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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은 동경 유학 시절,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모더니즘에 관심을 가진 바 있다. 하지만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한 그는 토속어에 더 큰 애정을 쏟아붓는다. 오산고보를 졸업한 뒤, 휴식을 취하던 1년 동안 그는 신문사의 신년현상공모에 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됨으로써 이미 소설가가 된 바 있었다. 그 후 신문사의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귀국 직후, 신문사 교정부에 입사해 근무하는 동안 백석의 시적 감수성은 고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시 <정주성>을 발표하여 깊은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이후, 스물다섯 살에 시집 <사슴>을 출간함으로써 한국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던진다.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된 이 책은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무렵, 문학청년 윤동주도 시집 <사슴>을 구하려고 애를 쓰다가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슴>을 공책에 베낀 뒤 애지중지하며 외우다시피했다고 한다. 시집 <사슴> 속에 수록된 33편의 시들은 한결같이 못생긴 것, 소외된 것, 그늘진 것, 주변부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시 속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은 곱씹어볼수록 정겹기 짝이 없다. 백석은 구수한 질감의 토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고향 정주에서 사용하던 말들을 우리 현대 시사의 지평 너머로 확산시킨다. 창씨개명,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 금지 등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질곡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조선인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광분한다. 최남선, 이광수 등 친일 문인들이 속출하고, 서정주와 노천명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변절의 대열에 들어설 때, 백석은 거취에 대해 고뇌하다가 만주 신경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만주국 국무원에 취직해 러시아 측량사의 보조로 일을 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그곳을 그만둔 뒤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 힘겹게 살아야 했다. 그는 만주에 있는 동안 <흰 바람벽이 있어>와 같은 빼어난 시를 발표한다. 해방 이후, 그는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 정주로 돌아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답답함과 부자유였다. 그는 머지않아 표현의 자유를 상실했다. 백석이 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밤잠을 자지 않고 번역에 몰두해 숄로호프의 대작 장편 <고요한 돈강>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시 쓰는 일을 포기한 뒤 동시 쓰는 일, 동화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남 몰래 창작열을 불태우며 긴 세월을 숨죽이며 살았다. 훗날, 그는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유래된 바로 그 삼수로 유배당했고, 거기서 양을 치다가 1996년 1월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문학계는 물론이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커져만 갈 때, 1988년 한국 정부가 납북, 월북, 재북 작가의 작품을 해금시키면서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백석의 시들은 다수가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에게도 친숙하게 되었고, 출판계에서는 그의 동화시들을 앞다투어 출판하여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질 정도가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백석이 뽑혔다. 생전의 백석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었을지언정, 현재의 우리에게는 시인들과 독자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애송되는 시를 거느린 시인으로 어엿하게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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