시적 원리이다. 일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적 성찰에 가깝다. 그가 산 하루를 다시 추억해야 그는 일기를 쓸 수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그는 갇혀 있다. 그 마음의 감옥에서, 그는 혼자이며,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는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다보면, 자아는 분열되어, 한쪽에선 주장하고 한쪽에선 가엾어한다. 술 마시는 자아는 주장하고 그 자아를 보는 자아는 그 자아를 가엾게 생각한다. [105]
- 6.29 세대가 생겨날까요? 서구나 일본처럼, 감각적이고 충동적이고, 정치엔 무관심한 세대 말이지요 [135]
- 정치에 무관심해지면 문학에도 무관심해지지 않을까요 [135]
- 사람은 두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정신적으로 죽는다. 그 죽음관은 프루스트가 정석화했고, 바르트가 그의 사진론에서 다시 환기시킨 죽음관인데, 그것을 그르니에의 에세를 읽다가 다시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을 왜 좋아하는 척하는 것일까? 깊이도 고통도 없는 글들을 [136]
- 똑같은 현상의 아주 다른 표현들 : 여당내의 진통, 난산은 미묘한 역학 관계로 표현되고, 야당내의 싸움은 분열, 흉작, 상호 비방.... 등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없는 싸움으로, 또 하나는 과열된 싸움으로 이해된다. 오, 말의 양날이여! [143]
- 오랜 행상 때문에 신경통이 팔,다리에 밴 어머니에게 굴비나 사드리려고 수산시장에 간 시인은 굴비 두름에서 굴비보다 싸게 엮여 들어간 친구를 떠올리고, 굴비장수의 "살 것인가, 안 살 것인가"는 질문에 "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149]
- 건망증이 심하다를 옛날에는 어떻게 썼는지 아십니까? 잊음이 많다에요 [162]
-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 우리는 잘살아야 하고, 잘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물질적으로 잘산다는 것을, 그는, 그냥 잘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조금 부유해졌다고, 과연 잘사는 것일까? 그는 물질을 올리고, 정신/신앙/문화를 낮춘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다. 언제까지?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 쾌락만 남을 때까지?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 [167]
-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이 없이는 느낄 수 없다 [168]
-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 [178]
- 설악산 등산팀의 해단식에서 홍성원에게 들은 말 : 이문열의 이천집을 지켜주는 녀석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이문열의 아버지가 교수직에서 정년 퇴직해서 신의주에서 살고 있다대. 이문열의 우파적 발상은 그것과도 관계 있을 거야. 아마 거기 가보고 싶은 모양이던데, 모든 사유의 뒤에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나보다. 여하튼 그 소리를 들으니, 그의 상당수의 행위가 이해된다. 그도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271]
- 조정래는 큰일을 하나 했다. 그것은 '토지'나 '장길산'을 많이 뛰어넘고 있다 (태백산맥에 대해)[281]
-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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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이니 데리다니 구조주의니 탈구조주의니 프랑스어 사전과 씨름하느라 진땀흘리던 17~8년 전 불어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인데...김현 선생님의 행복한 책읽기를 펴들고 행복한 책읽기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나는 싫다. 자리매김이란 관계 맺기, 관계 지우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번 자리가 맺어지면 변경하기가 힘들다. 변화를 전제하지 않은 자리매김이란 딱지 붙이기에 다름아니다."
