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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작가님의 2007년도 작품.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제일 잘 쓰는 작가라는 평을 받아오던 그녀가 이번엔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열정적인, 그러나 무분별한 연애가 만들어낸 결과물로서의 불안정한(?) 가족의 이야기. 이 소설은 그 가족의 이야기를 스므살이 갓 된 딸의 시각으로 잘 그리고 있다.
결혼을 한 상당수가 이혼을 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결손가정의 수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닌 요즈음.. 결코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가정의 이야기를 비교적 신파 없이 담담하게 (그래서 세련되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부담없어 편하게 읽히는 책.
가족 간의 소박한 대화로 소통이 불가한 경계가 일정부분 존재하고, 막연하게나마도 소통의 수단을 찾을 수 없는 고뇌를 마음 한 구석에 큼지막하게 안고 살아가는 가정의 구성원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볼 때, 사실 '아빠가 없네, 엄마가 없네'로 가정의 온전함 여부을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막연한 선긋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 읽기의 '부담없음'에 찝찔한 뒤끝이 없다. 삶의 노골성이 배제된 의도적 미화가 아닌, 수만의 가정 중 막연하게나마 존재할 수 있어보이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므살 딸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진 '세상보기'이기는 하지만, 제목에서 시사하듯 결국 엄마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열정적 사랑에 빠져 서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버린 부부가, 일상과 자아(자기애나 신념, 또는 삶의 의미 등)의 경계에 존재하는 절망의 늪에 빠져 결국에는 헤어지고 서로의 길을 간다. 딸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한채 그저 먹고살기에 열심이 되어버린 미안한 중년여성인 엄마. 많은 시간이 흐르고 딸아이가 충분히 커버린 다음에야 그 엄마는 힘들게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혼자 있는 사람이 외롭다는 건,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야. 사람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어서 외로운거란다.」
딸아이가 혼자라는게 외롭지 않느냐라고 물음에 엄마는 답한다. 자신은 이제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시작하겠다고, 그래서 지난 동안의 깊고 긴 외로움에서 벋어나겠다고..
전경린이라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에 기대어서 보면 기대와는 다소 다른 작품이었으나, 그녀가 그저 '남녀간의 애정행각을 언어의 유희를 통해 한 차원 승화시키는 능력' 이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멋지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 앞서 재미와 감동이 선행됨은 물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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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결혼, 출산, 이혼에 대한 우리의 자세> 사랑은 무엇이고 결혼은 왜 해야 하고 아이는 왜 낳는 것일까? 그리고 이혼은 왜 할 수 밖에 없을까? 사랑, 결혼, 출산 그리고 이혼까지... 이 단어들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이런 것들에 대하여 고민해야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개인적으로 정규교육과정으로 이런 것들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사랑과 결혼은 대학 입학이나 취업같이 내가 미리 계획해서 실행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내게 진정한 사랑이 26살에 찾아올테니 25살부터 연예를 준비하고 사랑을 맞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난지 6개월만에 결혼한 커플은 봤다. 이렇듯 사랑과 결혼은 갑자기 다가오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오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사랑이나 결혼 또는 이혼이 닥쳤을 때의 자세, 마음가짐이다.
'엄마의 집'에는 사랑, 결혼, 출산, 이혼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있다. 읽는 것만으로 그 고민들이 내 몸에 쏘옥 스며드는 듯 하다. 이 책에서 화자인 호은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무엇이고 결혼은 왜 하는지 왜 나를 낳았는지? 왜 엄마와 아빠가 같이 살지 않는지?
