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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코뮨주의라는 이름하에 그 동안 이루어졌던 실천들을 간략하게(?) 정리한 느낌이다. 그 정리는 이전에 단편적으로 이루어졌던 정리와는 사뭇 다르다.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또, 절실하게 다가온다. 왜 그런가? 내가 지금 야만의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 시대를 견딜 수 없어서이리라.
머리말이 인상적이다. 제목이 '코뮨주의 선언'이다. 시작이 이렇다. 우리는 코뮨주의자다. 코뮨주의란 무엇인가? 코뮨주의는 복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공통된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이고, 나와 다른 개체들의 사고와 행동의 리듬을 맞춰 가며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능력이다.
이 책은 이 말을 다각도로 설명한다. 정치학적 시각으로, 경제학적 시각으로, 휴머니즘 비판을 통해, 욕망분석을 통해. 여기서 나는 그동안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의문을 다시 제기할 수 없다. 이 책을 이미 읽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실체를 또는 증거를 확인하고픈 순간부터 나는 코뮨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다행히 그런 낡은 의문조차도 그대로 긍정한다면 다시 나는 코뮨주의와 가까이 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뭔 얘기 하냐고? 뭐 그냥 ㅋ
대중에 대한 개념이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대중을 어떤 대상으로 인식하던 낡은 인식으로 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해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을 단일한 객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공명하는 우정이다. 그래서, '우정의 정치학'은 인상깊다.
소유론에 대한 문제제기도 재미있다. 내가 그동안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가정을 당위적으로 인정하고 세상을 이해한 시도들은 잊어야겟다.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 왜 우리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또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에 빠져 있었을까? 동시에 '소유'라는 마치 성경의 예수님 말씀과도 같은 신성불가침의 단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휴머니즘이라는 인간 중심 주의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 글은 휴머니즘에 대한 반대가, 막연한 생태주의적 시각에 머무르는 수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휴머니즘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준다.
타자의 문제를 통해 개인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소통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하며,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기본 전제를 넘어서게 해 준다.
코뮨주의를 구성해 나가는 힘으로 '유머'를 제시한 것도 재미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다. 자신의 실패를 객관화 시키고 그 실패 자체가 우리를 '중-생'으로 존재하게 해 주는 능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코뮨주의와 욕망 부분에서, 특히 '자본주의적 욕망의 가족주의' 통해서, 라깡의 이론을 통해서, 오이디프스 가족와 자본주의적 배치의 유사성과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인상 깊었으나, 라깡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지식들이 거의 다 날라가 버린 상황이라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 해 아쉬웠다.
이진경 선생을 비롯하여 이름을 빌린 '모두'의 글들이 갈 수록 독자인 나를 자극한다. 이제 우리만의 특이성이 더 강화된 코뮨주의도 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잘 모르고 이해를 못 해서 그렇지 그 유령은 이미 내 옆에 와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의 무식에 대해서도 작은 안도를 할 수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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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주의’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 주의자들에게 익숙한 용어이다. 공산주의라고 옮겨 온 ‘코뮤니즘’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표기를 할 때 ‘Comun'(공동체란 뜻)과 ’ism' 사이에 하이픈(-)을 끼워 넣기도 한다. 코뮨주의를 통해 새 대안 체제를 구상해온 그룹 가운데 하나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쪽이 최근 한 권의 책을 내어 그 개념과 전략을 소상히 밝혔다. 이 논쟁을 통해 코뮨주의가 새로운 대안 체제 담론으로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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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수유+너머'
인문학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 한때는 혹은 지금도 꽤 알려진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이름정도는 들어봤을 것이고, 이진경 / 고병권 같은 연구자들의 이름 또한 접해봤을 것이다. 그 이름들을 들을 때 뭔가 설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2000년대 초 (한국에서) 유행하던 인문학 흐름의 중심에 있던, 주목받던 그들이었고 활발한 활동을 하던 둘(그리고 동료들)이 함께 쓴 이 책은 “간헐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언급되었던 ‘코뮨주의’를 정치적,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념적 지향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말해주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아직 그들 스스로도 뭔가 잘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온갖 이념들, 즉 개인주의, 공동체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유기체주의, 인간주의, 가족주의, 엄숙주의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는 있지만 “새로운 코뮨주의의 이념적 특이성이 어디에 있는지” 명쾌하게 말해주기 보다는 그걸 찾고 있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그 과정이 결론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코뮨주의는 과정에 관한 것이라고.
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때의 생각 그대로인지도 궁금하다. 폐기했을지도 모르고, 방향을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면 그냥 소규모 공동체일 뿐일까? 낙천-낙관적으로 자신들에 대해서 말할 것 같지만... 이제는 관심이 시들해져서인지 옛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되었을 뿐이다. 그때는 무척 관심이 컸었으니까.
