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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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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명령을 거부하는 ‘구원’의 미학-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은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에 ‘매끄러움’의 속성을 붙인다. 맑은 피부에 집착하는 현대인을 생각해 보자.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날라치면 사람들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길까 염려를 한다. 여드름은 매끄러움과는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울퉁불퉁하게 하는 여드름은 심하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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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명령을 거부하는 구원의 미학

-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은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에 매끄러움의 속성을 붙인다. 맑은 피부에 집착하는 현대인을 생각해 보자.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날라치면 사람들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길까 염려를 한다. 여드름은 매끄러움과는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울퉁불퉁하게 하는 여드름은 심하면 얼굴에 흔적으로 남는다. 매끄러워야 할 피부에 흔적이 남다니! 외모가 사회적 경쟁력이 되는 사회에서 얼굴에 남은 흔적은 그만큼 경쟁력 없는 외모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지은이는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9~10)고 말한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반대자를 애초부터 제거함으로써 매끄러움은 오로지 매끄러움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

 

매끄러움은 표면을 중시한다. 매끄러움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얼굴 피부가 맑으면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다. 단순명료한 자본의 논리. 지은이는 매끄러움의 세계를 미식(美食)의 세계로 규정한다. 제프 쿤스의 조각상인  풍선 비너스 에서 지은이는 매끄러움이 성화(聖化)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비너스가 출산하는 것은 가시관을 쓰고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2003년산 동 페리뇽 로제 빈티지 와인 한 병을 출산한다. 상처가 전혀 없는 매끈한 병은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긍정세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부정적인 것을 이면에 감추고 긍정적인 것만 표면으로 올린다. 신자유주의가 열망하는 소비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비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은 바깥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소비사회는 매끄러운 것을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매끄러움을 소비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 권력은 미학의 중심에 매끄러움을 배치하고 있는 셈이다.

 

정보사회를 구성하는 정보는 한없이 투명하다. 지은이는 정보를 지식의 포르노그래피적인 형태(23)로 규정한다. 포르노그래피는 표면으로 이면을 대치한다.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보를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포르노그래피는 정보가 직접 현전(現前)하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투명사회는 정보가 점과 점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이다. 점과 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점이 모든 것이다. 점과 점이 모여 어떤 형체를 이루지만, 그 형체에는 어떤 의미도 달라붙지 않는다. 보이는 게 전부인 사회는 윤리적일까, 아니면 비윤리적일까? 보이는 게 전부인 사회에는 오로지 동일한 것들만 존재한다. 동일한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반대자가 없는 사회는 과연 윤리적일까? 동일한 것들만이 반응하는 사회에는 그에 저항하는 타자가 부재하다. 타자는 동일한 것들의 소통을 방해한다. 타자가 많을수록 투명한 소통은 그만큼 느려지는 것. 동일한 것들의 반복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타자를 부정하는 까닭은 이로써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아름다움의 미학은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근대 미학에서야 미와 숭고가 분리된다. 미는 그 순수한 긍정성 속에 갇힌다. 강력해지는 근대의 자아는 미를 만족의 대상으로 긍정화한다. 이 과정에서 미는 숭고에 대립하게 된다. 숭고는 그 부정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직접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29)

 

미학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근대미학은 주체와 대상을 구분한다. 근대미학의 주체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 인식하는 주체는 인식 대상보다 우위에 있다. 주체를 만족시키는 대상만이 미적으로 가치가 있다. 미가 긍정성을 차지하면서 부정성을 지닌 숭고는 미와 구분된다. 미가 대상을 통해 직접적 만족을 준다면, 숭고는 부정성을 이성으로 환원하여 다시 긍정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친다. 숭고는 원래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전적인 타자를 나타내는 숭고를 근대주체는 내면적 표현 형식으로 갈무리한다. 지은이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물자체로 돌린 칸트 미학을 이야기하며, 미 앞에서도 숭고 앞에서도 (근대)주체는 자신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자기 안에 영구적으로 머무는 주체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파멸적인 것을 바깥으로 내몰아버린다.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타자들을 떠올려 보라. 바깥에 있는 괴물은 어떤 경우에도 근대주체의 이성을 침범하지 못한다.

