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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넘어선 시간과 공간-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자유를 넘어선 시간과 공간-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내용보기
철학공부를 시작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왜 철학이냐고 물어왔다. 심지어 집 앞에 대나무를 꽂을 것이냐고 농담같지 않은 농담을 건네는 이도 많았다. 그럴때마다 나는 대나무를 꽂고 싶어도 살아날 것 같지 않아서 아예 꽂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응수했지만, 사람들의 철학에 대한 인식을 보는 것 같아 명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내 한 생각은 ‘정말 너무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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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공부를 시작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왜 철학이냐고 물어왔다. 심지어 집 앞에 대나무를 꽂을 것이냐고 농담같지 않은 농담을 건네는 이도 많았다. 그럴때마다 나는 대나무를 꽂고 싶어도 살아날 것 같지 않아서 아예 꽂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응수했지만, 사람들의 철학에 대한 인식을 보는 것 같아 명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내 한 생각은 ‘정말 너무 어렵다’ 였다. 문학을 하는 분들은 언짢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철학 강의를 듣다가 문학 강의를 들으러 가면 기분 전환하는 것 같았다고 말해야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철학을 선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을 하지 않고 인문학을 하겠다는 것은 나무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는 가늠하지 않고 나무에 매달리는 것이나 같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인문학의 기초가 되면서 바탕을 이루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은 이진경씨의 깔끔한 글솜씨가 돋보이는 책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그의 사유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화두를 만나 새로운 개념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역사적 시간관은 순환적 시간과 직선적 시간으로 구성된다. 중세 이전의 시간, 즉 원시 고대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에 의거한 순환적 시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면, 신의 시간에 의거한 중세 이후의 시간은 직선적 시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고 보는 순환적 시간관은, 해가 뜨면 아침인줄 알고 해가 지면 저녁인줄 아는 자연적인 리듬에 시간을 의탁하고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시간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되었으므로 고대인들에게는 종말의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신의 시간이 대두된 중세 이후는 신의 탄생을 시작으로, 부활을 종말로 보고 있다. 신의 부활은 전혀 다른 세계의 도래를 약속하므로 지상의 시간의 종말을 의미하고, 그러므로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보는 직선적 시간관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저자는 이 시간관에 자본주의적 시간을 더한다. 자본주의적 시간은 곧 시계적 시간을 의미한다. 현대 도시의 삶은 시계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을 분절하고 그에 따라 행위를 한다.


  저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에 들뢰즈/가타리의 ‘기계’개념을 도입해 ‘시간-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시계적 시간이 단지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하고 채취한다는 점에서 ’기계‘라고 말할 수’있다는 것이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는 그런 의미에서 시간-기계의 의미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모던 타임스>는 시간에 의해 철저히 의식화된 채플린의 행위를 보여 준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노동이 배치됨으로써 노동은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채플린은 나사를 돌리는 행위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따라 이루어짐으로써 거대한 기계적 체계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노동자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신체의 본래 리듬, 자연적인 신체의 리듬은 무시되고 기계의 리듬을 따라가는 음울한 자본주의적 시간관에 따라 사는 도시인의 삶을 그려 보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시간의 본질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인간의 역사, 특히 근대 문명과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삶의 방식에서 시간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에서 분리된 어떤 형식으로 점점 독립되었으며, 그것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사로잡고 포획하는 그런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계적 시간은 손목시계를 통해 우리의 일상에 놀라울 정도로 침투하여 있으며, 그 시계적 시간은 자본주의의 화폐적 형식과 결합하여 우리의 삶을 ’좀더 정확히‘, ’좀더 빨리‘, ’좀더 길게‘라는 구호로 몰아붙이고 있다.


  공간 개념도 사회학적인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공간과 신체를 통해, 가령 학교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학교의 일부로서 교사는 다른 요소들과 더불어 학교라는 한 공간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교를 이루는 ‘공간적 신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관사는 기차의 일부를 이루지만 승객은 기차의 일부를 이루지 않는다. 그런 개념에서 볼 때 학생은 학교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기계가 작동하면서 가공하고 변형시키는 재료이므로 학교의 일부를 이루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은 학교라는 공간 내에서는 ‘공간 내 신체’이다. 이런 개념을 도입해 저자는 공장에서 노동하는 노동자의 신체와 상품을 신체를 구별한다. 노동자는 공장을 구성하는 공간적 신체라면 상품은 공장에서 가공되고 변형되는 공간 내 신체이다. 공간적 신체는 고정되어 있지만 공간 내 신체는 흐른다. 고정되어 있음과 흐름에서 우리는 자유의 의지를 감지해 낼 수 있다. 현대인은 시간과 공간에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비자유인이 되어 사는 비참한 존재인 것이다.


