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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평전>
상처는 어떻게 역사가 될 수 있는가
대개 작가들은 관찰자의 자리에 존재한다.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피사체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담을 수 있는 풍경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김학철의 삶은 이러한 이치를 아름답게 배반한다.
일본이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한 1937년, 만주를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군은 중국과 공조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상해의 황포군관학교를 지원한 20대 초반의 청년 김학철은 이 시기에 만주의 태항산 근처에서 조선의용군 창립에 동참했다. 어린 나이에 군관학교를 졸업한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근무했으며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전투가 격화되어가던 1941년 김학철은 중국 화북성의 호가장(胡家庄)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나카사키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한 다리를 잃게 되었다. 4년 가까운 수감 생활 끝에 광복을 맞이하여 조선으로 귀국하지만 김학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벌받지 않은 친일파들과 남과 북에 진주한 외국군이 지배하는 현실이었다. 항일 전선에서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동지들이 많이 남아 있는 북쪽에 남아 <로동신문>의 기자로 일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한은 6.25 전쟁을 치루면서 김일성 일인 독재 체재를 강화하기 위해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역사를 모두 김일성 개인의 업적으로 왜곡한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항일투쟁의 역사를 왜곡하고 반대파를 척결하는 남과 북의 행태는 김학철에게 커다란 환멸로 다가왔고, 이것은 김학철이 한국전쟁의 와중에 피신한 중국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춘과 한 다리까지 바친 항일투쟁의 역사를 부정하는 조국을 떠난 그는 중국에서도 시련을 겪는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폭력성과 권력의 이면을 고발한 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썼다는 이유로 김학철은 중국 문화대혁명 와중에 구속되고 만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의 허구성을 폭로한 그의 소설은 통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감금된 그는 10여년을 복역한 뒤 3년의 반혁명 전과자로 노동형까지 받은 후 1980년에야 복권된다. 항일전선과 6.25, 문화대혁명 등 동북아를 핏빛으로 물들였던 역사 속에서 생의 대부분을 차압당했지만, 노년에 이르서도 김학철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와 같은 소설들을 꾸준히 집필하였으며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1980년대 후반에야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직된 사고를 지닌 남과 북의 정권에서 끝내 그의 문학과 삶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고, 김학철은 2001년 연길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후에 김학철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다양한 연구가 행해졌으며 마침내 2005년 김학철이 항일투쟁을 벌였었던 만주에 문학비가 세워졌다. 기나긴 망명생활과 억압 속에서 글쓰기를 행했던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처럼 김학철의 삶은 20세기의 가장 처절하고 아픈 역사를 관통했다. 그러나 김학철은 한 번도 현실과 유리된 채 외면하거나 자학하는 글쓰기를 행하지 않았다. 작가들이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형성하는 ‘거리’가 때로는 현실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학철의 삶과 문학은 명징하게 보여준다. 실천적 지향점을 잃은 채 개인의 내면에만 골몰하는 지금-여기의 문학 현실과 파편화된 채 가볍게 부유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김학철의 삶과 문학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이 글귀는 만주에 외롭게 서 있는 문학비에 새겨져 있는 김학철의 유언이기도 하다.
책 속의 밑줄 긋기
· ‘나라는 망했는데 나만 편안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어느덧 ‘태극기 휘날리는 상해의 임시정부’는 아예 마음의 메카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 학생들도 당당하게 교육을 받고 있다는 황포군관학교에 당장 날아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54쪽
·“사람의 정의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 짝쯤 없어도 문제없다. 걱정마라.” -193쪽.
· “우리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숱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또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단상의 박헌영이 어줍은 몸가짐으로 서 있고 또 장내가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김학철은 목발을 짚고 뚜걱뚜걱 회장을 빠져나와버렸다 . -208쪽.
· 팽덕회가 어떤 사람인가? 태항산에서 항일투쟁을 할 때 부관도 대동하지 않고 조선의용군이 머무르고 있는 병영에 찾아와 허물없이 담소하고 구석구석 보살펴주던 백전노장이 아닌가. 김학철은 모택동이 조작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모택동 자신의 인격에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 277쪽.
