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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황금사과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황금이 불사불멸의 물질을 뜻한다면 사과는 에덴의 하와가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기 보다는 선악과(지식)를 선택한 것처럼 지식, 즉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사불멸의 지식은 다다를 수 없는 꿈이자, 헛된 욕망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황금사과의 참된 의미는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불사불멸의 꿈이자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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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화자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도서관에서의 하룻밤 이야기이다. 마감 전 들어간 도서관이 화자만을 남겨두고 모두 집에 돌아가게 되자 출구를 찾기 위해 헤맨 고(古)문헌실에서 우연히 프란체스코 회의 윌리엄 수도사가 남긴 독특한 이름의 서책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괴물 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면서 소설은 과거 페쇄 된 사회 인 중세시대로 순간이동 한다. ‘영원의 도시’라는 영예롭고 고귀한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이단의 온상’인 베르송. 때는 교황과 프랑스 왕과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로서, 지리상 여건으로 인하여 프랑스 안의 이탈리아였던 베르송은 프랑스의 뜨거운 감자이다. 교황과 황제 사이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소리없는 전장터인 베르송의 베네딕트 수도원. 그곳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 윌리엄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가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에서 교황의 절대 권력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수도사였던 윌리엄 수도사는 <황금 사과>에서도 정의로운, 신앙심 깊고 아직 어떠한 욕망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다. 반면, 지나치게 지식을 맹신하고 있는 제롬 사제는 장미의 이름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장서관에 억류하였던 호르혜 수도사와 겹쳐진다. 윌리엄은 제롬의 박학다식과 탁월한 논리와 교리를 보며 ‘궁극의 형체를 붙잡을 수 없는 완전한 무無를 지향하고 있는’이라고 표현하는데 마치 호르혜 수도사가 장서관에 맹목적이던 모습처럼 지식천착에 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윌리엄이 도착하였을 때는 피에르 주교가 의문의 죽음을, 그를 수행하던 시종의 실종 , 갑작스러운 페스트의 창궐과 인육파이 사건 등 이미 영원의 도시는 ‘음모와 의혹과 암투’로 점철된 지옥도 地獄道로 변하여 있었다. 오래 전 읽었던 장미의 이름도 마지막 장면이 화염이었다. 소란과 소요 속에서 불타오르던 장서관의 장엄한 불길. 그때 그 불길은 불멸과 지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신의 경고처럼 느껴졌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라는 미명하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인류 역사에 남겨준 진실은 ‘맹목적’인 '무조건적인‘ 믿음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사에서 맹신의 끝은 파멸이다. 맹신은 신을 향한 믿음만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무기가 숨겨져 있다. 황금을 찾기 위해 이교도의 시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는 것조차 신의 뜻이라면 가능했던 것은 폐쇄 된 사회성인 중세 시대 즉, ’신의 시대‘ 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폐쇄 된 사회에서는 욕망 그 자체의 직접성이 잘 드러난다. 영원할 수 없기에 멸하지 않는,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의 덧없음처럼 제롬 수사의 황금사과( 불사불멸의 꿈)역시도 화염과 함께 사라진다.
무지의 천국을 택하느니, 차라리 앎의 지옥을 택하겠노라 ! 당연히 , 이것은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다. 《황금 사과》의 첫 장에 쓰여진 글이다. 책을 다 읽고서 작가가 왜 이런 말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말에서 나는 머리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반전의 반전이라고 할까. 겨우 하룻밤이야기임에도 며칠 밤의 이야기처럼 중세 사회의 종교와 역사등의 다양한 텍스트들에 추리의 묘미까지 더한 방대한 이야기들이 결국 장미의 이름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맥빠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멸의 멍에를 지고 태어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가르키고 있는 경지는 바로 ‘텍스트’ 라는 말이 머리를 스치고 난 뒤에라야 소설을 절반 이해했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텍스트를 읽고 쓰고, 다시 읽고, 다시 쓰고, 하는 것이 인류의 근원적인 힘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멸하는 운명을 가진 인간에게 불멸이란, 결국은 텍스트(이야기)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하여 보여주고 싶어했던 소설가의 염원念願을 담은 소설이 아닐까.
