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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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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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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자본주의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사람을 자본주의는 우대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더 많은 자본을 움켜쥔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괜히 일어나겠는가? 부자는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자본은 오로지 이익이 되는 것만 광장으로 받아들인다. 이익이 되지 않는 모든 생명은 가차 없이 자본이 세운 광장 밖으로 쫓겨난다. 피라미드의 끝에 이르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으로 떨어진다. 피라미드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사람들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라미드는 더욱 더 높아진다. 황규관은 아득한 하늘로 치솟은 피라미드 사회에서 어제는 내가 졌다고 인정한다. 자본이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자본은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고한 성채를 쌓는다. 단시일 내에 허물어질 장벽이 아니다.

 

시인은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라고 쓰고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패배할 수 있다. 그것은 약자가 감당해야 할 필연적인 몫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욕은 다르다. 굴욕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다. 더 이상 적수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패배가 아니라 굴욕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본 앞에 설 수 있을까? 싸움에 지고 난 다음 시인은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다. 바람은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으로 들어간다.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은 패배를 모른다. 숱한 패배들로 이루어진 이 심연을 건너려면 어깨에 와 닿는 바람을 온몸으로 기꺼이 맞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오늘도 나는 졌다는 시인의 말을 눈여겨 들어보라. 어제는 졌고, 오늘도 졌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물음은 의미가 없다. 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싸움에서 져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굴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내일이면 다시 일어나 다시 싸움을 벌인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으면 어떤가? 속옷은 갈아입으면 그만이다. 알몸으로 싸워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싸움이 있다. 정당한 싸움을 할 때 그렇다. 적은 패배한 사람들에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한다. 모두를 내주는 게 곧 굴욕이다. 모두를 내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라고 시인 또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내주려면 적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적이 원하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살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적이 만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언어가 닿지 않는 저 심연을 품은 채로 적이 만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시인은 심연이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다시 싸우러 나가라는 신호이다.

 

누군가는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말한다. 어떻게든 이겨서 희망이나 선을 지키라는 얘기겠다. “유혹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지독한 욕망과도 같은 것이다. 날마다 패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기는 것은 얼마나 큰 유혹일까? 하지만 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듯, 이기는 것 자체도 문제가 아니다. 시인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싸움의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길이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생각할 일이다. 승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패배가 거듭되면 쉽게 좌절을 한다. 패배에 젖은 사람은 적이 원하는 모두를 내주고 깊은 좌절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승리와 패배가 주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승리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패배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으면 승리와 패배는 무의미한 결과가 되어버릴 뿐이다.

 

시인은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싸움은 과정이다. 결과는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될 따름이다. 승리든 패배든, 싸움의 결과에 안주하면 흐르지 않는 물이 곧바로 썩는 현상이 일어난다.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승리를 얻어냈는가. 4.19가 그랬고, 6.10이 그랬고, 촛불집회가 그랬다. 우리는 늘 결과에 안주했다. 결과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 시인은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과는 새로운 과정=싸움으로 나아가는 한 점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싸우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에 목덜미를 잡힐 수밖에 없다. 눈빛이 텅 빈 침묵으로 빛나는 사람은 이러한 결과주의와 치열하게 맞선다. 스스로 썩은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낸다.

 

승리를 해도 패배가 되고, 패배를 해도 패배가 되는, 그래서 승리와 패배가 곧 과정 속에서 거듭나는 싸움을 시인은 자본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지금 이곳에서 벌이려고 한다. “끝내 패배한 자여,”라고 시인은 외치고 있다. 끝내 패배하는 자는 권력에 굴복한 자가 아니다. 굴욕을 당한 자가 아니다. 끝내 패배하는 자는 계속해서 물길을 트는 자이다. 물길을 터서 이 세상에 샘이 깊은 맑은 물을 한시도 쉬지 않고 공급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승리와 패배는 의미가 없다. 승리와 패배는 다음 길로 가기 위한 정거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패배가 웃음이다라는 시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뻗어 나온다. 패배한 사람은 왜 웃을 수 있을까? 다시 싸우면 되기 때문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을 맞으며 시인은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본다. 썩지 않는 맑은 물이 그곳에서 출렁인다. 패배가 으로 거듭나는 장소이다.

