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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은 국어대사전에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얼핏보면 단순하게 보이는 이 단어는 사실 생각보다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을 처음 소개한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는 스피노자의 연민에 대한 정의를 싣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연민의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약자를 위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몸이 불편하거나 가진 것이 없는 이에게서 측은한 마음을 느낀다는 사실이 당연스럽게 여겨지지만 스피노자는 그 감정의 이면을 꿰뚫는다.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이 연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느껴지는 만족 등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자기만족과 좋은 평판, 상대의 감사를 얻을 수 있을텐데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연민이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기만 한다면 그것을 느끼는 사람도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 그 감정이 고민의 대상이 되는 단계는 바로 그에 대한 '희생'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 당장 내일 끼니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이를 데리고 가서 저녁을 해결해 주는 정도는 적당하다. 남을 위해 내가 선의를 베풀 수 있다는 만족감에 돌아가는 길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매일 저녁이 된다면 어떤가. 매일 나를 찾아와 저녁을 해결해 달라고 한다면 결국 나는 그가 의존적이라거나, 생의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내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연민의 감정은 사실 그저 감정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연민의 감정을 주던 이가 그것을 거둬들인다면 그저 감정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받던 이에게는 유일한 구원이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선의는 선의로 끝날 수 없게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은 그 미묘한 지점, '연민'과 '연민에 따른 희생'이 뒤따라야하는 순간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전도 유망한 소위 호프밀러는 우연히 알게된 에디트라는 소녀가 사실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적잖이 당황한다. 그는 무례하게 대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에디트를 찾아가고 매일 매일 그녀의 집에서 놀게 된다. 호프밀러는 자신이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심지어 모든 권한을 다 쥐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 것처럼 에디트와 그를 걱정하는 아버지 케케스팔바나 친척들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에디트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날 에디트의 이마에 친애의 의미로 키스를 하려고 했을 때 에디트가 호프밀러의 머리를 잡고 키스를 해댄다. 그저 그녀를 작은 존재, 육체적으로 열등한 소녀, 단순히 동정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호프밀러는 크게 당황하고 정신없이 그 집을 나선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그녀에게 주는 연민의 감정은 그저 '호의'일 뿐 사랑으로까지 발전시킨다는 생각이나 상상은 해본적조차 없었다. 그의 감정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해졌을 때 호프밀러는 이를 겁내고 어떻게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 한다. 사실 우리가 가지는 연민의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나와 전혀 무관한 이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동정은 매우 쉽고, 사랑해줘도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지는 것 역시 간단하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는 동안 상대를 보면서 자기위안을 느끼고 만족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누군가가 주변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위로하는 것이, 좋은 일이 있을 때 축하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기적 감정에 둔감한 이유는 스스로 너무 속물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누구도 드러내서 설명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인간의 본성에 대해 호프밀러의 세밀한 심리묘사를 바탕으로 독자 스스로 반문하게 하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호프밀러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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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조각칼로 새기듯이, 치밀하게 혹은 독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를 절대 잊어 버릴 수 없게 하는 마력의 구조와 이야기전개, ...솔직히 중간중간 쉬어 주어야할 정도로 사람 진을 빼는 구석이 있는 책이다. 내용은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결국 장애인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책임져주지 못하는 연민 가득했던 그러나 또 다른 이면에는 자기합리화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우유부단함이 돋보인다. 누구나 공감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우상화의 이면을 극명히 파고들면서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흔들어대는 묘사들은 집요하기까지하다 <연민>이라는 나긋한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선 소개되었지만, 원제인 <마음의 초조함>이 더 와 닿는다. 그 보다 더한 참을 수 없는 초조함' 내지는 미칠듯한 초조함'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내용이다.