  공간의 분절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재미있다. 16세기에는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방1. 방2. 거실, 주방 등으로 분화되지 않고 방 하나의 공간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재미있는 요소중의 하나가 많은 그림을 동원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인데, 프랑크푸프트의 16세기 집의 내부를 그린 그림을 보면 한 방에서 아이를 낳은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고, 이미 태어난 아이들은 바닥에서 놀고 있다. 식탁에서는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서는 병든 노인이 의자에 앉아 죽어가고 있다. 태어남과 성장, 일상적 삶과 죽음의 모든 일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자본주의의 발달로 부유층을 중심으로 여자의 공간이 집(home)과 남자의 공간인 집(house)로 나누어진다.

 

  home에서는 주로 일상적인 집안 일들이 이루어지고, house에서는 상업적인 일들과 휴식, 사교등이 이루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국 집이란 공간은 여유를 확보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어떤 식으로 절단하든 여유있는만큼씩의 공간이 개인에게 배당되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공간적 신체에 해당하거나 공간내 신체에 해당하는 것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학교에서는 공간적 신체에 해당하는 교사가 기차 안에서는 공간내 신체에 해당하기도 한다. 결국 문제적인 것은 공간적 신체에는 노동이 따른다는 것이고 공간내 신체에는 노동 대신 자유의지가 더 많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공간이 사람의 처한 상황을 벗어날때는 때로 재앙이 따른다. 억지로 자신의 공간의 넓히려 하거나, 공간내 역할 변경에는 반드시 무리수가 따르는 것이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재무감독관이었던 니콜라스 푸케는 보르비콩트 성을 건설하고 불과 3주후 루이 14세에게 체포되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보르비콩트 성은 당시 궁전의 화려함을 능가했는데, 루이14세와 궁정 사람들을 초대하여 시공식을 하고 난 후 왕의 노여움을 사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고, 루이 14세는 이후 귀족의 기를 꺾기 위해 루브르 궁전과 베르사유 궁전 등을 짓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적인 역할을 많이 수행하던 방은 사적인 공간으로 역할이 바뀌게 되고 지금은 집 전체가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속한다. 이제 남자들은 더 이상 집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 않으며, 가족 이외 타인의 방문은 지극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결례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자본주의적 시간인 근대적 시간이 선분적 시간이라고 한다면 공간은 구획화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공간은 구획화에 의해 부분공간이 산출되고 이는 공장이나 학교처럼 공간의 분할과 그 안에서의 특정한 지형적 배치, 그에 상응하는 양식화된 행위의 집합으로 구성되어진다. 근대적 공간은 더 이상 일반적 척도로서 작용하지 않고 추상화 되지 않은 장소적 특성에 의해 상품화된다. 고대의 추상적 공간 개념은 이제 신화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가 신문에 연재되고 곧이어 소설집으로 출간되는가 했더니 인터넷 서점에 덤핑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처음 <바리데기>가 연재된다고 했을때의 기대감은 컸다. 황석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감과 무속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바리데기’라는 소재 자체가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기대감은 곧 실망으로 바뀌어 하루쯤 연재를 읽지 않아도 별로 아쉽지 않은가 했더니 어느새 흐리터분한 결말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신화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자유롭다. 즉, 플라톤이 말한 절대적 시공간에 속해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리데기>는 그런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신화라는 모티브를 이용해 근대적 시공간과 절대적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었고 그것이 별로 부자유스럽지는 않았지만 흥미롭지는 않았다. 생명수를 찾아 서역을 찾아가는 바리와 그곳에서 만나는 죽은 이들의 영혼, 현실세계에서 수시로 경험하는 접신의 상황은 충분히 공감가는 내용이었지만 지루했던 것이다. 근대적 시공간에서 어려움에 처하면 바리는 어느새 신화의 세계에 속해 있었고, 신화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신화의 세계는 희망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그런 부분에서도 부정적인 희망의 시간에 바리를 놓고 있었다. 현실과 신화의 자유로운 이동이 오히려 소설의 흐름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이라는 이름이 우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이름은 대단하다. 나 역시 황석영의 작품은 책을 사볼 정도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리데기>는 마치 이문열의 <솥단지를 끌어안고>를 보는 느낌이다. 몰락해 가는 한 대작가의 기세가 작품에 스며 있는 것 같아 쓸쓸하다. 그 이름에 걸맞는 작품이 늘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그 이름에 거는 독자의 희망이다. 헤리포터처럼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운 이동이 우리 고유의 신화인 바리를 만나 좀 더 깊고 좀 더 넓은 작품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h******0 2014.01.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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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시간, 근대적 공간을 넘어서
"근대적 시간, 근대적 공간을 넘어서" 내용보기
시간은 우리의 행동과 말, 사고를 제약하고, 그 흐름을 적당한 단위로 절단하여 채취하는 '시간-기계'다. 학교에나 작업장에나, 또 많은 경우에는 공부하는 아이들의 방에도 어김없이 달라붙어 있는 시간표는 매시간, 혹은 이미 주어진 분량의 시간마다 우리의 할 일을 정해준다. 시간표-기계. (초판 '서문' 중에서) ▲ 그림 1-14 채플린, <모던타임즈>, 1936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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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우리의 행동과 말, 사고를 제약하고, 그 흐름을 적당한 단위로 절단하여 채취하는 '시간-기계'다. 학교에나 작업장에나, 또 많은 경우에는 공부하는 아이들의 방에도 어김없이 달라붙어 있는 시간표는 매시간, 혹은 이미 주어진 분량의 시간마다 우리의 할 일을 정해준다. 시간표-기계. (초판 '서문' 중에서)