 

 

o*****s 2019.10.1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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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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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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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자본주의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사람을 자본주의는 우대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더 많은 자본을 움켜쥔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괜히 일어나겠는가? 부자는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자본은 오로지 이익이 되는 것만 광장으로 받아들인다. 이익이 되지 않는 모든 생명은 가차 없이 자본이 세운 광장 밖으로 쫓겨난다. 피라미드의 끝에 이르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으로 떨어진다. 피라미드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사람들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라미드는 더욱 더 높아진다. 황규관은 아득한 하늘로 치솟은 피라미드 사회에서 어제는 내가 졌다고 인정한다. 자본이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자본은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고한 성채를 쌓는다. 단시일 내에 허물어질 장벽이 아니다.

 

시인은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라고 쓰고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패배할 수 있다. 그것은 약자가 감당해야 할 필연적인 몫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욕은 다르다. 굴욕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다. 더 이상 적수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패배가 아니라 굴욕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본 앞에 설 수 있을까? 싸움에 지고 난 다음 시인은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다. 바람은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으로 들어간다.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은 패배를 모른다. 숱한 패배들로 이루어진 이 심연을 건너려면 어깨에 와 닿는 바람을 온몸으로 기꺼이 맞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오늘도 나는 졌다는 시인의 말을 눈여겨 들어보라. 어제는 졌고, 오늘도 졌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물음은 의미가 없다. 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싸움에서 져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굴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내일이면 다시 일어나 다시 싸움을 벌인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으면 어떤가? 속옷은 갈아입으면 그만이다. 알몸으로 싸워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싸움이 있다. 정당한 싸움을 할 때 그렇다. 적은 패배한 사람들에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한다. 모두를 내주는 게 곧 굴욕이다. 모두를 내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라고 시인 또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내주려면 적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적이 원하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살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적이 만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언어가 닿지 않는 저 심연을 품은 채로 적이 만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시인은 심연이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다시 싸우러 나가라는 신호이다.

 

누군가는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말한다. 어떻게든 이겨서 희망이나 선을 지키라는 얘기겠다. “유혹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지독한 욕망과도 같은 것이다. 날마다 패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기는 것은 얼마나 큰 유혹일까? 하지만 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듯, 이기는 것 자체도 문제가 아니다. 시인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싸움의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길이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생각할 일이다. 승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패배가 거듭되면 쉽게 좌절을 한다. 패배에 젖은 사람은 적이 원하는 모두를 내주고 깊은 좌절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승리와 패배가 주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승리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패배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으면 승리와 패배는 무의미한 결과가 되어버릴 뿐이다.

 

시인은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싸움은 과정이다. 결과는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될 따름이다. 승리든 패배든, 싸움의 결과에 안주하면 흐르지 않는 물이 곧바로 썩는 현상이 일어난다.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승리를 얻어냈는가. 4.19가 그랬고, 6.10이 그랬고, 촛불집회가 그랬다. 우리는 늘 결과에 안주했다. 결과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 시인은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과는 새로운 과정=싸움으로 나아가는 한 점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싸우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에 목덜미를 잡힐 수밖에 없다. 눈빛이 텅 빈 침묵으로 빛나는 사람은 이러한 결과주의와 치열하게 맞선다. 스스로 썩은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낸다.

 

승리를 해도 패배가 되고, 패배를 해도 패배가 되는, 그래서 승리와 패배가 곧 과정 속에서 거듭나는 싸움을 시인은 자본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지금 이곳에서 벌이려고 한다. “끝내 패배한 자여,”라고 시인은 외치고 있다. 끝내 패배하는 자는 권력에 굴복한 자가 아니다. 굴욕을 당한 자가 아니다. 끝내 패배하는 자는 계속해서 물길을 트는 자이다. 물길을 터서 이 세상에 샘이 깊은 맑은 물을 한시도 쉬지 않고 공급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승리와 패배는 의미가 없다. 승리와 패배는 다음 길로 가기 위한 정거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패배가 웃음이다라는 시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뻗어 나온다. 패배한 사람은 왜 웃을 수 있을까? 다시 싸우면 되기 때문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을 맞으며 시인은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본다. 썩지 않는 맑은 물이 그곳에서 출렁인다. 패배가 으로 거듭나는 장소이다.

 

 

o*****s 2019.08.2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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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도로록, 위안 도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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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도로록, 위안 도로록   치유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집어든 시집 한 권. 조금 불순했던 이유만큼이나 어둠의 힘이 강한 제목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시인의 시는 이로써 처음 접하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역시나 선택의 결과는 탁월하다 못해 앞으로도 당연히 있을 내 앞의 어둠앞에, 패배앞에 당당히 치유제로써 1위를 군림할 듯 싶다. 새벽 두 시. 시간도 같이 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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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도로록, 위안 도로록

 

치유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집어든 시집 한 권.