<평범한 이혼가정> 아빠는 엄마와 이혼한 후에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그 여자의 딸 승지(중학생)와 셋이 살다가 재혼했던 여자가 병으로 죽고 승지와 둘이 산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후에 어떤 이혼남과 연애하고 있다. 아빠와 엄마의 딸인 호은이는 대학생이고 기숙사에 살고 가끔 엄마를 만나곤 한다. 호은이는 재혼한 아빠가 밉기도 하지만 다시 엄마와 합치기를 바라고 있다. 어찌보면 요즘 있을 법한 이혼가정이다. 아빠, 엄마, 호은 모두 어느 정도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날 갑자기 아빠가 승지와 함게 호은이 앞에 나타난다. 아빠는 승지를 엄마에게 맡기라는 말한다. 호은이는 엄마와 얘기됐냐고 묻지만 이 아빠 '공산당 선언' 읽었냐는 황당한 대답을 하고 트럭을 타고 가버린다.
<불행의 원인은 소통과 이해의 부족!> 이 사건으로 어찌어찌하여 엄마와 호은이와 승지는 같이 살게 된다. 호은이는 승지로부터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빠와 만나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호은이 모두 사랑과 결혼 그리고 호은이를 낳은 것과 이혼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한동안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또 자신만의 상처에 대한 방어로 서로를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은 '작은 오해'의 상처를 점점 커지게 하는 게 아닐까? 호은이는 엄마와 아빠 각각에게 왜 이혼했냐고 묻지만 서로 다른 대답을 듣고 놀란다. 부부 사이에 소통과 이해는 중요하다. 아빠, 엄마, 호은 모두 나중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이혼가정의 피해자인 중학생 승지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일기를 쓴다. 이 아이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3인칭 시점으로 봄으로써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불행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하나를 배웠다.
<자유로운 연애관, 결혼관> 이 소설에서 보여지는 자유로운 연애관 결혼관 또한 눈여겨볼 만이다. 호은이는 고등학생때 K라는 1년 후배 여자애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더 황당한 것은 자신의 딸이 동성애자라도 별 상관없다는 이 엄마의 쿨한 태도다. 엄마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성적 소수자가 겪어야할 고통에 대해 딸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해준다. 이런 엄마가 있다니! 엄마는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내도 괜찮을 때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말한다. "사랑의 결실은 변태야, 변화를 겪고 달라지는 것." "결혼은 두 사람의 합자로 이루어지는 법인체야." 호응이의 생각도 엄마와 비슷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하는 것 같다^^ "결혼은 그렇게 손쓸 수 없는 숙명적인 결함과 타이밍의 예술인 것이다."
<생존과 진실중에 어떤 선택? 타락이란?> 아빠와 엄마는 우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학생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아빠는 '생존'과 '진실'중에 계속 진실을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이혼의 이유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도 아빠를 이해하는 것 같다. 아빠가 자살을 하지도 않았고 범죄자가 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다행인 것이다. 아빠는 적어도 이 소설에서 말하는 '타락'하지는 않은 것이다. 승지는 타락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세우며 '타락이란,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사는 거야'라고 정의내린다. 나 또한 타락하지 않으며 살기를 다짐한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가정을 가지게 되면 '생존'과 '진실'중에 무엇을 택할지 고민할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환상과 실제의 상호교환을 잘 할 수 있을까?
<사랑과 결혼 '소통과 이해'로 맞이할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변화를 겪는 위대한 것이지만 결혼은 '법인체' 또한 '숙명적인 결함과 타이밍의 예술'이라?! 거, 참 햇갈리네^^ 출산과 이혼은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밖의 이야기다^^; 그래도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는가!^^ 이렇게 호기롭게 얘기하지만, 사랑과 결혼에 대한 자세를 준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통과 이해'는 어떤 인간관계에나 적용되는 중요한 덕목이다. 사랑과 결혼이 덜컥 찾아오더라도 나는 당황하지 않고 '소통과 이해'로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거기다 '배려'라는 환영선물로 준비할 것이다. 제가 결혼하면 예스블로거들 초대해도 될까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전경린 작가의 물기어린 맑은 문체가 내 마음을 정화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책에 나오는 흰 토끼 한 마리 키우고 싶어진다. 그리고 '레몬트리'를 듣고 싶다!
아래의 문장은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치환의 '개새끼들'의 가사 일부분이다.
