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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제대로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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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것은 저자 김태식이 2001년 쓴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풍납토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고고학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언론인 출신의 저자를 통해 역사를 쓰고 해석하는데 있어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건 학자들의 몫이지만 발굴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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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것은 저자 김태식이 2001년 쓴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풍납토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고고학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언론인 출신의 저자를 통해 역사를 쓰고 해석하는데 있어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건 학자들의 몫이지만 발굴과 연구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비판하는 건 언론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작과 새로나온 '직설 무령왕릉'은 큰 의미를 갖는다. 언론이 아니면 이렇게 솔직하게, 때론 칼날같이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성과를 향해 비판의 펜대를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김태식의 두 저서는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케 해준다.

 

'직설 무령왕릉'은 무령왕릉의 발견, 발굴, 연구의 전 과정을 샅샅이 들여다 본다. 45년전 현장의 기록, 그리고 발굴 당사자들의 육성, 후대의 연구 등을 통해 무령왕릉의 발굴이 가져다 준 충격, 감동, 혼란, 갈등, 논쟁, 정치적 이용까지 세밀하게 조명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단순히 화려한 '무령왕릉' 뿐만 아니라 무령왕의 생애와 혈통, 왕릉과 유물의 면면, 중국-백제-일본의 교류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저자가 제공하는 방대한 정보에 놀라게 되고, 황당하기까지 한 졸속발굴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일단 무령왕릉 발굴을 박정희 독재정권의 권력욕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좋으나 무령왕릉 발굴/연구에 대한 비판과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을 한 저서에서 함께 다루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또한 평양의 낙랑, 일본서기, 화랑세기, 임나일본부 등 일부 논란이 많은 소재가 가감없이 뒤섞여 혼란을 가중한 측면도 있다. '무령왕릉'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훨씬 즐거운 독서가 됐으리라. 마지막으로 수정할 부분 두군데가 눈에 띄어 덧붙인다. 252p의 '癸酉朔十二月'의 月은 日로, 334p '14년(495) 9월에는'의 495년은 405년으로 수정함이 옳다.

 

역사책 읽기를 즐기는 입장에서 참 좋은 책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책뿐만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를 관찰하는' 책도 많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s***u 2016.07.0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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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 대한 모든 것 [직설 무령왕릉] 김태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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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초등학교 다닐 때 견학을 다녀왔던 것 같은데, 기억에 선명하지 않다. 그때만 해도 이 왕릉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몰랐으니, 작은 복도를 지나 나오는 텅 빈 묘실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으리라. 그러다가 최근에야 무령왕릉에 대해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왕릉이 백제의 왕릉으로서는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처녀분이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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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초등학교 다닐 때 견학을 다녀왔던 것 같은데, 기억에 선명하지 않다. 그때만 해도 이 왕릉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몰랐으니, 작은 복도를 지나 나오는 텅 빈 묘실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으리라. 그러다가 최근에야 무령왕릉에 대해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왕릉이 백제의 왕릉으로서는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처녀분이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중요한 왕릉을 겨우 하룻밤 만에 발굴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실은 백제 멸망부터 지금까지 1,000년이 넘게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고, 중간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직적인 수탈을 겪었기에, 슬프지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두 번째 사실, 즉 무령왕릉을 하룻밤 만에 발굴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1971년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도 거친 후 재건이 얼추 끝나서 한창 발전하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재 때문에 권력이 집중되어 일단 보기에는 안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뭐가 급하다고 이 거대한 발견을 하룻밤 만에 훼손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을 완전하게 해소해준 것이 바로 <직설 무령왕릉>(2016, 김태식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이다. 저자는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재직했다. 중간에 고고학과 고대사 분야를 전공해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풍납토성, 화랑세기를 연구하고 책을 냄으로써 '언론인에 의한 고고학 발굴기'의 시원을 열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저자는 정통 역사학자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차라리 다행인 것이,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식민사학이 뿌리를 내렸고, 그 제자들이 여전히 학계를 장악하고 있어서 새로운 의견을 내기 어렵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무령왕릉 발굴이라는 사건을 바라보며 철저하게 해부하고, 무령왕릉의 의미에 대해서도 각종 사료를 들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부는 무령왕릉의 발견부터 발굴까지를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설명한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1971년이지만, 백제의 터전인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해서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뒤지고 수탈한 일제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1927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는 가루베 지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일제는 가루베 지온의 몸을 빌려 공주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시간과 공간, 학술적 배경이 차근차근 전개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고, 마침내 1971년 7월 5일 무령왕릉이 발견된다. 그 급박한 현장을 저자는 밀착 취재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짜 맞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건국 이래 처음이라는 충격으로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분위기여서 기록조차 부실하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난입해서 사진을 찍으며 현장을 훼손한 것, 아무리 나무뿌리에 얽혀 있었다지만 삽으로 떠서 가마니에 담아 들어낸 것, 관재를 젖은 천으로 감싼 채 며칠 방치해서 곰팡이가 핀 것, 사진이 거의 없고 기록조차 부실한 것. 저자가 설명하는 이런 사실들을 읽을수록 그 당시의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만으로 공주박물관을 채울 정도였으니, 다른 무덤들이 도굴되지 않았다면 백제 문화의 찬란함이 얼마나 빛났을까.


2부는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각각의 상태와 재질, 형태, 의미 등을 고증한다. 백제는 백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려 때 지어진 <삼국사기>,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와 이어지며 우리나라 고대사의 사실을 풍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사실에 대해서 비평할 입장이 못 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만한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앞부분에 실린 무령왕릉 발굴기의 전모를 읽는 것도 의미 있지만, 뒷부분에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과 사실을 비교함으로써 백제사, 고대사를 종합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벌써 45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무령왕릉과 무령왕의 의미에 대해 재검토하고 책임 있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큰 일을 해준 저자께 감사한다.

y*****9 2016.06.1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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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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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문화재 관련 학술기자로 활동한 저자 김태식의 [직설 무령왕릉]의 부제는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다. 바로 해답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전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비단 이 책뿐만이 아니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대부분 작가의 말과 뒷부분에 몰려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8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전부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문화재 발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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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문화재 관련 학술기자로 활동한 저자 김태식의 [직설 무령왕릉]의 부제는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다. 바로 해답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전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비단 이 책뿐만이 아니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대부분 작가의 말과 뒷부분에 몰려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8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전부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고 있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선 책의 첫 시작은 고고학이 제대로 자리잡지 않았던 1920년대에 총독부의 지시로 유물을 발굴하는 상황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의 고유 문화를 약탈하던 그들이 어째서 유물을 도굴이 아니라 '발굴'하려 했는지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큰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총독부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곳은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가 아니었다. 개성과 평양을 중심으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고 참여자들은 모두 일본 도쿄대 출신의 능력있는 학자들이었다.

