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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나에게 이 책은 한없는 부끄러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작가들을 만나고, 전시를 감상하고, 그에 대한 느낌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그 무언가를 일깨워준 이 책은 소중하면서도, 그만큼 야속한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내게도 미술이라는, 야릇한 대상을 향해 애정 지수를 높이던 때가 있었다. 작품을 보는 게 마냥 좋았다.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를 만나는 날은 오래 전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설레였다. 어쩌다 해외 출장길에 이름난 미술관을 찾을 때면 그 전날 밤부터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눈물은커녕, 그 흔한 감동이라는 단어조차 인색한 나에게 미술이란 밥벌이의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진, 삶의 찌꺼기로 가득찬 내 눈과 마음이 '정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라는 책의 제목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내겐 희망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편해진다.
사춘기 시절 이름 모를 소녀를 향해 조심스레 적어내려가던 황동규 시인의 시처럼, 내 다시 그림을 사랑하고 싶다. 내가 그림을 생각함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지라도 그 사소함으로 그림을 불러 보는 내 모습을 회복하고 싶다. 또 아는가.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내 뺨에 흘러내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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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실제 이 책 속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그림 앞에서 황홀경에 가까운 경험을 하며 눈물을 흘린 경험담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이는 한번도 울어보지 못한 미술사학자이다.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신선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림을 보고 울어본적이 있는 사람들의 편지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왜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지,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대체 왜 그런지 그 이유에 대해서 밝혀준다.
나 역시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쉽게 눈물을 흘려 본적이 있지만 그림이라는 작품 앞에서는 그만큼 빠져 본적도 울어 본적도 없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도 어릴 적부터 줄곧 내방 벽에 걸려있던 그 그림이 인상적이었던 추억이 있다. 갈색배경에 다양한 형태들의 물방울들이 질서 없이 흩뿌려진 그림이었다. 내 방에 언제나처럼 걸려 있는 그 그림을 보면서 여러 번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나만의 공간이 있었고, 시간을 낼 마음만 있다면 시간도 언제든지 낼 수 있었다.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저 물방울들을 그렸을까? 이 그림은 왜 내 마음을 이토록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찬찬히 보고 있으면 같은 듯 달라 보이는 이 물방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빠져있었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이 책 속에 작가에게 편지를 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눈물이 말라버린 상아탑이라는 말처럼 그림을 그림 자체가 아닌 그 안의 수많은 정보들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과 나의 1대 1의 만남이 아닌 내가 쌓는 지식의 일종이고 정보의 일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보다는 전시회의 판플랫에 집중했었고, 그림 앞에 쓰여진 안내판을 더 사랑했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림이란 건 내가 배워야 할 교양의 일부가 아니라 순수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 친구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 대한 정보만으로 그와 친구가 될 수 없듯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고 진실되게 만나는 것이 진정으로 그림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이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그림을 보고, 가능하다면 감동까지 받는 법”이라는 부분을 보면서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감동을 받는 방법이었다. 결국 눈물이라는 건 아주 개인적인 부분이고 전문가 입장에서 알려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감동받는 방법이었다. 그 내용들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마디로 나와 그림에 집중하라는 이야기였다.
[어떤 그림이 당신을 끌어당긴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아무리 기이하다 해도 무슨 생각이든 자신에게 허용하라. 그림이 제 뜻대로 작용하도록 두라. 원한다면 그림에 대해 공상을 해도 좋다. 당신의 생각들을 그림에 투사하라. 그림이 당신에게 최면을 걸게 하라. 그것만이 한 점의 그림을 진정으로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적절한 것 혹은 진실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그 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 ]
글 속에서 한없이 감수성을 발휘하다가도, 눈물이 말라버린 상아탑이라고 미술사학자들을 꾸짖는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쉽게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었지만 한 부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었다. 빨리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만 많은 생각들을 일으켜서 순식간에 읽어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앞으로 나올 그의 책들이 더욱더 기대가 된다.
아마도 우는 것, 또는 갑작스런 충격을 받는 것 자체가 회화라는 기상 체계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불안정함을 느끼고 그림이 당신의 생각을 밀거나 잡아당긴다고 느끼는 것은 바람을 느끼는 것과 같은 거이다. 또 당신이 울기 시작한다면 구름들이 마침내 부서지고 비가 쏟아지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벼락을 맞은 것과 같다. 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번개를 맞는 것은 더욱더 드문 일이다. 그러나 비와 바람과 천둥과 번개는 회화라는 거대한 기후 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눈물은 느닷없이, 그림의 의미와 전혀 무관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폭풍우의 중심에서 오는 것이다. P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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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목이 마르다. 문학과 그림과 음악에 몹시 목이 마르다. 나이 40에 이제서야 지금까지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일말의 지식이나 식견없이 그저 건성으로 대해왔었다. 요즘 돌아가는 사회 세태에 '배부른 소리하는구나'라는 타박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내 밥벌이를 위한 지식의 축척말고 지금까지 인류가 이뤄낸 아름다운 예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나의 메마른 소소한 일상에 단비같은 내용이었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흘리는 눈물은 당연하다 생각했으나 이 책은 제목부터 의외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흘리는 눈물이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부드러워지고, 포용하게 하고, 너그러워지고, 생각하게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남도 나와 같다 여기게 되고, 감사할 줄 알게되고,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그림으로 인해, 음악, 예술로 인해 사회적 악덕들이 순화되지 않을까? 연습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연습. 난 남자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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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몇달전에 신경숙 작가님의 추천작품으로 소개되어있는 걸 보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그림을 보고 감정이 동요되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일이 상상이 잘 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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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눈물
묻고있다 - 이 책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묻고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적이 있냐고.. 내 대답은 아니요- 였다 그리고 순간 떠오르는게 있었다
바로 플란다스의 개 그곳의 작은 꼬마아이 네로는 그림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아니 울었는지도 모른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그림은 바로 루벤스의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였다 참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이고 슬픈 장면이다 그 마지막 장면은..