절대의 선은 없어 절대의 악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영원한 적은 없어 영원한 친구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넌 개새끼야 난 개새끼야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절대의 가치도 없어 절대의 신념도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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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라는 개념의 자를 가지고 들이대는 순간 사랑은 없단다
우리 곁에는 참으로 많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허브'에는 7살 지능을 가진 20살 딸과 엄마의 눈물 이야기, 사춘기 소녀와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 소설, CF속 눈물로 우유를 마시고 있는 딸아이에게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모습 등등. 딸은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고 한다. TOY의 '딸에게 보내는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꿈 많던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게 했단다. 너란 꿈을 품게 됐단다" 이전 소설들에서 딸들이 가장 싫어하던 엄마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자신을 버리고 딸에게, 혹은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던 그런 모습. '지지리 궁상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엄마들의 모습에 혐오의 시선을 보내던 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부장적인 사회, 순종적인 아내, 자식에 모든걸 바치는 엄마. 하지만 전경린의 이 작품은 조금 다르다.
<엄마의 집>은 돌연 집을 나가버린 엄마 윤진, 엄마의 가출로 외가에서 성장해야했던 딸 호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가부장적인 질서가 싫어 가족을 떠났던 엄마는 자신 만의 집을 갖기위해 중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드디어 그녀의 집을 갖게 된다. 20살로 성장한 딸이 찾은 엄마의 집.....가출 이후 10여년 만에 갖게된 엄마와 그녀의 집, 진정한 성인으로 여자가 되어 찾은 엄마의 집에서 딸은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많은 상처를 속에서 엄마를 용서하고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게 된다. 엄마와 딸의 대화... "미스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건 뭔가요?"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엄마인거" (P. 272) 단숨에 대답해 버리는 엄마. 엄마의 집. 아니 '여자의 집' 에서 새롭게 여자로 만난 두여인. 엄마와 딸이 아닌 여자로서 상처와 미움이라는 고통과 두려움의 흔적은 엄마의 이 말속에서 새로운 그녀들의 관계를 이야기 한다.
"사랑은 늘 있어. 너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 햇빛 속을 걸을때나 비 오는날 우산을 펼칠때, 한밤중에 창문 밖에 걸린 반달을 볼때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할 때도, 차 한잔을 마시거나, 홀로 먹을 밥을 끓일 때에도, 아침 일곱시와 오후 두시와 밤 열한시에, 사랑은 늘 거기 있어" (P. 274) ![]()
내 미움의 근원은 아빠를 아빠라는 개념의 감옥에 가두고 그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에 생긴것이었다. (P. 207)
또한 딸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서 자신이 갖고 있던 관념의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엄마의 친구, 아저씨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마음이 호은에게 보이는 변화라고 할수 있다. 초반 선배와의 대화속에서 가족을 '유효기간이 끝난 사이들'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다. 요즈음 가족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가족간에 대화는 없어지고, 서로의 역할만을 요구하고, 쉽게 해체될 수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우리 가정들의 보편적인 모습. 호은의 말처럼, 개념의 감옥을 풀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과 눈을 갖게 된다면 우리 가족의 유효기간이 조금은 늘어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경린의 이번 작품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변화를 이야기 하고 있다. 전작을 만나지 못한 나로서는 그 변화를 느끼지는 못한다. 단지 그녀의 사회에 대한 시선이 상처의 치유, 이해와 연민의 시선이라는 것은 명백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는 '화해'와 '웃음'이 담겨져있다. If life gives you a lemon, make lemonade.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것이다. P. 278)
그리고 가족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지이자 희망의 메세지를 담아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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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은 타인의 삶을 연기 해 볼 수 있는 것이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을 한다. 그런 느낌은 공감은 책을 좋아하고 하게 된 나의 이유와도 닮아있다.