​송산리 6호분 유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62쪽


'가루베'라는 와세다 대학 출신의 학자는 주 전공이 고고학 혹은 역사학이 아니었던 등의 이유로 해당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그때 가루베가 교편을 잡게 된 곳이 공주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가지게 된 송산리 고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가루베는 총독부도 인정했을 정도의 '도굴'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비롯 여러 도굴꾼이 공주를 파헤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유물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루베에 의해 공주의 고분들이 발견된 후 총독부가 드디어 송산리 고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때마침 가루베의 도굴 행적이 드러나면서 '무령왕릉'이 하마터면 발견될 수 있었던 상황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가루베의 저서를 보면 송산리 고분들 중 6호를 통해 가까운 지점에 '무령왕'혹은 그정도 위치의 권력을 가진 이의 고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기 때문에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무령왕릉이 가루베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유물을 일본 혹은 아예 만나지 못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봉분의 원형을 알 수가 없다. 1971년 발견 당시에 봉분이 거의 허물어져버려 원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화재관리 당국은 원형을 복원한다며 우람한 봉분을 얹었다. 177쪽

무령왕릉이 다행스럽게 가루베의 손을 피할 순 있었지만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내내 가슴아파했던 '졸속발굴', 도굴꾼들도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정도라고 안타까워 하는 상황은 피하질 못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한내에 제대로 된 고고학자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북한과 비교해서도 그 실력과 관심이 뒤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희망을 걸 수 있었던 남한에서 유일하게 관련 연구를 했던 김정기도 일본출장 일정과 겹쳐 1차 발굴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다. 무령왕릉 발굴과 관련 김원룡은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듯'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안타까워 했다.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 속에 졸속으로 마무리된 발굴 작업을 외부에서는 크게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아 할 정도다.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할 수 있는데 저자는 크게 6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장된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령왕의 사망 연대를 통해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입증할 수 있었고 삼국사기 뿐 아니라 [일본서기]에 기술된 내용과의 일치성을 통해 이 문서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백제가 어느 나라와 교류했는지도 알 수 있는데 책의 다른 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긴 하나 우선 관재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임을 밝혀냄으로써 어떤 의미로 관재에 일본목재가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연구과제를 남겼으며 묘의 겉모습이 벽돌무덤이라는 '중국'문화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묘 내부의 구조와 시신이 안치된 방향등을 미루어 백제인들의 내세관과 중국 및 일본의 내세관과 거의 일치하다는 사실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런 유물을 통해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구가했을 왕국을 떠올리게 되고, 나아가 현세의 독재자 출현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454쪽-


무령왕릉과 관련된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하지만 다시 처음 서두에 적은 것처럼 이런 내용들이 어째서 권력과 관련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마무리 해야 할 것같다. 우리가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배우려는 것과 권력자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특히 독재자들의 정세가 높았을 때 일수록 문화는 더더욱 화려해지고 역사에 대한 의미부여가 강력해질 수 밖에 없다. 무령왕릉 이후 천마총을 발굴하는 작업에 대통령이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을 그저 역사에 관심을 갖고 문화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정도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때의 영광을 다시금 자신의 손으로 이뤄보려는 자가 어떤 정치를 펼칠 것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웠기 때문이다.  

YES마니아 : 로얄 i********g 2016.06.0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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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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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 고구려, 세나라중 우리는 신라에 대해 찬란한 역사라 부른다. 신라가 찬란한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건 그들의 문화제가 현존하고 있는 유물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상대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유물들은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이 한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에 현존하고 있으며,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백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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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 고구려, 세나라중 우리는 신라에 대해 찬란한 역사라 부른다. 신라가 찬란한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건 그들의 문화제가 현존하고 있는 유물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상대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유물들은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이 한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에 현존하고 있으며,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백제의 유산이다.


이 책의 맨앞에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백제의 송산리 고분군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본인 교사 가루베 지온이 공주에 교사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백제의 문화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 총독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 공주 곳곳에 남아있는 백제 고분들을 직접 답사하게 된다. 가루베 지온은 700여기의 백제 고분들을 답사하였고 , 그의 발자국이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이며, 백제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 있으며, 그 사적지는 고고학 최대의 발굴이라 부르는 백제 25대 왕 무열왕의 무덤 무령왕릉이다. 이 무덤은 그가 죽은 이듬해 1971년 6월에 배수로 공사를 하던 도중에 나타났으며, 저자는 이 무덤이 발굴된 그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고 있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그 당시 언론들은 들썩 거렸다. 한국일보 특종으로 문화재 발견 소식이 타전되었으며, 언론 뿐 아니라, 공주군민들, 문화재 관계자들 또한 큰 관심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것이 무령왕릉 졸속 발굴의 원인이 된다. 문화재 발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이들이 문화재 발굴에 참여함으로서, 무령왕릉 문화재들은 훼손되었다. 무령왕릉 입구에 무덤을 지키는 영험한 동물 진묘수가 사람의 발자국으로 인해 훼손되었고, 문화재는 하루사이에 감자, 고구마 캐듯 쓸어 담았다. 1차 발굴로 인해서 문화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료와 흔적들을 제대로 얻지 못했던 것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은 문화재는 그렇게 쓸어 담아도 되는 줄 알았다고 변명하고 있었다. 꽃삽을 활용해 쌀포대에 쓸어 담았던 그들의 행동들, 실제 문화재 발굴에 참여했던 29살 지건길, 30살 조유진은 문화재 훼손의 주요 책임자였다. 저자는 이렇게 졸속 발굴하게 된 책임을 청와대에 있다고 보고 있다. 무지몽매했던 권력자는 문화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목적 달성에 무령왕릉을 이용하려 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또한 문화재 발굴을 재대로 할 줄 알았던 고고학자 김원룡은 그곳에 없었다.


