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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아니 보름이다. 2007년이 가고 2008년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 내가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남은 시간.
윤상의 '달리기'를 들으면서 길고 긴 고3시절을 지내놓고 왔더니 대학생활은 꿈같지 않더라.
취업만 하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더니 연애만 시작하면 세상이, 거리가 달콤해질 줄 알았더니
나는 오늘도 새벽마다 이놈의 회사 때려쳐?하는 마음으로 겨우 눈뜨고 출근하고 그나마 하루의 낙은 퇴근 후 수영장과 요가원에서 찾는다. (심지어 연애는 하고 있지도 않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집어 든건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권신아의 그녀가 너무 예뻐서 책속엔 뭔가 "달콤"한 것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물론, 정이현의 글은 달콤했다. 젠체 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고, 그냥 딱 내 옆에서 내 친구가 조잘조잘 얘기하는 것 같았다.
<풍선><작별>을 봤을때도 그랬다. 깨끗하고, 하늘거리고, 그렇지만 귀여운 표지와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풍기는 빨간 리본의 상자. 서른이 되는 나를 위해 해주어야 할 선물로 손색이 없었다.
소설에서 미쳐 말하지 못한 그녀의 수다. 영화를 통해, 책을 통해 풀어 내고 있었다.
책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지난 시간을 살았는지, 어떤 영화를 보면서 살았는지, <달콤한...>의 그녀들처럼 내 맘을 대신 얘기해 주기도 하고 내 기억속에서 내가 이 영화를 봤을때 어땠더라, 나는 누구랑 이 영화를 봤더라, 나에게 이사는 어땠더라, 나에게 연애는 어땠더라,,,,
좋은 책은, 좋은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순간부터, 책장을 덮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한다.
어제부터 <풍선>이 말을 걸고 있다. 너의 20대는 어떠했냐고, 너의 30대를 어떻게 살아갈거냐고...
뭐, 별거 있나, 아침에 눈 떠지면 그냥 사는 거지 (올드 미스 다이어리 대사 중 하나라고 책에서 말하던데...) 그래, 별 거 있나. 새 날이 오는 거지.. 새 해가 오는 거지.. 한 살을 더 먹는 거지..
새해엔, 서른엔, 책 좀 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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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 정 이 현
모든것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물며 대출도 계획적으로 하라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쓸 독후감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 계획은 수정되기에 이르렀으니..
정이현 작가와 함께하는 2007년 작별의 밤 행사에 당첨되었다는 메일이었다.. 올 한해 운좋게도 나를 따라다니던 그 당첨운이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나보다..
그 사람이 쓴 책 정도는 보고 나가야지 예의가 아닐까 싶어서.. 정이현씨의 소설도 본 지 좀 오래되었고.. 그래서..
유난히 예쁜 케이스에.. 예쁜 두권의 책이 들어있고.. 예쁜 카드지갑까지 선물로 주었던.. 그 '예쁨'으로 똘똘 뭉쳐져 일찌감치 출간되자 마자 사두었던.. 내년에나 보려고 계획했던 정이현씨의 산문집들을 새삼 펼쳐보았더랬다..
풍선과 작별.. 두권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내가 '작별'을 먼저 선택했던 이유는.. 풍선의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란 부제 보다는.. 작별의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란 부제 때문이었으리라..
여기 내가 쏘께라고.. 호기있게 계산을 하던 순간이었다..
신용 카드 매출 전표에 싸인을 하면서.. 난 그 밑에.. '행복하세요' 라고 적었더랬다.. 마치 연예인이 싸인 해주는것 처럼..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_-
이 책은.. 김영하씨의 '퀴즈쇼' , 공지영씨의 '즐거운 나의집'에 이어.. 세번째로 가지게 된 저자의 친필 사인본 이었다.. 물론 한두권도 아니고.. 몇백권씩 싸인을 해야겠지만.. 하나같이 다들 멋대가리 없게.. 날짜랑 싸인만 남겨져 있다..
다른 문구도 하나 정도 더 적어주면 참 좋으련만.. 이번에 정이현씨를 만나면.. 꼭 '행복하세요' 내지는 '장가가세요' 등의 문구를 책에 적어달라고 졸라봐야겠다..
개인적으로 정이현씨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무척이나 재밌게 보았더랬다..
그 때가.. 서울로 막 상경해 사촌형의 공무원 관사에 얹혀 살다가.. 저 사람은 왜 공무원도 아닌데 공무원 관사에서 사냐고 뽀록이 나서.. 급하게 독립을 해서 나왔던 그 해였던것 같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기다려 주지않는 불꺼진 그 썰렁한 원룸.. 심하게 몸살이라도 걸릴라 치면.. 죽조차 사러 나갈 힘이 없어서.. 침대 위에서 연신 식은땀만 뻘뻘 쏟아내던 그 때..