 

가속이 붙은 근대의 시간은 영화처럼 머무름이 없는 영상을 우리에게 강제한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우리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미지를 놓쳐버린다. 지은이는 롤랑 바르트가 제안한 스투디움풍크툼을 바탕으로 풍크툼이 사라진 현대사회를 그려낸다.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스투디움의 영역에 있는 관찰자는 사물을 눈요기로 생각한다. 유물을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을 생각하면 된다. 여행객에게 유물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눈요기 대상일 뿐이다. 풍크툼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풍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것은 눈요기로서의 사진을 온통 꿰뚫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57) 돌려 말하면, 풍크툼은 타자가 있는 자리를 의미한다. 타자의 시선이 관찰자를 휘감을 때, 사물에 담긴 의미는 한없이 증폭된다. 한밤중 시퍼렇게 불을 발하는 호랑이 눈과 마주친 주체를 상상해 보라.

 

호랑이 눈은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두려운 대상으로 근대주체를 압도한다. 신자유주의는 호랑이 눈과 같은 충격적인 타자를 어떻게든 사회 밖으로 내쫓으려고 한다. 그것은 지금 이 사회를 부정하는 눈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들이 모여 이루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이렇게 타자가 완전히 제거된 동일자의 세계를 꿈꾼다. 타자로서 이 사회에 살려면 어떤 저항의지도 드러내면 안 된다. 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을은 조용히 갑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정작 개인의 자유를 근본부터 침해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긍정하는 주체만을 인정한다. ‘자기계발이라는 말로 전해지는 긍정사회의 미학은 성공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사회를 만들어낸다.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부익부 빈익빈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는 사회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재앙의 미학은 주체가 자신을 향유하는 만족의 미학에 대립한다. 재앙의 미학은 사건의 미학이다. 사소한 사건도, 빗물 한 방울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휘날리는 하얀 티끌 하나나 여명 속에서 고요하게 내리는 눈, 여름의 뙤약볕 속에서 풍기는 암석의 향기도, 자아를 비우고, 탈내면화하고, 탈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행복을 주는 공허의 사건도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런 사건들은 자아를 몰수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재앙은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자기애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65~66)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kalokratie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70)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사회는 재앙을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재앙은 매끄러운 사회를 침범하는 울퉁불퉁한 괴물과 같은 것이다. 자기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주체는 재앙이 불러오는 죽음과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한다. 2014년에 벌어진 세월호문제만 봐도 그렇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극우보수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그들은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세월호와 같은 재앙은 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매이면 행복한 미래는 올 수 없다는 논리. 그러면서 그들은 그 재앙이 일어난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재앙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외칠 뿐이다. 재앙은 사회에 퍼진 전염병과 같다. 그대로 놔두면 모든 사람들은 병에 전염되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재앙을 고쳐야 할 암으로 보는 논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건강한 사람과 병에 걸린 사람으로 나누는 논리로 이어진다. ‘세월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몸에 암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논리. 암에 걸린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재앙을 떨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재앙을 붙들고 지금 이 사회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신자유주의 사회를 휘감고 도는 건강의 미학에는 무엇보다 매끄러운 게 아름다운 거라는 자본의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자본은 이익이 되는 모든 사물들을 자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건강만큼 이익이 되는 게 어디에 있는가? 병원은 이제 자본을 낳는 거대한 화수분이 되었다. 병원은 돈의 유무로 생사를 결정한다.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는다.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자본은 그래서 한없이 냉혹하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돈이 많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비가 곧 미덕인 사회는 돈이 곧 미덕이 되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소비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소비자로서 왕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소비자가 왕으로 대접받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미는 언제나 강제를 낳는다. 지은이는 보톡스와 신경성 과식증, 성형수술과 같은 문명 도구(현상)들에서 미의 통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테러를 발견한다. 보톡스는 늙음을 자연스러운 미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주름이 많은 늙은 얼굴은 매끄럽지 않다. 얼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보톡스를 맞는다. 보톡스는 매끄러움(젊음이 아니다!)을 잃은 얼굴에 매끄러움을 돌려준다. 성형수술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몸은 자본이 부여한 명령을 따라 아름다운 몸으로 개조된다. 자본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워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워져야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거식증과 같은 먹을거리 장애가 왜 나타나겠는가. 아름다워지라는 지상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한다. ‘아름다움에 이르려면(성공하려면!) 거듭해서 자기를 단련시켜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라고 외치지만, 그들이 외치는 자기에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명령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타자만을 신자유주의는 인정한다. 돌려 말하면 신자유주의에서 타자는 오로지 소비자만이 될 수 있다. 소비자가 타자라고? 소비자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을 의심 없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타자가 될 수 없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사회에는 타자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다. 타자가 없는 사회는 동일자들로만 넘쳐난다. 동일자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우리는 좀비들이 들끓는 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좀비에 물린 사람들(타자)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좀비 외에는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좀비는 그래서 냉혹하다. 좀비는 같은 좀비에게는 무관심하고, 자신과 다른 존재는 어떻게든 좀비로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살아남으려면 좀비가 되라고!’ 좀비는 부정성이 내포된 미를 모른다. 부정성은 타자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타자가 사라진 사회는 부정성은 사라지고 긍정성만 넘쳐난다. 동일한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이제 동일한 것을 긍정하는 존재만이 남는다.

