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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에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조나 레너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가 바로 그랬습니다. 지난 주말에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yes24.com/document/6415802>에서 발견한 다음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227쪽)”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저자가 인용한 부분이 너무도 황홀했다고 한 선생님의 소감에 이끌려서 바로 주문했고 읽어냈습니다. 박완서선생님은 선물받고 석달이 넘도록 다 읽지 못했다고 고백하셨는데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신경과학분야의 연구성과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전공이 신경과학의 한 분야인 까닭에 조금은 읽기에 편한 점은 있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얼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저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 - 요리사도 예술가라 한다면 -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들에서 신경과학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추출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연구논문과 과학자들의 관련 자료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 http://blog.yes24.com/document/4851897>을 통하여 제시한 학문간의 경계를 뛰어넘으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이 어떻게 상호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레너박사가 인용하고 있는 여덟 사람은 시인 월트 휘트먼, 소설가 조지 엘리엇과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요리사 에스코피에, 화가 폴 세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입니다. 레너박사가 이들의 예술적 성과에서 추출한 키워드를 다시 정리해보면, 휘트먼은 ‘감정’을, 엘리엇은 ‘삶의 복잡성’을, 에스코피에는 ‘미각과 후각’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을, 폴 세잔은 ‘시각’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청각’을 거트루드 스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자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청각과 시각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우리의 뇌가 수용하여 인식하고 기억하는 과정에 관한 신경과학적 연구성과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의 경우는 인식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공유하고 있는 소통의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척추동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대뇌의 기본적 활동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나 자아라는 주제는 인간에 고유한 정신활동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덟 사람의 예술적 성과 가운데 저자가 프루스트를 제목으로 정한 것은 아마도 저자의 전공과 관련된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분야에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기억을 찾아서; http://blog.yes24.com/document/2256546>를 통해서 소개한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델교수의 실험실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프리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이박사와 함께 연구를 했다는 인연이 작용한 것 아닐까하는 억측도 해봅니다.
저자는 앞서 소개드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제3의 문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제3의 문화운동이 유용한 대화를 구축하는 대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학을 그저 또 다른 텍스트 정도로 무시해버리며, 많은 과학자들은 인문학을 가망 없는 오류로 치부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저자는 영국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이 새로운 움직임, 즉 제4의 문화운동의 시발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4문학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려는 문화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융합이란 무엇인가; http://blog.yes24.com/document/6387963>를 통하여 소개드렸던 융합의 개념과도 잘 통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4문화는 “임의적인 지적 경계선을 무시하고, 구분하는 선들을 흐려놓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334쪽)”라고 저자는 예고하였습니다. 저자는 결론을 통하여 “이 책이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통합되어 비판적 이성의 범위를 확장해갈 수 있는지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거듭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책’이라 하신 이유를 알 듯합니다. 저 역시 박완서 선생님처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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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려 여러번 시도해보았지만, 그 방대한 분량때문에 차마 시작하지 못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 소설의 의미나 저변에 깔려있는 통찰에 대해서 아는바는 없다. 나의 지식이 짧아서인지, 이 책에 소개된 통찰력이 뛰어난 천재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며 이름을 들어본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통찰력과 시대를 앞서가는 인지능력에 대한 놀라움은 좀 덜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한쪽면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쪽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다른 면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두둥.. 이런 느낌의 충격이랄지, 놀라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그 다방면의 천재들의 해석정도로밖에 느낌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과학적으로 밝혀지기 전에 그저 인지만으로 인간의 반응나 감각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긴 하다.
어차피 과학이라는 것도 놀라운 발상을 가설로 세우고 그것을 증명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그 놀라운 발상을 예술인들도 심심찮게 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술의 시각에서 과학을 보고, 과학의 견지에서 예술을 해석하고자 한다. 실험과 시는 서로 보완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의 마음은 온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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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었었다. 리뷰도 쓰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신경물질이 조금만 부족해도 혹은 조금만 넘쳐도 인식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다. 신경물질이라는게 정말 희한하고 뇌는 더 희한하구나 이런 느낌과 함께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이 책을 소개하는 박완서님의 글을 보고는 옳다구나 하고 덥석 선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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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최초의 학자들은 specialist 이기 보다는 generalist 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 해도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작을 남긴 위대한 화가였으며 동시에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어마어마한 영역에 수많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연결 고리는 깨어졌고,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영역은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교육만 해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그 순간부터 서로 문과니 이과니 하며 다른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를 비롯하여 ‘만들어진 신’에 이르기까지의 베스트셀러가 자연과학적 내용을 담고 있긴 하나 리처드 도킨스의 인문학적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임을 감안할 때, 두 영역 간의 완벽한 분리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각 대학들은 모집단위를 점차 광역화하고 있으며, 모 출판사에서는 학자와 학자, 학문과 학문간의 상호작용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책을 출판하는 등 두 영역 간의 분리되었던 학문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인문/사회과학과 예술을 같은 것이라 칭할 순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러한 움직임들의 연장선 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와 화가, 작곡가, 요리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이룬 업적으로부터 과학, 특히 두뇌의 신비와 관련된 과학을 발견할 수 있을 줄 누가 예상이라도 했을까? 과학이라 하면 엄밀하고도 무언가 틀에 박혔을 것만 같은 인상이 드는 반면 예술 영역은 정해진 틀을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정서인지라, 둘 사이에 연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엄 촘스키는 이미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과학적 심리학보다 소설로부터 인간의 삶과 인성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고, 압도적으로 그럴 만한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과학의 진보가 정해진 것으로부터의 일탈(?)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고려한다면, 촘스키의 이런 말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작가는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과학이 우리를 해체한다면, 예술은 우리를 다시 통합시켜준다고... 프루스트로부터 불완전한 기억력과 관련된 과학을 읽고, 휘트먼으로부터 현대 신경 과학을 발견하는...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을 들으며 흐트러진 뉴런들을 이해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으며 자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또 다른 양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껏 무의미해 보이던 모든 현상들에 대해 주목할 것이며,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 하여도 그냥 스쳐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문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 공격하는 두 가지 인식론적 극단을 만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학을 그저 또 다른 텍스트 정도로 무시해버리며, 많은 과학자들은 인문학을 가망 없는 오류로 치부한다. 유용한 대화를 구축하는 대신, 제3의 문화는 이런 서글픈 현상을 부채질할 따름이다.(p330 중에서) 1959년 C. P. 스노는 문학적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달라, 공통된 기반을 거의 찾을 수 없을 지경이라는 비탄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가 꿈꾸었던 ‘제3의 문화’는 이제 막 스스로의 정체성을 체득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나 시인들이 아인슈타인을 이해하고 물리학자들이 콜리지를 읽는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분열되었던 두 문화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필요한 예술가-과학자 간의 대등한 대화가 필요한데, 아직 우리는 자신을 높은 곳에 둔 채 사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따름이다. 무지가 부끄러움은 아니지만, 무지의 상태에 머물고자 하는 닫힌 마음이 존재하는 한 현재의 분리된 학문들 간에 공통된 분모를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예술도, 과학도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이 책은 어려웠지만, 다행스럽게도 흥미로웠다. 이러한 시도가 각각의 분야에서 지속된다면, 그리고 시도의 과정 과정에 독자가 함께할 수 있었으면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