무령왕릉 훼손은 1971년 7월이 처음이 아니다. 이후 문화재는 공부 박물관에 이관되었지만, 무령왕릉은 대중들에게 다시 공개되었으며, 2차 훼손이 일어나게 된다. 관광지로서 수익 창출을 위한 공주시의 이해관계, 또다른 특종을 기대했던 언론, 무령왕릉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청와대..그들은 그렇게 무령왕릉을 이용하였고, 훼손하게 된다. 그리고 무령왕릉은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영구 폐쇄 조치 되었다.


우리는 항상 일본을 비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성찰은 없다. 무령왕릉 발굴단은 도굴군보다 더 못한 졸속 발굴을 진행하였고, 그들은 구경꾼들이 무령왕릉 주변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변명한다. 그 당시 문화재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본인 가루베 지온도 세상을 따니 버렸다. 살아있는 이들은 백제의 소중한 문화재 무령왕릉의 남아있는 흔적과 그 안에 숨어있는 고고학적 증거, 그들은 졸속 발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알고 싶었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k*******2 2017.04.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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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여 년 역사 가운데 백제 유산만 있는 것도 아니요, 하물며 공주가 품고 있는 백제 유산이 무령왕릉만 있는 것도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이 이곳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 한 가지를 미리 말하자면, 광복 이후 일본인에게 인수 받은 공주박물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보유하고 있는 유물이라고는 와편과 자기 등 200여 점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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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여 년 역사 가운데 백제 유산만 있는 것도 아니요, 하물며 공주가 품고 있는 백제 유산이 무령왕릉만 있는 것도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이 이곳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 한 가지를 미리 말하자면, 광복 이후 일본인에게 인수 받은 공주박물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보유하고 있는 유물이라고는 와편과 자기 등 200여 점에 불과했고, 사무실 한 칸 없었으며, 전시조차 할 수 없는 영세한 시설이라 당시 존폐설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했던 것은 당연 무령왕릉의 강림이었다. 너무나도 훌륭한 이 유적은 108종 2,906점이나 되는 유물을 한꺼번에 토해냈고, 그 덕분에 지금의 국립공주박물관에 이르게된 것이다.

 

1971년 7월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거대한 회오리를 몰고 왔다. 무령왕릉 이전 우리나라에선 우리의 손으로 발굴한 왕릉은 단 한 기도 없었다. 모두 일본인의 손을 거쳤으며,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금석문 한 점 나온 바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의 손을 거쳤던 송산리 고분군에서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처녀분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도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는 묘지석과 함께 말이다. 그 발견의 흥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와 같은 흥분은 우리나라 발굴사에서 최악의 졸속발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은 바로 그 발굴 전후 이야기에 전반부를 할애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조선 각지의 무덤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연구의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연구의 목적이라는 것도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그밖에 대부분은 그야말로 도굴에 가까웠다. 공주의 대표적 무덤군인 송산의 고분군의 발굴과정에서는 '가루베 지온'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가루베는 계획적으로 공주로 와서는 고분군을 철저하게 도굴했다. 이 장면에서 식은땀을 흘리게 했던 것은 그가 지금의 무령왕릉의 외관을 인식했던 점이다. 다만 의아하면서도 무척이나 다행인 점은 이 무령왕릉을 당시엔 6호분의 배총(背塚)으로 파악하고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가루베가 이것을 수상쩍다 여겨 파헤쳤다면 무령왕릉임을 밝히는 금석문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이 알려지지 않고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그야말로 우연에 의한 우연이었다. 만약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의 삽 끝이 한 치라도 벗어났다면, 혹은 공사 진행 도중에 튀어나온 '강돌'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더라면 공주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일본인의 마수를 피하고 하늘의 계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무령왕릉이 최악의 졸속발굴을 피하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다. 흥분이 '환장'에 이르러 무덤 안으로 들어가 유물을 마치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내듯' 끄집어낸 행위는 사실상 도굴꾼과 도굴행위와 같았다. 당시 우리의 발굴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기자의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발굴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책의 후반부에는 관련 고대 기록과 그동안의 한·중·일 연구 성과를 모두 담고 있는데, 무령왕릉은 이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은 흔히 묘지석 혹은 매지권으로 부르는, 앞뒤로 글시가 새겨져 있는 두 장의 돌판이 무엇인지를 규명한 부분이다. 저자가 묘권(墓券)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 돌판은 함께 나온 수천 점의 유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묘권에 의해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이라는 점이 확인 된다는 점은 이들의 가치부여에 있어서 국보지정 문화재와 일반 유물 만큼이나 큰 차이를 가져온다. 무령왕릉에거 가장 핵심적이고 학술적인 '돌판에 새긴 비밀'을 규명해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s*****w 2016.12.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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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발견은 우리 고고학이 맞이한 가장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반만년 역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특별히 세련되고 풍요로운 농경 정착 문화를 가꾸고 살아 온 우리 민족에게는 그 역사에 걸맞을 만큼 양적으로 풍부한 유산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첫째 외침이 잦았고, 둘째 꼭 우리 민족만의 사정은 아니지만 도굴꾼들의 집요한 시도로부터 체계적인 문화재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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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발견은 우리 고고학이 맞이한 가장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반만년 역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특별히 세련되고 풍요로운 농경 정착 문화를 가꾸고 살아 온 우리 민족에게는 그 역사에 걸맞을 만큼 양적으로 풍부한 유산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첫째 외침이 잦았고, 둘째 꼭 우리 민족만의 사정은 아니지만 도굴꾼들의 집요한 시도로부터 체계적인 문화재 수호, 보전이 이뤄지지 못했으며, 셋째 무엇보다도 일제 강점기라는 뼈아픈 시련기를 겪었던 탓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려, 신라도 아니고 무려 백제 시대 왕의 고분이 남아서 거의 온전한 형태를 드러내었다는 사실은 차라리 전율에 가까웠습니다. 한 집안으로 비유하자면, 40대조 조상님이 남긴 국보급 도기가 어디 고택 별채 다락 한 구석에서 나왔다는 소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용케도 화재, 수해, 도둑놈의 탐욕으로부터 온전한 채로 그 세월을 견뎠구나 하는 경이감. 이 책에도 유독 이 무령왕릉만이 온전한 형태를 기적처럼 보전한(보전했던) 데 대해 여러 이유를 제시합니다. 진실로 이 발견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특별한 은총에 가까웠던 이 기회를, 바르고 삼가는 태도로 영접해야 할 우리 후손들의 태도는 "만행"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고대의 유적이 말 그대로 어느날 갑자기 현대인의 눈 앞에 나타난 게 확률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사건이었건만, 이를 두고 세상 어디에도 없을 만큼 무지하고, 계획성 없고, 지독할 만큼 속물적으로 대한 우리 후손들이었습니다. 이런 발굴의 현장에선 최초 수십 시간의 처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당시 무령왕릉 발굴팀은 이 같은 기초 수칙의 준수는 안중에도 없었으며, 더 큰 문제는 발굴(그런 걸 발굴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 마무리된 지 한참 후에까지조차 문화재의 품격과 가치에 걸맞은 대우가 도외시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워낙 개탄스러운 행태였던지라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즉 발굴 당시의 당혹스러움, 급박함, 무지함 등의 사정이 이미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박하고 몰지각한 정책적 대처가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나 학계, 언론인들의 몰상식을 탓하기 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당시 발굴 팀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분은, 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그 글이 실렸던 故 김원룡 서울대 명예교수입니다. 해방 이후 고미사학계의 소장파 그룹을 주도해 나간 학자로서 이 분야에선 동시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쌓은 분이죠. 또한 야나기 무네요시(복성도 아닌데다 한자로 柳宗悅이라 써서 꼭 한국인 이름 같은 인상을 주는)가 남긴 식민적 프레임과 맹렬한 논쟁을 벌여 그 나름대로는 민족주의 시각의 확립에 공을 세운 업적도 큽니다. 이런 분이 주도한 발굴 작업이, 그만큼이나 졸속되고 후세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부터가 우리들에게 큰 아픔을 남깁니다.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 꾸려져 있습니다. 소설처럼 믿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 아니며, 건조한 르포나 고발성 기사와 달리 "과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독자가 흥미롭게(흥미롭다는 말이 어폐가 크긴 합니다만) 사태의 흐름을 좇을 수 있게 재구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적 인물 등에 대해서는 글의 형식을 불문하고 경칭이 생략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 실존 인물들에 대해 일체의 경칭이 생략된 건 그런 관행을 따랐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자의 태도가 무작정 당시 책임자들에 대한 비판 일변도로 치닫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는 겁니다. 실제로 저자는 대단히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는 게, 우리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치를 떨 만한 행적, 태도를 보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애에 대해서조차 "그의 처지"라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입니다. 책의 객관성에 대한 유력한 방증 중 하나입니다.

