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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혀 다르게 사는 삶이 가능할까?'
30년간 고전문헌학을 가르쳐온 김나지움 교사 그레고리우스. 출근길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을 만나면서 혼란이 시작되고, 그로부터 갑자기 모든 게 변한다. 익숙한 삶에 이별을 고하고 자아를 찾아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게 되는데.. 처음엔 제목만 보고 첩보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느 순가 찾아온, 일탈에의 강렬한 끌림. 자석같이 끌어당기는 지적 호기심. 책을 읽는 내내 그레고리우스를 부러워 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구절이 있어 남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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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제 2 권, 134 쪽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어떤 소설은 쉽게 규정지을 수 없다. 대체, 이 소설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평론가들은 작품을 분해하고 그것을 둘러싼 의미망을 추적하려 하지만 독자들은 그들의 해석에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평범한 나의 독서는 왜 그런 명쾌한 정의와 분석에 가닿지 못할까? 열패감을 안기기도 한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명사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첫 독서에서 큰 감동과 끌림을 남기지 못했다. 내가 이 소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어둔 책을 두 번, 세 번 훑으면서부터다. 곱씹을수록 대단한 문장들이 내 눈에 선명히 와서 박혔고 작가가 문장속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우리 삶을 비추어주는 철학이 예사롭지 않은 통찰력 속에 담겨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두 번 읽고 서평을 쓰게 된다면 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할 것이다.
더군다나 독자들은 이 소설에 대한 예비적 지식이나 추측이 쓸모 없는 착각이런 걸 곧 깨닫게 된다. 제목에서 암시되는 `기차'라는 사물이 갖는 상징성은 지극히 약하게 보인다. 그게 일단은 착각일지라도 ! `일상이 낯설어진 한 남자의 돌연한 일탈'과 그에 얽힌 흥미진진 뒷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그게 이 소설의 발단일지라도 !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독자들은 제목과 출판사의 멋들어진 홍보문구를 보고 책을 잡았을 듯 하다. 사건의 발단은 독자들을 강렬히 유인한다. 한번의 이혼경력을 갖고 있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예순을 바라보는 스위스의 베른, 김나지움의 고전어 선생이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문두스(Mundus, 세계, 우주, 하늘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의 완벽한 수업 능력과 고전어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더군다나 30년 동안 그의 일상은 단조롭고 규칙적이었다.
그런 그가 아침 출근길에 김나지움과 연결되는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우연찮게 구한다. 이 여인과의 대화 한 구절이 그의 잔잔한 일생에 전환점이 된다. "모국어가 뭐지요?" "포르투케스(Portugues)" 그녀는 포루투칼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다. 평소 언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문두스'에게 이 소리는 하루종일이라도 들을 수 있는 멜로디였다. 서점에 들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는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포루투칼어로 쓴 것이었고, 지은이는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사람이었다. 번역을 통해서야 한 구절 진도를 낼 수 있는 그 책은 묘한 감동과 느낌을 전해준다. 드디어, 그레고리우스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는 시도' 즉 프라두의 고향이자 조국인 도시, 포루투칼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한다.
하여,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고 봐야 한다. 소설은 짧은 열차여행을 포착한다. 소설은 리스본에 도착한 문두스가 프라두의 삶의 궤적을 쫓는 것' 그리고 그가 작품 <언어의 연금술사>를 번역해 조금씩 읽어내는게 전부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의 내용이란게 고작 프라두라는 인물이 포루투칼의 독재 시절을 살아온 이력을 추적하는 것이다.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 서사에는 흡입력이 약하다. 이 작품이 뛰어난 점은 다른 곳에 있다. 책 속의 책인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조금씩 번역해 소개하는 그 문장들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드러내고픈 이야기의 진실, 알맹이였다.