오래 전, 김경욱 작가의 <동화처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황금사과>는 전작의 가벼움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읽혀진다. 움베르토 에코의 그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 텍스트로서의 시도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시간여행의 소설처럼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진실과 허구의 환상적인 텍스트의 시도이며 문학으로서도 새 지평을 열어 주고 있는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장미의 이름만큼이나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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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별명은 소설 쓰는 기계이다. 이 소설 쓰는 기계가 보여주는 텍스트는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단어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조탁되어 있고 문장은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치면 어느샌가 마지막 장을 덮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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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작가 서정인이 제1회 김동리문학상의 수상 소감으로 밝힌 것이다. 서정인은 타락한 시대의 병리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진리와 만나려는 노력이 긴요한데, 문학이 사물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줌으로써 진리에 이를 수 있고 타락한 시대의 병리를 고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문학적 노력들이 점점 예외적 소수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들에 의해 여전히 이런 탐문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유의미하다. ‘소설쓰기’라는 도구를 가지고, 예술을 통해 진실한 세계에 이르는 것은 가능할까? 서정인은 이미 ‘르네상스 탐문 시리즈’로 묶을 수 있는『용병대장』(「사팔뜨기」, 「용병대장」)과 『말뚝』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했다. 연작소설인『용병대장』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로 평화와 풍요 속에서 문화와 예술이 꽃핀 시대로 알려진 르네상스시대를 용병대장들이 활개친 타락하고 추악한 시대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내용은 지문 없이 대사로만 이루어진 대본을 보는 것 같은, 매우 시각적으로 펼쳐지는 텍스트와 맞물려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소설과 예술이 가지는 의미까지도 새삼 돌아보게 만들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익숙한 현실 사회도 성찰하게 만든다.[i] 중세의 탐문, 그리고 『황금 사과』 김경욱의『황금 사과』 의 문제 의식 역시 서정인의 『용병 대장』, 『말뚝』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 작품의 내용이 가진 문제 의식과 형식이 가진 새로움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사회를 성찰하게 하고 우리가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소설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에서『황금 사과』는 ‘질문의 책’이고 ‘성찰적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김연수의 발문에 진 빚이 많다. 김연수가 쓴 발문을 읽은 뒤에야 비로소 작가로서 김경욱이 가진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고, 서문과 후기의 역할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액자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할 때, 액자 틀에 해당하는 서문과 후기가 소설가의 역할이나 소설이나 예술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윌리엄 수사의 수기인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괴물 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의 일부를 필사한 것으로 설정된 2장부터 13장까지의 내용은 중세에 대한 서술이면서 아울러 현실 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데 왜『황금 사과』는『장미의 이름』의 패러디라는 형식을 따온 것일까? 이전의 작품을 패러디하는 글을 쓰는 건 매우 무모한 모험이다. 특히 모델로 삼고 있는 원 텍스트가 완벽에 가까울수록 패러디한 작품은 그 원 텍스트와 비교되어 초라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은 역사소설이고, 정확하게 같은 배경과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인물들을 가지고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김경욱은 새롭게 작품을 창작하는 대신『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하기로 한 것일까 이것은 한 편으로 작가의 지적 욕구에 의한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명징한 증거이기도 하다. 대저 인간이 만들어낸 글이라는 것은, 기호라는 것은, 어떤 실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호를, 선행하는 기호를 소환할 뿐이며, 원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의 서고에나 존재할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더듬고 있는 꼴이었다. (p.318) 즉,『황금 사과』는『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하는 형식을 따올 수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나는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더듬되 태양이 사라지지 않기를, 그림자의 윤곽이 지워지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 따름이었다. 뜻하지 않게 잊혀진 기록의 복원자, 기록에 대한 기록자를 자처하게 된 나는 때로는 기억을 더듬으며, 때로는 내 자신의 상상력이 이끄는 대로, 또 때로는 여러 서적과 자료들을 등대 삼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탈고한 후에는 이것이 과연 윌리엄 수사의 기록인지, 내 자신의 창작물인지, 참고서적과 자료를 재료료 한 가공물인지 나 자신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순수한 연대기적 기록물이면서 창작물이면서 가공물이었다.