인간의 마음을 이거다저거다 하나로 결론짓는것은 불가능하다. 사람 누구나 어느 정도의 가식을 매너로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더더군다나 말이다. 겉으론 온화한 미소를 짓고 훌륭한 매너를 자랑하는 사람의 속마음이 모두 비단결 같다고 말할 수 없는것과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25살 호프밀러 소위의 연민을 가장한 우유부단함에 한 가녀린 장애아 소녀가 목숨을 건다. 하지만 이건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고 타인에게 옳은 표현을 하는거야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살아간다. 서로의 미숙한 감정의 전달을 한 사람은 연민의 대상으로 여겼고, 또 한 명은 숙명적인 사랑'으로 여겼던 간극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걸 알아 차리지 못한 남자의 둔함을 탓해야할지, 오직 자신의 장애만을 죽음같은 천형처럼 여기던 소녀의 눈에 처음으로 등장한 자신을 자애롭게 보듬어주고 염려의 눈길을 주는 낯선 젊은 남자의 모습에 속절없이 빠져들고만 소녀를 탓해야하는건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이 연민'이라는 감정이 혹은 누구에겐가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도 있다는 거다. 다만 배려의 차원으로 그리고 자신이 누려보지 못한 화려한 문화를 접해보기 위한 수단으로 가볍게 드나들었던 젊은이에게 지워지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책임감일 수 도 있다. 자신을 사랑해마지않는 장애인 소녀의 앞날을 함께 헤쳐나가야하고 자신의 모든것을 원하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여야하고 - 또한 순간 등장하는 에디트의 삐걱거리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혐오해 마지않는 호프밀러의 모습은 비장애인아 느낄법한 모습이다 - 이런 모든것들을 뛰어넘지 못할 바에는 그녀의 사랑을 거절하는것이 마땅하지만 그럴 수 없는것이 운명'이라는 질긴 굴레일것이다. 사춘기소녀의 감정은 언제나 제어하기 어려운 기복이 심한 어떤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것을 남자에게 걸고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에디트.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 - 감상적이지 않은 ,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
여기에 등장하는 제대로된 연민을 발휘하는 인물로 에디트의 주치의 : 콘도르가 나온다. 연민과 사명감으로 자신이 치료하다 실패한 맹인여자를 아내로 맞는 인물로 끝까지 환자인 에디트와 호프밀러 소위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어차피 자기 몫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연민으로만 동정심으로만 타인을 책임져 줄 수는 없는거같다. 사랑이 깔려있지 않은 관계는 모래위의 집과 같이 조금의 금만 가도 와르르 무너진다. 에디트가 가진 사랑이 남자에게는 없었다.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인것을 떠나서 사랑을 강요하거나 책임지울수는 없는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가혹한 운명의 두 사람은 운명의 장난인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인지 비극을 맞는다. 연민'의 독성이 남녀모두에게 가혹한 형벌로 내려진다.
무엇보다, 인간의 보여주고싶지 않은 내밀한 곳을 밀도있게 그린 수작임에 틀림없다. 자극적인 사건사고없이도 긴밀하게 엮어내는 구조와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감정이입하게 하는 전개가 흥미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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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속에 연민도 포함되어 있는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었다. 책의 제목처럼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서야 왜 책의 제목이 이러한것인지...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 속 주인공에게 있어서 연민이라는 감정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버렸어야 할 지독한 감정이라는 것을....
저자에 대하여- 많은 시집과 시를 펴낸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 책의 맨 뒷장에 이 사람의 일대기가 쓰여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내 놓았는지.. 일년에 한권정도가 수두룩했다. 그 열정이란.. 하지만 그는 첫번째 부인과 헤어지고 두번째로 다른 여성과 결혼했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다가, '자유로운 위지와 명료한 정신상태' 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두번째 부인과 동반자살을 했다.
주인공 호프밀러 소위는 유명한 귀족 집으로 초대를 해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 귀족의 딸 에디트를 소개받게 된다. 에디트는 걷지 못한 장애를 가진 소녀였는데, 그것을 몰랐던 호프밀러는 그녀에게 그날 밤 춤을 신청한다. 그리고 한바탕 벌어지는 에디트의 충격과 소동.. 그 일을 계기로 호프밀러는 장애를 가진 그녀에 대해 연민을 가지게 되고 매일 그 귀족의 집에 들러 그녀와 말상대를 하게 해준다. 오로지 연민의 감정으로. 하지만 호프밀러 소위를 사랑하게 된 에디트는 그 또한 그녀를 좋아할거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데... 그 고백은 한 사람의 자살로 이어지게 되고 만다..
안타까운 이야기... 한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다른 한 사람이 갖는 연민이라는 감정과 겹쳐 나타나게 되는 소설. 그래서 더 비극적인 소설이었다. 책의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어서 많이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린 책이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주인공 호프밀러의 내면을 맘껏 들여다 볼수 있었다. 그의 연민에 대한 상처와 고통들. 그리고 에디트의 아버지 케케스팔바 의 근심이 너무도 잘 표현된 책이었다.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만 환자를 위한 위로이고 치료제이며 약이 되지요. 그러나 이걸 정확하게 조제할 줄 모르고, 적당한 시기에 멈출 줄 모르면 독약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 한두 번 맞으면 통증을 진정시키고 마비시켜 기분을 좋게 만들죠. 그러나 육체나 영혼이나 우리의 기관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원하듯 감정도 점점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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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전율을 느꼈던 작품이 딱 두 권있다.(너무 얄팍한 독서량인가...)