지난달 모임에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탐방하러 갔다가 이산가족을 만난 기분으로 모셔온 책이지... 누렇게 빛이 바랜 책이지만 새책을 사 본 느낌과 퍽 다르다. 헌책을 별루 좋아하진 않지만, 때론 이렇게 기억에서 알뜰이 비워내진 옛 보물들을 찾아낸 기분 흐믓해서 좋다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날짜를 쓰고 일기형식을 빌린 또 하나의 critique text를 읽는 이 쏠쏠한 느낌을 보수동에서 이시가리 회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떠들던 그때엔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행복한 책읽기의 즐거움이 마르기 전에 책읽기의 괴로움에도 푹 빠져봐야겠다...신록과 계절의 여왕, 가슴아픈 또 하나의 계절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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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현의 1986년에서 1989년까지 일기를 책으로 출간한 "행복한 책읽기"는 다시 보아도 그의 천재성에 놀라게 된다. 방대한 독서량과 천재성으로 무장한 김현은 문장에서의 적확성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의 평론을 읽노라면 '과학적 글쓰기'라고 명명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김춘수의 신작 에세이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을 읽었는데, 납득이 잘 안 되는 대목이 많다. 단절된 연상들을 연결시켜 시적 ㅎ효과를 내는 방법이 에세이에서는 별로 큰 효과를 못 내고 있다. 아니, 그의 연상들이 너무 피상적이다.(P.15)" "김용택의 <맑은 날>은 지루하고 상투적이다. 농촌 세계의 가족적 정황이 수필같이 드러나 있으나 감동을 주진 않는다. 민요 쪽으로 빠져나가면 출구가 있을지 모른다....(P.43)" 에서 보듯이 당사자에게는 거슬릴만한 내용의 비평에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의 비평은 그만큼 예리하고,정확하다. "미국 영화가 자꾸만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지적 힘이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자기 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선전해야만 안심이 되는 나라는 이미 그렇게 좋은 나라가 아니다.(P.47)"에서 보여지듯 일기로 쓰는 그의 생각은 옷매무새를 정갈히 한 새색시처럼 풀어지거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죽음에 다다른 마지막 몇 해 동안, 그의 직관은 타인의 글을 향하고 있다. 참 좋은 책이다. 다만 그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 "행복한 책읽기"를 다 읽었다. 다 읽었다고 말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첫장에서 넘기기 시작한 책장을 마지막까지 넘겨대서 책을 뒤집어 놓았다. 김현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울대 불문과 교수였고, "문학과 지성"을 이끌어온 이였고, 문학비평가이면서, 그 자신의 산문은 "김현체"로 불릴 만큼 숭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실 내가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고종석의 글을 통해서이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이를 내가 좋아하는 단아한 글을 쓰는 이가 감히 따라가지 못할 사람으로 추모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 받았었다. 서점에 들리면 전 15권으로 발간된 김현 전집을 두고 만지작 만지작...꺼내서 대강이나마 읽어보면 온통 시에 소설에 대한 비평, 푸코와 샤르트르, 루카치, 발리바르... 이건 내가 볼만한 게 아니군... 부족한 내공을 절감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던 것이었으니. 그러다 단행본 "행복한 책읽기"를 발견. 낼름 사버렸고 조금씩 조금씩 읽어나갔다. 중앙일보의 토요일 북 섹션 제목이 "행복한 책읽기"인데... 독서일기라고 불릴만한 형식으로 책을 쓰는 이들 중 장정일의 홍수같은 독서감상을 훑어보고는 다소 질려버린 경험이 있고,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접근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 하는 반감도 슬쩍. 그런데 김현의 책은 달랐다. 이건 마치, 이미테이션. 카피를 보고 질려버린 경험을 가진 이가 우연히 원작을 보고 감동을 먹는 그런 느낌? 독서가 주가 아니면서도 종도 아닌, 그 오묘한 글쓰기의 마력. 달리 先事를 알 길이 없기에 김현의 글쓰기가 알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풍덩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책을 온전하게 소화해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모르는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이 나오기에 감당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면 부득불 스킵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그 부분만을 섭식했어도 얼마간은 행복하다. 소박하게나마 김현처럼 할 수 있기를 꿈꿔본다.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유고집이다만, 그래도 좋다. 바라건대, 책을 읽고 소화해내는 속도가 책을 쌓아두고 더부룩해하는 속도 보다 빠르기를. 현대는 속도전이다. 전쟁이었네.. 그래도 행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