책 속의 공간에서 타인의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늘 무언가 흥분되어지는 느낌 가운데 나를 반추해 볼 수 있는 때로는 그 감정이 지나쳐 황당한 상상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책을 통해 타인의 인생을 들여 다 보는 느낌은 늘 나에게 긍정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집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혼한 엄마와 그 엄마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 아빠에게 또 다른 아내가 있었고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이런 구조만 본다면 이 이야긴 굉장히 신파조로 흘러 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엄마의 집은 구질구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하향처럼 입안 가득...쏴아하게 퍼지는 그런 개운한 느낌이 들어서 그 기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의 삶언저리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힘들다 란 생각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사는 것 보단 당당해지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딸은 자기를 유기하듯 무시했던 엄마를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를 애인으로 만나고 있는 엄마를 이해 할 수 있었고... 자신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고...
엄마 역시 딸을 그렇게 무책임 하게 유기한 듯한 자신의 모습으로 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애잔함을 가지고 있었던 마음은...
"부모의 운명을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자기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을 긍정하며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란 이름이전에 내가 딸이란 이름이전에 내가...내가 먼저 나를 만들어야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이혼을 한 후 싱글맘으로 살게 된 여성에게 좀더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그녀의 삶에 힘을 불어 넣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싱글맘이란 이름 이전에 당신이란 이름으로 당신만의 세계를 먼저 굳건히 ..주춧돌을 쌓듯 그렇게 스스로를 키우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던 소설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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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관계다. 제일 많이 이해하면서도 결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이, 이 소설 『엄마의 집』은 그런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그러나 기존의 엄마와 딸처럼 억지스런 해후도 화해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같은 여자로서 동등한 인격체로서 바라보는, 그게 낯설지 않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다. 엄마, 386세대라 일컫는 80년대에 대학을 나와 세속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고 평생 가난하고 자유롭게 살자던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운동권이 변절자가 되어 제 앞길 막기에 급급할 때도 혼자서 청춘에 변절하지 않고 바닥을 헤매던 남편을 결국은 떠나야만 했던 엄마는 전형적인 한국여자가 되기보다는 이혼한 것에 기죽지 않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직업을 갖고, 애인을 두고, 나름대로 지각이 있는 여자다. 그리고 딸의 모든 아픔은 오로지 자기 때문이라고 믿는 '엄마'다. 딸,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자 엄마와 살기 전까지는 외할머니와 살아야했고 이제 엄마와 같이 살 수 있게 되지만 학교 기숙사로 떠난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세상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철저한 몰이해 속에서 문득문득 상실의 공포를 느끼며 곧잘 울음을 터뜨렸다. 스물한 살인 지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팔이 떨어질 만큼 일을 하면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88만원 세대, 비운의 청춘이자 남루한 청춘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씩씩한 '딸'이다. 이야기는 딸인 호은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재혼한 아빠가 어느 날 나타나서 재혼해서 생긴 딸을 두고 사라진다. 커서 되고 싶은 것은 없지만 세계의 특선 요리를 다 찾아다니면서 먹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고, 원숭이와 개와 당나귀와 공작새와 함께 대단한 공동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열다섯 살의 승지. 돌연한 승지의 출현으로 엄마는 어이없어 한다. 그리고 그 딸을 데리고 아빠를 찾아 나서지만 찾지 못하고 전 남편의 딸과 묘한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언뜻 호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우울해지기도 한다. 