일종의 추억읽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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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선언」 지금 나는 찾고 있다. 이곳저곳 두루 다니며 나의 모습을 찾고 있다. 그래도 자신의 모습은 얼추 찾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도 도통 모르겠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이다. 나는 교회를 알고 싶다. 교회를 느끼고 싶다. 교회를 전하고 싶고, 교회를 가르치고 싶다. 교회의 빛 된 역할을 하고 싶다. 나는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며, 교회를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의 희망이며, 세상의 빛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세상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는 공동체 이며, 세상을 향한 유일한 빛이요, 소망이며, 사랑을 가르치는 곳이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은 바로 교회의 공동체 됨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기본이요, 이제는 교회라는 단어조차 안경을 끼고 대대적인 비난과 욕설 및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기독교를 세상의 대안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아닌 시끄러운 공동체, 이기적인 공동체, 편협적인 공동체, 심지어 폭력적인 공동체라며 비판한다. 뭔가 잘못되었다. 2000년 전 예수가 보여준 세상과 다른 공동체의 모습과는 너무나 딴판이다. 이러한 이유로는 교회 구성원의 개인적 이기주의와 함께 공동체성의 붕괴가 있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체 됨을 돌아 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혹시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교회의 그것처럼 그런 공동체를 꿈꾸고 있거나 실천하려 하는 사람들의 사유들을 돌아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코뮨주의 선언」은 서로 다른 7명의 저자들이 ‘코뮨’이라는 동일한 중심속에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담은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서로 다른 7명의 저자들의 필체의 색이 매우 다른 것을 느낄수 있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코뮨주의에 관한 본질적인 이해와 개념은 모두 같다. 그들은 책의 서문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선언한다. “우리는 코뮨주의자다. 코뮨주의가 우리의 존재론이고 인식론이다. 가장 고독한 순간에도 우리는 고독한 채로 무리를 이룬다. 우리에게는 ‘고독’조차 고독들이다. 모든 것들이 더불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더불어 있는 것만이 실존할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코뮨은 실존한다. 아니 코뮨만이 실존한다.” 저자의 이러한 선언을 마친 뒤 코뮨주의를 3부 9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1부에서 코뮨주의의 정치(Politics)에 대하여 말하면서 1장 코뮨주의와 대중, 2장 코뮨주의와 정치, 3장 코뮨주의와 소유에 대하여 우리에게 전한다. 2부에서는 코뮨주의의 주체(Subject)를 말하며 4장 코뮨주의와 특이성 5장 코뮨주의와 휴머니즘 6장 코뮨주의와 타자 3부 코뮨주의의 감응(Affect)은 7장 코뮨주의와 유머 8장 코뮨주의와 욕망 9장 코뮨주의와 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필자가 이해한 코뮨주의의 특성 속에서 눈여겨 본 부분은 두 가지 이다. 첫 번째는 “공동체성을 위한 개체의 이해”이다. 공동체성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한 개인의 개성과 존엄성이다.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그리고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이데아 적 공동체를 꿈꾸며 만들어가다 실패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개인의 욕망으로 인한 리더십의 실패와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개채의 보호의 소홀, 그리고 개체성에 대한 개성 파괴 때문일 것이다. 역사속에서 수많은 리더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칼을 들었고, 펜을 들었지만 그들이 할수 있는 것이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또한 이데아적 세상을 위한 소수의 핍박은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는 폭력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 시켰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주검뿐, 결국 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속에 「코뮨주의 선언」은 필자에게 신선함을 가져다 주었다. 저자는 개체로부터 대중이 생겨난 게 아니고 대중으로부터 개체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개체란 대중의 흐름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응고된 것 혹은 지층화 된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결국 하나의 개체란 수천 수만의 대중, 그 무엇도 될수 있는 무수한 대중이 만들어낸 특정한 조합, 특정한 응고 상태라고 말한다. 그리고 필자가 앞서 말했던 수많은 정복가들, 리더들을 그는 코뮨주의 혁명가로 말하며, 코뮨주의 혁명가에게도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의 초월적 목적을 대중보다 먼저 깨달은 자가 아니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자도 아니고, 대중을 기다리는 자도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민감하고, 들끓는 소수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부분을 읽으며, 바로 코뮨주의 혁명가가 해야 하는 일이 교회의 목회자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 나아가 전신자 제사장 주의를 외치고 있는 개신교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부분을 한 번 더 생각하며,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누구보다 세상 속에서 민감하고, 사회의 약자들을 돌아보며, 하나님 뜻이 나의 뜻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자가 아닌가? 하며 생각해 본다. 두 번째는 “공동체를 위한 우정의 정치학”이다. 저자는 코뮨주의가 오기 전까지 마르크스주의 정치와 나치 정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란 국가 권력의 장악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치란 직접적으로 계급 투쟁이다. 즉, 정치는 언제나 또 어디서나 적과 투쟁하는 것이고, 적을 공격하면서 우군을 최대한 규합하는 것이다. 또한 나치독일의 정치학은 바로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문제였다.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코뮨주의는 우정의 정치학이다. 우정의 정치학은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우정의 정치학을 작동하는 가장 일차적인 요소는 타자를 긍정적으로 촐발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친구가 가진 장점을 좀더 밀어붙여주는 것일수 있지만, 그가 지닌 단점을 넘어서 비판할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부분을 통해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우정의 정치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단점을 비판하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모습. 그것이 오늘날 교회의 공동체 됨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코뮨주의 선언」 가운데도 선 듯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바로 8장 코뮨주의와 욕망이라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코뮨주의와 욕망에 대한 부분을 성에 대한 욕망을 연계하여 바라보는 부분에는 다소 억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책을 통한 ‘코뮨주의’에 대한 부분은 교회 공동체가 한번더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9가지의를 돌아봄으로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볼수 있고, 또한 교회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서도 공동체를 위하여 저토록 사유하며,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이 천년전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대안의 공동체를 보이셨던 예수의 공동체를 꿈꾸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비록 느리더라도, 그리고 보이지 않아도 한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세상이 갈망하는 그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