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괴델의 불완정성에 대한 핵심문장이다. 진실인데,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괴델은 플라톤주의자이자 실재로서 우리의 경험 넘어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실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그냥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진실의 실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하게 실재하는 진리의 영역을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괴델의 이런한 노력이 더욱 처절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수학적 실재론자였던 괴델의 이상은 당시의 사상적 흐름이었던 논리실증주의와 정반대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괴델이 대학시절을 보냈던 1920년대의 빈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빈은 문화, 예술, 철학, 과학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활발히 교류하며 구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 했던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중에서도 비트겐 슈타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빈 서클은 과학과 철학의 선두그룹이라 할 한 했는데, 이들은 인간이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 진실을 모두 배격하는 논리 실증주의을 표방했다. 괴델은 이 빈써클의 멤버로써, 플라톤주의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춘 채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침묵의 반대자였다. 모든 진실은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어야 하며, 직관에 의한 선험적 명제들을 몰아내고자 했던 당대의 시도가 수학적 영역에 반영된 것이 형식주의였다. 수학은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공리로부터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진리를 도출해낸다. 공리도 참이고 추론에 모순이 없다면 결론도 참이다. 그런데 최초의 공리가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직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형식주의자들은 모든 직관을 배제한다. 모든 의미있는 서술을 모두 제거해버리면, 무의미한 기호들과 무의미한 기호들의 관계에 관한 형식체계만 남는다. 그들은 모든 선험적 직관을 배재하고 오직 논리적인 추론으로써 진실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1930년 10월 '엄밀한 과학의 인식론"에 관한 쾨니히스베르크 학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한마디로 형식체계 안에서 진실이긴 한데 진실임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괴델의 제1불완전성정리이다. 형식주의자들에게 이것은 모순이다. 이들에게 모든 진실은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증명될 수 없다면 진실이 아니다. 그것이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괴델은 "형식체계'안에서 증명될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이것은 수학에서의 직관을 일소하려는 형식주의자의 꿈이 애초에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괴델은 제1불완정성정리에서 나아가 "산술을 포함한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형식체계 안에서는 증명불능"임을 추론했다. 이것이 괴델의 제2불완전성정리이다. 이것은 형식체계가 증명불능한 모순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괴델 자신도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을 확신했다. 다만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형식체계 바깥의, 형식화될 수 없는 직관에 의지해야만 한다. 그날 괴델의 발표에 대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괴델의 발표가 가진 함의를 유일하게 알아차린 사람은 유명한 형식주의자였던 폰 노이만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직관을 배체하고 객관적인 논리만으로 진리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형식주의자들은 뼈아프게 패배했다. 괴델은 자신의 불완전성정리를 통해 어떤 수학적 진리들은 형식체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형식적 체계화를 반드시 빠져나가는 수학적 실체가 존재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선험적인 직관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수학적 직관은 제거되지도 형식화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직관은 무엇일까? 이것은 인간의 고유능력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직관을 얻는가? 우리는 어떻게 직관을 활용하는가? 우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부터, 인간은 형식체계의 지식을 초월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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