엄마를 여의고 아빠의 전처의 집에서 살아야 하는 승지나 이혼한 부모와 그 누구하고도 살지 못하고 외할머니와 살아야 했던 결손가정의 소녀 호은, 그러나 호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여성이다. 엄마가 자신의 집을 가지고 나서야 자신을 불렀을 때, '엄마의 집'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았는지 이해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빠가 돌아와 호은이 간직하던 진실을 비로서야 알게 되었을 때, 호은은 가지고 있던 우울한 과거를 떨치게 된다. 그리고 이제 과거들에 얽매이지 않고 부모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며 따뜻하게 끌어안는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와 아빠와 아무리 무수히 헤어져도, 그건 삶일 뿐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p280 아무래도 전경린은 변한 것 같다. 기존의 소설들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다. 일탈과 자기 정체성에 방황하는 여자들이 아니다. 남편이 없어도, 아빠가 없어도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그 변화가 아주 반갑다. 호은이 참 잘 자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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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가정에 대해 쓴 소설인데 재밌었고, 느끼게 하는 점도 많았다. 다만,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통일이 안 된 것 같았다. 엄마는 미술학원을 하다가, 살림을 위해 일러스트로 전향해서 돈을 모아 집을 장만했다. 딸 김호의 시점에서 서술한다. 아버지의 또 다른 딸 승지가 찾아오면서 세 사람은 함께 산다. 아버지는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같이 학생운동하고 살림보다는 이념에 더 빠져지냈다. 그래서 살림이 어려웠다. 아버지는 직장을 6번이나 옮겼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어머니는 변했다. 속세의 세상에서는 가족을 건사하고 돈을 버는 것이야 말로 부모가 져야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 사람은 건실하게 회사생활하고 있다. 김호의 눈치를 보며 데이트하는 아저씨와 어머니. 김호는 두 사람에게 미안해 한다.
김호의 과거 연애경험도 나온다. K라는 고등학교 후배와 사랑했었다. K는 활달하고 선물공세도 해왔는데, 김호 앞에서는 어리숙했다. 사귀고 나서 K는 한시를 외워줬고, 잘해주었다. 그런데 K는 어느순간부터 밀어내기 시작한다.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K는 어느새 Y라는 여학생과 친하게 어울리며 커플이 되었다. K도 가난했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알바하는 김호를 K가 찾아왔다. 외국에 나가 돈을 벌기로 했다고 말한다. 둘은 오해했었다. 마음놓고 연애도 하기 힘든 세상. 속물이 되어야 하는 곳. 그걸 타락이라고 생각하는 승지.
김호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저씨와 승지를 보면서, 세상에 대해서 배워간다.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집. 그 집을 위해 도와준 김호. 아빠의 또 다른 딸 승지. 엄마의 새로운 시작인 아저씨와의 관계. 세상은 힘든 곳이지만, 그 힘든 곳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
미래를 생각하면, 때로 부풀어오르는 과육 속에 박힌 애벌레처럼 시고 달콤한 세속적 소망에 사로잡히고 또 때론 내 소망의 철저한 세속성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난 시골이나 산으로 숨지도 않고, 내 방에 틀어박히지도 않을 것이며, 공연히 세상 끝까지 가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이 세상의 여러가지 것들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열두 개의 별자리를 골고루 친구로 사귀고 싶고, 남자와 여자를 사랑하고 아이도 낳아 키우고 싶다.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삶에 모욕당하지 않고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백 가지 적과 늘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 P275
if life gives you a lemon, make lemonade!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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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는 무거운 사회적 담론을 벗어나 다양한 브랜드를 가진 작가들이 한국문단에 등장한 시기다. 더욱이 여류작가들의 활약은 눈부시기만 하다. 후일담 문학으로 시작해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진화하고 있는 작가 공지영, 발군의 섬세한 문체로 굳건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신경숙, 냉소적 페미니즘 소설의 선두주자 은희경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쓴다고 평가받는 전경린도 응당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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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린의 '엄마의 집'을 어제 저녁 단숨에 읽어 해치웠다. 오후 여섯시경에 책을 잡아서 열시경 끝내는 사이, 지민군은 늦은 낮잠을 한차례 자고, 나는 가스불에 올려 놓은 계란찜을 약간 태워먹었으며, 쇠고기 미역국을 평소보다 약간 더 짭게 만들어 놓았다. 단순한 나는 두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하는 건 정말 힘들다.