"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 제 2 권, 30쪽
`프라두'라는 인물은 여러가지로 화자 `그레고리우스'와 연관된 인물이다. 그들은 태생도, 자라온 환경도, 달랐다. 프라두가 귀족 가문의 엄한 법률가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고, 귀하게 자랐다면, 그레고리우스는 박물관의 경비원 아버지를 둔 가난한 집 출신이다. 스위스와 포투투칼이라는 지리와 역사적 배경 또한 다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이 두 인물의 유사성에 대한 의혹을 품고 나가게 된다. 이 유사성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는 세가지다. 바로 `언어와 글쓰기, 그리고 존재론적 사유'다. 독자는 메르시어와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프라두를 잇는 이상한 유사점을 눈치챈다. 그들은 고전어 강사요, 언어학자요, 작가였다. 언어라는 공통항이 그들 삶을 묶고 있는 끈이었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고전어로 대표되는 언어의 세계에서 행복과 존재의 이유를 찾은게 그레고리우스다. 그런데 그가 감행한 일탈이란게 또다시 `언어'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집착 때문이란게 놀랍다. 자살하려던 여인에게서 들려온 새로운 언어, 포르투게스가 낯선 세계, 낯선 인물로 그를 이끌어 낸다. 질서정연했던 한 인간의 삶에 벼락 같은 충격을 안긴 것이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로 빚어진 프라두의 책 한 권 이었다. 그 책의 제목을 보라. `언어의 연금술사' 아닌가. 왜 작가는 언어에 집착하는가?
프라두는 다방면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실력있는 고전어학자 그레고리우스를 숙연하게 만드는 `글쓰기의 천재'였다. 프라두라는 인물의 삶에는 미숙한 점이 발견된다. 아버지와 주변인물,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은 평범한 인물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언어의 연금술사'를 통해 바라본 프라두는 독자까지를 전율케 할 정도로 훌륭한 글을 써낸다. 이 소설은 프라두의 글귀를 이정표처럼 곳곳에 배치하고, 독자를 글쓰기와 사유의 세계로 인도한다. 본래의 주제로 알려졌던 60대 남성의 일탈과 방황은 서서히 잊혀지고, 남겨진 것은 언어가 빚어낼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이며, 언어와 글쓰기가 가닿을 수 있는 신비한 세계, 또 우리 삶에서 그것이 가진 의미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
" 그리고 몇 주 후에는 `왜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 " 제 1 권, 171쪽
이 소설은 흥미롭다기보다는 정교한 깊이를 선물한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을 가장한 `언어 철학'이다. 하여, 무턱대고 제목의 매력에 끌려 책을 잡은 독자들이 당황하는건 당연하다. 인내하며 도달한 마지막 장은 허무하다. 허나, 깊이 있고 사변적인 언어로 삶을 포착하려한 작가의 글을 참아낼 수 있는 독자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밑줄 그은 부분들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독자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며, 그것이 비교적 쉬운 일임을 보여준다. 그는 30년간 다녔던 출근길을 포기하고, 리스본행 열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는 전혀 연관도 없던 한 인물의 역사와 종적을 추적한다. 그 동기를 건네 준 것은 그가 일생을 거쳐 사랑한 대상 즉 `언어의 세계' 덕분이다.