그렇게 시작된..
외로움과 고독과의 사투..
정이현씨의 소설을 보며.. 이땅의 수많은 은수들에게 화이팅을 전했던 그 까닭이..
저녁의 정거장, 길들은 여러갈래로 뻗어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 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
난 그 감상을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찾았다.. 서울이란 낯선 도시에서.. 혼자 지내며 맛 본 그 씁슬한 '서울의 맛'..
하지만 이젠.. 조금은 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또한 그것을 가슴깊이 느꼈기에.. 그때 보다는.. 조금은 더 다른 '서울의 맛'을 느꼈던 한 해 였노라고..
나처럼 어느 '원룸'에서.. 그렇게 혼자 살며 써내려간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이 책을 보고나니 그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생각들을 글로 펼쳐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가슴 먹먹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런것들을 정이현씨는 이 책의 머릿말에서.. 참 공감되게 표현해 놓고 있어 특히 인상깊었다.. 그래서 작가란 아무나 되는게 아닌건가 보다..
어떤 책은 덮고 난 후에 더 가까이 사귀게 된다.
작별하고 나서야 한 사람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맞부딪칠때, 나는 책을 읽는다.
철저히 외로워지도록.
내 안에 꽁꽁 유폐된 나를 아무도 발견할 수 없도록.
그리하여 어떻게도 훼손되지 못하도록.
수많은 '당신'을 만난 것도 책이었고, 수많은 '당신'을 떠나보낸 것도 책이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하여 어쩌면 백 편의 글을 읽었다.
백 편의 글을 읽었다는 건, 백 명의 당신들을 떠나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허공으로 흩어진 작별인사 뒤에 당신들은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 정이현 作 '작별'의 머릿글 中 )
이 책은 전반부에 문학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이현 작가의 그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와.. 중후반부의 일종의 독후감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뜻하지 않게 내가 모르고 지내왔던 흥미로운 책들을 소개받게된 것도 하나의 큰 수확이리라..
우리 문학에 대해 응원을 해주길 바랬던 그 부분이 아니었을까.. 함성이 가득한 그라운드를 달리는 축구선수가 더욱 힘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언제던가 어느 네티즌의 리뷰를 보다가.. 이런 대목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것 같다..
글쎄다..
책을 보다가 내가 익히 아는 그런 거리들의 명칭들.. 인사동.. 종로3가.. 연신내 등등.. 그런게 나오면 무척 반갑기도 하고.. 따로 시간을 내어 그 거리를 다시 찾아 혼자 걸어보기도 하는데..
94년 대학 과친구들이랑 무전여행 비슷하게 놀러갔던.. 마치 포카리 스웨트 CF속에서만 나올법한 그 옥빛 물빛..
점점이 어둠 속에 묻혀가던 그 바다 빛깔을 보았다니..
72년생으로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기억이 있고.. 혼자서 '원룸'에 살았던 기억이 있으며.. 왼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는 사실까지..
함덕의 바다는 정이현 작가와 본인과의 공통점에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
많은 골수팬들을 확보하고 있고.. 많은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선두 그룹에 속해있다는 생각이 드는.. 정이현 작가..
난 그녀가.. 조금의 세월이 더 지나고 조금의 연륜을 더 가지게 되어.. 지금처럼 이삼십대 여성들에게뿐만 아니라.. 박완서 선생님처럼.. 오랜 세월동안 좋은 작품을 발표하고.. 다양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작가로 남았으면 좋겠다..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많이 읽었던 소녀였기에..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글로나마.. 외로움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었던.. 사람이었기에..