가루베 지온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그쪽 학맥에선 적자는 못 되고 서자쯤 되는" 위상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였으니만치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의 발굴에 임해선 뭔가 졸속으로라도 "한 껀" 올려보려는 속된 공명심이 크게 작용했을 만합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죠. 뭔가 배경이 든든치 못하고 저력, 내공이 부족한 사람은 꼭 무리수를 둡니다. 이 책은 이처럼, 기사를 다루기에 앞서 등장인물(당연히 실존 거물)들의 성향과 인격, 출신 배경 등을 분석하고 들어가는 방법론이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책을 "소설처럼" 읽어 나갔다고 평한 건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저자는 한 가지 프레임을 고정시키고 모든 인물을 평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위의 가루베 같은 경우, 그가 강점기 시절 현지 고교 등에서 교사로 재임하며 양성한 제자들이, 이후 사회에 진출하여 버젓한 지위를 확보한 후 수십 년이 흘러 자신을 환영하러 나왔다며 뿌듯한 감회를 털어놓았다는 서술도 있습니다. 세상 일이 이처럼 복잡한 것이라 뭔가 한 가지 잣대만을 기계적으로 들이대고 평가하기란 애초에 무립니다. 당시 명문고(여고)에는 우수한 일인 교사가 여럿 재직하던 게 보편적인 실정이었을 텐데, 이를 두고 일제 잔재 청산이라며 일체의 의리를 끊으라는 게 과연 인지상정에 부합하는 태도일까요?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서, 여튼 가루베는 좋지 않은 흔적을 최소한 고미사학계에 남긴 건 분명합니다. 책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건 김원룡 교수의 "성미 급한 개성"입니다. 이 시절 병영식 상명하복 문화가 판을 쳤던 기업만큼이나, 이 탐사팀에서 그는 제자들과 하급 공무원들을 독재차가 수하를 다루듯 마구 다그칩니다. 정작 그 자신 역시 본인 스스로의 학문적 한계와 지식의 부족으로 이처럼이나 일을 그르쳐 놓고선 말입니다. 이 과정을 상세히 다룬 내용에서 간접으로 당시 시대상도 파악할 수있었는데, 예컨대 "학예관"이 5급 공무원임은 처음 알게도 되었습니다. 이 당시 국가의 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문화재 관련 부서가 갓 설립되어 첫발을 뗄 무렵이라(그나마 이런 초기 형태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무 설비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경천동지할 대사건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하는 모습들이 실로 갈팡질팡입니다.

