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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소하고 위트있게 꾸며낸 맛깔난 이야기 책!
대학시절 내가 무척 따랐던 선배가 있었다.
사 년이나 위인 그 선배는 까마득한 저하늘의 태양같이 높아서 눈도 함부로 맞출 수 없던 존재이지만(80년대 말 대학은, 특히 남자들로 득시글한 우리과는 그렇게 살벌했다. 무시무시한 군부정권 만큼이나..) 함께 운동을 했던터라 터울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학번은 세 학번 차이지만 실제나이는 일곱 살이나 많은 '노老학생'이었던 그는 이제 막 청년이 된 내게는 캠퍼스티를 입은 중늙은이로 비춰져 은근히 함께하기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알 순 없지만 대단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그 선배는 항상 주머니가 넉넉해서 함께 하면 늘 밥과 술을 자신이 도맡아 내는 덕에 그를 쫓아다니는 후배들이 예닐곱 명은 족히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남들이 부러움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투일 뿐 그에게는 넉넉한 주머니 사정보다 훨씬 더 넉넉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등진 채 학력고사 점수높이기에 급급했던 무지랭이 새내기에게는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같은 이야기에 낮밤을 잊고 듣고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대학도 세번 째로 옮긴 그의 이력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은 트여 있었고, 사회경험에 목말라하는 중생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존재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사회와 정부를 꼬집는 소재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빠질 수 없는 음담패설도 한 몫을 했다. 학기중에 '자체방학'이라는 명목아래 덜컹대는 중고차를 타고 7박 8일로 여행을 떠나거나, 물때가 좋을 땐 언제나 밤낚시여행을 떠나곤 했다. 웃음 뒤에 남겨진 질문과 고민은 내게 숙제로 남겨졌고,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 답을 찾곤 했다. 그 선배에게서 나는 사회를 알았고, 남자를 알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여자도 알게 되었다.
소설 <유이화>를 통해 알게된 작가 조두진의 책 <마라토너의 흡연>을 읽으면서 그 선배를 떠올리게 된 건 일곱 편의 단편소설 모두 술 한잔 놓고 밤새워 낄낄대며 장단맞춰 듣던 선배의 맛깔나는 이야기들을 닮았기 때문이다. 정년을 앞둔 형사의 난감한 상황을 그린 [7번 국도]도 그렇고,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강조하다가 결국 어처구니 없는 상황극이 연출되는 [족제비 재판]이 그렇고, 제아무리 선비라도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힘쎈 남자' 신드롬에 낚여버린 사나이의 이야기 [정력가]가 그렇다. "술먹으면 모두가 '개'가 된다"고 했던가? 술집에 모인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그리고 피부과 친구의 손톱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상황에서 병원 밖을 나온 '별 수 없는 인간'의 군상이야기까지 ... 사회에서 저마다 '제 자리'를 박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을 재미있게 꾸며놓았다.
가장 재미있게 본 소설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마라토너의 흡연]인데, 카오스 자체인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가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자신의 삶에 대해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교훈을 얻었는데, 그 반전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세월은 훌쩍 지나 나는 그때 그선배의 나이보다 열살은 너 먹었다. 꾸준히 만나던 선배와도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여섯 해를 지나는가보다. 얼마전에 읽은 <완득이>가 청소년을 위한 우리 작가의 성장소설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고단한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을 위해 해학과 독설를 갖춘 어른을 위한 소설이라고 보겠다. 소설가는 세상의 거울이다. 아니 빽미러다. 목표를 향해 무표정하게 앞만 보며 달리는 우리에게 소설가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살필 수 있는 그림을 던져준다. 우리에게 웃음을 더져주고, 안심을 시켜준다. 그리고 큰 기침을 하고 다시 앞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던져준다. 이 소설은 내게 잠시 휴식을 주었고, 웃음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배움을 던져주었다. 이십 년 전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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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진의 작품집에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그 대립항의 간극에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형식을 취한다. 표제작 「마라토너의 흡연」의 주인공 ‘채’는 마라톤을 취미로 시작한다. ‘채’가 마라톤을 하는 이유는 특별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고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혼자서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채’는 결코 전력으로 질주하는 법이 없고 마라톤 완주 후의 흡연을 즐길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다르다. “아마추어라면 건강에 커다란 도움이 돼야 하고, 프로 선수라면 돈이 돼야 한다”(42쪽)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다. ‘채’의 기록이 향상될수록 아내는 음식을 새로 만들어 주며 기록에 악영향을 미치는 흡연을 삼가라고 하지만 ‘채’는 그런 말에 따르지 않는다.