조금 불순했던 이유만큼이나 어둠의 힘이 강한 제목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시인의 시는 이로써 처음 접하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역시나 선택의 결과는 탁월하다 못해 앞으로도 당연히 있을 내 앞의 어둠앞에, 패배앞에 당당히 치유제로써 1위를 군림할 듯 싶다.

새벽 두 시.

시간도 같이 어두워주고 열린 창 사이로 들리는 울렁대는 토악질 소리는

내게 멀지 않은 곳에서 늘 어둠이 되게 깔려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향기마저 방문하지는 않는 거리감에 그나마 감사해얄지 잠시 고민해본다.

 

시 한 권의 엮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엮여있는 듯한 느낌은 왜 일까?

공통된 저변의 그 무엇의 힘일까?

짧으면서도 깊은 호흡을 주는게 시.

시인의 예민함이 무던하게 살아가며 상처받는 평인들을 치유해준다.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부지런함이.... 사색 한 장면 장면이...

분과 초를 나눠가며 일정대로 움직였던 기계들을 눈물로 녹이며 시간을 천천히 되감아 준다는 것을 잘 아시는지요..

마치 우리들은 저 마다마다의 생을 살고 있는데.... 살아내고 있는데...

시를 읽고 있자니.......

왜 쌍둥이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은 나만 드는 것일까?

 

소재 하나 하나의 선택이 마치 내가 살고 있는 방안과도 같은 모습이며,

걸어가고 있는 길 위이며, 강가이며, 그네들인가?

좁은 원룸 안의 열린 화장실(혹은 욕실이자 화장실인..) 앞에서 책 쥐고 보며 밥 먹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고,

절삭해야 할 부분 짚어주는 '자신들의 착취 때문임을 죽어도 알 수 없는 자들'에게 시급 다시 계산해가며 적게 나온 수당을 굳이 이번달 안에 추가입금(당연히 그달에 받아야 할 당연한 수당을..;;)해 달라며 구질 구질 말하던 모습하며....

그렇게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외쳤던, 그것만 바라보며 이 지점에서 일하든, 서울에서 일하든 어디에서든 다 일할 수 있다는 말을 그렇게 했어도 된다고 했던 사람마져 취소되었어도 나만은 안되었던 소식을 전해듣던 일하며....

 

 

시 한편 한편이 흑진주처럼 알알이 꿰어 있음을 목격하는 건 비단 나뿐일까?

세상의 울음이 이렇게 찰지게 옹골차서 알알이 꿰어 있는 시 한권....

뻘밭 조개들이 품어 낸 하나 하나의 눈물의 결정은 아닐런지..

조용히 품어내온 황규관 시인의 성찰이....

삶의 길들이....

묘하도록 토해냈던 최근의 나의 좌절들을 같이 투영하게 되는 것은 지나침일까?

 

부디, 절필하지 않으시길....

부디, 예민한 시인의 길을 가주시길..,

그래서 많은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시길....

어디에서건, 누구에서건 위로를 받지 못하고

혹은 울 자리가, 울 공간이, 울 시간조차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울음을 편안히 흘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길, 그 핑계로 인하여 깊은 공감과 위로를 얻어 힘을 얻을 수 있게 해주길....

YES마니아 : 로얄 m*****e 2008.05.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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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패배는 나의 힘)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패배는 나의 힘)" 내용보기
시를 말하는 시 128   ​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글 창비 펴냄, 2007.12.14.   ​   나무가 선 곳에 새가 찾아듭니다. 새가 찾아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애벌레가 있습니다. 애벌레는 새한테 잡히기도 하지만, 새가 알아채지 못해서 씩씩하게 살아남기도 합니다. 새한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애벌레는 나비로 깨어나기도 하고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패배는 나의 힘)" 내용보기

시를 말하는 시 128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글
 창비 펴냄, 2007.12.14.