제가 읽으면서 혀를 내두른 게, 학교에서 정식으로 학문을 익힌 학자, 직무의 엄격한 프로토콜에 따라 본분을 수행할 공무원들보다, 이익을 쫓아 활보하는 일자무식의 도둑놈들이 훨씬 능률적으로(?) 행동한다는 겁니다. 탐사팀뿐 아니라 관계자 대부분이 "금강여관"이란 곳에 묵었는데, 어떻게 용케도 도둑놈 하나가 이 소식을 알고 찾아와 그예 몇 점이 도난당했다는 거죠. 저자나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분들이나 점잖은 인격들이라 이를 "양상군자"라 표현합니다만,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갖춘 분들이 물욕에 혈안이 된 범죄자를 감당하기가 애초에 무리인지도 모르죠.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낸 엄청난 보물의 현장에서, 발굴팀은 문화재들을 푸대자루에 쓸어담습니다. 연약한 것은 갑자기 개봉되어 들이닥친 외부 공기에 의해 벌써 심각한 침해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마치 중상해를 입은 환자를 들것에나 옮기듯 정성을 기울여야 할 이 상황에서 문화재들은 푸대자루에 실려져 나갑니다. 잡부들이 일하는 노가다판이 이럴까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들이닥치는데, 질서를 잡을 방법도 없고 어떤 사람이 정부 관계자며 어떤 사람이 기자고 어떤 자가 도둑놈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쓸어담아서 불측한 자가 검은 이익을 보는 일이나 당장 막아야 할 만큼 급박합니다. IS는 의도적으로나 문화재를 파괴했다고 하지만, 이 책을 읽는 현대인 중 소양 있으신 분들은 아마 손톱이 들리는 듯 아찔아찔한 느낌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찾아올 겁니다.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벌건 자국을 남깁니다. 본래 그런 것이려니, 이미 지난 일이려니 넘길 게 아닙니다. 책을 읽고 우리들 평범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식이 바뀌어야, 모습과 규모만 달리한 채 또다시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어이없는 참사가 안 생깁니다.

v*****7 2016.06.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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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을 다시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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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한 고분벽화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뒷쪽으로 배수구 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인부가 내리찍은 괭이 끝이 뭔가에 걸려 튕겨져 나왔다. 그것이 무령왕릉 벽의 모서리였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벽돌을 따라 파 내려가니 입구인 듯한 아치가 나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무령왕을 모신 왕릉이 우리 앞에 문을 열기 직전이다. 일단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를 하고 어설프게나마 제를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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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한 고분벽화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뒷쪽으로 배수구 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인부가 내리찍은 괭이 끝이 뭔가에 걸려 튕겨져 나왔다. 그것이 무령왕릉 벽의 모서리였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벽돌을 따라 파 내려가니 입구인 듯한 아치가 나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무령왕을 모신 왕릉이 우리 앞에 문을 열기 직전이다. 일단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를 하고 어설프게나마 제를 올리고... 참으로 긴박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분 발굴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기록되어지기도 한다.  그 긴박함과 참담함이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 날, 왜 그리도 비가 내렸을까?  고분에 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밤새워 무덤 앞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돌렸다. 다음날은 다행히 비가 그쳤고 구멍안으로 들여다 본 터널형의 복도에서는 돌 짐승 한마리가 올테면 와보라는 듯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제고분. 그것도 도굴되지 않은... 고고학자라면 당연히 가슴이 떨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닥치게 되면 우리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마비상태가 되어버린다. 모든 이성은 멈췄고 그랬기에 그 날의 현장에서 진두지취하던 김원룡은 '내가 미쳤었다!'고 그날을 회고했다. 벽돌을 떼어가며 안으로 들어선 김원룡과 김영배의 눈앞에 '王' 이라고 써있던 지석이 나타나고... 우리나라 고분은 연대나 이름을 써넣지 않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연대가 써 있고 명문이 써 있는 유물을 눈앞에 둔 고고학자들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야말로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으니... 문제는 거기에 기자들과 소문을 듣고 몰려든 공주사람들이 동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종을 터트리겠다는 욕심하나만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몰려든 가지들에게 왕의 무덤은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고 말았다. 당연히 바닥의 유물은 상처를 입었다. 제자리를 벗어나 뒹굴며 후손들의 철없는 홀대(?)에 비명을 질렀다.  그 북새통속에서 두 사람은 무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들은 말했다. 쓸어담듯이 유물을 걷어냈다고. 그렇게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다시한번 공주박물관에서 박제되어진채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서울에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던 시간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미나미 지로, 사이토 마코토, 고이소 구니아키 라는 이름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이름을 목록에 올려야 할 것 같다. 가루베 지온... 일제강점기의 도굴꾼. 무령왕릉 앞에 있는 송산리 6호분을 발굴한 사람으로 이 사람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우연인지 책을 펼치자 그동안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그 이름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것처럼 내 앞을 막아 섰다. 그런 인물이었구나.... 그런 와중에도 가루베 지온이 송산리 고분을 발굴하면서 바로 뒤에 있는 무령왕릉을 왕릉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니!  힘없는 나라의 서러움이 깊은 슬픔을 불러온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파헤친 사실만을 이야기한다. 무령왕릉 발굴에 관한 전후의 일과 무령왕릉을 파헤치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졸속으로 이루어진 무령왕릉 발굴의 비화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읽다보면 기가 막혀 가슴을 치는 순간도 있을 것이고, 졸아드는 안타까움에 잠시 숨을 몰아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교훈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전무후무한 그들의 행태를 변호하자는 건 아니다. 김원룡의 발굴 회고록을 보면 그 상황에서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나지 않았었다는 말이 보인다. 고고학도로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그러나 그 쓰라린 경험이 경주 고분 발굴의 교훈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스스로 위안할 뿐이라고. 그러나 이 책속에는 그 사건에 대한 심판이라는 말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잘못된 것에 대한 반성과 교훈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게 옳은 일일터다. 

 

책장을 넘기면서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그 참담함과 뻔뻔스러움으로 표현되어진 글자들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책속에서 기어나오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 이야기의 끝을 알고 싶었다. 내가 이 책에 마음을 빼앗긴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까닭이다.  무령왕릉 발굴에 얽힌 비화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편협함이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공주박물관을 두어번 찾았던 기억을 더듬는다. 김원룡과 김영배의 혼을 빼앗아버렸다던 진묘수와 묘석이 떠오른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전해져오는 울림이 크다. 다시 그 박물관에 가고싶다. /아이비생각

 

발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놓은 모습이다. 돌짐승 진묘수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그 앞이 墓地石이다. 墓地石에는 왕의 , 을 해서체로 새겨놓았다.  누구의 묘인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墓地石때문이었다.  