첫번째는 슈테판츠바이크의 단편 모음집이었다. '감정의 혼란','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달밤의 뒷골목','황혼이야기' 등 이런 작가도 있구나! 이런 작가를 난 이제서야 알았구나...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츠바이크의 책을 읽고 난 뒤의 전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두번째 작품은 에밀아자르(혹은 로맹가리)의 '자기앞의 생'이었다. 이 작품은 책을 덮는 순간 극도의 흥분과 함께
두 작가 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인지 아무런 배경지식없이,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조사 없이 읽었기 때문에 더 놀라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뒤로 아자르(혹은 가리)의 작품들은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호들갑스런 감정까지 느끼게 했던 츠바이크도 오랜만에 다시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고 다시 또 며칠을 설레이면서 지냈다.
츠바이크의 소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하고 오랜만에 구입한 '연민'. 처음 책을 받았을 때 그 방대한(?) 분량과
예전에도 그랬으니까.초반 몇 장만 지나고 나면 엄청난 흡입력으로 사람을 빨아들였으니까... 소설의 결말 내지 마무리 부분이 갑작스러운 느낌은 있었지만 역시나 츠바이크는 역시 츠바이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독서량이 많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자리는 넓게 퍼져 있다가 점점 좁아지면서 결국 한 군데로 귀착되는 휘오리 바람처럼 묘사를 하고 서술을 하는 이런 작가는 본 적이 없다. 마치 스스로가 글쓰기에 취한 양,약간의 광기와 평정심,이성의 조합이라는 곡예를
아무래도 당분간은 츠바이크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질려버렸던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조금 어렵더라도 다른 전기작품이나 다른 소설들.... 앞으로 꾸준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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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연민. 사랑할 때 버려야 하는 가장 지독한 감정. 사고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버린 소녀의 장애를 전혀 모른 채 함께 춤추기를 권했던 호프밀러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사과받기 위해 다시 그 집을 방문하면서 연민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버려진 소녀에게 매일 성심성의껏 그녀의 감옥을 방문했던 유일한 남자인 호프밀러는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대였다. 그저 연민의 노예였던 호프밀러는 그 모든 감정을 알고는 도망치듯 그 상황을 벗어나지만 결국 마음속에 남는 건 처절한 죄의식 뿐 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연민이라는 감정이 불러오는 가장 큰 비극을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체는 숭고한 일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컨트롤 되지 않아 자신이 책임질 수 없을 만큼 커진다면 연민을 받는 상대나, 연민을 주는 자신이나 모두가 괴로운 상황이 오게 된다. 누구나 연민하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연민이란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것, 즉,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자신을 희생할 용기도 없으면서 지나친 연민만을 품었던 호프밀러를 통해 연민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잘 그려낸 치명적인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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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압권이다. 프롤로그의 시작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목덜미를 확 나꿔채서 작품속으로 콰악, 처박는다.
그래서 나는 처 박혔다. 본문이 다소 급작스럽게 막을 내린 느낌이 있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가글을 한 것 처럼 청결한 느낌이다.
430쪽. 말이 430쪽이지 이런 젠장. 처음 이 책을 스르륵 훑어 볼 때의 느낌이 그랬다. 마치 인문서를 보는 양 활자가 빽빽하기 이를 데 없었고 폰트도 작았다.-다른 책과 비교해, 자로 재보지는 않았다. 재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안쟀다.- 다른 소설과 비교하면 족히 500쪽의 분량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선뜻 손이 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스타일의 소설은 재미가 없을 경우, 독자를 미쳐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치고 싶지 않았다.