“기록을 세우려고 마라톤 하는 것이 아닌데요. 담배 끊을 바에야 마라톤을 왜 합니까? 저는 평생 담배 피우려고 마라톤으로 몸 다지는 겁니다.” (68쪽)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뛰고 움직인다는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프로’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경쟁관계와 도시적인 압박감에서 채와 같은 사람의 달리기는 온전히 개인의 취미로 보전되지 못한다.
주요 인물과 주변과의 대립구도는 「아름다운 날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주인공인 김영부는 시골의 순진한 농부였으나 돈을 벌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는 공사에 참여 했다가 발파작업의 와중에 청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보상은 없다. 오히려 공사장 감독에 의해 일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동네사람들도 모두 그가 번 조금의 돈에만 관심을 나타낼 뿐 그의 불구는 입담거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동네에 개통된 신작로를 통해서 들어온 버스를 타고 아내가 떠나버린다. 그의 큰 아들 역시 도시로 나가 조직폭력배가 되고, 작은 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 대책없는 불행의 연속 속에서도 김영부는 고작 눈물을 흘리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대충 짐작하고 바보처럼 웃을 뿐이다. 댐공사로 인하여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도 그는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한 탓에 물이 들어찬 마을과 함께 수장된다. 조직 간의 다툼으로 한 팔을 잃은 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는 맞아주는 건 정든 고향이 아니라 댐 주변을 에워싼 철조망이다. “큰 아들은 붕대를 친친 감은 팔을 목에 걸고 고향에 나타났다. 고향은 이미 물에 잠긴 후였다. 고향집과 마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푸른 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댐 가장자리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99쪽) 조두진은 이렇듯 프로/아마추어, 도시/고향, 미소/냉소 라는 대립항 사이에 평범하고 착한 인물들을 밀어 넣는다. 이들은 주변인들의 비웃음과 냉소에도 미소를 짓지만 그들의 미소는 바보스러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며 그들의 순수함은 부적응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바보취급하고 냉소로 일갈하는 주변인들의 초상은 어떠한가. 조두진은 단순히 바보스러운 인물들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바보로 비춰지는 인물들의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곁들인다. 이 작품집에는 총 네 명의 ‘김영부’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마라토너의 흡연」의 주인공 채가 일하는 회사의 김영부 국장, 「아름다운 날들」의 귀머거리 김영부, 자신의 손자를 물었다는 이유로 족제비를 잡아서 재판을 벌이는 「족제비 재판」의 김영부 할아버지, 불구이지만 동네 골목의 어떤 남자보다도 절륜의 정력을 지니고 있는 김영부 노인. 「아름다운 날들」의 김영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기심과 속물근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김영부 국장은 ‘기록’과 ‘경쟁’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전형으로, 손자에 대한 복수로 족제비를 잡아서 재판을 벌이다가 주변의 장황한 말들에 울화가 치밀어 족제비를 불태워버리는 김영부 노인은 자신의 분풀이를 동물에게 푸는 소시민으로 읽혀진다. 또한 정력에 대한 모종의 비기를 지닌 듯한 냄새를 풍기며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용해 돈을 뜯어 틀니를 해 넣는 김영부 노인과 그에게 속는 사람들은 거짓과 상호간의 적당한 수준의 뜯어먹기를 묵인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채와 귀머거리 김영부의 대립항으로 존재하며 그들을 비웃는 다른 김영부들의 모습을 통해 조두진은 현실을 우화로 끌어내리며 우리들 중 누구에게 약자에게 모멸감을 던질 자격이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닮아간다. 그 모습은,「돼지」에 나타나듯이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술을 먹고 몸을 팔았지만 결국은 두 딸에게 버림을 받고 공원에서 몸을 파는 갈보로 전락하는,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돼지’의 모습으로 은유된다. 인간이 인간을 돼지처럼 취급할 때, 인간은 돼지처럼 변해간다는 진실. 돼지는 스스로 미친 듯이 먹어대며 살을 찌우다가 결국은 누군가의 위장에서 소화될 운명을 지녔다. 경쟁과 기록만을 중시하는 당신들도 돼지와 같지 아니한가. 경쟁과 기록은 늘 깨지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밀려난 자들은 귀머거리 김영부나 「돼지」의 갈보처럼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밀려나게 된다.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은 인간들의 모습도 긍정적이지 않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세 동기들의 어느 저녁식사 풍경을 그린「손톱」에서는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그들의 고민 또한 얼마나 속물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피부과 의사인 기호와 정형외과 의사인 동조는 손톱이 피부냐 뼈인가를 놓고 언쟁을 벌인다. 성형외과 의사인 정수는 부유한 아내 덕에 잘되는 성형외과의 원장이지만 자신의 병원을 ‘감옥’처럼 느끼며 따로 애인을 사귀는데 몰두한다. 손톱에는 암 같은 것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네일 아티스트나 피부미용사가 빼앗아 간다는 푸념에 이르면 그들 또한 사회로부터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았을지언정, ‘돼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자고로 신체부위에는 암이 있어야 해. 그래야 개나 소나 함부로 나대지 않는다고. 머리카락이나 손 톱에 암이 있었어봐? 개나 소나 미용실을 열고 네일 케어점 열 수 있겠어? 지네들이 맘대로 지지고 볶고 깎고 밀 수 있겠느냐고?” (255쪽) 당신이 약자인 김영부이든, 소시민적인 김영부이든, 혹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안정된 인생이든 소설책을 덮으면서 어떤 느낌이 다가올 것이다. 인간을 돼지로, 약자로, 대책없는 소시민으로 몰아가는, 위선적인 편견체제로 이룩된 현실에 대하여. 이 현실의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견고한 현실에 균열을 가하기 위하여 많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비현실적인 언어로 말을 건네거나 서사를 약화시키고 관념을 나열하며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이미지에 대한 몰입을 행한다. 그러나 외부를 탐색하고 소통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는 그 자체의 난해함으로 인하여 더욱 요원해지는 경우가 많다.