 

i****9 2016.05.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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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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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김태식 저, "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메디치, 2016."어떻게 하면 유물로 아이들을 유혹할 것인가?"이는 1년 전 제가 박물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전시해설*을 할 때 가진 고민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미 유리창 너머의 유물들에게 코가 꿰었으니, 이렇게 좋은 것을 저만 당할 수 없다(?)는 맹랑한 생각에서 이런 고민이 탄생했지 싶습니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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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김태식 저, "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메디치, 2016.

"어떻게 하면 유물로 아이들을 유혹할 것인가?"
이는 1년 전 제가 박물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전시해설*을 할 때 가진 고민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미 유리창 너머의 유물들에게 코가 꿰었으니, 이렇게 좋은 것을 저만 당할 수 없다(?)는 맹랑한 생각에서 이런 고민이 탄생했지 싶습니다. 당시 박물관에서 아이들을 즐거이 이끌고 다닌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저를 포함하여, 문화재는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사람들이 문화재에 홀린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 고려청자를 마주한 저와 같이, 단순히 신기하고 예뻐서 그랬던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학자들처럼 유물에 담긴 역사성에 반했거나, 혹은 이것들을 좀 파내어 내다 팔면 돈이 될까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화재와 그 역사를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보려는 자 또한 있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마지막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제 당시 자기 욕심을 위해 백제 고분을 파해친 일본인부터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 국민들에게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심어주고 싶어했던 독재자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자기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문화재가 가진 힘과 매력을 이렇게 활용한 것이지요.

저자는 책에서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이 권력과 궤를 같이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이 우리에게 문화재를 어떻게 인식 시키려 하였는지, 또 그것으로 자신의 부당함을 어떻게 변호했었는지 조목조목 파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 우리가 문화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고, 또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과거 제가 전시 해설을 할 때 혹여 어떤 실수가 없었는지 반성하게 되더군요. 혹시 저와 같은 고민을 시작하셨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청년멘토 제도
** 책, p. 6.

추가하여,
제가 사학을 전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심심할 때 박물관에 구경가는 일이 전부인지라 이 책의 감상문을 쓰기 조심스럽습니다. 제 부족함으로 책과 그 저자께 누가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이 책은 훌륭한 무령왕릉 발굴지이기도 합니다. 백제 문화와 무령왕릉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께 권합니다.


YES마니아 : 로얄 j******2 2016.05.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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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과 정권, 역사와 현재, 정치의식과 문화적 혜안의 관계...
"고고학과 정권, 역사와 현재, 정치의식과 문화적 혜안의 관계..." 내용보기
'직설 무령왕릉'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 - 1970)이라는 ‘교육자를 가장한 도굴꾼,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권력과 고고학의 관계와 무령왕릉을 계기로 드러난 민족주의적 레토릭(rhetoric; 수사修辭;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수단)을 파헤친 책이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난 1940년 무렵 자신이 조사한 백제 고분이 1천기를 돌파했다고 떠벌였을 정도로 큰 도굴꾼이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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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 - 1970)이라는 교육자를 가장한 도굴꾼,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권력과 고고학의 관계와 무령왕릉을 계기로 드러난 민족주의적 레토릭(rhetoric; 수사修辭;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수단)을 파헤친 책이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난 1940년 무렵 자신이 조사한 백제 고분이 1천기를 돌파했다고 떠벌였을 정도로 큰 도굴꾼이었다.

 

가루베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적을 파괴하고 수탈한 장본인이다. 저자 김태식은 무령왕릉에 대한 레토릭(중국의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이란 글자를 보고 무령왕을 민족주체성을 선지해준 분으로 열렬히 선전)이 이후 전개된 경주 지역 신라 왕릉 발굴로 이어져 굉음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령왕릉에 대해 논하려면 공주 송산리 고분군(古墳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송산리 고분군은 충남 공주에 자리한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일곱 기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송산리 고분이란 이름은 가루베가 처음 쓴 것이다. 무령왕릉 외에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도굴이 워낙 심한 까닭이다.(34 페이지)

 

무령왕릉은 배수로 공사를 하던 김영일(현장소장)에 의해 발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초창기의 고고학적 기록은 대부분 가루베의 자료를 출처로 한다.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듯 1920, 1930년대 일본은 고고학 인력을 전부 평양과 경주에 쏟아부었다. 이 바람에 공주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가루베는 공주를 틈새 시장으로 삼은 것이다.(53 페이지) 물론 당시 일본 총독부는 모든 고적조사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각종 법령으로 유적과 유물 보존 정책을 표방했었다.(52 페이지) 마타도어 같은 도굴꾼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놓친 것은 무령왕릉을 6호분 보호를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주산(主山) 또는 배총(陪冢)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56, 57 페이지)

 

저자는 가루베의 범죄적 실체를 부각시키면서도 그가 수행한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제 붐을 조성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공주분관은 무령왕릉 발견으로 폐쇄 위기를 넘기고 국립박물관 산하의 다른 지방 분관과 함께 공주박물관으로 지위가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77 페이지)

 

충남 역사문화관으로 변모한 이 건물은 무령왕릉 발굴 이전 230점 정도였던 수장 유물이 발굴 이후 8,365점으로 늘었다. 저자는 무령왕릉이 졸속 발굴되었다고 주장한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5, 6호분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로 준설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책에는 새 왕릉을 짐작케 하는 상황에서 계속 배수로를 파내려가자는 쪽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야 한다는 쪽의 가벼운 다툼은 물론 무령왕릉 발견 공을 차지하기 위한 분투 또는 책략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졸속을 무마하려는 사후 변명에 대한 기록 역시 생생하다.

