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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욕망을 향한 시적 사유 - 박노해, 『참된 시작』 1990년대 박노해 시에 나타나는 일상적 욕망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보다 섬세한 시각이 요구된다. 그는 1980년대의 강철 신념과 대립되는 지점에 일상의 욕망을 놓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강철 신념’의 세계에 부재했던 존재의 욕망을 시를 통해 하나하나 복원함으로써 새롭게 단련된 ‘강철 신념’을 내보이려 한다. 일상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욕망과 다르지 않다. ‘사노맹’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그가 “이 운명을 피해보고 싶은 것이다”(「바람 잘 날 없어라」)라고 고백하는 것은, 신념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내밀한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을 인정하지 않을 때, 신념은 관념으로 절대화되어 인간의 삶을 옥죈다. 박노해 시의 방향 전환은 이렇듯 삶의 내밀한 장소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해 겨울나무」에서 시인은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고 선언한다. 그가 “가차 없는 포승줄”에 매인 시기는 공교롭게도 모스크바의 삭풍(소련의 몰락)이 전 세계를 뒤흔든 순간과 일치한다.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인데”, 그리하여 “춥고 서러운 사람”들은 여전한데, 지친 몸을 지탱해 오던 이념의 깃발은 급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빛이 보이지 않는 겨울,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시대에 그는 “뼈아픈 침묵”을 선택한다.
침묵한다는 것은 내면의 빛을 다시금 성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뼈아픈 침묵이 내면의 종 울림으로 맥놀이 치는 순간을 침묵으로 견뎌내야만 “새로운 탄생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외부적인 상황의 악화는 시인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지만, 외부적인 조건을 내면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뒤바꾸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침묵의 소리가 움터 나온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시작 → 패배 → 참된 시작으로 변주되는 시적 주체의 내면을 묘사함으로써, 시인은 패배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져야 할 투쟁의 길을 발견한다.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 「강철 새잎」 전문
연둣빛 새 이파리는 엄혹한 겨울의 두터운 껍질을 “제 힘으로” 뚫고 나왔기에 “강철 새잎”이라고 불릴 수 있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들뜬 존재의 열정이 이 시에도 드러나지만, 그 열정은 ‘보드라움’으로 강함을 이겨낸 ‘강철 새잎’의 역설적 이미지로 표출된다. 강철 같은 신념은 이념의 성채에서 뻗어 나오지 않는다. 제 힘으로 도달하지 못한 이념의 성채는 이념이 사그라지면 쉽게 허물어지는 허약할 성채일 따름이다.
이념은 이념을 ‘살아내는’ 존재의 삶 속에서만 강철 같은 신념으로 굳어진다. 엄혹한 겨울에, 강철 새잎은 부드럽고 여린 품성으로 두터운 껍질을 뚫고 나온다. 새잎은 때를 기다릴 줄 안다. 외부적인 조건(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새잎은 때를 기다린다.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굳센 마음이 있기에 새잎은 ‘강철 새잎’으로 다시 탄생한다. 패배를 참된 시작으로 회향(廻向)하려는, 다시 말해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 세상을 바꿔”(「회향」)내려는 박노해의 새로운 ‘강철 신념’은 이러한 ‘강철 새잎’의 부드러운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서서히 담금질되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 욕망에 대한 박노해의 시적 사유는 그러므로 ‘참된 시작’을 다시금 다짐하는 존재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길로 나타난다. 욕망은 이념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안쪽에서 이념과 더불어 존재한다. 「절정의 시」에 표현되는 미래의 세상, 이를테면 “쾌적한 일터에서 더 높은 의욕과 보람으로 노동하는 사회, 보다 많은 시간을 맑고 푸른 자연 속에서 건강한 레포츠를 즐기는 사회”는 시인의 이념이 투영된 세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윤리적으로 실현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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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시작』은 ‘두 번의 죽음’속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1991년, 박노해 시인에게 ‘사형’이 내려진 그날, 인간해방의 이상으로 품었던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임박한 죽음, 그리고 신념의 죽음 앞에서 그는 침묵 속에 자신을 묻으며 패배를 직시한다. 그로부터 7년 6개월간 그는 감옥 독방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아낸다. 시 「그해 겨울나무」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그리고 이렇게 끝맺음된다.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시작-패배-참된 시작’의 변증법으로 나아가는 강렬한 시의 힘, 그리고 강인한 영혼의 힘! 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죽음 앞에서 길어올린 이 시편들은 패배에 눈물짓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며,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건넨다. 살아있다면 희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언제나 삶은 거듭, 새롭게 시작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