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었다. 당연히,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였다. (pp.318-319) 그러니까 ‘서문’과 ‘후기’의 1인칭 시점은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기도 하다. 글이라는 것은 이미 선행하는 기호를 소환할 뿐 그 어떠한 것도 원본이 될 수 없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연대기적 기록물이면서 창작물이면서 가공물이기도 한,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천재지변과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역경의 중세를 겪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 중 일부는 1000년간 오지 않았던 세상의 종말이 1500년에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세상은 심판이 반드시 도래해야만 할 만큼 죄악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섭고 추악한 곳이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모두 어리석고 악한 죄인들이다. 교황과 국왕(의 충복들)은 서로 상대가 적그리스도라 헐뜯으며 의로움보다는 이로움을 좇고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사특한 것인지 오리무중이다. 종종 형상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기도 한다. 온갖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유언비어들이 우물에 푼 독처럼 퍼져나갈 따름이라 개인들은 그로 인한 공포를 타인에 대한 막연한 분노로 해소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마녀된 자가 있어 마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녀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 마녀가 존재하는 것”(p.190)이다. 인간은 그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 유한한 존재 그 자체가 이미 죄악인 것이다. 즉 죄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따라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죄악이 되는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불멸, 그 완전함을 구하는 것일 따름이다.[ii] “황금이라는 것은 일종의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예부터 황금이란 모든 생명이 희구해 마지않는 궁극의 경지, 영원불변을 상징하는 물질이 아니더냐? 마찬가지로 현자의 돌이란 불사불멸의 물질을 의미한다. 내 이미 너에게 이른 것처럼 인간의 모든 죄악은 바로 유한함에서 연유하는 바, 이성이 신앙의 시녀 노릇할 하는 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씌워진 죄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란 요원한 일이다. 앎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무지야말로 모든 죄악의 근본인 것이다. 일찍이 에덴의 하와가 선악과를 취한 것도 앎에 대한 궁극적인 갈구에서 비롯된 것일 터, 무지의 천국을 택하느니 차라리 앎의 지옥을 택하겠노라. (후략)” (p.296)
타락한 시대에 대한 소설과 소설가의 대응 방식
중세를 대표하는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바보들의 배>라는 작품이 있다. 이 그림 속 사람들은 작은 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서로 싸운다. 그 중 어느 한 사람도 돛대 꼭대기와 이어져 있는 숲―지혜의 새인 부엉이가 앉아 있는 숲―으로 갈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인간의 삶에 깃든 불행의 비극적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림 속 중세의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 세계가 주는 상실감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소설은 무엇이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소설쓰기’라는 도구를 가지고, 예술을 통해 진실한 세계에 이르는 것은 가능할까? 제롬 사제가 윌리엄 수사에게 말한 것처럼 인생의 오묘함이나 허망함은 마치 양파와 같다. 껍질이면서 알맹이고 알맹이면서 껍질인 양파를 벗기고 벗기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생의 비밀도 이와 같아서 한 꺼풀씩 벗겨나가다보면 궁극에는 텅 빔, 절대 무만 오롯이 남는다. 사멸의 멍에를 지고 태어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란 고작 거기까지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 눈시울을 붉히며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 뼈아프게 확인하는 것.[iii] 그러나 이런 인간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죄악이 되는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불멸, 그 완전함을 구하는 것이므로 소설가는 무지의 천국 대신 앎의 지옥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락한 시대에 대한 소설과 소설가의 대응 방식이다. [i] 서정인의『용병대장』과『말뚝』에 대한 논의 중 일부는 우찬제의 '르네상스의 진실 혹은 진실의 르네상스: 서정인의 『말뚝』 읽기'에서 인용하였다. 어떤 부분은 변용하기도 했음을 밝힌다. [ii] 『황금사과』p.265 참조. [iii] 『황금사과』p.150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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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읽으려고 사무실에 두고 다니는 책 『황금사과(2002.5.21. 문학동네)』를 본 동료가 “그 책 재미있어요?”라고 묻기에, ‘김경욱’이란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는 말과 함께 이번에 출간된 신작 <야구란 무엇인가(2013.7.16. 문학동네)>라는 제목의 소설이 궁금해서 책의 구입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의 전작을 먼저 읽는 탐색의 시간을 갖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동료는 제목보다는 작가를 먼저 확인하고 읽을 책을 선택하는 나와는 다르게 책 제목만으로 읽을지 말지를 선택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각자의 책과 관련된 취향에 대한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앞으로 작가 김경욱의 작품과 마주할 때면 동료와의 즐거웠던 대화가 떠올라 마음이 푸근해 질 것만 같다.