벌써부터 그녀와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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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어쩌다보니 처음 읽은 책이 정이현의 산문집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와 단편집 ' 오늘의 거짓말'을 정말 너무나 지나치게.. (트리플 과장...)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그녀가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느끼는 지 궁금했더랬다. 반갑게도 이렇게 셋트로 다소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을 하게 되어서 기쁘다. 선물로 주는 카드집은 지민군이 호시탐탐 노리더니, 결국은 뺏어서 내 지갑에 있는 카드를 몽땅 꺼내어 카드집에 넣고 빼고 하는 놀이를 했다. 덕분에 물론 나는 그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감상문이 주를 이루는 '풍선'보다는, 산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별'이 더 마음에 든다. 밑줄을 그어 놓은 문장 중 하나, ' 인간은 고독을 택한 순간조차 소통을 열렬히 희구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순간조자 자기안의 고독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녀의 개인사도 들여다 볼수 있고, 그녀의 말마따마 대중문화든 순수문학이든 '문화'를 경험하여 느끼는 그녀의 단상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이 말엔 공감 백배다. (문화라는 게 뭐냐... 먹고자고싸고 하는 거 외에, 해서 즐거운 게 문화지? 안그렇남?-근데 생각해보니, 먹는 문화라는게 있긴 하네.. 이 문화에 대해서는 공부 좀 더해서 다음에 한번 논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직 미혼이지만, 70년대 태생인 만큼 공감대가 확실히 형성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반사 작용이기에, 그녀가 친구 언니마냥 좋다. 사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올리게 되었다. 뭐 글쓰는게 별거냐? 정이현처럼 그렇게 내 생각을 내식대로 쓰면 되지.. 하면서 과한 자심감을 가슴에 품고서 말이다... (웃기지도 않지. 쳇~ 결과는 빤한데...정신차려~ 이 아줌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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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이 코앞으로 다가온 4학년 마지막 학기. 이미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이수해버린 '무늬만' 학생이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겠다며 취업준비로 한 일은 '말하기/듣기, 읽기, 쓰기'가 전부였다. 아침 일찍 자취방을 나와 스쿨버스를 타고 바다를 보며 학교에 도착하면, 매점에서 경향신문을 한 부 집어들고 하루 종일 모든 활자들을 읽어나갔던 그 때. 신문에 지치면 도서관을 맨발로 누비며(조용한 도서관을 헤집고 놀기 위해 맨발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리) 온갖 책을 야곰야곰 보았던 그 때. 생각만해도 좋았던 시절이다.
도서관에서 남들 모두 토익이나 수업 텍스트에 몰두하고 있던 그 때 신문을 뒤적이다 만난 그 말.
"사랑과 이별의 외양이 구질구질하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그 실존의 무게조차 가볍다고 폄하하는 것은 오해다"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기사 꼭지였는데 거기에 담긴 그 말이 어찌나 와닿았던지. 게다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단어였던 '쿨함'의 본질을 꿰뚫는 저 표현을 보라!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백퍼센트 완전하게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것, 일정한 거리와 여유를 가지고 타인을 대하는 것, 그것을 쿨한 태도라고 정의한다면, 그 태도는 많은 경우 자기보호본능에서 비롯된다.
타인에 의해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내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일부러 몸을 사린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간격을 띄운다."
그렇게 만난 작가가 정이현이었고, 그 후 그의 몇 안되던 모든 작품을 읽어나갔고, 항상 신작을 손꼽아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 출간된 책이 바로 <풍선>. 단골 인터넷 서점 메인에 '저자 사인본 증정'이란 말이 없었더라도 분명 단숨에 사들였을 그 책에는 역시나 눈빠르고 손빠른자에게 오는 행운인 저자의 사인이 선명하다.
혼자하는 말 같기도 하고, 소곤소곤 옆에 앉은 친구에게 속삭이는 듯도 하고, 왁자지껄 수다판을 벌인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털어놓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책. '맘 같아선 삼순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언니다(p164)'란 표현만 보아도 알 수 있을 듯. 책과 영화 등의 문화에 대한 소비자로서, 또 문화 생산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작가로서 풀어나가는 글들이 참말 재미났다.
다만, 이 책은 <풍선 작별> 세트 중 한권인 <풍선>인데, 개인적으로는 <작별>에 담긴 글보다는 <풍선>에 담긴 글이 좋았다. <작별>에 담긴 글에서 리뷰한 책들 중에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아 공감의 폭을 더 넓히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으니 뭐 그정도로 만족. 왜냐, <풍선>이 정말 내 마음을 부풀어오르게 했으니. 그렇게 내가 좋았으니.
아, 만나고 싶다.
p15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p26 나는 치명적인 것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섭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나머지, 타인에 대해 아주 쉽게 품평하고 또 충고한다. 오만한 계몽의 태도로 자신과 다른 타인의 방식을 '바로잡아' 주려 한다.
p30 이제 그녀는 담담히 긍정할 것 같다.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떠민 것은 그들이 아닌 나였다고. 그렇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다녀왔어"라고 인사하면 "어서와"라고 받아주는 사람과 체온 나누며 살고 싶다는 꿈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그 꿋굿하고 순결한 정신에, 한숨 대신 박수를 보낸다.