▲ 그림 1-14 채플린, <모던타임즈>, 1936
채플린은 나사를 돌리는 동작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가면서 점점 미쳐가는 신체를 통해서 이를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적절하게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나사를 따라 거대한 기계적 신체 안으로 끌려들어감으로써 기계의 움직임에 사로잡힌 인간의 신체를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69쪽)
시계를 타이틀백으로 시작하는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는 제목 그 자체가 뜻하는 것처럼 근대적 시간성에 대한 예리한 묘사와 풍자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화장실에 드나들 때나 경찰에 쫓겨 공장에 들어올 때나 시간체크기 누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부인의 가슴에 달린 단추를 보고 너트로 오인해 쫓아가는, 정신병적인 상황에서도 잊지 못하고 시간체크기를 누르는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근대적 시간성이 이미 (사람들의) 무의식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은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근대인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는 근대적인 시간, 근대적인 공간에 대한 연구서다. 1997년에 나왔던 같은 책을 초판 이후의 연구 성과를 추가하고 기존의 글에 첨삭을 가해서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초판과 비교해보면 우선 본문 중 4개의 글을 새로 추가했고 많은 도판과 주석도 추가했다. 결론에 해당하는 글도 따로이 독립된 장으로 새로 썼다. 그 결과 초판의 두 배에 이르는 분량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초판이 주던 딱딱하고 전문적인 연구서의 성격에서 어느 정도는 대중적인 교양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들뢰즈와 문학-기계>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지은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적 틀을 빌려,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기계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기계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시간-기계' 와 '공간-기계'를 다룬다. 근대적인 시간·공간 개념의 탄생, 나아가 근대인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건으로서 근대적인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의 탄생에 대해 100여 개가 넘는 도판들을 삽입하고 주석을 달아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집이나 학교, 공장 등 근대의 사회적 장에서 우리를 일상적으로 근대인으로 생산하는 '배치'를 탐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 지긋지긋한 근대적 삶을 넘어서는 것조차 이러한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극복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원시사회의 삶이나 중세사회를 언급할 것도 없이 농촌생활이 주를 이루던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시간 개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 뜨면 일어나 논밭을 갈고 해지면 들어와 잠을 자던,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았을 것이다. 그들이 시계를 보며 9시까지 논에 나가고 6시까지 집에 들어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말 발명되었다는 시계는 16세기경에 이르러 폭넓게 보급되는데, 시계를 통해 비로소 시간은 등질적인 어떤 양으로서 측정되고 분할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노동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에 의해 체계화된 근대적 노동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무엇을 생산하는 어떤 노동이냐, 곧 노동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추상적인 양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농사를 짓는 일이나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이나 고기를 잡는 일이나 모두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노동이란 것이다. 이때 이 추상적인 노동의 크기를 재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과 근대적 노동의 결합은 테일러주의에서 보이듯이 초 이하의 세분된 단위로 노동자의 활동을 통제하려는 메커니즘의 축을 이루면서 근대인의 삶과 행동을 제약하기 시작한다. 이제 시간은 상인들의 계약에서 공장의 규율로, 마침내는 기차의 선로를 따라 민중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서 손목시계를 통해 우리의 신체에 직접 부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시간-기계는 우리의 신념이나 의지보다 먼저 작동하는 신체적 습속이 되어버린 것이고,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분·초와 같은 미소한 단위시간으로 분할할 수 있는 근대의 추상적 시간에 익숙한 사람들과, 우리의 부모님 세대처럼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던 근대 이전의 사람들 혹은 여전히 그러한 소농민들의 경우에 대해 우리는 동일한 방식의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다. 해뜨면 일어나 밭을 갈고 해지면 자는 그들로서는, 밤새 일을 해야하는 근대적 노동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며, 자연의 리듬을 벗어난 반복적인 단순노동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던타임즈>에서 시계를 부수는 채플린의 행동은 근대적 시간성에 대한, 아니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근대적 삶의 양식과 통제방식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변화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고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것이다. 곧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으며, 정확히는 사람들의 집합적인 삶의 변화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느림>에서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을 대비시키는 것도 정확히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행동의 양상이 이전에는 한가로움으로 간주되고 종종 멋과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면, 시계의 초침 안으로 삶이 끌려들어간 지금 그것은 결코 멋이나 미덕이 될 수 없는 빈둥거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변화는 분명히 시간의 변화로 요약되는 사회적 삶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행동하며, 그 형식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