"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제 1 권, 46쪽
우리 삶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혹여 집착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은 아닌가 ? 그것은 죽음과 동시에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그렇지 않다. 언어는 생명력이 강하고 특히 아름답게 빚어진 언어는 더욱 더 오랜시간 사람들의 기억속에 뿌리내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한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고 나의 존재와 나의 사유 능력을 북돋을 테다. 책장을 덮기 전, 파스칼 메르시어는 프라두의 언어를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제 2 권, 334쪽 우리가 사는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곤궁함이다.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은 언어와 사유로 대표되는 차원높은 세계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상상한다면 적절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똑같은 말을 달리 표현하고 있었다. "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제2권, 286쪽),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물리적 세계가 아닌 언어와 사유의 세계를 강조한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이 작품은 독자들의 통속적인 언어습관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가 되는 언어, `윤을 낸 대리석 같고, 바하의 변주곡 처럼 맑은' 그런 언어에 대한 갈망을 이처럼 극적으로 표출한 작품은 없을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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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가진 힘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남긴다는 것이다. 솔직히 고전을 읽으면서 너무 재밌다는 느낌보다 이 책 정말 생각할 것이 많네, 또는 왜 이렇게 어려운건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하면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전모임읽기에서 채택한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역시 소설처럼 읽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글을 곱씹으며 음미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책이다. 누구나 안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 후회 비슷한 감정은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게 선택의 연속이라 내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나이를 먹으면서 종종 하게 되는 것처럼...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우연히 편지를 읽는 한 여인을 보고 그녀에 대한 알수 없는 마음을 쫓아가며 생전 그의 일생을 통털어 한 번도 선택하지 않은 방식의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출근길의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아침에 다리 난간에 서 있는 여자의 불안정한 모습에 자살하려는 것은 아닌지 자신도 모르게 허둥대데 생전 하지 않는 실수를 하고 만다.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을 본 여인은 그에게 다가와 이마에 전화번호를 적는다. 솔직히 참 아니러니 한 만남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가르치는 학교에까지 동행하며 그의 수업을 잠시 듣고 사라진 여인... 그레고리우스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동안 눈에 담아두는데... 너무나 짧은 만남을 남기고 떠난 포르투칼 여인의 강한 흔적은 그녀가 쓰는 포르투게스어에 매료되고 그가 책방에서 만난 같은 언어의 책 한 권이 계기가 되어 저자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그는 리스본행 기차를 타러 간다. 그를 존경하고 인정하는 학생과 동료 교사들을 두고 떠난 그의 리스본행...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프라두의 삶을 쫓는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우정, 프라두와 그의 아버지, 누이들과의 관계, 친구, 저항운동, 그가 사랑했던 여인... 그녀의 글과 프라두의 글이 가진 진실, 쉼없이 철학적 사고를 이끌어내는 이야기는 결코 쉽지 읽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게 되는 책이다. 분명 매력적인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소설로 읽기에는 계연성이 살짝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솔직히 낯선 여자의 재등장이 언제 일어날지 내심 조바심을 안고 읽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끝내 들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자신과 아내와의 과거의 모습을 계속해서 생각한다. 그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한 사람의 인생을 쫓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와 같이 틀안에 묶여 있는 사람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레고리우스처럼 인생의 전환을 맞는 특별한 경험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나 역시도 현재의 내 삶에 나름 만족하지만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며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 주인공이 가진 삶은 쓸쓸하지만 안정적인 삶이라고 여겨진다. 자신이 아닌 타인... 아내에 대한 배려심을 제대로 갖지 못한 주인공이 잠시 다른 길을 걸어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앞으로 살아갈 거란 생각이 드는데 계속해서 사유를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책임에는 틀림없으며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어떤 느낌을 받을지... 책장 속에 꽂아두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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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서울역으로 간다. 주말 가정의 엄마인 내게 금요일 저녁은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일주일 동안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굳이 사주팔자를 들먹이지 않아도 내가 그냥 느낌으로 아는 '나에 대한 어떤 것'중 하나가 바로 역마살이다. 