 

무령왕릉 입구를 파헤치자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떨어졌다는 과장된 소문이 돌았다. 이 릉 이후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지역 발굴 때 가뭄도 왕릉 탓, 폭우도 왕릉 탓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제주, 하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곡이 생각난다. 저자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아무리 고고학자라도 사자(死者)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 라고 말한다.(111 페이지) 본문이 말하듯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토지신에게서) 구입했음을 증거하는 문서인 묘권(墓券)이란 것도 있다.

 

제주 4. 3이 죽임의 폭력과 관계된 것이라면 고고학자의 작업은 문화를 위한 것이다. 참고할 것은 지진제(地鎭祭)이다. 1938415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 기공식때 지진제(地鎭祭)가 드려졌다. 일종의 위령제이다.(118 페이지..위령제는 한국고고학계의 관례이다.) 공사가 무사히 진행되도록 땅의 신에게 지내는 고사이다.(25 페이지)

 

무령왕릉은 공개적으로 발굴된 최초이자 마지막 유적이다.(117 페이지) 일반인에게까지 공개된 것이다. 무령왕릉임을 확신케 한 문구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문구였다.

 

저자는 "손 하나 대지 않은 완전한 백제 왕릉, 그것도 백제 중흥의 대왕 무령왕의 능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고학 하는 사람으로서 누가 가슴 떨리지 않겠는가."란 김원용의 말에 졸속 발굴(하룻 밤에 발굴을 해치운)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 란 말을 한다.(127, 128 페이지)

 

졸속 발굴은 유물의 파손을 초래한다. 김원용은 보도진이나 구경꾼들과의 마찰과 사고 방지를 명분으로 도굴꾼이 아니면 생각하지도 못할 한밤중 발굴을 결정했다.(143 페이지) 졸속 발굴 때문에 실측도도 부실했고 사진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147 페이지)

 

저자는 고구마 감자 캐듯 이루어진 유적 파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고고학자의 합법적 발굴이라도 경험 부족, 지식 부족, 성의 부족 등으로 얻어내야 할 정보를 일부분 밖에 얻어내지 못하거나 기록화가 미비, 불충분하여서 다른 사람이 유적의 원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도 또한 결과적으로 유적의 파괴자요 도굴자란 글을 언급한다.(163 페이지)

 

"그러나 어쩌랴. 이런 글을 남긴 주인공은 바로 무령왕릉을 고구마나 감자 캐듯 파헤친 김원용이었다."는 저자의 글(164 페이지)은 의미심장하다. 저자에 의하면 김원용은 분명히 고고학 발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분위기에 휩싸여 기본을 잊고 무령왕릉을 졸속 발굴하고 말았다.(16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은 졸속 공개되었다가 급기야 영구 폐쇄된다.(177 페이지) 저자는 일반 공개가 무덤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충분히 예상됨에도 무리하게 공개한 것은 무령왕릉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리려는 당국의 얄팍한 계산 때문이라 말한다. 무령왕릉은 발견 당시 이미 허물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왕릉 봉분을 무리하게 만들어 올림으로써 신라 고분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봉분이 우람, 장대하다.

 

이는 백제 왕릉이 크기면에서 신라 왕릉만은 해야 한다는 경쟁심의 발로일 수 있다. 저자는 무령왕릉 졸속 발굴에 청와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무령왕릉 발굴 완료 시점과 출토 유물의 청와대 나들이 시점에 주목한다. 저자에 의하면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박정희는 고고학 발굴을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선전에 마음껏 활용했다.

 

저자는 무령왕릉에서의 실패(홍보 자료로 만들지 못한) 이후 경주 발굴은 전 과정을 홍보용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을 들어 무령왕릉이 고고학과 권력이 결합하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무령왕릉은 유물 처리와 보고서 발간도 졸속이었다.(223 페이지) 고의인지 실수인지 유물 누락도 있었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무령왕릉 보고서 작성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본 학계는 예나 지금이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더구나 무령왕릉에서 쏟아진 많은 유물이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무령왕릉에 대해 보인 각별한 관심은 이해가 간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는 무령왕릉을 선전용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238 페이지) 저자는 일본 학계 주도의 무령왕릉 연구의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무령왕 또는 무령왕릉을 오직 중국이나 일본 중심의 대외관계로만 보게 되었고 백제사를 전체사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무령왕이 재위하고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웅진 도읍기라는 극히 짪은 시기로 따로 떼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241, 242 페이지)

 

무령왕은 일본 열도 어느 섬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귀국해 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성 도읍기와 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성왕 때 도읍을 사비로 옮겼다. 사비시대와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일본 학계가 무령왕릉 연구를 주도하고 거기에 국내 학계가 종속되는 것은 문제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한글판과 거의 동시에 발간된 김원용의 일본어판 무령왕릉 단행본을 일본에 간도 배알도 다 내준 것으로 본다.(243 페이지)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의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시기는 물론 주인공이 밝혀진 고분이다.(흥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도 무덤 주인공이 밝혀졌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지신에게서 땅을 구입했음을 증빙하는 서류인 묘권(墓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묘권 즉 매지권과 오수전(五銖錢)이라는 돈 꾸러미는 무령왕릉이 살아 있을 때 이 세상의 주인이었으나 지하세계에서는 불청객일 뿐임을 증명한다. 묘권과 오수전을 함께 묻은 것은 지하세계의 동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무령왕릉보다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아 연구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릉의 가묘라는 설을 제시한다. 저자는 고고학 발굴에 광범위한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임해야 함은 무령왕릉 부부 관재(棺材)에 대한 목재조직학의 분석 결과로도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351페이지) 저자는 우리나라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을 대단한 나라로 착각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주()나라 천자가 죽음에 붕을 쓰고 팔일무라는 특권 춤을 추었으며 죽어 빈() 기간이 7개월이나 되는 특권을 누렸다 해서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라고 말한다. 패권은 제후국 왕인 제나라 환공, ()나라 문공, 초나라 장공,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이라는 다섯 패자(霸者)에게 갔는데 천자라는 허울만 뒤집어쓴 채 맞이한 죽음이 붕이든 훙이든 졸이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럼에도 무령왕릉 지석에서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자를 발견한 학계에서는 이 글자 하나로 백제가 민족주체성을 견지한 왕조였노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아직도 이런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373 페이지)