어린시절부터 그림은 내게 신성한 것으로 다가왔다 책에서 그림을 보면서 한번만 실제로 보았으면 싶은적이 많았다 나이가 먹고 작품전시회에 많이 다니면서 실제로 보면서 나는 그림 앞에서 감동을 하기보다는 대부분 실망했다 작품은 내가 상상했던것보다 웅장하지 않았다
미술책에 한쪽 구탱이에 실린 작은 그림을 보고는 그토록 감동했던 내가 실제로 큰 그림을 앞에 두고는 감동하지 않았던것이다 그것은 나이탓일수도 있고 미술관의 분위기 탓일수도 있고 어쩌면 내 감정이 메말라버렸기 때문일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림과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 책 제목에서 말하는 눈물이란.. 진짜 눈물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그만큼의 감동 즉...작품과의 교감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는동안 감정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에 대해서 모든것들과 교감하고 때로는 조금 감정적일지라도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우리는 흔히 이성적인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감정을 표출하는것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성인도 적절하게 감정을 표출할줄 알아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질수 있다 눈물의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바로 지금 나의모습일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의 모습일수도 있다 사람을 감싸고 풍요롭게 만들고 따뜻한 기운을 북돋아 주는 책을 오랜만에 만난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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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의 이름처럼 눈물을 주제로 한다. 눈물!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어뜻 보면 굉장히 심오하고 가치있는 일이 울음인 것 처럼 느껴진다. 보통, 그림을 깊이 이해하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울 줄 알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엘킨스는 결론적으로 눈물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제임스 엘킨스가 그림의 감상적 접근에 대하여 지지를 하는 것이 다른 학자들에겐 그렇게 달가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림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을 피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보고 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심지어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그들의 입장이 십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림은 화가의 감상으로만 가득찬 존재물이 아니다. 오히려 꾸준한 색채와 화법의 발전을 위해 화가들은 과학자 못지 않은 노력을 했다. 또 그들이 살던 시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독립기사처럼 용감한 그림을 그려서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분석하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적으로 본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운다는 것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그림에 대입시켜 투사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감정에만 충실하게 되고 정작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림의 실재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술학자들은 눈물이라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보통 존중하지 않는다. 심지어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이며, 잘 우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술사 교과서를 읽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그림을 보면서 운다. 그들이 한 가지 작품을 보고 꼭 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꼭 유명한 작품일 리도 없다. 오히려 유명한 작품을 접했을 때에는 전혀 울음이 안 나올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너무나 흔하게 접했던 그림이기 때문이다. 전혀 처음 보는 그림을, 전혀 색다른 상황에서 (어두컴컴한 미술관이라든지, 한 점만이 걸린 전시회라든지, 또는 쇼팽의 음악이 나오는... 그런 복합적인 상황) 보았을 때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단지 색깔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비추어 보며 울기도 한다. 어떤 이는 푸른 잎을 보면서 울고, 외로운 산에 오르는 이를 보면서 울고, 종교화를 보면서 운다. 이들의 눈물에 이유를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그림을 보아도 다른 이유로 울기 때문이다. 외로운 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반추할 수도 있지만, 산에 오르는 노고를 생각하면서 외로운 등을 보며 몸이 불편한 부모님을 생각하며 울 수도 있다. 혼자 산에 올랐고 이제는 내려가야 할 인생의 시기를 보내면서 결국 혼자 그 산을 내려와야 되는 허무함 때문에 울 수도 있다. 이렇게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나도 그림을 볼 때에는 좀 더 과학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림이 그려진 배경이나, 작가의 실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 처럼 그림을 읽는 것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보다 보면 답답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큐레이터라는 직업도 생겨난 것일 테니까. 하지만 작가는 울음 또한 중요하다고 한다. 한 그림 앞에서 수 시간 동안 그 그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적어도 그런 감정의 표현을 억제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수시간 동안 그림을 보고, 그림을 이해하고, 그림을 통해 감동을 얻고 그림을 보고 울음이 났던 경험... 그것은 미술사학 적으로는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굉장히 가슴에 남는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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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에 가면, 그림에 대한 감동을 얻기 위한 그림 감상법이 저마다 특유의 기법으로 그림을 대한다. 흔히, 그림을 대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전시된 그림과의 눈높이를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살펴보는 방법을 많이 권한다. 그렇게 하면 제대로 그림의 전면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그림에 대한 감동이 제대로 느껴질까? 감동이 눈물로 맺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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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앞에서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나한테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이 메말랐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읽고나면 말라비틀어진 가슴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진 않을까 싶었다. [그림과 눈물]은 그림 앞에서 울어보거나 그림 에게 모든 혼을 빼앗겨 넋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경험담을 묶어놓은 책이다. 나는 사실 그림을 보고 울어본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많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림을 몇번 보지는 못해봤지만, (대개 책을 통해서였다.) 