▲ 그림 1-16 달리, <기억의 고집>, 1931년
달리는 다른 방식으로 시계적 시간, 근대적 시간의 외부를 사유하려고 했다. 치즈처럼 부드러운 시계, 아니면 그림에서처럼 축 늘어지고 휘어진 시계를 통해서 시간의 비균질성과 '부드러움', 혹은 '휘어짐'을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73쪽)
그렇다면 지은이의 이러한 작업이 가지는 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지은이는 항상 우리 사회의 변혁, 진보를 생각한다.

그 변혁이란 게 단순히 국가권력을 대체하고 사회적 관계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제 그것만으로 사회변혁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현실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삶의 양식, 삶의 관계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국가권력의 대체는 언제든 다시금 그런 국가권력을 재건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 이런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바꾸지 못한다면, 다른 종류의 배치로 변환시키지 못한다면, 근대적 삶을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적 생활양식, 근대적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근대적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가 왜 근대적 시간, 근대적 주거공간 연구에 천착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혁명', 그것은 단지 국가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것을 대체하는 것만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공간에서 활보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들이 동일한 것을 재건할 수 있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을까?"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p31)

하지만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미 '기계'로서 선험성으로서 우리의 신체를 사로잡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저 불변의 확고한 힘을 갖고 있는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를 대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은이가 '진보'라는 개념을 시간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며 전개하는 5장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본인이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m******7 2007.09.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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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내용보기
예전부터 읽고 싶기는 했었는데 절판이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우연히 영풍문고에 구경하러 갔을때 떡!하니 있어서 구입하게 되었다. 덤으로 yes24를 다시 검색해본 결과.... 판매 중인 것으로 확인 되었다.젠장.... -_-;;;;흔히 말하는 "근대"가 되면서 부터 혹은 기독교로 인한 인식의 변화가 이전에 갖고 있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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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읽고 싶기는 했었는데 절판이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우연히 영풍문고에 구경하러 갔을때 떡!하니 있어서 구입하게 되었다. 덤으로 yes24를 다시 검색해본 결과.... 판매 중인 것으로 확인 되었다.