· 후일 김학철은 서울 어느 신문사 기자의 인터뷰를 받을 때 아름다운 서울을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곳’ 이라 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이쯤 되면 사회적인 동란은 으레 일어나기 마련이다. 불 위에 올려놓은 물이 끓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노릇이다.” 라고 일침을 놓았다.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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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대립이 만들어낸 골이 얼마나 깊기에 아직도 우리는 역사의 절반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지난 두 정권을 두고 ‘좌파’라 칭하는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꿈을 품은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회가 아무리 변화했다 하여도 여전히 망설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이들을 두고 좌우를 논하는 것은 소의를 위해 대의를 버리는 것과도 같다. 그들의 투쟁 역시 일본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삶을 보며 나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게 얼마나 힘겨운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절단된 그의 다리는 오히려 훗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음을 증명해 보이는 훈장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남과 북 모두가 치열한 이데올로기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하여도 여타 다른 이들처럼 눈치껏 권력의 흐름을 따랐더라면 제법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줄곧 반대 방향을 향해 걸었다. 이승만, 김일성 그리고 모택동까지 그들은 그에게 철없는 독재자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영웅이 아닌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드는 인물이기에... 물론 절대 권력에 맞서는 것은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저자의 상상력이 약간은 가미되었겠지만 <20세기의 신화>를 쓰기 직전 김학철의 고뇌를 이 책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모택동이라는 1인 독재의 해악을 낱낱이 폭로해 만천하에 경종을 울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계속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언감생심 모택동을 반대하다니. 내가 이거 미치지나 않았나!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게 아닌가!” 총살을 당하는 광경이 자꾸 눈에 밟혀왔다. (p 280 중에서) 저항을 택한 그는 10년의 징역살이를 감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10년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출옥 이후 그가 보여준 왕성한 창작 활동은 시련이 그를 성장시켰음을 증명하는 예가 아닐까? 특히 그가 남긴 글들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또 다른 역사를 우리에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자신의 그리고 민족의 치열한 투쟁이 담겨 있는, 그의 글은 작품이기 이전에 진실이기에... 여운형, 김원봉 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독립운동보다도 이념을 중시하는 풍토(?)가 지속되는 한 독립을 위한 이들의 기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힘들 것이다. 김학철 역시 마찬가지다. 포탄에 맞아 다리 한 쪽을 잃은 그는 조선의용대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로 남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는 북한 사회에도 속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택한 중국 사회에서조차도 절대자를 향한 투쟁에 전 생애를 바쳤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그는 ‘디아스포라’였다. 역사가 양산한 아픔들, 이제는 그들을 끌어안을 때도 되지 않았는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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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는 이런저런 양질의 책을 많이 펴내는 곳인데 개인적으로 저는 근현대사, 인물 평전류를 이 출판사 책으로 많이 읽었던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김학철이라는 인물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건 계간 창비 어느 권을 읽던 중이었습니다. 이 책은 김호웅, 김해양 두 저자의 저술이지만 창비 해당호의 그 아티클은 김학철 선생 본인의 직접 회고였습니다. 항일 활동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였지만 회고가 엄숙주의로 흐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약간 어리숙한 채 혈기만 왕성했던 자신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회고하는 분위기가 재미있었습니다. 마치 예전에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씨가 경기도 시골에서 갓 상경하여 처음으로 짜장면을 접했을 때 음식이 아니라 소똥인 줄 알았다고 털어놓는 어투나 비슷했다고 할지.
그는 자신의 회고에서 김일성의 발언을 재인용하는데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도 했다고 합니다(직접 들은 건지 아니면 전언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무솔리니는 그나마 배운 게 있어서 글도 잘 쓰고 논리도 정연한데 히틀러는 무식하기 짝이 없다." 무솔리니, 히틀러를 마치 우리가 지금 트럼프, 보리스 존슨, 바이든 보듯 동시대로 겪은 사람의 소회라는 데 주목할 수 있습니다. 김학철 본인의 말로 장개석의 사진을 보고 너무도 잘생겼다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훌륭한 외모이기는 하나 당시에는 연예 셀럽들이 지금처럼 대중 앞에 자주 노출되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개석은 물론 당시 대륙을 통치하던 중화민국의 그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김학철 선생은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우리가 잘 아는 분이죠. 조선의 강점기 말엽에 중국 둥베이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한 단체의 계보는 크게 보자면 두 갈래인데 하나가 조선민족혁명당인데 초기에 김규식 선생도 간여했고 나중에는 바로 그 김원봉이 주도한 단체입니다. 다른 단체는 조선독립동맹인데 여길 주도한 사람은 한글학자이기도 한 김두봉(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기에 한때 한국에서는 학술문헌에서도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게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북한에서 큰 영웅으로 숭배되는 무정 등이 리더였죠. 전자의 무장단체가 조선의용대, 후자의 산하 단체가 조선의용군입니다.
김학철 선생은 1917년생이니 박정희와 동갑입니다. 타계는 2001년이니 김일성보다 7년 더 산 셈입니다. 둥베이 지역에는 이처럼 몸소 항일 전선에 뛰어들어 청춘을 불살랐던 인사들이 많았으므로, 김일성의 행적 중 석연치 않거나 과장, 날조되었다고 여겨 증언하는 이들이 (오히려) 많았던 것도 당연합니다. 만약 해방 후 그가 북한에 계속 머물렀다면 (계열은 완전히 달랐지만) 박헌영처럼 비참하게 숙청되거나 김두봉 등 연안파처럼 씁쓸하게 퇴장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도. 십중 팔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