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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책 제목이기도 한 '풀밭 위의 돼지'라는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소재로 삼았다. 아버지는 아내, 돼지와 함께 산다. 집 앞마당 풀밭에 누워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철학교수인 아들이 찾아와 어머니는 오래전에 죽었으니 자신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자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못마땅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긴다.
저자가 2005년 등단할 때 발표한 작품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은 괴기하다. 내용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 이지는 않다. 죽은 아버지의 혼령이 들어있는 녹색 유리병이 등장한다. 뚜껑을 열면 죽은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다. 가족들과 대화까지 나눈다.
'유리방'이란 작품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유리방에서 있는 스트립걸이다. 그녀를 보는 남성의 시점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이어 스트립걸 시각이 따라붙는다. 어느 곳에도 안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한 듯하다. 다른 작품 '벙어리'에서 주인공은 계모와 이복 여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벙어리인 양 행동하며 산다. 수화를 배워 대화를 시도하는 여동생을 통해 핏줄의 의미가 강조된다.
대충 줄거리와 특징을 나열했지만 공통점이 없다. 소설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쉽고 짧고 단순하다. 다만, 같은 주제라도 새로운 발상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발상이란, 어떻게 보면 정신병적인, 좋게 말하면 4차원적이다. 독자는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형이상학적인 내용은 아니므로 이 저자의 '새로운 발상'에 친숙해지면 중독될 작품들이다. 마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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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혹은 우리는 개인가 ? 돼지인가 ? 아님 개가되지 못한 돼지인가 ? 돼지가 되고 싶은 개인가?
나 , 너, 우리는 기호같이 주어진 이름이 있을텐데, 너는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너 또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서로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바라본다. 개, 혹은 돼지를. 너는 소리친다, 나에게, 우리에게 " 나 여기 있어" 라고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그냥 돼지 소리처럼 퀠퀠퀠
나, 너 , 우리는 익명성의 다른 모습일까 ? 나는 너와 교류하고 대화하고 우리는 섹스도 하지만, 그냥 우리가 되지 못한 너, 나일뿐. 나는 늘 생각한다. 그러나 머리만 아플뿐 나를 찾지를 못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 벌레처럼 걷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의 피곤함. 이 피곤함이 나의 삶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 유리를 통해 너를 보고 있다 . 너는 유리방에 갇혀 있다, 아니, 갇혀 있다 라는 말은 틀렸는지도 모른다. 너는 유리방에 살고 있다.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다면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 "
- 유리방 중에서 - p 89
나,너,우리 인간이 살면서 타인과 관계를 규정 지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말이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관계맺음에 흔히 태어나면서 주어진 이름으로 서로를 호칭하지만, 관계를 규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주어진 호칭이 배제된 관계속에서 나를 찾아가려 하지만, 늘 가로막는것은 너, 우리라는 말. 이를 배제하고 나를 찾기위해 내 의식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저들어가지만, 찾지 못하는 나의 모습. 관계를 벗어나 내가 중심이 되고자 하는 현대인으로서의 나. 그러나 , 나를 찾기 못하는 나 빙빙도는 의식의 흐름만이 있는 것일까 ? 책을 덮으면 긴 의문부호가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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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기술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 쓸모없는 생각이라고 되풀이하면서도 이 작가의 생각은 쉽사리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마치 웃찾사의 한 코너인 ‘웅이 아버지’의 나레이터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아빠에서 이웃집 아저씨로 폴짝폴짝 잘도 옮겨 다닌다. 그런데 문제는 ‘웅이 아버지’만큼 재미있지는 않다는 것, 그래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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