조두진은 외부의 탐색이나 저항의 형식을 찾기 위하여 애쓰지 않는다. 그는 소설을 통해 누군가를 계몽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마라토너 ‘채’가 완주 후에 흡연을 즐기는 순간을 조두진의 소설을 독해하는 우리의 행위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특정한 정보나 지식의 습득, 뭔가를 해석해야 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그의 소설 속에서 움직이는 소시민들의 행위를 읽어나가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잠깐의 사색에 빠지는 것. 현실과 흡사한 편협하고 이기적인 인물들과 박해받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삶을 교정하는 작은 계기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마라토너의 흡연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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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마라토너의 흡연을 보면서, 우리가 기록에 연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그리고 마라토너의 목표가 서브쓰리가 아니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고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매번 같은 기록을 유지하면 되지, 굳이 기록을 단축하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기업의 구조 조정 이야기와 흡연하는 마라토너의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기업의 경우도 극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 특히 구조조정이라는 해고를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아주 강하게 이야기한다. 담담하지만 강한 메시지이다. 멋진 소설이다. 아름다운 날들을 보면서 김영부 (대부분 주인공이 김영부씨고 다 다른 인물이다.) 씨의 인생을 생각해본다.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농촌이 현대화가 되면서 주변이 바뀌고 그로 인해 그의 가족들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면서 슬프다. 조용하게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슬픈 소설이다. 족제비 재판이 여러 인간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깊숙하게 참여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고, 휘둘리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손톱을 보면서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도 어떻게 보면 별 볼일 없는 개털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삶이란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달려있고, 잘사는 삶이란 작고 소박하지만 나에게 맞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집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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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진 / 한겨레출판 / 2007. 11. ★★★★★
다 읽고난 후, 마음속 외침 하나. "읽을 맛 나는 한국소설 하나 추가요"
조두진 작가의 다른 소설은 읽어본 바가 없기에 쉽사리 판단할 순 없지만 성석제, 원재길, 이기호, 백가흠, 한차현, 김종광, 천명관 작가를 이어 입담 좋은 아저씨(백가흠 작가 등 미혼에겐 미안)를 한 명 더 알게 된 기쁨에 몸서리가 쳐진다. '마라토너의 흡연' 왠지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비틀려 있다. 이 소설집에 담긴 일곱 단편들은 저마다 공간과 소재를 달리해 세상을 비틀어 본다. 아니, 비틀린 건 세상이기에 이를 바로 보려는 시도가 반대로 세상을 비틀어 보려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7번 국도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검사와 그를 모시고 행사장에 가는 경찰 서장이 7번 국도에서 겪는 에피소드다. 수사권이 독립되지 않은 데다가, 기소독점주의를 채택하는 우리나라에서 검사의 권력은 필요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몸체로 따지자면 너무 비대해서 숨조차 고르게 쉴 수 없는 지경이랄까. 이 권력이란 건 대국민권력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몸소 느낄 만한 권력이기도 하다. 이런 모순된 구조에서 액면가만 보더라도 아들 뻘 되는 검사에게, 아니꼬우면서도 굽실거릴 수밖에 없는 서장의 심리가 재밌게 그려져 있다. 7번 국도를 달리다가 교통 경찰에게 붙잡히는 에피소드는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냐, 몽둥이냐가 아직 세상만사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임용된 어린 검사의 기분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은근히 꼬집는다. 상황 파악 못하고 덤비는 교통 경찰과 어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회를 먹고 싶은 검사, 검사 눈치를 살펴야 하는 서장 사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뱃속을 간질인다. 씁쓸한 이야기임에도 큭큭거리며 읽었다.
