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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교라는 신념의 차이로 인한 서구와 비서구의 극한적 갈등과 악의에 찬 행위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촌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결단코 좁혀질 것 같지 않은 이들의 종교 갈등은 어떠한 해결의 싹도 찾지 못하고 그 반목은 오히려 더욱 깊어만 가는 것 같다.
여기에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까지 더해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다.”에서 살만 루시디의 “종교는 늘 그랬듯이 피에 든 독이다”까지 종교의 폐해론이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실정에 이르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로 대표되는 서구와 중동의 종교배타적인 그들이 성전(聖戰)이라고 칭하는 행위는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에 바쁘고, 미국은 이슬람국가를 이슬람교도들은 미국을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들을 수시로 살상하고 파괴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양 극단에 서있는 이들 종교간의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편으로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의 제고에 고된 작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저술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공히 그 종교의 근원을 같이하고 있음에도 두 종교간의 갈등을 초래하게 된 역사적, 이론적 배경을 예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라고 보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와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인 사도로 보는 이슬람교의 일위일체(라 일라하 일랄라)에 대한 신념이다. 이슬람의 종교로서의 정립을 이룬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도로서의 역할과 예수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동일선상으로 인식함으로서“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이슬람의 유일신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종교관과 근원적 차이가 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위해 저자는 초기 무슬림복음서에 표현된 예수에서 꾸란, 하디스에서의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시각을 보여줌으로서 다른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영적 스승을 초대한 이슬람의 종교간의 공존도모를 종교사학적으로 모범적인 화합의 모델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어 이슬람의 경전인‘꾸란’의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비롯해서 이슬람의 역사와 이슬람의 사상적 뿌리와 신앙으로서의 7가지 기초, 이슬람의 종파적 신학으로서 시아파와 순니파의 신학적 사상과 종교철학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준다. 또한, 오늘날 이슬람의 신앙적 뿌리로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이슬람의 수피즘에 대해서는 그 사상적 기초와 전통, 특징을 대표적인 수피즘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잘랄 아딘 루미’와 이슬람 신학자인‘이븐 아라비’의 문헌을 통해 섬세하고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영지(Gnosis)적 지식으로서의 수피즘의 참된 진리로 가는 길에 대한 그 내재적 진리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이 저술은 서구 편향적 시각에 비판 없이 노출되어온 우리들의 무지와 이로 인한 편벽한 이슬람에 대한 곡해를 시정하는데 유익한 지식을 제공하며, 나아가 초기 이슬람의 타 종교에 대한 관대한 시선의 복귀는 물론 그리스도교의 공격적 선교 행위의 지양(止揚)과 종교적 존중의 촉구와 같이 종교의 화합과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진정성을 내재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지역으로 대표되는 중동지역의 역사와 문화, 문학과 철학등 사상에 대한 많은 인용절과 문장, 인물등 귀중한 지적 보고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어 종교론자는 물론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편적 이해를 가지는 모든 이들에게 귀중한 사상적 이해의 기초를 제공하는 양서라 할 수 있다. “피조물들이 사랑으로 움직이나니 영원한 신의 사랑 속에서, 바람은 창공으로 인하여 춤을 추고 나무는 바람으로 인하여 춤을 추도다.” - ‘잘랄 알딘 루미’의 우주율동에 대한 사랑의 배경에 대한 詩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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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테러와 납치가 발생하면 항상 배후에 이슬람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러한 경우도 많다. 종교의 기본적인 이념을 세세히 들여다 보면 '사랑'과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종교가 만났을 때는 대립과 갈등으로 표현되거나 때론 '전쟁'으로까지 번지기도 한다. 그들은 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이 책은 무함마드와 예수의 생애를 통해 두 종교의 생성 배경을 알아보고, 그들의 가르침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서술하였다. 서로의 다른점을 알아가고 이해를 통해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주목할만한 내용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같은 민족이고 종교적인 뿌리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슬람에서 말하는 유일신 '알라'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솔직히 이슬람에 대해서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이삭의 배다른 형제가 이슬람의 조상이니 그들이 말하는 유일신이 다를 이유가 없다.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구약에 나오는 모세와 욥과 같은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알라의 말을 전하면서 지지세력을 모았다. 