p58 ('묵묵'하다보면 나는 왜 '막막'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중략 (적당한 요령도 능력이라는 가치관을 초등학교 때부터 실천해왔다) 중략 (짧지 않은 인생, 수백 번의 포기를 할 때마다 포기의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합리화시키곤 했다.)
p97 이 남자랑 살까, 말까. 내 인생을 걸까, 말까. 여자의 흔들리는 마음을 콱 다잡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남자의 '우직함'이다. 좀 못나고 가진게 없어도, 이 남자만큼은 언제나 변함없이 내 옆자리를 지켜주리라는 믿음. 안달안달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저이가 당최 뭔 생각을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잘생긴 사람보다 돈 많은 남자보다, 편한 남자와 믿음직한 남자가 미인을 차지하는 이유다. 길가에서 종종 발견되는 미녀와 야수 커플의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고.
p113 솔직히 '있는 애들'이나 쿨한 거 아니니? 남편이랑 속궁합? '포인트'가 사라져? 놀고 있네. 까놓고 말해서 걔 인생에 고민은 그게 다였잖아. 누구는 돈 별랴, 살림하랴, 애 키우랴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말야. 누구는 뭐 바보 천치라서 이러고 사는 줄 아나? 진짜 그냥 확 관둬버릴까 싶다가도, 또 꾸역꾸역 살아지는 게 인생인데 어떡하니.
p149 나이에 상관 없이 한 개인을 자기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도록 하는 원동력은, 늙어도 늙지 않는 생생한 욕망과 최소한의 자기 생산력일 것이다. 욕쟁이 진안댁의 말대로 인생이 신발 밑창에 눌어붙은 껌 딱지 같은 것일지라도 사람과 자연과 술과 환각이 어우러진 해방의 밤을 그토록 멋지게 즐길 수만 있다면, 욕망하며 노동하며, 어쨌거나 열심히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p157 어떤 영화가, 해피 엔드로 끝난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인물들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이 우르르 몰려나간 뒤에도, 부대끼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들은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p172 그 밖에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여러 일상적 공간 속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은 그 '맨'들과 마주쳐왔다. 자꾸 보다보면 제법 익숙해지지 않느냐고? 미안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이 폭력의 특성이다.
p179 나이가 든다는 게 반드시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법은 배우게 된다. 삼십대 중반. 자신이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지 정도는 알게 되는 나이라는 것을, 나는 그들을 통해 깨닫는다. 눈부신 스타인 적이 없었던 배우들의 담담한 성장을 지켜보면서, 어쨌든 내 길을 한번 계속 가보자, 용기를 추스른다.
p188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는 이분법은 이미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 소비자로서의 하나의 '개인'은 일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를 손꼽아 기다리고, 부천필하모닉의 말러 연주회에 다녀오고, 황병승 시인의 새 시집을 읽고, 동시에 낄낄대며 <무한도전>을 보는 것이 바로 지금, 이 곳을 사는 문화 향유자의 모습이다.
p228 그렇다고 해서, 죄라고는 단지 '우리 오빠를 너무 사랑하는 것뿐인 소녀 팬들의 취향 자체에 대해 부정하고 폄하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좀 있어 뵈는 뮤지션들의 이름을 줄줄이 답해야 '가오'가 산다고 여기는 허위의식에 비한다면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순수한 열정을 쏟아붓는 그들의 태도가 훨씬 정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타인의 사랑에 대해 간섭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니, 남의 취향 '빠순이'로 매도하지 말고 저마다들 자신의 취향이나 잘 지켜나가자.
