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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는 작가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반영해서인지, 슬프고 잔인한 장면이 많다. 그 중 가장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는 작품을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빨간 구두>를 꼽을 것 같다. 세상에, 피 흘리는 잘린 발목을 담고 춤추며 지나가는 빨간 구두라니! 어린 시절에 읽고 얼마나 무서웠던지 밤에 화장실 혼자 가면서 내 발목을 만져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용은 이렇다. 가난한 고아 카렌은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간다. 길을 가다가 만난 부자 할머니가 이런 카렌을 가엾게 여겨 데려가서 키워 준다. 카렌의 세례식날, 할머니의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해 카렌은 검은 구두라 속이고 세례식에 신을 구두를 빨간 색으로 산다. 이후 카렌은 사람들이 다 흉보는 데도 계속 교회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간다. 기도도 찬송가도 잊고 빨간 구두 생각만 한다. 심지어 카렌은 할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데도 빨간 구두를 신고 무도회장에 가서 춤을 춘다. 결국 카렌은 천사에게서 쉬지 못하고 빨간 구두에 이끌려 춤을 추어야 하는 벌을 받게 된다. 이후 할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춤추는 빨간 구두에 이끌려 카렌은 춤추며 떠돌아 다니게 된다. 그러다 사형수의 목을 베는 사람이 살고 있는 외딴 집에 이르러, 카렌은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발목을 잘라 달라고 목 베는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 발목을 자르자, 빨간 구두는 잘린 발목을 담고 춤추며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나 카렌이 교회를 가려고 하면 다시 춤추는 빨간 구두가 나타나 방해를 한다. 겁에 질린 카렌은 목사님 댁에서 무료 봉사를 하며 반성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의 죄를 뉘우친 카렌 앞에 전의 천사가 나타나 카렌을 구원한다. 입장에서는 춤 추거나 술 마시는 것 뿐만 아니라 극장에 가는 것도 큰 죄악이 된다. 현대에 와서 이런 엄격한 원리주의의 일상지배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아직도 껌정 스타킹, 껌정 양복에 껌정 구두만 착용하고 사는 근본주의 칼뱅주의자 신도들이 네덜란드에만 50~60만명이 있다고 한다. (아, 물론 안데르센의 고국인 덴마크는 80%이상이 복음루터주의인 거 알고 있다)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천사는 손에 번쩍번쩍하는 긴 칼을 들고 있었습니다. "너는 언제까지나 춤을 추어야 한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그 빨간 구두로 춤만 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네가 파랗게 질려서 싸늘하게 될 때까지! 네 몸이 말라서 해골처럼 될 때까지! 너는 방방곡곡 모든 사람의 집을 춤추면서 돌아다녀라! 그리고 거만하고 허영에 들뜬 아이들이 있는 집의 대문을 두드려라! 그런 아이들이 네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 벌벌 떨게 해 주어라! 자, 출 수 있는 데까지 춤을 추어라! 자꾸 추면서 가거라!"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세요!" 카렌은 큰 소리로 외치며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카렌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구두를 따라 울타리를 벗어나 한길로 춤을 추며 나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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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시리즈로 구성된 책 중 겨울편인 겨울 사자에 이은 빨간 구두를 펼쳤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내게 빨간 구두 역시 매혹의 대상이다. 이 책은 또 얼마나 멋진, 혹은 얼마나 소름 돋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까? 표지에서 풍기는 느낌은 순결한 아름다움, 그 자체인데 과연 그럴까, 펼쳐보자. 몇 해전에 김혜수의 열연으로 화제를 불러온 영화 분홍신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 안데르센의 이야기와 닿는다. 바로 그 이야기가 나를 맞는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까?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까?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았기에 그 놀라움이 더 컸다. 빨간 구두를 신게 되면서 원하지 않게 춤을 추어야하는 카렌, 멈출 수 없는 그 욕망은 빨간 구두 그 자체인지 모르겠다. 욕망은 그렇게 숨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만약 카렌이 아닌 내가 빨간 구두를 만났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다. 빨간색이라는 것은 그렇게 욕망을 자아낸다. 찰스 디킨슨의 신호원은 처음부터 음산하고 기묘하게 시작된다. 사람인듯 사람이 아닌듯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고독감의 표현은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 허상은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 외로움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만다. 가끔 사람들이 만나는 유령은 무엇일까? 기이함은 모파상의 오를라로 한층 더 깊이를 더한다. 나 아닌 또 다른 나, 그것은 진정 무엇이며 누구인가?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을까? 문학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애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역시 독특한 이야기이다. 두 명의 윌리엄 월슨이 등장한다. 둘 인지 하나인지 나는 헤메였다. 책을 읽는 내게 그 어지러운 정체성의 혼란이 전염된다. 과연 진짜 나는 누구이고 나를 조종하는 이는 누구일가.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빨간 구두의 욕망의 끝은 두 발을 버리는 것으로 이어지며 나머지 세 편은 존재에 대한 물음뿐이다. 내게도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내 안에 선과 악은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그 처철한 끝을 만나고 보니 자신을 다스릴 성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헤럴드 블룸 시리즈에는 단편을 함축해 놓은 듯한 그림이 함께 한다.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오싹함이 무척 크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리즈를 계절과 함께 차례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장대한 시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주목한만 장점이다. 내게는 낯선 경험이었지만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이 책, 조카가 노리고 있다. 이런 즐거움이 책읽기에 대한 뿌듯함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