젠장.... -_-;;;;


흔히 말하는 "근대"가 되면서 부터 혹은 기독교로 인한 인식의 변화가 이전에 갖고 있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개 정판을 내면서 내용을 추가했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내용의 완성도가 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약간은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근대적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시선의 변화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적절한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진경 선생이 썼기 때문에 역시나 들뢰즈의 시각이 곳곳에서 나타나므로 들뢰즈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약간은 우회하는 입문서로서도 쓸만하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적 전제 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 시간, 공간을 우리는 너무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약간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자본과 군사적 지배만을 제국주의라고 보는 촌뜨기 좌파 혹은 진보주의라는 역겨운 인간들도 술집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세상 욕하기 보다는 이런 책도 읽으면서 잠시 심호흡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y*******o 2007.08.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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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에 대한 토대로서의 시공간의 탄생,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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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놓고 조금보다 놓고를 반복했다가 출장가면서 자투리 시간에 이책을 다 보려는 맘에 다시 책을 들게 되었다.이진경의 책은 이전에도 본적이 있고 그 문체나 필치가 내 선호에 많이 부합하여 그의 책을 자주 접하고 싶은 욕망은 항상 내재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대적 의미의 부여, 시간은 탄생이라 말하는게 맞을 듯 싶고 공간은 새로운 의미 찾기가 더 맞지 않나
"근대 철학에 대한 토대로서의 시공간의 탄생, 그 의미" 내용보기
책을 사놓고 조금보다 놓고를 반복했다가 출장가면서 자투리 시간에 이책을 다 보려는 맘에 다시 책을 들게 되었다.이진경의 책은 이전에도 본적이 있고 그 문체나 필치가 내 선호에 많이 부합하여 그의 책을 자주 접하고 싶은 욕망은 항상 내재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대적 의미의 부여, 시간은 탄생이라 말하는게 맞을 듯 싶고 공간은 새로운 의미 찾기가 더 맞지 않나 싶다. 시간의 탄생...근대 과학자들에게 표준적 척도로서의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찾아야 했던 시간..시계...이러한 시간은 이제 추상적 개념에서 시계라는 기계가 등장하고 이는 자본주의와 합성되어 '시간-기계'가 나오고 '시간=속도=돈'이라는 공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공간에 대한 의미 부여...사물에 대한 배치,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근대 자본의 집요한 실질적 포헙 전략이 구현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과학자와 부르죠아지에 의해 그 근대적 의미 짓기와 활용 방법에 대한 적극적 연구/ 실험이 집행되기 시작하여 철학/예술/공학/시민 운동과 부합하는 과정을 거쳐 종국적으로 자본/ 자본가/ 자본주의가 가장 주목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스스로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재생 수단'으로 전락하는 시점에 이르게 된다.