마라토너의 흡연은 이 책의 표제작으로 가장 재밌기도 했다. 주인공 채는 어느 날 별 이유 없이 마라톤을 시작한다. 혹자는 구조 조정에 대응한 시위 행위로 보기도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런 거창한 이유는 없다.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재능과 탁월한 신체 조건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도 인정받을 만하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한껏 기대를 품는 아내와 주변 사람들과의 바람과는 달리 채는 기록을 깨는 데 무신경하다. 그저 끈덕지게 달릴 뿐. 게다가 마라토너에게 쥐약이라는 담배조차 끊지 않는다. 단순히 한 회사원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취미(마라톤과 담배)를 이야기한 듯하지만, 인원 감축을 감행하는 회사와 흡연자 마라토너를 크로스해 보이면서 작가가 사회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 같다. 마라톤을 한다고 꼭 기록을 갱신하라는 법은 없다. 담배를 끊으란 법도 없다. /기업이 살기 위해 반드시 구조 조정을 할 필요는 없다. 병에 걸리지 않고 살려면 죽으면 된다. / 기업이 적자를 면하는 유일한 방법은 폐업하는 거다. 담배를 피워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건강한 몸을 만들려고 마라톤을 하는 거지 마라톤 하려고 담배를 끊을 수는 없다. / 기업 안에 속한 직원들을 살리려고 기업이 있는 거지 기업이 살려고 직원들을 죽이는 건 말도 안 된다. 읽다 보니 이런 대비가 가능했다. 내 과장된 추측이 작가의 마음속 외침과 닮았다면 무척 기쁜 일이다.
아름다운 날들에서는 김영부라는 귀머거리 사내가 서서히 아름다운 날들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아내의 세속적인 바람을 충족해 주려다가 아내도 잃고 청각도 잃은 한 사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도 잃어 가면서 그는 내내 웃기만 한다. 헛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는 김영부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날들이 아름다운 것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족제비 재판은 줄리언 반스도 단편 소설에서 쓴 소재이자, 중세시대 실제 있었던 재판이기도 하다. 꼭 족제비를 피고로 한 건 아니지만, 중세시대에 실제로 농가나 아이를 해친 멧돼지나 소, 말 등 동물을 대상으로 재판을 한 기록이 있다. 그때는 복수주의(응보형)에 의거한 재판이었고, 범죄의 주체를 인간에 한정할 만큼 법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때였다. 이 소설은 그런 동물 재판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사법고시에 일곱 번 낙방했으나 자신이 천하에 둘 있기 힘든 인재라고 굳게 믿는 법대 졸업생과 야생동물 보호협회 간사, 지역 신문 기자, 이벤트 회사 대표 등 여러 사람의 이해 관계에 맞물려 진행된 이 재판은 흥미롭다. 한낱 농짓거리로 여기고 말기에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촌철살인이다. 이들의 아귀다툼에 정작 사건의 중심에 선 김영부 노인은 애꿎은 딸기 농사만 망치고 만다.
정력가는 남자들이 귀를 솔깃할 만한 이야기다. 70이 넘은 노인, 그것도 다리를 못 써서 하루 종일 앉아 지내야 하는 데다가 이빨도 성치 않은 노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동네 여자들을 홍콩에 보낸다면? 뭔가 비기가 있을 법하다. 이 비기를 전수 받고자 거금 백십 만원이나 주고 틀니를 껴 준 주인공도 물건이지만, 얼마나 글을 감질맛나게 썼는지 여자인 나조차 "그깟 틀니 하나 얼른 껴 줘 버려!" 하고 안달할 정도였다. 여기서 관건은, 그런 대가를 받고 전수 받은 비기는 오히려 그런 노인의 술수였다는 거, 게다가 그 비기로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는 거. 남자들, 특히 우리나라 남자들, 과연 그렇게까지 정력에 연연하는 이유는 뭘까. 남자들의 정력에 연연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반증일까? 아닌 것 같은데...(웬 내숭)
돼지는 처연하다. 갈보, 돼지, 또는 돼지갈보라 불리는 한 여자 이야기다. 카프카의 <변신>을 보는 듯도 한 설정이다. 살덩이를 빼앗기고 맥주 살이 불어난 채 바닥을 기는 돼지가 되어 버린 여자. 꽃을 좋아하는 고운 심성으로 세상을 대했으나 정작 돌아온 건 오물투성이 땅바닥이다.