한군데 진득하니 앉아 있지 못하는 유아적인 성격 탓에 젊은 시절부터 참 많이도 사는 곳과 하는 일을 바꾸면서 살았다. 어딘가 가장 오래 눌러 앉아본 게 고작 3년 정도라면 그래, 알 만하다. 이건 거의 병적인 수준이니까. 그래서 나는 늘 무언가 한 가지를 오래 하거나 한군데 오래 있을라치면 먼저 몸이 불안해진다. 이거 이래도 되는가? 싶어져서. 그래서 그런지 기차역은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곳이다. 특히 해가 저물녘의 기차역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떠남과 돌아옴이 상존하고, 부유하는 인생이 간혹 어렵게 터를 잡은 그곳,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인생의 <다리> 같은 곳. 나는 서울역에 갈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트랙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길게 꼬리를 늘인 채 승객을 기다리고 있는 기차를 보면 풍요로워진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나는 서울역에 갈 때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생각한다. 서울역에서 올려다본 이른밤의 하늘색을 똑닮은 표지를 감고 태어난 책이다.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김나지움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교사다. 이순을 코앞에 둔 그의 삶은 단조롭고 경직되어 있다. 흡사 “박물관의 조형물” 같다. 그런 그가 생애 최초로 일탈을 감행한다. 출근길에 만난 낯선 여인이 자살을 감행하려들자 그는 몸을 던져 막는다. 놀랍게도 여인은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숫자를 적는다. 모국어가 뭐냐고 묻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여인은 “포르투게스”라고만 대답한다. 그 단어의 독특한 울림에 이끌린 그레고리우스는 돌연 일상에서 낯선 세계로 눈을 돌린다. 우연히 손에 넣은 포르투갈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들고서 일정도, 기한도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무서워졌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그리고 내가 경험한 부분과 그래서 알게 된 어떤 것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과 생경하게 부딪칠 때 <나>는 어떻게 폭발할 것인가?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그렇다면, 단지 내 인식과 인지 영역의 밖에 있으므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일까? 적어도 어느 순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지독한 오만이고 지독한 편견이었다. 그 오만과 편견을 깨주는 것은 고맙게도 늘 문학이 먼저다. 사고의 틀을 정연하게 닦아가기 전에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주고 나를 치유해주고 달래주는 마음의 위로자들, 그들이 있기에 나는 다시 힘을 얻어 생각하고 계획하고 설계하고 무언가를 정립해나간다. 오늘의 내 삶에 각인되어 있는 그 무엇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우려고,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으나 먼 곳에서 늘 나를 부르는 그 <울림과 소리>에 응답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게 아닐런지. 서울역으로 갈 때마다, 서울역으로 돌아올 때마다, 나는 그래서 떠나고 싶은 곳, 그곳을 <영원한 안데스>라 이름 붙여놓고 마음으로 그린다.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촌스럽게 컬러풀한 판초를 걸치고 얼굴에 잔뜩 낀 기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모르는 나를 찾아, 내 DNA 어딘가에 박혀 있을 원시의 꿈을 찾아 허허롭게 떠나는 그 순간을. 서울역에 갈 때마다 나는 그레고리우스가 그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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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 아주 자연스럽게 1권의 첫장을 다시 펼쳐들었다. 그날 그 다리에서 일어난 일과 세면대 거울을 바라볼 때 이미 결정난 모든 일들.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게 만든. 적어도 서점에서 오래된 포르투갈어로 씌여진 그 책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살펴봐야 했다. 앞부분을 꼼꼼하게 다시 살펴봐도 역시 어려운 책이다. 마치 추리소설처럼 - 추리소설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 짜여 있는 구성의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고 각각의 구성요소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것도 쉽지 않았다. 40년간을 고전문헌 교사로 살아온, 동시에 열두명과 체스를 둘 수 있는 그런 기억력과 특히 언어에 대한 타고난 능력을 가진 그레고리우스와 역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포르투갈의 의사 프라두의 연관관계에 대한 연상이 도무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우연히 만난 프라두의 생애를 통해 그레고리우스가 어떤 자기 성찰을 하게 되는 낯설지 않은 스토리라고도 생각되었지만, 그의 삶을 탐구하면서 그레고리우스가 얻은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의 현기증은 예전부터 시작된 증상이고 그에 대해 이미 어떤 예감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서 계속 반복되는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삶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이 그 뜻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반복되는 문장 중 하나인 '내가 느끼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아니면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에 대한 의문도 - 마치 장자의 나비이야기처럼 -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건, 역시 책을 결정지은 첫 내용처럼 '사람이 어느날 문득 아무일도 아닌 듯 모든 걸 버리고 문득 떠나는 게 가능할까?'였다. 그 시작만으로도 어려운 내용을 끝까지 좇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는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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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서평중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이젠 독어를 공부해야 하나..."