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괴물 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이란 기이하고 야릇한 제목을 가진 책의 발견은 아주 우연히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소설 『황금사과』는 시작한다. 프란체스코 회의 수도사 윌리엄의 수기라고 밝힌 이 기록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프랑스 왕 필립 4세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윌리엄 수사 선친의 죽마고우였던 베르송 주교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에 윌리엄은 베르송으로 가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다. 그리고 성문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요상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게다가 베르송 교회에 도착한 윌리엄은 요리 담당 제롬 사제와 레이몽 부주교를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즉, 피에르 주교로부터 뭔가 듣거나 건네받은 물건이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상하고 의문스런 일의 연속이었다. 베르송 교회에서 윌리엄은 피에르 주교의 거짓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피에르 주교의 죽음을 확인한 의사와 시종이 실종된 사건, 파이를 만들어 파는 가게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그들이 이단 재판을 거쳐 화형 당한 일, 피에르 주교로부터 받은 서찰을 도둑맞은 일 등 이해하지 못할 여러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윌리엄이 베르송 교회에서 발생한 일련의 상황들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듯이, 나 역시 어떤 일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또 누가, 무엇을 위해 그런 일들을 꾸몄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 『황금사과』는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한 소설이다. 책의 말미에 [장미의 이름]과 『황금사과』를 비교, 분석한 글을 보면 상당히 유사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나는 [장미의 이름]과의 닮은 점을 찾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장미의 이름]은 어릴 적 보았던 영화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편적인 영상으로. 그래서 지금 읽은 『황금사과』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싶다. 연기처럼 사라진 제롬 사제가 영원불변, 불사불멸의 꿈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불에 타 재로 변해 버린 ‘버스커빌 출신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윌리엄이 기록한 수기’는 영원히 이야기로 살아남았으니 불멸의 꿈, 불사의 영원은 이야기가 차지한 샘인가!! 우연으로 시작해 우연으로 끝난 이야기이지만 영원히 살아남은 건 그 누구도 아닌 이야기라는 사실에 경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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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커뮤니티던간에 세력이 확장되면 권력이 붙게 된다. 그 권력은 선한 의미로 쓰여질 때보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특히 종교 세력은 더욱 특이한 양상을 지닌다. 그 종교에 귀이해있는 영혼들까지 세력의 도구가 되고 만다.
2.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이 펼쳐졌던 중세기는 더욱 그러한 기록이 많다. 1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그때까지 위력을 발휘했던 중세적 질서가 일시에 전환하는 시기였다. 가톨릭 교회가 점령하고 있었던 지위는 대단했다. 로마는 실제 공간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원천이나 마찬가지였다. 종교의 세력이 강력해질 수록 그 병폐가 심각해진다.
3. 주인공인 나는 전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저 어딘가로 잠적해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오직 소리없이 사라지고 싶은 마음만 지닌 채 제대로 먹지도 못한 빈속을 움켜쥐고 도서관을 향한다. 그런데, 공교롭게 서고속의 서고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양피지 고책을 만난다. 소설은 그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1298년 부터 서술되고 있다.
4.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괴물 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이 텍스트의 제목이다. 뒷부분이 유실된채 앞부분만 남아 있는 그 책은 한 수도사가 페스트가 서유럽에 창궐하던 그 시기에 혼신을 다해 기록한 책으로 설명된다.
5. 수도사 윌리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이자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던 피에르 주교가 갑자기 운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길을 떠난다. 그곳에 도착한 후 막연히 염려했던 의혹과 불안이 분초를 다투며 전개된다. 세속의 세력과 교회의 세력이 부딪치는 현장이다. 양쪽은 전혀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6. 이어지는 사건 속에서 종교가 근본적으로 지닌 평안과 축복이 아닌, 권모술수와 암투만이 표현될뿐이다. 윌리엄이 도착한 성당에서 만난 제롬 사제는 신비로우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로 윌리엄을 보살펴주고 있다. 그는 감추고 있으나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느낀다. 그가 윌리엄에게 달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깨진 달걀을 놓고 설명한다. "알을 품고 있던 저 껍질은 이 우주의 창공, 즉 공기이다. 그 껍질의 흰색은 만물의 어머니, 대지를 의미한다. 즉 흙이다. 깨진 알에서 흘러내린 묽은 저 액체는 물이다. 그리고 노른자는 불이다."