손톱을 다치면 어느 병원에 가야 할까. 정형외과인가 피부과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6년까지 도합 20여 년을 공부에만 몰두해서 얻은 의사라는 직함. 병원에 갈 때마다 난 의사들이 측은하다. 돈 많이 번다고 좋은 직업이라고 하지만, 과연 행복할까 싶은 거다. 의사보다 더 좋은 건 의사 부인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지 않을까. 죽자 살자 영어 몰입교육 시키고 조기 유학 시켜 가면서 아들 의사 만들려고 바둥대지 말자. 그네들은 오늘도 힘겹다. 두 평 남짓한 수술실에서 하루 종일 감옥살이에, 서른 넘어 가정을 꾸리고 난 후 비로소 첫사랑을 만난다. 친구들끼리 만나도 대일밴드 하나면 나을 수 있는 손톱 갖고 네 거, 내 거 하며 싸운다.
'운전 면허 소지자에 한해 주차 관리원에 임명할 수 있다'는 법령이 나오는 세상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작가. 재밌는 소설 잘 읽고 소화도 다 됐다. 담배나 한 대 피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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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토너에겐 꿈이 있다. 어렵고 힘들어도 꼭 이루고 싶은 꿈. 써브쓰리. 보통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3시간이라는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치기 위해 담배도 끊고 식이요법이나 운동 처방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고들 한다. 안 해봐서,,,) 하지만 『마라토너의 흡연』( 취미 생활을 하다 보면 꼭 지름신과 만나게 된다. 사진이 취미면 끊임없는 렌즈 욕심에 시달리고, 자전거가 취미면 소위 업글병에 밤잠을 설친다. 심해지면 쇼핑이 취미인지 사진이 취미인지 운동이 취미인지 헷갈린다. 그럴 때 마다 난 채를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해서 지름신은 사라지지 않지만...) 오직 달기 위해 달리는 해탈의 경지. 기록 따위는 개에게나 줘 버릴 수 있는 대범함. 자기가 무언가 미련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소설집을 추천한다. 「마라토너의 흡연」외에도 삶을 살아가는 인간다운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간만에 글쟁이 다운 작가를 만났다. |
| 살아가면서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 정작 관심을 갖고, 신경써서 해야할 일은 뒤로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세트메뉴식 내용들이다. 젊은검사와 연세가 꽉찬 경찰서장과의 신경전, 담배피우기위해 마라톤을 하는 40대 직장남성, 귀한 손자의 팔과 닭을 훔쳐간 족제비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시골 할아버지, 한때는 잘나갔던 창녀의 초라해진 마지막 모습, 손톱이 피부과인지 정형외과인지 싸우는 한심한 의사와 또다른 성형외과 의사, 남성의 힘을 위해서 혼자사는 영감님의 틀니값을 물어주고라도 알아야하는 잡지사 기자 등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일을 엄청 신경써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즉 우유부단의 대가들이 모두 모아진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게 만드는 이야기. 한마디로 다 읽고나면 피식 웃다가도 한번쯤 인상을 찌푸려보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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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그 힘든 유격훈련을 마치고, 혹은 하프코스 이상의 마라톤 완주 후 담배를 피워물고 있는 사람 옆에 있으면, 아무리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나같은 사람도 아, 이래서 담배를 피나 보구나 싶게, 담배 냄새가 정~말 달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내 ‘저러려면 운동은 왜 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소설 ‘마라토너의 흡연’에서 주인공 ‘채’는 담배를 피기 위해, 더 맛있게 피기 위해 마라톤을 한다. 표지는 상당히 촌스럽다. 제목 그대로 그냥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뛰면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이라니...표지디자인 한 사람, 너무 날로 먹은 거 아냐? 싶다. ^^ 책에 관한 몇 개의 평을 보니 조두진이라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신선한 발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기대하고 구입했는데, 그런대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첫 소설 ‘7번 국도’는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무척 궁금해하면서 마치 인물들이 타고 있는 자동차를 따르는 것처럼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었고, ‘마라토너의 흡연’은 마침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고, 풀코스 완주 경험도 있어서 더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외 여러 소설 역시 평범함을 벗어나는, 하지만 아~주 개성적이지는 않아서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몇년간 마라톤 대회에 계속 참가해 왔는데, 올해는 수영을 하게 되면서 참가하지 못했다. 생각난 김에, 조만간 내년 대회 참가 신청을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