이 책의 영문번역이 형편 없었나보다. 원성이 자자하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그 형편없다는 번역본으로 만족못하겠다는 독자들의 아우성인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그럴 듯한 무언가가 있나보다.
그래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난 책이나 영화를 접할때 요즘 정보화세대처럼 사전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난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음반을 구매하면서 절대로 들어보지 않는다. 미리듣기 미리보기
무척 싫어하는 21세기적인 행태라고 생각한다.
전자제품은 데모를 시연해보고 게임도 데모플레이를 해본뒤 구매하지만 음반과 책만큼은 내게 있어선 오래전부터 그리고 오랜후까지 내 마지막 순수를 지켜줄 매개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난 들어보지않고 음반을 사며 줄거리나 작가나 캐릭터에 대한 사전정보없이 책을 구매한다. 물론 미리보기 페이지 몇장을 읽어본다. 이건 서점에서 책을 휘리릭 넘기면서 몇페이지 읽어보고 책을 집어오던 내 오랜 습관의 디지탈적인 변형이다.
출판사 서평은 되도록 읽지 않는다. 비평없는 홍보문구만 읽다보면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버린다. 내 느낌을 믿는다. 바보같이 말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한국에 루이스 피구라는 선수가 알려지기전 우연히 바르셀로나 소속 선수로 활약하던 그의 경기를 접하곤 난 그전까지 터키나 불가리아와 헷갈리고 관심없던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푹 빠져버렸었다.
리스본..그 이름만으로 흥미가 돋았다. 야간열차라...너무 뻔한 야간열차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한 진행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스본행 야간열차란 제목이 우습다. 야간열차는 그저 이 이야기속에서 주인공을 이동시켜주는 교통수단이다. 하..하... 물론 이 책을 관통하는 일탈이라는 사건의 상징적 존재가 이 열차이긴 하다
철학적인 면이 강한 책이지만 읽다보면 추리소설을 읽는듯한 기분까지든다.
자살하려는 듯 보이는 한 여자를 구한 그레고리우스.. 그런 그의 반쯤 벗겨진 이마에 무언가 급하게 싸인펜으로 적는 그녀..
이 우스운 사건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그레고리우스라는 평생을 고전문헌을 연구하고 가르쳐온 한 노교수에게서 너무나 단조로운 삶을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를 탈출시켜버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태워서 말이다.
난생 처음 가보는 곳 전혀 모르는 언어 낯설고 이질적인 일탈에 의한 상황 속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쌓아온 그리고 쌓아가는 그래서 나날이 견고해져만 가는 우리의 단조롭고 기계화되어가는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이미 견고해져버린 한 중년의 남자 , 그레고리우스를 통해서 더 늦기전에 새로운 도전과 자아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
그는 낯선 리스본이라는 도시 속에서 어느 곳이나 그랬던 현재의 우리 조국이 그러하듯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고 철권통치를 시도하던 시절 그에 희생당한 이 하지만 그레고리우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미 죽어사라진 한남자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맹목적으로 찾아 헤매이며,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과 인간의 양면성 속에서 우리들의 숨겨진 혹은 내재된 이중성과 이중잣대를 끄집어낸다.