p240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과 낳지 않겠다는 선택. 그 사이에서 지금 이땅의 젊은 여성들은 제 생애와 실존을 걸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안 되겠어. 도저히 못 낳겠어"라고 어렵게 결심하는 바로 그 순간, 그녀들은 이 괴물 같은 시대를 향해 슬픈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인지도, 정녕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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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靑春에게 보내는 작은 이야기 정이현의 산문집 [작별]과 [풍선]
산문집 [작별]과 [풍선]은 셋으로 된 것이 있었는데, 나는 따로따로 구입해 읽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모두 보았지만 수필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았고, 내가 거래(?)하는 서점에서는 [작별] 한권만 반값세일을 했다. [작별]을 하루 만에 다 읽고, 너무 기쁜 나머지 다음날 바로 서점에 달려가 정가대로 [풍선]을 구입해 읽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수필집은 짤막짤막 하여 어디에서도 쉽게 읽혀졌다.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말이다. [작별]과 [풍선]은 서른 중반을 달리는 작가가 지난 과거로 보내는 작은 메시지들이다. 소설 속에서 보여 왔던 90년대식 사랑법과 지나간 청춘에 대해 회한 그리고 한창 몰입중인 글쓰기에서의 중간 점검 보고서이다. 수많은 ‘당신’을 만난 것도 책이었고, 수많은 ‘당신’을 떠나보낸 것도 책이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하여 어쩌면 백편의 글을 읽었다. 백편의 글을 읽었다는 건, 백 명의 당신들을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허공으로 흩어진 작별인사 뒤에 당신들은 내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정이현의 소설 속 향기라면 솔직함이라 말하고 싶다. 순수하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속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적당량의 농도로 희석된 드라이한 칵테일처럼 읽는 내내 부담 같은 것은 없다. 이유라면 새침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조잘대는 수다스럼, 그래서 편안한 말투를 문장에 담아 문제의 답들을 하나하나 새겨놓았다.. 완보의 적당한 속도로 읽다보면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 멋진 말들의 숲속을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한다. [작별]과 [풍선]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양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발랄한 문장과 세련된 말들의 풍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연필을 꺼내 사진을 찍듯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다.. 달콤한 휴일처럼 안락하고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기 마련이다. [작별]에서는 그녀가 글을 쓰면 느꼈던 후일담과 소소한 느낌, 글감에 대한 소감들을 수다 떨듯 말하고 있다. 아마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부담가지 않은 편안함일 것이다. 또한 읽었던 책들에 대한 작은 느낌과 명문장, 혹은 공들여 쓴 서평들이 좋았다. 한편의 소설을 쓰기위해 100편의 소설을 읽어야한다는 구절이 실로 믿겨질 만큼 책속에 길을 찾는 자의 진지함을 느꼈다. [풍선]은 그녀가 보았던 영화에 대한 평과 느낌들을 적은 내용들이다. 취향에 따라 틀리겠지만 [작별]이 내게는 좀 재밌었고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언어가 없으면 관념도 없다. 구현되지 않은 말은 아무것도 정의 하지 못한다. 정의되지 못한 관념은 암흑이다. 암흑의 평안을 택할 것인가, 태양아래 까발려진 오욕칠정의 혼돈을 택할 것인가. 이따금 어둠 속에 침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모국어로 문학을 하는 것은 고통스런 쾌락이거나 행복한 좌절이다.
문학이 꿈꾸는 것은. 관념 이전에 소통이 아닐까. 나와 당신의 소통, 나와 세계의 소통, 나와 나의 소통. 물론 그 소통들은 지구에 존재하는 문학가의 숫자만큼이나 각양각색의 무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것도 줄 세우지 않고. 국민총경제생산량에 별 도움도 되지 못하는. 물음표와 물음표 아닌 것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정이현의 글을 읽으면 왠지 자신감이 생긴다. 그 자신감의 근원에는 문학이란 비장하고 엄숙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문학이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소통]을 요구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답을 얻기 까지 독자는 소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따라하고 싶고, 닮아 가고 싶은 문학적 전범으로서 적절하다. 비록 그녀의 글이 완전히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획득 할 요소들을 덜 갖춘 글일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스타일대로 나름 모습을 찾은듯하다. 아무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얘기들이지만, 누구나 그녀처럼 뽀송뽀송 어투로 명랑하게 표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이현의 글처럼 가독성이 뛰어난 글은 많지 않다. 물론 작금의 글쓰기가 유행이 돼버린 단문과 스타일만으로 승부하다는 말처럼, 요컨대 그녀는 자신만의 문장으로 독자를 설득하기에 충실한 스타일리스트임에 틀림없다. 정이현의 문장은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다. 쾌활하게 들리지만 듣고 나면 슬퍼지는 묘한 무게감을 준다. 예컨대 ‘마크 노플러’의 맑고 투명한 브라이트 톤의 기타소리와도 같은 공명(共鳴)을 낸다. 그 발랄함에 나도 모르게 즐거워진다. 맑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간드러지는 선율과 경쾌 리듬은 경계가 뚜렷하다. 듣고 나면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무게중심을 잡듯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또 읽고 싶고, 그녀의 새로운 글을 기다리는 뚜렷한 이유가 생긴다. 대중성과 작품성의 경계를 구분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치열한 그녀의 노력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시대를 적확히 읽고 쓰고 있는지 모른다. 