 

좀비는 오로지 현재만 산다. 기억해야 할 과거도 없고, 만들어가야 할 현재도 없다. 좀비는 그저 흐느적거리며 좀비가 아닌 타자들을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좀비가 타자의 흔적으로 새겨진 예술미를 알 리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라고 선언한다. ‘은유화는 이면으로 들어가는 힘을 가리킨다. 매끄러운 표면만 중시하는 사회를 향해 작가는 매끄러운 표면 뒤에 감추어진 울퉁불퉁한 것들을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것을 상처라고 해도 좋고, ()라고 해도 좋다. 얼굴에 난 상처는 매끄러운 얼굴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한다. 똥과 같은 추한(?) 사물을 보면 우리는 이내 얼굴을 돌린다. 타자로서 사물에는 사회논리에 깊이 침윤된 우리를 사회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 지은이는 모든 것이 휘발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타자의 힘을 강조한다. 매끄러워지고 아름다워지라는 자본의 명령과 맞싸우는 힘은 무엇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서 나온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117)이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o*****s 2019.05.07.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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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조각모음,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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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얼어 있던 명사名詞들을 다 끄집어내서 動詞동사로 녹여낸 다음 다시 새로운 틀에 얼리는 작업 같다. 단어를 재정렬하고 의미를 재정의하고 개념을 재생산하는 작업이다. 세월이 지나면 생각도 낡아지게 마련이고, 시대가 변하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작도 귀엽고 얇은 책에서는 아름다움의 구원에 대해 말한다. 온갖 종류의 아름다움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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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얼어 있던 명사名詞들을 다 끄집어내서 動詞동사로 녹여낸 다음 다시 새로운 틀에 얼리는 작업 같다. 단어를 재정렬하고 의미를 재정의하고 개념을 재생산하는 작업이다. 세월이 지나면 생각도 낡아지게 마련이고, 시대가 변하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작도 귀엽고 얇은 책에서는 아름다움의 구원에 대해 말한다. 온갖 종류의 아름다움이 등장한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틀로, 내가 해본 적 없는 해체와 조합의 방법으로 말이다. 아름다움의 대척점에 있을 것만 같던 것들이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설명이 신선했다. 은폐, 상처, 재앙의 아름다움이라니! 



책만 읽을 때는 어려웠는데, 마침 철학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도움을 받았다. 미적 체험은 나를 만족시켜주는 것이기 보다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고, 상품과 예술이 같아져버린 시대에 부정성이 제거된 매끄러움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우연한 화살을 맞듯이 내 인식의 범위를 벗어날 때 사고의 확장이 되는 계기가 되고, 내가 마주하는 부정성 자체가 소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최종 목적은 소비되지 않는 것. 그늘지고 불투명하고 낯설고 불쾌해도 그걸 아는 한 존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을 멈추면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과 같다”고 말한 플루타르크의 말처럼 존재를 위해, 더 나아가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 아름다움의 여러 면을 알고 구원해야 한다는 것. 



j***u 2026.02.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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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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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고 했다. 미에 대한 로망으로 인해 이 책을 완독한 지금,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는 나는 침묵해야 한다. 그럼에도 내 무지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독후감을 작성하여 침묵을 깨는 이유는 ‘아름다움의 구원’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움의 길’만큼은 저자의 견해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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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고 했다. 미에 대한 로망으로 인해 이 책을 완독한 지금,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는 나는 침묵해야 한다. 그럼에도 내 무지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독후감을 작성하여 침묵을 깨는 이유는 아름다움의 구원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움의 길만큼은 저자의 견해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진술은 그리 친절하지 않다. 아름다움, 즉 미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미학에 관한 저자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아름다움구원의 의미를 먼저 명확히 정의해야 하지만 개념적 설명은 철저하게 생략되어 있다. 대신 헤겔, 바르트, 가다머, 스캐리, 벤야민, 플라톤, 칸트, 아도르노 등 예술가도 아니면서 예술을 논했던 철학자들 - 오늘날 그 역할은 비평가들이 대신 떠맡은 것으로 보인다. - 의 견해를 언급하며 저자가 판단하는 아름다움의 특성을 수렴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상징적 표현과 현학적 기술 방식은 나와 같이 미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에겐 난해하기만 하다.