하필이면 잡은 책이 '엄마의 집'이다. (요즘..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왜 이렇게 많이 쓰는지.. 쩝) 이번달 25일은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지 15주년되는 날이다. 15주년이라서 공원묘지에 찾아 가서 연장 계약을 해야 하는데, 마감일자는 다가오고 써야할 리포트는 쓰지 않고 걱정만 계속해 대는 꼭 그 꼴마냥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주문만 외고 있고, 차일 피일 미루고 있다. 읽는 내내 엄마 윤진에게도 공감이 되었다가, 딸 호은에게도 공감이 되었다가,어정쩡한 포즈로 양다리를 걸친 것처럼 불편해 하는 나를 보았다. 386세대도 아니고, 80년 후반 태생도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엄마이자 동시에 딸이어서 그런지.. (사실 나는 엄마 딸 역할이 10대 후반에 끝나 버려서, 동년배들이 나이들어 느끼는 딸의 '엄마에 대한 그 깊은 감정'을 잘 알지 못한다) 전경린은 오래전 '열정의 습관'을 읽은 뒤 찾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다. 그나마 좀 읽었다는 생각이 드는 여성 작가는 '공지영'정도 밖에... (공지영씨 소설은 요즘 들어 조금 편안하게 느껴진다. 작가 개인적인 변화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신앙의 회의를 느꼈을 즈음에 그녀의 '수도원 기행'을 읽고 나서, 그녀에 대한 나의 시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운한 시대를 타고난 386세대에 공감하기도 어렵고, 치열하게 페미니즘을 외치는 그네들의 소설이 거북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더우기 지금이야 어느정도 결혼 햇수가 늘어서, 너무나 심오한 그 '여자들의 삶'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녀들이 왜 그럽게 외로운지, 왜 그렇게 처절한지, 왜 그렇게 눈물 흘리며 가슴 깊은 통탄을 삼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거북스럽고 짜증나고, 후다닥 읽고 덮어 버리고 싶은 그런 류의 소설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제 '엄마의 집'을 읽으며,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책 후미에 있는 '페넬로페의 후일담'처럼 자아 찾기를 위해 집을 나간 엄마는 자신만의 집을 가지면서, 그 가출을 완성한다. 자신의 존재 찾기에 지나치게 열정적었던 나머지, 버림받아 홀로 자라야 할 자식은 내팽개치고 자신만의 인생만을 위해 살아온 엄마가 결국은 '자신만의 집'을 마련하고, 딸과의 화해를 시도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려한다. 그러나 이미 상처속에 자라 버린 딸과의 화해는 쉽지 않다. 그 간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이해하는 그 과정은 덤덤하면서도 경쾌하게 신파조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모녀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사이의 성숙한 완성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이 두 여자를 바라보며,그리고 또 다른 작은 주인공 승지- 버림받았던 호은과 닮은 듯한 작은 짐승과 같은 여리고 여린 아이- 를 보면서, 상처의 깊이와 크기는 다를 지언정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상처를 어떻게 하면 누굴 원망하지도 않고,또 배타적이지도 않고,또 무심하지도 않게 웃으면서 다독거릴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나는 사실 책표지의 그 얼렁뚱땅 쓴 듯한 짧은 리뷰가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자기만의 집을 가진 엄마 '미스엔'의 탄생! 미스 엔과 스무살 딸이 완성해가는 집과 일상과 사랑의 풍경' 뭐 이따위를 써놨냐 말이다....)