문학이 다원화되고 계층과 취향과 장르가 뚜렷이 구분이 될 때, 그녀의 글은 더 빛을 발할 것이다. 마치 표백제로 탈색한 흰옷처럼 책장을 덮으면 마음이 밝아지는 이유다. 소설쓰기를 통해 내가 꿈꾸는 것은, 소통이다.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있다. 문학의 문학성과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 작가가 아니라 독자라는, 현대문학이론을 개념화한 용어이다.(중략) 현대의 작가는 더 이상 ‘신’도 아니고 ‘천재’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작가는 단지 한 시대의 ‘보고자’일 뿐이다. 보고서를 쓰는 역할을 맡은 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들끊는 개성을 맘껏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관찰하고 얼마나 정확하게 기록하며 얼마나 충실하게 보고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예전처럼 순수니 대중이니 하는 흑백으로 무 자르 듯 명료하던 시절에는 그녀의 글은 지금처럼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글에 단점을 들었던 이유라면 가볍기에 하찮고, 깊이 없는 공명(共鳴)으로 쌩 목소리를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들 어쩌랴 “쿨은 스타일도, 취향도 아니다. 그것 또한 정신이다,” 라는 발랄한 그녀의 한 줄 문장 압박만으로도 구시대적 시시콜콜한 담론을 한방에 날릴 수 있는 것 또한 이 시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08.5.15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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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작별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풍선』
작가에 대한 호불호는 어쩌면 그와 얼마나 많이 소통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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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이현에 푹 빠져 있다. 그녀가 쓴 단편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시작해,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그리고 오늘 정이현의 산문집 '풍선'읽기를 마쳤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정이현은-실은 나보다 앳되 보이지만-그래서인지 30대 중반 여성의 심리와 상황을 너무나 공감가게 그려낸다. 내가 겪어온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의 사회와 그것을 겪어가는 태도며 정서까지 너무도 흡사하다. 가끔은 어머어머 할 정도로 내생각을 꼭 찝어내어 말해서 흠칫 놀랄 정도이다. 게다가 그녀의 소설이나 그녀의 산문들은 가식이 없어서 좋다. 등장인물들도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내 친구이거나 혹은 나의 모습이고, 좌절도 하고, 절망적 상황앞에도 놓이고, 사소한 것에도 즐거워하는 편안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정이현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슬며시 삶의 의지나 희망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생기기도 한다. 아마도 등장인물들의 삶이 내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위안이거나, 혹은 그들의 생을 통해 좌절을 딛고 일어날 힘을 얻는 것일게다. 이렇게 정이현의 글은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생기가 넘친다. 그것이 독자들을 끄는 매력이기도 하다.
산문집 '풍선'은 정이현이 그동안 보아왔던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그녀의 솔직담백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는 내가 본 것도 있고, 보지 못한 것도 있고, 보지 않은 것도 있고, 너무나 유명해서 안보고도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산문집에 대한 평은 접어두고, 맘에 와 닿았던 구절만 조금 옮겨보기로 하자.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인용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 ...........조금 더 사랑하는 쪽에서 참지 않으면 둘의 관계가 끝장나 버릴까 봐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사랑에 관한 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권력관계는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둘 앞에 펼쳐지는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강자와 약자는 서로 그 위치를 바꿀 수도 있다. .......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몬스터>에 대한 감상 중에서 발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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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에 세트로 출간한 <풍선>과 <작별>. 사실 난 <풍선>이 더 좋았다고 말하련다. 그건 <작별>은 주로 '독후감'을 담은 글이 많은데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훨씬 많아서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일게다. 거기에 언급된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아마도 또 다른 느낌일테지. 그래서 결국 이 책에 대한 감상은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단골 인터넷 서점의 '아름다운 서재' 코너에서 정이현이 추천해주었던 <퍼레이드>, <통역사>, <바둑두는 여자>는 참말 좋은 공감을 이뤘던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닮은 도서 목록에 담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무자녀혁명>, <남자의 탄생>, <비치:음탕한 계집>은 보통의 책만 빼면 모두 양성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었는데 감상이 비슷하여 새삼 놀랐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정이현의 글으로 읽고 싶은 책들이 또 여럿 생겼다. 한동안은 '무슨 책을 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다양한 작가들이 가지각색 이야기를 담은 그런 목록들이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캐러맬 팝콘>, <로큰롤 보이즈>, <바다에서 기다리다>, <불릿파크>, <밤의 클라라> 뭐 이정도.