 

저자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 아름다움이 아닌 것을 먼저 나열하자면, 관조적인 거리가 필요 없는 밀착성과 무저항성을 의미하는 매끄러움, 일체의 부정성이 배제된 나르시시즘, 은폐도 상처도 재앙도 숭고함도 담지 못하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어떤 것, 소비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고 디지털 질서에 편입되어 버린 시장, 정치, 그리고 감흥과 격정의 무대. 자유와 진리를 잃어버리고 욕망과 시스템의 강제에 충실한 현대 예술은 타자를 구원하는 미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제프 쿤스의 작품과 아이폰, 브라질리언 왁싱은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소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순간의 만족으로 휘발되지 않는다. 예술은 신중하고, 품위 있고, 고상하며, 처음에는 고통으로 다가오지만 종국에는 자아를 초월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저자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독자로서의 나는 매우 드물긴 하지만, 그러한 지향에서 음악의 형태로서의 예술을 어렴풋이 안다. (저자에 따르자면, 저항성이 매우 강하며 내러티브가 있는 베토벤의 교향곡은 예술에 가깝겠지만, 매끄럽기만 한 K-Pop 아이돌 음악은 아무리 기술(技術)적으로 뛰어나더라도 감각적 만족만 줄 뿐,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아름다움에 관한 저자의 지향은 자아중심적인 서구 근대 예술관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서 비롯되지만, 디지털화되고 산업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린 포스트모던의 예술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요컨대 구원하지 못하는 예술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미의 위기의 시대로부터 아름다움을 구원해야 한다.

 

p.s 한 번의 정독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정말 오랜만에 재독(再讀)한 책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논의 자체가 아닌, 저자의 의도 즉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저자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독서 과정에서 몇 가지 의문을 기록하자면, 첫째, 저자는 세계를 은유화 하는 것, 다시 말해 시화(詩化)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라고 했으므로 저자의 관점에서 ()’는 분명 예술이다. (저자의 저술 방식도 이러한 지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진심으로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폭로를 사명으로 하는 사진은 포르노그래피적인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 될 수 없는가? (또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모네가 그렸어도 걸림이 없는 매끄러운 풍경화는 아름답지 못하고 - 모네의 그림을 보고 고통을 느낀다면 아마 변태일 것이다. - , 부정성의 상징과도 같은 뭉크절규같은 작품만을 예술로 인정해야 하는가 

둘째, 상업화된 대중문화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성을 지니지 못하는가? 거칠게 비유하자면 맛과 영양을 균형 있게 추구하는 요리사의 철학과 정성이 반영된 스파게티만 음식이고, 공장에서 찍어낸 자극적인 맛의 인스턴트 라면은 소비자의 건강을 위해 아무리 피드백을 해도 진정한 의미의 음식이 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저자의 예술관은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 아닌가? 저자와 동등한 지적 수준이 아니라면 (스파게티의 맛을 알지 못하고 라면만 먹는) 일반 대중은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 수도, 향유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

대중음악인 김윤아의 솔로 4집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제목 그대로 청자인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카타르시스도 준다. 이는 불후의 엄숙함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슬픔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래식의 정점에 있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니지만 나에겐 그저 너무나 매끄럽기만 하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1 2024.01.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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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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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작가님의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작품입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알게 된 작품인데 친구들과 우연히 얘기하다보니 친구녀석들도 벌써 아는 책이더군요 나름 유명한 작품인가봅니다ㅡ아님 제가 그동안 독서를 너무 안했기도 했구요 반성합니다 올해는 한달에 힌권이상은 읽기로 다짐했는데 역시나 지켜내기 어려운 목표였나봐요 ㅎㅎ 시작이 반이니 다시 도전해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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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작가님의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작품입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알게 된 작품인데 친구들과 우연히 얘기하다보니 친구녀석들도 벌써 아는 책이더군요 나름 유명한 작품인가봅니다ㅡ아님 제가 그동안 독서를 너무 안했기도 했구요 반성합니다 올해는 한달에 힌권이상은 읽기로 다짐했는데 역시나 지켜내기 어려운 목표였나봐요 ㅎㅎ 시작이 반이니 다시 도전해보려구요
k*******2 2021.09.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