정권의 개이며 공포의 대상인 비밀경찰의 고문전문가를 돈없는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아온 그래서 모두에게 추앙의 대상이던 한 의사가 살려낸 일 그리고 그로인해 자신들이 아프고 돈없을때 도와주던 그 의사를 향해 돈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의 양면성과 군중심리에 또한번 휘둘리는 대중의 이중잣대.. 사람이기에 살려야하는 의사와 사람을 죽이는 그이기에 죽였어야 한다며 은인이던 의사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
그레고리우스는 수십년이 지난 그 일을 뒤쫓는다. 그러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과 그 안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군상과 저마다의 시선으로만 보려하는 인간의 이중성등을 작가는 그레고리우스를 내세워 파헤쳐간다. 그 지겹고 딱딱하며 단조롭기 짝이없는 그레고리우스를 통해서 말이다.
이 아무런 상관없는 ,더구나 딴나라의 흘러간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파헤치는 그레고리우스는 그가 살아온 너무나 단조롭고 견고했던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열정과 희열을 찾는다. 그래서 그는 집착한다.
이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독일소설임을 자랑하듯 무척 딱딱한 문체가 거슬린다. 번역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원래 그렇게 쓰인 책같다. 또한 그 맛이 이 책이 가진 맛이다. 어찌보면 도통 매력이 가질 않는 그레고리우스와 등장인물들 점차 추리소설화되어가는 이야기
철학적인 메시지를 느끼려해도 좋고 추리소설로 읽어도 좋을 듯한 이야기다
어릴적 집에 굴러다니던 시드니샐던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영미권 소설을 접했었다. 그렇지만 왠지 늘 뻔해보이는 캐릭터설정등은 점차 그동네 소설에 흥미를 잃어갔다. 차라리 고전을 다시 읽는 걸 즐겨왔다. 무언가 세월의 무게를 지닌 유럽의 소설 이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태생이 독일이기엔 그렇게 느끼는걸까? 이 책은 무겁다. 묘사되는 모든 것이 최첨단 시설의 아파트가 아닌 삐걱거리는 계단을 통행 올라가는 오래된 아파트같은 무게감미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이 포함된 기획물이 즐겁다.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하는 비영어권 작품이기에 더욱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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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입안이 깔깔하고 기운없이 어깨가 축 늘어질때면 뭔가 좀 상콤하고 든든한게 없을까... 뭘 먹으면 축늘어진 화초에 물 한바가지 부었을 때처럼 정신이 버뜩 들면서 활력이 생길까 고민하게 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일때문에 피폐해진 나의 정신세계에 환절기 든든한 보양식처럼 든든하고 뿌듯하게 만들어주는 책.
새콤달콤 버무린 봄나물이라기 보다는 담백한 보양식이 더 잘어울린다 하겠다.
줄거리나 내용은 필요없다. 너무나 마음에 와닿고 가슴깊이 새기고픈 글귀도 많아서 감히 다 옮겨적기도 민망하다.
암튼 굿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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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은 익숙한 환경에서 갑작스럽게 변화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난 그 정도가 심했다. 회사에 다닐 때 몇 사람을 뽑아 다른 곳으로 배치한다는 소문이 나의 귀까지 들렸고 당연히 난 그곳에 포함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사람을 발표할 때 나의 이름이 딱하니 적혀 있었다. 1년 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료와 헤어지고 새로운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다시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다행히 나와 조금 친한 동생 한 명과 같이 가게 되어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기억이 난다. 일반적으로 갑자기 닥친 변화를 두려워하는데 이 책의 주인공은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찾아나서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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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읽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읽는 내도록 그랬다.. 금방 읽어지는 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좋았다.. 원래 좀 지루한 책 같은 경우에 읽다가 마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건 뭐랄까 손을 완전히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외국인 여자와 알지도 못하는 언어의 책에서 받은 뜻모를 감정(?)을 안고 떠나는 외국 여행.. 자신의 일과 지금의 생활을 모두 버리고 책을 쓴 주인공을 찾아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떠난다.. 주인공의 이야기와 소설 속의 이야기가 함께 나오면서 주인공이 소설가의 주변 인물을 찾아 다니며 자신을 찾는 이야기...
책 속에서처럼 외국인과 외국소설 한권으로 지금의 삶을 떠나 여행을 시작한다는게 과연 가능할는지...