나는 작품을 분석할 만한 심미안이 없어 지금 내 멋대로의 리뷰를 쓰고 있지만,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 어떤 부러움 비슷한 욕망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크고 작은 상처가 벌어지고 아물고를 반복하여 그 상처가 징그럽도록 보기 싫지만, 또 다시 예쁘게 아물도록 연고를 자주 발라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상처가 아무는데에는, 그리고 상처가 옅어지는데에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상처가 난 몸이 건강하고 또 면역력이 강해야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건강하지 못하는 마음, 누굴 원망하는 마음, 십대 소녀마냥 불평하는 마음,배타적인 자세,자기 연민에 빠진 자세에 빠져 있다면 절대로 아문 상처는 예쁘게 자리 잡지 못한다. 주인공 윤진처럼 나는 사십대가 아니어서 그럴까? 원숙한 이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타인에 대한 성숙한 포옹.. 이러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짐작은 하지만, 어떻게 갖출 수 있는 지 모르겠다. 면역력이 강한 육체와 정신, 천천히 지을 수 있는 미소, 농담의 여유, 한 여인으로서의 성숙과 이해, 깊이있는 자아성찰과 이에 비롯된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 강렬히 원한다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한 욕망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비록 내가 지금도 짙은 색의 상처를 달고 있지만,비록 지금은 면역력 저하의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오래 간만에 느끼는 이 카타르시스... 정말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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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했었다. 나는 잘 안되는, 하지만 나와 비슷한(또는 내가 쓰고 싶어하는) 문체가 소설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부러웠다. 그래서인지, 독특한 내용보다는 문체에 집중해서 소설을 보게 된 것 같다.
엄마의 집은 제목 그대로 엄마의 집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참 잘 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과해서 너무나 진지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독특한 소재를 독특하게 잘 풀어나갔다는 평을 내려본다. 특히 이혼을 한 아빠의 딸을 맡게 된 엄마라는 굉장히 신선한 소재는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이혼한 부모 밑에서 정체성의 혼란기를 겪는 딸의 이야기와 잘 버무려지지 않았나 싶다.
호은은 엄마의 집에 사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이다. 그리고 아빠의 딸인 승지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다. 둘은 아빠도 엄마도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있다. 그런 두 아이를 보고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승지와 너, 둘 말이야. 닮았어..." "너희 둘 다, 아직 어린것들이 이 세상을 수백 번 살아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어. 참 이상해. 이 세상과 인간을 바닥까지 다 안다는 듯이 봐." (191쪽)
젊어서 운동을 했던 아빠는 감옥에 다녀왔고,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소통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세상일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현실에 순응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아빠의 세상이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게 때문이다. 그러한 아빠 밑에서 자란 탓일까? 호은이도 승지도 세상과 조금은 유리된 듯한, 많이 어려워보이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비단 아빠의 잘못도, 그리고 이유야 어찌됐든 불완전한 가정 속에서 자란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엄마의 집의 진정한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는 특별함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승지의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호은이의 엄마는 참 특별하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만큼 특별하고 또 특별하다. 엄마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그녀는 여자로서의 정체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 둘의 균형은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보는 객관적인 성찰까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엄마라는 존재가 호은이의 엄마, 노윤진 아니 엔여사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지나치게 무언가를 수식하고픈 작가의 욕구가 잘 느껴지는 문체 속에, 정말 특별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했을 작가의 또 하나의 욕구가 만났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전경린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문장들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꿈꿔볼 수 있는 가슴 벅찬 시간을 보냈다.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내용적이든 형식적이든 간에.