7. 작가 김경욱은 이 소설이 '당연히, 이것은 작품(work)이 아니라 텍스트(text)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텍스트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중세 그 암흑기에 전개되었던 종교와 세속 세력의 알력과 오랫동안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어떤 의식을 표현하고 싶었을것이라고 생각든다.
8. 저자는 후기에 이런 말을 적고 있다. "세상은 일종이 거대한 책, 혹은 텍스트다. 텍스트를 읽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사람도 있을 테고, 책갈피에 코를 박는 사람도 있을 테고,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란 무엇이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 그리하여 질문은 또다른 질문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다른 텍스트를 향해 빠끔히 열려 있는 저 텍스트의 운명처럼." 그 텍스트의 세계에서 또 다른 향을 느낀다. 작가의 치밀하게 파고드는 작가 정신을 엿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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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을 끝냈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어쩌면 나는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계속 생각하며 누워 있기 보단 뭐라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꽂이 앞을 서성여본다. 그리고 <황금 사과>를 발견했다.
언젠가 <위험한 독서> 낭독회에 갔다가 탐이 나서 덜컥 사버린 책. 그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이 소설의 내용이 내가 광팬임을 만방에 알리고 다니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파생해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일지 너무 궁금해서 그 자리에서 사서 싸인 받고 고이 모셔두었더랬지.
이후 나는 여행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바로 떠났으니 이 책은 책꽂이에 꽂힌 채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겠지?(다른 아주 좀 많은 책들과 함께) 조금만 읽어야지(시차 적응 중) 생각하며 책꽂이에서 힘을 주어 녀석을 뽑아내고 독서등만을 켜고 침대에 누운 채 책장을 펼쳤다.
그리곤 아이 난 몰라. 단숨에 반 정도를 읽고 다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다음 날 있을 강원도 여행 때문에 겨우 책장을 덮고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눈 뜨자마자, 차에 타서 강원도 양양의 유명하다는 송이 전문 레스토랑까지 가는 길을 나는 이 책과 함께했다. 창밖의 절경을 감상하느라, 책 내용에 빠져 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정말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장미의 이름>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하나의 거대한 사건에 대한 회고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란 정말 흥미진진. 사실은 약간 예측 가능한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또 그런 조금은 예측 가능한 내용도 있어주어야 읽는 독자로서는 자긍심도 생기는 법! (그것이 신파와 성공신화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먹히는 이유 중에 하나다)
한국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외국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드는... 그리고 혹시 움베르토 에코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꽤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종교와 연금술과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각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암투,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활약...그야말로 매력적인 역사적인 배경까지....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이 재미있는 책이었음을 단언할 수 있다.
(솔직히 여행 내내 한글로 된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에 목이 말랐던지라 돌아오자마자 몇 권의 책을 기웃거려보았으나 나를 사로잡을만큼 매력적인 텍스트를 만나지 못하다가 이 책을 만났음을 고백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이라면 이건 이미 필독서이고 혹시 몇 번이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이라면 한 번 <황금 사과>부터 읽어본 뒤에 <장미의 이름>을 시도해볼 것을 권하는 바이다.