뭐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한번쯤 생각을 하게끔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 것들이 이 책의 매력인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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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이마에 쓴 숫자를 지우려고 거울 앞에 선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을 느꼈다. 수수께끼 같은 붉은 코트의 여자가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던 인생의 한 조각이 그레고리우스라는 단단한 우주에 균열을 낸 것일까. 아니면 여느 때와 똑같이 시작한 그 날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베른 시 역사박물관 뾰족탑과 구르텐 산 그리고 푸른 빙하수를, 평생을 살아온 낯익음의 세계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일까.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 놓은 그날은 그렇게 시작했다. 비가 내린다는 것만 빼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우연의 실타래에 엮여들었다. 우연히 만난 여성을 돕고, 그 여성이 갈 만한 곳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마음을 빼앗는 책을 만났다. 그는 우연의 연쇄 속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가 무엇인지 알기위해 길을 나섰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미래를 향해 플랫폼을 떠나는 순간 정신없이 그의 여행에 빠져들었다. 그가 프라두를 만나 그의 흔적을 뒤쫓은 것처럼 나도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풀어내는 그의 사유를 한 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동의가 됐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나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는 순간 나는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레고리우스처럼 자신에게 남은 가능성이 얼마 없다는 판단을 한다면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문득문득 “그 때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의 세계에 빠져들곤 한다. “떠났더라면”, “만났더라면”, “했더라면”, “안했더라면”. 언제나 발은 굳건히 현재에 못 박은 채다. 희미해진 머리숱에 두꺼운 안경을 코에 걸친 초로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내가 매료된 것은 그가 가정과 체념의 세계를 우연을 핑계 삼아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순간을 잡아 챈 것일까. “하고 싶다”,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습관과 동거하는 우리는 매일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레고리우스는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하는 교사다. 그는 과거의 언어를 전공으로 하고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를 고집했”던 그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낯선 빛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 짐을 꾸린 것이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일상의 자력을 이겨낸 그의 뒷모습은 절대 그 옷차림만큼 허름하지 않았다.
프라두를 목적으로 한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은 어찌 보면 얻은 것 하나 없는 일탈이었다. 프라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로잡은 글을 쓴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그의 생을 한 조각씩 재구성해 나갔다. 프라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무대에 서려던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회고하는 인식의 예리함을 놓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가 발견한 프라두의 빛은 자신이 통과한 시간에 대한 성찰이었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의 영향,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의 느낌에 대한 면밀한 관찰자였다. 프라두의 자취를 쫒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는-지금까지 모르던-해방감이 섞인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동굴에 갇힌 듯 정해진 경험만을 추구하던 그는 잃어버린 단어를 찾고,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존재를 찾아 나간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평소에 자주 가던 익숙했던 일상의 냄새가 나는 장소를 돌아볼 것이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될 것이고, 하지 않은 말을 할 걸 그랬다며 후회할 것이다. 그 때 독시아데스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결정에는 의미가 있다고, 길을 떠나 도중에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해줄 사람. 머뭇거리는 마음이 욕망하는 방향을 알아챌 수만 있다면 나를 현재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젠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삶의 변곡점을 알아보게 되길, 그 순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용기가 내게 있기를 바란다.
그레고리우스는 다시 낯선 문 앞에 서 있다.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시간을 암흑으로 만들곤 했던 현기증에서 비롯된 여행이다. 이 여행의 끝이 어디가 될지는 모른다. 도피와 같았던 첫 여행의 출발은 혼자였지만 병원 앞에 선 그의 곁에는 친구가 있다. 길을 잃어버려도 전화를 할 수 있고, 나를 잃어버릴지 모를 병에 대한 처방을 써줄 수 있는 친구 독시아데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난 그의 이번 여행이 얼마쯤 따스한 것이길 바래본다. 그레고리우스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고 문으로 들어선다.
다시 비가 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