또 한 번의 놀라운 경험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한 번 잡으면 쉽사리 놓기 힘들다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작은 폰트와 빽빽한 활자를 감안해 봤을 때 정말 대단한 소설이 아닌가. 더 대단한 것은 장황한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아주 간략한 이야기를 길게 얘기함에도 지루하지가 않았다는 것이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이다. 연민. 이 한 단어로 그렇게 많은 일들을 풀어내다니! 놀라운 구성이다. 정말이지 430쪽의 모든 내용이 이 "연민"이라는 한 단어에 온통 집중되어있다. 단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단단하게 조여져서 "연민"이란 주제를 쏘아보고 있다. 말하자면 "연민"이란 단어는 사단장쯤의 위치가 된다. 수많은 장병들의 두 눈이 오직 이 사단장을 향해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어찌 이리 긴 장편이 단 한 순간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연민"이란 한 단어를 향해 도열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가막히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기가막히게 독자를 몰입시킨다. 그러면서도 흥에 겨워 혼자 다른 곳으로 새거나 하지 않고, 포인트를 잘 지키고 있다. 마치 프로 이야기꾼 같은 느낌이다. 김제동스럽다고나 할까.
작가가 프로이트의 친구란다. 이 예가 이 작품의 설명으로는 딱 적합하다. 심리소설. 1800년대 작가이며 20세기 초에 씌여진 작품이다. 즉 백 년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독일 교육을 이수했으며, 여러나라를 떠돌아 다녔단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유태인 혈통이 아닌가 싶다. 카프카처럼. 왜 이 설명을 하는 가. 한국과는 전혀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려내는 작중인물들의 심리묘사 또는 서술이 기가막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감정에 대해서 지구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 다 비숫한 감정을 지니고 있나보다, 라는 생각.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작품에 완전 몰입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민이란 감정에 대해 작중화자가 풀어나가는 얘기들이 말 그대로 공감 백배를 불러일으킬 뿐아니라, 그런 심정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해 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지식으로 씌여졌다는 느낌보다 경험으로 씌여졌다는 느낌이 강하다. 작가가 그런 감정을 모르고서 상상만으로 표현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되는 부분들이 많다. 그건 마치, 영화속의 어떤 배우가 너무나도 리얼하게 극중 배역을 소화해내는 바람에 저 놈, 진짜 그런 놈 아냐?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작중 인물의 성격이 나와는 몹시 다른 형편임에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공감이 들만큼 리얼하며, 그런 심리를 표현함에 감탄되는 부분들이 요소 요소 그득하지만 그 중에 특히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 하나를 소개하면서 서평 마무리 지을란다.
[무엇이든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을 아직 배우지 않은 행복한 나이입니다.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나를 믿으십시오. 간혹 인생에게 속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직은 눈동자에 예리하고 남을 진단하는 표독스러운 시선이 숨겨 있지 않고,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믿음이 담겨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것이니까요.] 174쪽
하나만 더 들어볼까?
[우리의 행동에서 허영심은 가장 강력한 추진력 중이 하나이고, 성격이 유약한 사람들은 용기와 결단력처럼 보이는 무엇인가 하자는 유혹에 특히 잘 넘어간다.] 310쪽
또 들어 볼까? 됐어, 장난 그만. 연민이라는 주제에 관한 구절은 들지 않겠다. 나의 친구 장애인 복지 공단에서 일하는 녀석이 아무리 충심이라도 평생 할 생각 아니면 함부로 봉사할 생각하지 마라, 라고 한 얘기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의 저자 한비야가 봉사하겠다는 마음은 좋으나, 교육받지 않는 자가 함부로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왜 그런지 이 책에도 아주 시원하게 표현되어있다. 선(線)을 넘어선 좋은 의지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한 구절 소개하고 마무리 한다더만, 나는 확실하게 우리엄마의 아들이 맞다. 잘못 걸린 전화로 30분 통화하는 유전자를 그대로 타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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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사이에 오가는 감정중에 버려야할 불필요한 감정이 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것이 바로 연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서툴게 흘린 연민이라는 감정이 상대방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서 현실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별것 아닌듯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람사이의 감정의 교류가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있다니 섬뜩했다. 이토록 연민이라는 감정이 지독한 것일까 하고 말이다. 인간안에 미세하게 흐르는 감정의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는 작가의 풍부하고 예민한 감성을 엿보기에 충분했고 읽는 내내 흥미를 읽을 수 없게 했다. 연민은 상대방을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보통은 나보다 어렵고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따라서 연민은 그보다는 내가 나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동반하고 행하는 이기적인 선행의 동기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베푼 배려는 상대방의 필요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본능적 욕망의 충족에만 머무르게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의 인물 호프밀러가 그러했다. 그는 에디트의 가련한 눈빛과 케케스팔바의 눈물에 마음을 빼앗긴채 감정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로 그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에디트의 감정이 한 남자를 향한 일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자신의 감정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다루지 못하고 결혼을 약속하고 심지어는 그녀의 병이 완치될수 있다는 엄청난 거짓말로 그들을 절망의 나락에 빠뜨리고 만다. 