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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없겠는가
"왜 '나'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없겠는가" 내용보기
이 책은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철학 입문서라고 하기에도 힘들다. 장르를 얘기하자면 참 애매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너무나도 푸코를 닮아있다. 역사가인 저자는 푸코를 자기식으로 소화하여, 차후 저작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임상역사가'라는 꽤나 낯선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임상역사가는 전문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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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철학 입문서라고 하기에도 힘들다. 장르를 얘기하자면 참 애매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너무나도 푸코를 닮아있다.

역사가인 저자는 푸코를 자기식으로 소화하여, 차후 저작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임상역사가'라는 꽤나 낯선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임상역사가는 전문역사가와 비교되는 개념으로 '누구나' 역사를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누구나'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 '누구나'라는 것이 그저 '평이' 혹은 '재미'만을 일컫지는 않는다. '누구나'는 무엇보다도 '자기 배려'를 전제로 한 수사다.

푸코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젠 모모 역사가가 그렇게 역사를 보았다는 것보다는 '내'가 역사를 어떻게 보고 그 역사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일체의 편견을 배격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이 어떤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지 분명히 한다면, 또한 보편성에 대한 전망을 견지한다면, 나아가 충돌하고 대립하는 가치를 변증법적 긴장에 넣어 포기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자서적인 이야기야말로 사회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말해'져야 하는 것이다.

역사 시간에 배우는 수많은 사실들이 왜 나의 삶과는 무관한 것 같고, 그리도 지루했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상에 대한 공감'이 없이, '자기에 대한 배려'가 없이, 그 어떤 역사가 나에게 의미가 있겠으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겠는가.

 

비록 저자가 자신의 책을 '철학 입문서'의 성격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적어도 '푸코 입문서'로서도 추천할만한 책이다.

푸코에 대한 저자의 이해도 탁월하지만(내가 그것을 평가할만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나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

푸코와 저자의 삶이 별개의 것으로 따로 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책이든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글은 독자의 감흥이나 공감을 얻어내기가 힘들다.

아무리 탁월한 묘사와 화려한 서술이 장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이 비록 역사전문 출판사에서 출판이 되었으나, 많은 전문 역사가들은 이 책을 '역사서'로 분류하기를 주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랬으면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 '포월'의 시작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n 2007.12.22.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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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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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불안한 노후, 치솟는 대학 등록금, 공포의 유가 기타 등등 암울한 시대의 여울목에서 넘어지지 않고 지탱하기 위해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물살은 점점 거세게 발목을 휘어잡는데 나는 도통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자칫 한 발짝만 잘못 떼었다가는 물길에 휩싸여 떠밀릴지도 모른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물길을 건너기 위해 애를 쓰는 내게 ‘푸코에게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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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불안한 노후, 치솟는 대학 등록금, 공포의 유가 기타 등등 암울한 시대의 여울목에서 넘어지지 않고 지탱하기 위해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물살은 점점 거세게 발목을 휘어잡는데 나는 도통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자칫 한 발짝만 잘못 떼었다가는 물길에 휩싸여 떠밀릴지도 모른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물길을 건너기 위해 애를 쓰는 내게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의 저자 이영남은 슬쩍 동아줄 하나를 보여주며 이거라면 당신이 그 물살을 헤치고 나가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권해준다.

  그 동아줄의 이름은 ‘성찰적 사고’다. 이영남은 얼 쇼리스가 쓴 ‘희망의 인문학’을 언급했다. 얼 쇼리스는 가난한 이들에게 한 끼의 빵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 즉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영향을 미칠 때 무조건 반응하기 보다는 심사숙고해서 대처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클레멘트 코스(노숙인 및 저소득층에게 대학수준의 인문학 강의를 실시함)를 운영한 사람이다.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인문학은 삶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이영남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것은 내가 평소에 우리 아이에게 계속 강요하던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건 바로 ‘공부해라’다. 공부의 유형은 다양해서 학교 시험공부도 공부고, 공무원 시험공부도 공부지만 인문학적인 사고를 위해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것도 공부다. 누가 그랬지. 내세의 운명을 바꾸려면 적선을 하고, 현세의 운명의 바꾸려면 공부를 하라고. 공무원 시험공부해서 현세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지만 인문학 공부를 통해 성찰하는 삶을 살게 될 때는 진정 내부로부터 변화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저자 이영남이 푸코를 통해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내용이다. 미셀 푸코로 말하자면 들뢰즈와 함께 프랑스 철학의 거두인데 그 푸코의 인문학적 성취를 더듬는 이영남의 시선은 때론 찬탄하고, 때론 동정하고 그러면서 때때로 현실을 탄식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책을 읽는 방법’에서 슬로 리딩의 최종 목표는 작가가 의도한 것 이상을 상상하고 발견하는 창조적 오독에 있다고 했다. 이 창조적 오독이라는 것이 바로 책을 읽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즉 공부다. 이영남이 푸코를 텍스트로 삼아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창조적 오독의 과정이요 공부의 과정이다. 독자는 이영남의 공부를 따라가면서 푸코를 이해하고 푸코를 이해하면서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이영남이 바란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이다. 개인의 역사가 실증적 연구를 거쳐 사회성을 얻고 역사성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어쩌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의 기본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순 계산은 계산기에 맡기면 되는 것처럼 단순 지식은 네이버에 알아보면 된다. 현대는 더 이상 단순지식의 암기가 필요한 세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왜 읽고 공부를 왜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푸코가 성취한 학문적 업적이라든가, 이영남의 역사적 사유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 삶이란 그리 단순하지도 않다는 점,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것으로 혼재되어 있다는 점, 자기도 그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파편화될 수도 없고 그렇게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삶을 충실하게 역사화 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분과나 시대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인문학을 두루 공부하는 것이 요청된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인문학이 나에게 여울목을 지나갈 동아줄이 되어줄 것이란 기대를 한다.

           

h******h 2008.03.17. 신고 공감 2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