물론 모두 공감이라고 말할 순 없다. 제목에 속았다고 후회했던 <제발 조용히 좀 해요>, <기다림>으로 날 숨막히게 한 탓에 한동안 그의 책은 읽을 수 없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작가 하진, 열심히 읽으려 노력을 거듭했으나 지지부진 덮어버린 <러브>. 이 책과 작가에 대한 찬사는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모든 감정이 다 똑같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아, 나도 이런 글이 쓰고 싶다. 거저 되진 않겠지만.
p38 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고, 일상에 지칠 때마다 습관처럼 생각한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날의 바다가 이제 어디에도 없음을 알기 때문일까. '내 마음 속 그곳'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 혹은 한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일지도 모르기에.
p40 나는 왜 스스로에게 인위적으로 '변화'를 선물하려 드는가. 진정으로 필요한 건 환경보다는 '마음'의 변화일 텐데.
p48 자신이 어떤 아주 작고 따뜻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또한 타인과 특별한 관계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만끽하는 데에 연애만큼 유용한 것은 드물다. 또한 연애는 한 인간의 자아존중감을 극도로 향상시켜주기도 한다.
p61 소설은 다만 이 불감한 세상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불모와 소통의 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전부다. 이것을 소설의 무기력이라고 부른다면, 담담히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소설은 이 끔찍한 무기력을 통해 당신에게 다가가려 한다. 다가가고 싶어 당신을 앓는다.
p99 우리는(샨사와 정이현, 내 덧글) 동갑이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문득 내가 쌓아온 세계와 쌓아가야 할 세계가 한없이 연약하다고 느껴질 때, 전갈자리에 태어났다며 "아이 엠 어 스콜피온"이라고 당당히 웃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곧, 그래도 다시 책상 앞에서 싸워야지, 생각하게 된다. 아무렴 소설 쓰기란 '우리 영혼의 비밀을, 사랑의 비밀을, 힘의 비밀을' 미래의 소녀에게 바치는 일일 터이니.
p147 당신이란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혼자가는 먼 집, 허수경)
p166 이 책 속 궁궐 여성들의 생애사를 읽는 동안 나는 작은 못으로 가슴 한구석을 긁힌 것만 같은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언젠가는 가부장적 윤리의 척도 너머 그녀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172 '일반적인 혼기'를 지난 미혼자들은 끊임없이 결혼 언제 할 거냐는 질문에 시달리고, '무자녀 부부'는 끊임없이 아이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에 시달리는 이곳. '표준'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사는 꼴은 도저히 눈뜨고 봐주지 못하는 이곳. 타인의 사생활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한 이곳. 당신과 내가 사는 대. 한. 민. 국! 그러니 지금 이 이중적인 장소에서 쿨을 말하는 자, 도대체 누구인가?(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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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X세대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소비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좋고 싫음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고, 어른들의 시선따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미디어(PC통신)에 첨병 역할을 한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가끔 일상에 파묻혀 살다보면, 내가 내 자신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낯설어지는 경우가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어린애같고, 철이 든다는 것은 먼 훗날의 남의 얘기처럼 살고 있는 사람. 30대 중반, 그 나이의 무게감을 느끼기란 좀체 어렵다. 그러나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마도 스물아홉의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하고, 2년정도 남은 대학 생활을 고3처럼 열심히 보냈던 시절. 군대가서 사람 됐다는 주위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자랑스런 사각모자를 쓰고 졸업앨범 한 장 씩을 받고 곧바로 백수가 되었던 시절. 그런데 스물 아홉이란 낭떨어지에 선 나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게도 사랑을 하고 있었다. 보기좋게 미끄러지긴 했지만, 스물 아홉까지의 그 사랑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X세대로서 젊은 날에 남겨둔 마지막 낭만적 사랑의 기억이란, 그게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되고, 나는 더이상 스물 아홉의 순수한 사랑따윈, 내게도 상대에게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직도 서른 중반의 내가 이 사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득하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 언제까지든, 이 사회속에서 나와 우리 세대의 시대는 오지않을거란 비극적인 예감은 대체 어느 지점부터 머리속에 기생하게 된 것일까? 90년대 PC통신의 창작공간을 종횡무진하던 내또래의 K씨는 아직도, 도서관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때 제법 공부를 잘 했고, 집안이 부유했던 J는 몇차례의 고시에 연타 떨어지더니, 아직도 그 세계를 헤매고 있는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매일 밥벌이를 위해 정시출근을 생활화 한 나는 그 정체성의 혼란에서 좀 벗어날때도 되지 않았나 ?