112쪽
279쪽 나는 색색의 종이배를 창문 아래로 하나씩 떨어뜨리고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과 무언가를 주고 싶은 다정한 마음이 똑같이 차올랐다. If life gives you a lemon, make lemonade!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특히 116쪽과 117쪽의 1과 2가 참 마음에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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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의 엄마가 전형적인 한국여자는 아닐 것이다. 엄마는 독립적이다. 직업이 있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기사를 가위로 오려가며 신문을 열심히 읽고 이혼을 했고 애인도 있고 지각도 있다. 엄마의 이름은 노윤진, 영어로 쓰면 세 글자에 모두 n이 들어간다. 나는 이따금 엄마를 미스 엔이라고 부른다. 전경린의 『엄마의 집』을 두 페이지정도 넘기면 ‘사실 나의 엄마가 전형적인 한국여자는 아닐 것이다. 엄마는 독립적이다.’로 시작하는 문단이 나온다. 이 다섯 문장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제길, 또 페미니즘 타령이겠군. 설마 386이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 내 예상은 생각보다 쉽게 들어맞았다. 페미니즘적 요소들과 386, 동성애 등등이 시골 잔칫날이면 꼭 등장하는 마요네즈로 뒤범벅된 ‘사라다’처럼 뒤섞여 있었다. ‘나는 엄마가 바라는 소녀적 이미지가 못마땅했다. 그건 수동적인 헤어스타일이다. ’라거나 ‘사실 여성호르몬만으로는 단순할 뿐 아니라 진부하다.’란 문장을 읽을 땐, 마요네즈가 뭉친 사라다 속의 감자를 먹는 듯 느끼하고 비위가 상했다. 2007년에 출간된 작품인데 주인공들은 90년대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던가! 386세대인 아빠와(운동을 하던) 그림을 그리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호은, 그녀가 주인공이다. (관점에 따라서 호은의 엄마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호은의 엄마는 운동권이던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고 호은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활동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호은의 엄마는 남편과 이혼 후 집을 나가고 호은은 외할머니 손에 자란다. 대학생이 되어 호은은 엄마와 함께 살게 되지만, 두 모녀는 서로의 감정을 탐닉하고 방어하면서 위태로운 평온함을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은의 아빠가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나타난다. “승지를 네 엄마한테 좀 맡겨라.”라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소설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본적인 가족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사랑을 주지 못해서 혹은 받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외로워하면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방어기제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양성애자면 어떨 것 같냐는 딸의 물음에 ‘어떻긴, 그런가보다 하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엄마도, 유년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은 엄마에게 그런 도발적인 물음을 하는 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비정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몇 년 만에 겨우 만난 딸에게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았냐고 묻는 아빠도 위선자로 느껴졌다. 아내와 외도 상대자의 선물을 같은 것으로 고르고, 딸과 친구를 대동하고 부인 모르게 다른 여자를 만난 것, 마땅히 해야 할 경제활동을 자신의 신념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응하지 못하는 무책임함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승지가 진짜 자신의 딸이 아니었던 것처럼 어쩌면 승지 친엄마와의 외도 역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이 깨지고 친딸은 방치해두었으면서 남의 딸을 거두어 기른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순 없었다.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니 이건 페미니즘 이야기도, 386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주인공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정당한 노동마저 물질에 농락당하는 것이고 착취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무능력한 남편을 떠나 자립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호은 엄마, 그 사이 외할머니 댁에서 외롭게 자라야 했던 호은, 나이가 들어도 예전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방랑하다 시골에 정착하려는 호은의 아빠. 다른 시각에서 이들을 보니 인간의 가치관이나 신념이라는 건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호은과 그녀의 엄마가 아닌 호은의 아빠로 보게 되었다. 모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은 장본인. “글로벌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물질에 농락당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려면, 마음과 생각 속에서 우선 착취의 사슬을 끊어야 해. 말하자면, 더 가질 수 있고 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공존의 선을 가져야 하는 거야. 진짜 삶은 욕망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가 아니라, 욕망이 멈추는 공존의 선 위에서만 가능해. 너도 그 선을 찾아야 하고. 모든 것에 가격이 붙어 있는 이 세계에 속지 마. 때가 되면 네가 가격의 질서에서 벗어나 살게 되기를 바란다.” 부자는 타락한 사람이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조직일 뿐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386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는 변했고 마찬가지로 변해가는 사람도 많다. 예전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많다. 물질에 농락당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농락하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정말 위험한 것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삶에 기생하고 심지어 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호은 아빠처럼. 승지가 엄마의 집에서 나오던 날, 호은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척아줌마(호은엄마)는 타락했다고. 화가이면서 생계를 핑계로 진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승지의 생각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런 인물들을 창조해 낸 것은 시대가 변했어도 같은 생각,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그 신념들은 자식을 통해 대물림되고 그래서 세상은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읽히는 소설이라고 해서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집』을 읽으며 새삼스레 떠올린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