 

자를 보고 호들갑을 떤 사람들에게 고민거리가 있었다. 붕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매지권에서 중국 양나라가 무령왕에게 내린 영동대장군이란 봉작이 그대로 쓰였다는 것이다. 또한 무령왕릉은 구조부터 중국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출토 유물도 중국 수입품이 아주 많다는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답은 주체의식에 불리한 증거는 백제의 진취적인 기상이라 하며 넘어가고 주체의식이 뚜렷해 보이는 것은 과대포장한 것이다. 저자는 무령왕릉은 중국인들이 만든 것임을 강력 주장한다. 저자는 무덤은 결코 보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닌, 한바탕 불고 지나는 유행품일 뿐이라 말한다. 무덤은 입었다 버리는 옷과 같다는 것이다.(411 페이지)

 

저자는 중국식 무덤을 썼다고 중국이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주 개발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언급한다.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기폭제로 삼아 국민정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개조하며 유신(維新)하고자 했다.(449 페이지) 박정희는 경주개발을 통해 정서를 순화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 철두철미 반공으로 무장한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450 페이지)

 

저자는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얼마 전까지도 유일하게 고고학 발굴현장을 직접 찾은 인물이다.(453 페이지) 고고학과 정권의 밀착은 전두환으로 이어졌다. 정권 기반이 박정희보다 더 취약했던 서울 올림픽 공원 조성 지구에 포함된 몽촌토성 발굴을 고리로 고고학계와 연결되었다.

 

"고고학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학문이다. 땅속에서 캐내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고 그 하나하나가 옛 문화의 새로운 면을 부활케 한다. 유물 대부분은 군주시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왕과 관계가 있다. 이런 유물을 통해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구가했을 왕국을 떠올리게 되고 나아가 현세의 독재자 출현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독재자는 흔히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민족주체성, 전통문화 부활을 부르짖은 박정희가 좋은 예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454 페이지)

 

절묘한 말이다. 김윈용은 유적 발굴에 고도의 정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았다. 저자는 무령왕릉을 땅 속에서 파내는 민족주체성의 뿌리로 정의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저자의 노고가 돋보인다는 말부터 무령왕릉을 둘러싼 고고학과 정권의 공생, 역사에 대한 숙고 등등....

 

나는 물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독재정권이 고고학과 유물 등을 이용해 국민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경주 개발과 같은 선물이 주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국민의 무의식적 동화 또는 갈망을 이야기했기에 대응논리가 미비하지만 요즘 국민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적 술수를 헤아릴 줄 알지 않을지 란 말을 하고 싶다. 저자로부터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개발과 관련해 삼불 김원용 선생이 공과 별개로 무령왕릉 졸속 발굴은 물론 실증사학, 친일사학 등의 혐의를 지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균형 있게 보아야 할 것이다. 

m******1 2017.05.0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무령왕릉, 그 45년 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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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그 45년 만의 진실역사에 관심 갖고 책읽기를 하던 중 만난 오래된 한권의 책이 여전히 내 책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 땅에서 태어나 백제의 숨결을 이어받고자 했던 한 사람에게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왔던 책이다. 바로 당시 연합통신 기자 김태식의 '풍납토성 500년 역사를 깨우다'(2000, 김영사)가 그 책이다. 문화재와 발굴과 관련된 긴박성과 문화재를 대하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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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45년 만의 진실

역사에 관심 갖고 책읽기를 하던 중 만난 오래된 한권의 책이 여전히 내 책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 땅에서 태어나 백제의 숨결을 이어받고자 했던 한 사람에게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왔던 책이다. 바로 당시 연합통신 기자 김태식의 '풍납토성 500년 역사를 깨우다'(2000, 김영사)가 그 책이다. 문화재와 발굴과 관련된 긴박성과 문화재를 대하는 기자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책으로 백제역사에 대한 관심을 한층 높여주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후 다시 그 기자를 그의 책 '직설 무령왕릉'으로 다시 만난다. 내겐 풍납토성 관련 그 책으로 인해 기자로 각인되었기에 여전히 기자로 남아있다. 처음엔 몰랐다. 저자 김태식이 그때의 그 기자라는 사실을. 책이 발간되며 이를 먼저 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고 나서야 동일 인물임을 확인하고 이 책이 전해줄 이야기에 호기심이 한층 더해졌다.

 

직설 무령왕릉'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무령왕릉 발굴 전후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19717, 무령왕릉으로 밝혀진 발굴이 하룻밤 사이에 수천여 점의 보물들 거둬들인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이며 그러한 문제는 왜 일어났을까? 발굴한지 45년 그 사이 문화재 전문기자의 눈에 비친 무령왕릉 발굴 당시의 학계, 정계 등 다양한 역학관계를 살펴 문제의 근본으로 추적해 들어간다.

 

먼저, 무령왕릉 발굴 전후의 사정을 살핀다. 이는 일제하 문화재 발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백제 권역의 문화재에 관련된 인물들을 살피면서 시작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을 살펴 무령왕릉 발굴의 전후 과정을 따라가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발굴 당시의 사정을 밝혀 문제점의 출발이 어디에 있었는지 밝히고 있다. 이는 문화재 발굴의 기본지침에도 어긋난 일이 일어나 시대적 한계이면서 동시에 발굴과정에 참여한 관련자들의 사명감의 부재로까지 읽혀지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발굴된 무령왕릉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무령왕릉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이다. 이는 무령왕릉임을 명시한 돌판에 세겨진 글로부터 추적할 수 있는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뿐만 아니라 무령왕릉을 중심에 두고 중국, 일본 등과의 밀접했던 국제관계를 살펴 무령왕의 실체에 접근한다. 이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편에서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언론인으로 17년간 문화재·학술 전문기자로 일한 저자 김태식은 무령왕릉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쓴 흔적이 책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발굴당시 발굴단과 정부 관계자, 언론 보도, 관계자들의 증언 등을 비교 분석하면서 무령왕릉의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역사적 관점과 기자의 눈으로 시원하게 밝히고 있다.

m*****8 2016.05.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