며칠전 회사에서 정이현의 산문집을 읽다 휴게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P가 내게 묻는다. 정이현? 소설가냐 ? 몇살인데? "형님하고 동갑.... " 곁에서 지켜보던 마흔이 넘은 Y형이 P에게 말한다. "야, 너랑 동갑이잖아. 이 여자는 소설쓰고 책까지 내는데, 너는 그 나이에 지금 뭐하고 있냐 ? 풋ㅎㅎ " 이 말에 모두다 한바탕 웃었다. 그 말을 들은 P 왈. "내가 지금 어때서 ?" 그래 맞다. 꼭 정이현처럼 자기 이름으로 책내야 성공한건 아니니까. 정이현의 산문집을 하루에 한 권씩. 이틀에 걸쳐 읽었다. 근래에 책을 잡고 이렇게 빠르게 속독을 할수 있었던건 나의 독해력이 늘어나서일까? 아닌거 같다. 정이현의 문체에 날개가 달린것뿐. 글을 이렇게 속도감있게, 전혀 지루하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김형경도 그랬고, 정이현도 그렇다. 소설가인데, 소설을 먼저 읽지 않고 산문집부터 보고 있으니 나는 책읽기를 잘못하고 있는건가 ? <풍선>과 <작별>, 책은 두 갈래로 묶여 있다. <풍선>에선 영화평을 담았고 <작별>은 내 또래 여자 소설가의 삶을 조금 보여주다 곧바로 읽은 책에 대한 리뷰로 이어진다. 지금껏 작가가 소설을 쓰다가 외유처럼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것 같다. 때는 2005년을 전후로 한 시점. 그 시점엔 된장녀란 것도 없었고, 촛불집회도 없었고, 쇠고기 협상도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을까? 밀려서 가끔 읽는 신문과 매일 노트북을 켜고 포탈에 접속하면 보게되는 요즘의 시대상과 격세지감?을 느꼈다면 오버일까? 아침에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커피 한잔을 타서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검색하다, 곧바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맘내키는대로 소설을 쓰는 생활? 이것이 중산층으로 자라나 여류 소설가로 살고 있는 정이현의 일상의 단편이다. 영화와 티비 드라마 그리고 책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가로서의 삶의 일부분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소시민, 작가와 같은 서른 중반의 한 남자가 지난달에 이미 다녀온 여름휴가를 한 번 더 정신적으로 다녀온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면, 이 산문집에 감사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나쁘다'인가? 주지하건대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그러니까, " 그 영화 별로다"라는 문장의 앞뒤에 생략된 말은, `나는' 과 `~라고 생각한다'가 아닌가 말이다. " <풍선> p.203 이 산문집의 어느 구석에 여자로서 남자란 어떤 생물인지 궁금하다 라는 문구를 읽다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서른 중반, 90년대를 함께 통과해온. 중산층 가정의 정규 교육을 받은, 내 또래의 여자와 또 여자 소설가는 이 시대를 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건지, 궁금했던 거다. 직장 형이 "너 나이에 이 여자는' 이라는 말을 할때처럼,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이 나이에 나란 남자는'이란 질문을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정이현의 산문집은 그에 대한 그림을 너무도 선명히,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엿보여주고 있었으니, 어찌 올 여름 두번째 외유의 순간이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작가와 내가 한 시대를 동시에 통과해서,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새롭고도 낯설다. 시대를 읽는 감각의 더듬이를 한층 높이 세우고, 기생하는 지역과 공간을 뛰어넘고, 가정환경과 직업적 차이를 무시하고, 함께 현시대를 사는 동료로서 작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묘미를 몇배는 더 첨가하는 길이다. 그래 이 여름, 지난 90년대의 X세대들은 사회 구석구석에 박혀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그 다양성이 모여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게 될 날이 올 것이다. 90년대 잊혀진 세대인 나와 작가가 만나게 될 지점이 거기가 아니겠는가? 정이현의 산문집을 읽으며 지난 여름 휴가 중에 만난, 아내의 중학 친구가 생각이 났다. 유명 방송인으로서, 나름의 프라이드와 지성적인 체취가 물씬 풍겼던 그녀. 그녀가 몰고온 프라이드 골드 뒷자석엔 영문모를 영어 원서 뭉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아내에게 말한다. " 너 자신을 믿어, 그리고 타인이 아니라 바로 너에게 감사해, 너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200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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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영상문화가 문자문화의 결락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조각났다. 영양가 없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로 매주 반복되는 연속극이나 시청자의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기 분주한 쇼·오락프로그램의 부박한 수준은 심히 넌덜머리가 날 정도다. 그럼에도 즐겨보는 TV프로가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금년에 신설된 M본부의 <명랑 히어로>를 매우 즐겨본다. 소위 '막말'로 대변되는 리얼리티 쇼프로의 골격을 답습하곤 있지만, 방송의 구성과 취지가 마음에 들어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편이다. 점차 희망과 행복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명랑'한 사회를 꿈꾸며 수다를 떠는 그들네의 '막말'이 내게는 그닥 밉게 다가오지 않는다. http://blog.naver.com/gilsam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