꺄오!! 역시 한글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야. 해피해피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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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다리: 책 다 읽자마자 먹었던 송이버섯전골.....그 역시 초대박의 맛이었다. 양양으로 가시는 분들 반드시 송이골에서 송이버섯 요리 잡숴보시길. |
| 당연히 장미의 이름 패러디라는 말을 듣고,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때의 기분과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아니면 에코의 작가적 역량이 너무 뛰어났던 것일까. 생각보다는 실망스웠다. 물론 주인공 윌리엄이 장미의 이름에 등작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만 빌린 독립적인 이야기인듯 하다. 황금사과라는 책 자체로 읽으면 재미있을법한 이야기이지만 장미의 이름과 비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차라리 장미의 이름 패러디라는 광고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듯하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광고 때문에 이 책을 읽었겠지만. 하지만 단순히 황금사과 자체의 이야기를 읽을 때도 의문점이 많이 들었다. 왜 제롬 사제는 자신의 연구실을 파괴했으며, 발렌티노는 교황청에, 연금술에 심취했었던 피에르 주교의 파문을 요청했는데, 파문의 대상이 제롬사제가 아닌 피에르 주교라는 것과 그렇다면 서찰속의 명단이 '자유영혼의 형제단'이나 '성전 기사단'이 아니고 단순히 '메르쿠리우스'라는 연금술사의 이름이었던 것인지... 정말로 애매하게 끝났다. 여러가지 궁금증과 의문만 남긴채. 또한 사순절 기간에 인육으로 파이를 만든 이들이 어째서,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도 좀더 자세하게 설명했으면 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책은, 일은 너무 크게 벌려놓고 마무리는 어설픈 것 같다. |
|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했다는 책소개에 호기심을 가지고 보았다. 대학교 재학시절 장미의 이름을 읽고 느꼈던 소설적 재미와 지적 충만감을 다시한 번 느끼고 싶어서...그런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마도 저자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만연히 어려운 배경지식을 열거하여 혼란스럽게 하고, 너무 많이 벌려놓고 나중에 수습하지 못하는 추리소설의 형식, 그리고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 무협소설적인 감탄사.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책을 잡은 순간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나가게 하는 재미는 있다는 것이다. 원래 추리소설의 형식을 띤 어설픈 작품들은 그러하지 않은가 읽어나갈때는 굉장히 재미있지만 모두 읽고나면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이것은 패러디도 아니고 단순한 모방에 불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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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것은 작품(work)이 아니라 텍스트(text)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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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카피하려 했다고 말하는 작가는 자신의 시선을 중세로 돌려 놓고 있다. 프랑스 어느 지방의 대주교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수도사 윌리엄이라는 에코식의 내러티브를 가져와 자기 나름의 소스를 뿌린 형태. 물론 장미의 이름이 의심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지적 추리물이라면 작가의 그것은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신 나름대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이에 따라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당대의 실존인물을 내세워, 철학 대 신앙, 진보 대 보수, 이단 대 정통, 교권 대 속권, 인간이성 대 신성이라는, 해묵었다고 하면 해묵은 아직 의미가 있다고 하면 또 의미가 있는 주제를 건들고 있다. 소설은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수학중인 한국 유학생이다.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날, 이방인과 같은 존재인 나는(아마도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인 윌리엄이 떠돌이 수도사로서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하는)도서관에 들렀다가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물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그리고 소설은 바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라고 너스레를 떤다.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 윌리엄은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베르송의 대주교 피에르 사제로부터 기별을 받고 베르송으로 향하던 중 피에르 사제의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들르게 된 베르송에서 그는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교구에 들르자 먼저 이상한 소문이 횡행한다. 피에르 사제가 죽은 후 그의 시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몬테나 추기경 일행과 베르송의 영주가 새로운 주교 선출을 놓고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 와중에 윌리엄은 요리사를 겸하고 있는 제롬 사제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점점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이용된 독초나 인육을 이용한 파이, 페스트와 화형식 등 다양한 소재들이 사건과 얽히고 설키며 독자를 유혹한다.
결국 약간은 해결되고 나머지는 미결로 남겨 놓은 액자 소설의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유학생인 나는 길을 찾지 못해 이 귀한 책에 불을 붙이고, 책이 모두 불타는 시점에서 도서관을 나서는 길을 찾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그 책의 내용을 되짚어 적는다. 그리고 이렇게 읇조린다.
"대저 인간이 만들어낸 글이라는 것은, 기호라는 것은, 어떤 실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기호를, 선행하는 기호를 소환할 뿐이며, 원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의 서고에나 존재할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더듬고 있는 꼴이었다."
요컨대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 할만한 나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지금까지의 창작 행위를(움베르토 에코의 카피라는) 옹호함과 동시에 어차피 이러한 행위들이 꽤나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양파란 묘한 것이다. 그 껍질을 벗기고 벗기다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말이다. 껍질이면서 알맹이고 알맹이면서 껍질이다. 그 오묘함이나 허망함이 꼭 생과 같지 않더냐. 생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다보면 궁극에는 텅 빔, 절대 무(無)만 오롯이 남게 되는 법. 사멸의 멍에를 지고 태어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란 고작 거기까지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 눈시울을 붉히며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 뼈아프게 확인하는 것……"
몇 페이지 앞에서 이미 이렇게 밝혔지만 말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이야기이고, 이야기란 것의 원천은 어차피 구전에 의한 것이며 이것을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생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결국 남는 것은 없으며, 그렇게 더듬어가는 과정 또한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더듬는 것에 불과하는 말일터. 이런 의미에서 지금 읽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의 행보가 스스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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