단 한번도 어떤 감흥이나 설레임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그림으로 인한 충격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그림이 주는 어떠한 감정에 의해 눈물을 흘리고 멍을 때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그림의 색채감에 우리의 눈은 눈물이라는 것을 흘려보내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왜 이 그림이 그런 느낌을 준다는 것일까? 어떻게 같은 그림을 두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이리도 다른 것일까? 를 생각해 봤지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내 자신 스스로 설명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자 어쩌면 [그림과 눈물]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도 나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다 우연히 보게 된 고흐의 자화상. 그동안은 별 느낌없이 지나쳐가던 이 그림엽서 한장이 나를 한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무릎을 끓고 내가 이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때는 그냥 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것 같은 허무감과 무기력함만을 느낄수 있었다. 저 노랗게 칠해진 색깔들이 마치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나 자신을 혼란의 숲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닐까. 고흐는 나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등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겁도 나고 감당이 되지 않았다. 저자나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게 이런것이었을까. 그림을 통해 알수 없는 감정들을 느껴보고, 문화적 폭을 넓히라는 ...........? 그림을 보면서 생동감이나 화가의 의중을 읽고 느끼기에는 난 참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나도 아는 나의 이런 맹맹함이 어느날 문득 깨져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했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생겨 이런일이 생긴 것일까 라는 의아함도 들었다. 요즘은 미술과 관련된 책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다. 클림트, 고흐등의 화가들에 쏟아지는 화려한 관심들이 책과 전시회, 길가의 여러 포스트들에서 느껴지듯이 그림과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묻혀져버린 우리의 일상이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상들을 얼마나 느끼고 살고 있는 것일까. 무심코 지나쳐버리고, 그냥 하나의 눈요깃거리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림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관람객이나, 그림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는 대신 나도 함께 그 그림 앞에 서서 그 느낌을 공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본다. 너무 메말라서 아직은 촉촉해지지 못했지만, 그림을 통해 언젠가는 촉촉한 감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로 고흐의 자화상을 다시 한번 감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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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영된 KBS 2TV ‘KBS 전국민 합창 대축제 더 하모니’에 출전한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이 결선무대에서 김태원씨가 작곡한 ‘사랑이란 이름을 더하여’를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이 차오르는 경험은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도 드물지 않은 편입니다.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리크 바우츠의 1460년작 “울고 있는 마돈나”를 담은 표지를 열면 모두 7개의 미술작품을 담은 원색도판을 실었습니다.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작품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울고 있는 마돈나”는 저도 혹시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을 보고 운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등 애매한 이유로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도 한다는데,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이 181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에 걸려 있는 귀도 레니(Reni)의 ‘베아트리체 첸치’ 그림을 감상하면서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어놓은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즉 19세기에는 그림을 보면서 발작적인 반응, 혹은 격앙된 눈물의 홍수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1989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정신과 과장 그라지엘라 마게리니가 이런 환자들이 보이는 다양한 증상을 묶어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병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스탕달 신드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마크 트웨인 질환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고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림의 음침한 잔래”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눈물이 앞을 가려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다빈치는 <파라고네>에 “화가는 감동으로 웃게 하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지는 않는다. 눈물은 웃음보다 감정을 훨씬 더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171쪽)“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사사한 빌 비올라는 “예술가는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라면서 눈물을 주제로 다룬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고대 그리스로부터 기독교가 유럽에 뿌리를 내리면서 울음과 눈물은 예술작품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수난을 슬퍼하고, 개인의 회개와 구원을 청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회개의 눈물은 기쁨과 슬픔, 욕망과 후회, 참회와 헌신과 사랑과 희망이 뒤섞인 씁쓸하고도 달콤한 홍수이다.(257쪽)”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사조는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가 17-18세기에 다시 귀환하였다고 합니다. 안 뱅상 뷔포는 <눈물의 역사; http://blog.yes24.com/document/2667610>를 통하여 18-19세기의 프랑스 문화사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눈물이란 열쇠글로 18~19세기 프랑스 문화사를 살핀 매우 독특한 책. 우리의 가장 은밀한 태도들 가운데 하나인 이 눈물을 역사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감동의 형태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섬세하거나 혹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는 사실을 성찰한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우리의 눈물없음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20세기 회화는 건조한 접근법이 썩 잘 맞는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조(思潮)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이 화려한 모습으로 귀환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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