[인상깊은구절]
진보를 정의해주는 능력이란 이제 새로운 창조와 창안, 변이들이 생성될 수 있는 탈주의 공간, 그 여백을 통해 정의되어야 한다. 탈주선과 능력의 확장을 통해 정의되는 진보란 그러한 생성능력의 확장이며, 다양한 이질적인 것들이 숨쉬면서 새로운 일관성을 생성할 수 있는 여백의 확장을 뜻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을 위한 진보가 아니라 이질적이고 비인간적인 것들이 인간과 최대한 공존하고 공생하며 새로운 관계의 생성, 그러한 생성능력의 확장이 진보라는 개념안에서 가능해진다.
s*****s 2004.02.2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근대에 대한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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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씨의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지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는 말은 이 책의 제목대로 '근대'겠지요. 근대를 살고 있는 나는, 부연하자면 근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떤 사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고민합니다. 이런 고민으로 저는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의 매력적인 제목에 눈길을 줬을 겁니다. 지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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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씨의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지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는 말은 이 책의 제목대로 '근대'겠지요. 근대를 살고 있는 나는, 부연하자면 근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떤 사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고민합니다. 이런 고민으로 저는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의 매력적인 제목에 눈길을 줬을 겁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시간과 공간적 성격은 '나'를 이해하는 여정에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근대적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 탐색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크게 '근대적 시공간의 개념'과 범위를 확장시켜 '근대 사회의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에 대한 얘기합니다. '기계'라는 개념은 들뢰즈에게서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저자의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그 연혁이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의 생각은 시공간에 대한 개념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해 '기계'라는 개념과 만나보면 진일보 하는 것 같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추즉이 너무 많군요. 근대 이후에 시공간에 대한 생각은, 시간과 공간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이런 생각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깨집니다. '시간과 공간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생각을 멈추면 안 되겠습니다. 시공이 선험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공간이라는 것 위에서 사건들을 만들어 내니까요. 저자는 '시공이 가변적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선험적 시공개념은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시공간의 개념이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라면, 근대적 시공간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니까요. 이렇게 사는데,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한 학문적 천착이 뭔 필요가 있겠습니까.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은 근대 과학에서 출발합니다. '시간'개념 먼저 얘기 하겠습니다. '간명함이 갖는 아름다움과 편리함은 근대 과학의 싹이 발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단의 학자둘은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해, 물리적 자연을 수학화 할려고 합니다. 이 수학화를 통해 자연은 '시계적 시간'과 만납니다. '시계적 시간' 더 나아가 '시간 기계'는 개인의 활동과 동작을 선분화된 시간에 대응시킵니다. '시간 기계'는 시간표와 시계, 그리고 징벌의 계열화를 통해 자본주의적 배치를 이룬다고 합니다. '시간 기계'라는게 특정한 성격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않는 것 같습니다. 특정 배치에 들어갔을때, 그 배치 속에서 요구하는 성격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 잠깐 '기계'라는 개념에 대해 짚고 넘어가죠.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해서 특정 목적에 쓰이도록 하는 것, 이쯤 되겠습니다. 머리 속에서 맴돕니다. 정확하게 이해를 못 해서 그런가... '공간' 개념을 얘기 하겠습니다. 근대적 공간으로 다루는 것은, 이 책에서는 학교, 집, 공장입니다. 이 세개가 근대적 주체를 생산하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세개는 개인의 활동 공간을 구획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라는 공간은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사회화(?)'시키기 위한 배치를 만듭니다. 그 배치속에 들어 온 아이는, 배치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만들어 지겠지요. 더 중요한 개념들이 많은데, 너무 길게 쓰는 것 같아 줄입니다. 이해할 수 없느 부분도 많았구요. 이외에도 '공장-기계'과 '가정-기계'에 대한 내용과 시간과 공간의 개념적 차이에 대한 내용들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마지막 장은 '시간공간-개념과 시간공간-기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가 네 페이지가 개인적으로 정말 어려웠습니다. * 아쉽게도 색인이 없습니다. 저는 97년 판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얇은 책이라도 색인은 꼭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뷰 쓰기가 너무 어렵네요.
g********m 2003.05.0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근대성과 시간 공간에 대한 지루한 탐구
"근대성과 시간 공간에 대한 지루한 탐구" 내용보기
필자는 97년 판본을 읽었으며,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1997년에 나왔던 같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본문 중 4개의 글을 새로 추가했고 결론에 해당하는 글을 새로 작성되었다. 또한, 철학관련서적의 "쉬운" 또는 "재미있는" 책들이 "재미를 보니"깐 증보를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속좁은 의심을 하게 만드는 책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책과 그가 추구하는 학문의 성격상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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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97년 판본을 읽었으며,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1997년에 나왔던 같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본문 중 4개의 글을 새로 추가했고 결론에 해당하는 글을 새로 작성되었다. 또한, 철학관련서적의 "쉬운" 또는 "재미있는" 책들이 "재미를 보니"깐 증보를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속좁은 의심을 하게 만드는 책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책과 그가 추구하는 학문의 성격상 어쩔 도리가 없음은 인정하는 편이다. 결국, 2권에 대한 서평을 나눠야 하지만...필자의 귀차니즘을 능가하는 니힐리즘은 타이핑의 게으름을 -이즘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어찌되었건 "이진경"은 "진중권", "이정우" 와 함께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철학, 미학의 서적을 출판한 인물들이다. 속좁은 필자로선 그들의 다작(多作)이 배가 아프긴 해도...김용옥에 비해 용서를 쉽게 해 주는 편이다? 근대성의 시간과-공간의 관계를 기계화 되는 문화, 사회와 역사의 근거를 들어 재미없게 얘기하고 있다. 저자가 밝혔듯이 자신의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위주로 작업한 것을 그냥 묶은 것이 97년 판본이라서...그렇게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그의 대중적인 작업인 "굴뚝청소부"와 "논리속의..."씨리즈에 익숙해지신 분이라면, 하품할 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가 스크랩한 도판은 상대적으로 흥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아주 명료하게 요약될수 있다. 근대성을 발견하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측정가능해져서 기계화되었다는 비판적시각을 가지고 있다. 근대 라는 연구주제와 시간과 공간의 개념분화에 대하여 다소 직업적(?)인 흥미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면, 옛 판본을 구해다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YES마니아 : 로얄 i******8 2003.01.2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