 

  나무가 선 곳에 새가 찾아듭니다. 새가 찾아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애벌레가 있습니다. 애벌레는 새한테 잡히기도 하지만, 새가 알아채지 못해서 씩씩하게 살아남기도 합니다. 새한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애벌레는 나비로 깨어나기도 하고 나방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나비나 나방은 바지런하면서 기쁜 날갯짓으로 꽃을 찾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꾸면서 잠만 자느라 몹시 배고프거든요. 이 꽃 저 꽃 수없이 찾아들며 꽃가루하고 꿀을 먹는 동안 나비나 나방은 어느새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가만히 보면 애벌레가 자라도록 해 준 나무는 나비나 나방이 깨어난 뒤에 즐겁게 꽃가루받이를 할 수 있어서 천천히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나는 이승의 어떤 탐닉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 살이 얼었던 마음을 녹인다 / 살이 굳어버린 영혼을 살린다 / 강물 같은 살이 / 달빛 같은 살이 (흐르는 살)

 

아내가 사온 쌀은 여주쌀 / 20킬로그램 한 포대에 사만팔천원이나 한다 //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깻잎무침 오천원어치 / 구운 김 삼천원어치 등등, 이렇게 / 나는 금방 장에서 돌아와 쌀을 푼다 (쌀을 푸다)

  황규관 님이 빚은 시집 《패배는 나의 힘》(창비,2007)을 읽습니다. 시집 이름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황규관 님으로서는 이녁 삶에 ‘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일터에서도 지고, 곁님한테도 지고, 아이들한테도 지고, 또 술벗한테도 지고, 여기에서도 지고 저기에서도 지고, 더욱이 어머니 병문안을 다녀오며 병원삯을 변변히 보태지 못하는 살림에도 진다고 해요.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는 바람에 앞으로 다가올 날에도 자꾸 지겠구나 하고 여긴다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지고 자꾸 지면서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 씩씩하지 못한 몸짓이라 하더라도 다시 아침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엽니다. 새 일자리를 찾으려고 기운을 내어 다시 이력서를 쓰고, 먼지를 수북히 먹은 자전거를 바라보면서 어릴 적 꿈을 되새깁니다.

왜 우리는 결핍에 시달리며 사랑을 해야 하나 / 봄비 그친 오늘 아침엔 / 마른 가지마다 어린잎이 입도 안 가리고 웃었다 / 그게 우주고 또 우리의 생활은 거기서 피어나는 것 (완전한 슬픔)

 

아침에 일어나 다시 뒷산을 걸어도 / 떡갈나무야, 나는 아직 아는 바가 없구나 / 분노보다도 슬픔에 익숙해진 이후라야 / 혼자 길을 갈 수 있을까  가난, 사랑, 바람, 잎사귀, 자벌레 / 이런 뭉게구름 같은 말들에 마음이 닿는지 / 옮겨적은 말씀이 가벼웁다 (금강경을 옮겨적다)


  새한테 잡아먹힌 애벌레는 얼핏 보기에 ‘삶에 진’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는 어느 모로 본다면 ‘새와 한몸이 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먹은 밥 한 그릇도 이와 같이 바라볼 수 있거든요. 내 몸이 되어 준 모든 밥, 모든 목숨, 모든 숨결, 모든 넋을 돌아본다면, 내 몸을 이루는 수많은 목숨과 숨결이란 언제나 나를 새롭게 이루는 꿈이나 사랑이라고 여길 만하다고 느낍니다.


아파트 복도에 자전거가 기대 서 있다 / 큰애가 내리자 작은애가 한때 / 즐겁게 달렸던 낡은 자전거 / 중학교 삼년, 자전거만 타면 /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

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 / 품어주고, (품어야 산다)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나무 그늘이 지켜 주었다고 합니다. 지고 또 지는 삶에 지친 황규관 님한테도 이녁을 따사롭거나 시원하거나 너그럽거나 넉넉하게 지켜 주거나 돌보아 주는 느티나무 그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벚나무 그늘이나 구름 그늘이 있을는지 몰라요. 감나무 그늘이 있을는지 모르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기쁘게 그늘을 드리워 줄 수 있을 테고요.


  들판이나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비와 나방이 씩씩하게 깨어납니다. 조그맣고 수수한 빛깔인 나비와 나방도, 알록달록 곱거나 눈부신 무늬를 갖춘 나비와 나방도, 저마다 즐겁게 바람을 가르면서 아침을 엽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나무를 찾아듭니다. 우리도 저마다 새롭게 삶을 이루고 살림을 지으며 사랑을 꿈꾸면서 아침을 엽니다. 지고 지고 거듭 지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란 바로 우리 마음속에 꿈꾸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새처럼 노래하고 나비처럼 춤추는 마음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2016.7.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h*******e 2016.07.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