정확하게 말하면 호프밀러의 이러한 욕구는 사랑도 연민도 아닌 기껏해야 싸구려 동정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그의 행동이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의로운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책임지지 못할 감상적인 욕망들을 조절하지 못하고 질질흘리면서 상황을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데에는 그 부당한 처신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말랑말랑한 감상만으로 어설프게 베푼 친절과 위로는 오히려 상대에게는 혼란과 착각을 가져오는 동기를 제공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연민이라는 이름의 허울좋은 명분을 뒤집어쓴 우리의 무분별한 행동은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칼날로 날아들어 생의 전반에 걸쳐 깊은 생채기를 내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어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주고 받는다. 에디트는 죽음으로 자신을 포기하고 호프밀러는 죄책감으로 전쟁터를 헤매이는 것처럼 말이다. 연민이라는 그 고귀한 감정의 이면이 얼마나 어둡고 위험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연민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연민이 온전한 사랑으로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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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를 아시나요. 판도라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신으로부터 받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옵니다. 어느 날 호기심이 발동한 판도라는 절대로 열면 안 된다는 신의 당부를 무시하고 상자를 열기로 결심합니다. 상자 안에는 질병, 재앙, 슬픔, 아픔, 괴로움, 미움 등 온갖 나쁜 것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나쁘다는 감정을 모르고 지내던 인간들은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간이 흐른 후 인간들은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판도라의 상자 맨 밑에 있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나쁜 일,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인간에게는 마지막에 희망이 찾아옵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살 수 있었던 게지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 [연민]은 희망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한 가정에 젊고 멋진 남성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호프밀러는 쥐꼬리만큼 받는 장교(소위) 월급과 큰어머니가 매달 얼마씩 보내 주시는 돈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청년입니다. 그런 그는 자신을 대단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귀족집안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바로 케케스팔바 씨입니다. 귀족의 성에는 늙은 아버지 케케스팔바와 딸 에디트, 조카 일로나가 살고 있습니다. 오래 전 케케스팔바의 성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아내가 죽고 어린 딸은 장애인이 되어 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케케스팔바의 성에는 돈과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아픔, 슬픔, 고통, 의심 등 모든 게 존재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희망만이 없었습니다. 그 희망을 가지고 온 자가 바로 호프밀러입니다. 호프밀러는 자신이 그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데 짜릿함을 느낍니다. 자신을 미비한 존재로 여겼던 그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단지 그 기분에 도취되어 그는 의도하지 않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판도라 역시 세상에 나쁜 것들을 보낸 게 의도했던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요. 케케스팔바의 가족들은 희망을 보았고, 그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욕심을 내면서, 그 욕심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끝내 절망이 이르게 됩니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호프밀러가 케케스팔바 씨 집에 드나들면서 가졌던 처음 감정은 연민, 동정심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데 우쭐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행복해서 그 또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디트에게 생각지 못한 고백을 받게 되면서 그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아니 당황했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숙하지 못한 그의 마음은 장애인인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혹시나 그녀가, 그녀의 가족이 그의 진심을 알지 못할까봐 동분서주합니다. 하지만 희망도 때가 있나 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케케스팔바의 집안으로 희망이 오려는 찰나, 상자는 닫히고 맙니다.
결단력 없고 책임감 없는 호프밀러와 대조되는 인물로 작가는 의사 콘도르를 등장시킵니다. 그는 자신이 치료하다 눈이 먼 맹인과 결혼합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려고 또 누군가는 맹인 여자의 재산이 탐나서 결혼했다고들 하지만 그녀 옆에 있는 콘도르는 슬퍼 보이지 않습니다. 불행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연민이 사랑의 출발선이었다 하더라도 결승선은 결코 연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종류가 여러 가지 이듯 사랑의 정답 역시 없습니다. 어떤 방법이 옳다 그르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입지 않는 사랑이 누구나 원하는 게 아닐까요. 나 역시 그러니까요.
이 작품은 1939년에 출판된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입니다. 그의 작품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문체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표현한 그의 문체에 빨려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알게 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인연의 끈을 이대로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나의 이 마음은 어쩌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호기심일 지도 모릅니다. 어쩐지 그의 생은 불행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입니다. 어서 그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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