그렇다보니 꾸란(코란은 영어식이다)에는 구약과 신약의 일부를 인용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순수하고 흠 없는 알라의 계시라고 믿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의 일부를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참으로 화해할 수 없는 차이점을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p.160"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만 있을 뿐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예언자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무함마드는 그리스도교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교는 무함마드가 성서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는 예수의 신성을 주장한 12사도를 비난하였지만, 무함마드 사후에 무슬림 또한 무함마드를 여전히 예언자로 보는 순니파와 '무오류성' 즉 신성을 주장하는 시아파로 나뉜 뒤, 후대에 내려오면서 계속 파벌이 생긴다. 그 외에도 예수는 생애를 통틀어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초기부터 신정정치를 통해 지지세력을 결집하였고, 세력을 확장하기위해 정복 전쟁도 끊이질 않았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꾸란에 따라 도둑질한 자의 손을 자르고 율법을 어긴 자들을 돌로 쳐죽였다. 이는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옴으로써 인권문제등을 야기시키고 있는데 정치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여전히 꾸란에 따르고 있다. 또한 예수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것에 반해 무함마드는 많은 부인들을 두었다. 전쟁으로부터 과부와 노예들을 지키려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개인의 소유욕에 의해 여인들을 취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무함마드 자신도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양자의 아내를 맞거나, 부인들간의 갈등을 '계시'를 내세워 일축하기도 했다.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책을 통해 이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꾸란'이나 '라마단(이슬람의 단식)'에 대해서만 들어봤을 뿐 언론에서 '시아파'나 '순니파'가 어쩌구하면 어떤 의미인지 못알아 들을만큼 용어조차 낯설었는데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두 종교가 아예 다른 지역, 다른 민족이었다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적극적이지는 않았을까. 앞서 언급한대로 '알라'와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시각에서는 무슬림과 그리스도교가 공존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보였는데 세세하게 살펴보니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타협점을 찾기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의 개인을 예로들어 보자.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도 하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태어날 때 물려받은 유전적인 요인에다 어린시절부터 조금씩 형성된 성격들을 어느순간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뜻일게다. '한국인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표현되는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가 스스로 문제점으로 인식하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보니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공존과 갈등은 쉽게 생각할수만은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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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종교이건만, 종교로 인한 전쟁과 다툼은 오랜 역사 동안 계속되어 왔다. 종교의 참뜻에 부합되지 못하는 인간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중동지방의 분쟁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등 종교로 인한 갈등은 심각하다.
기독교, 불교와 같은 타 종교와는 다르게 이슬람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심지어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신이 전혀 다른 신인 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뿌리는 동일선상에서 출발한다.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사상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슬람교는 오직 알라신 한 분만 섬기며 예수 또한 무함마드와 같은 사도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차이로 인해 반목과 다툼이 지속되고 있는 거라면,이는 종교를 권력 다툼에 잘못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슬람교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무함마드가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와 꾸란에 나타난 여성상이다. 무함마드는 양자의 아내를 사랑하여 그가 이혼을 하자 그의 아내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비록 양자일지라도 아들의 아내를 다시 부인으로 삼은 셈인데, 이러한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꾸란에 양자의 아내가 이혼하면 결혼해도 무방하다는 문구를 삽입시켰다. 종교를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한 종교의 지도자로서 금해야 할 행동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서 도덕적 오점을 남긴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게다가 꾸란에서는 돈을 벌어주는 문제로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아내가 그녀의 남편에 복종할 때 원하는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 등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한 관계로 보고 있다. 당시 아라비아의 사회적 풍속과 일부다처제 등을 감안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아직까지도 히잡을 쓰고 다니는 무슬림 여성들을 생각할 때마다, 실로 하늘에 계신 유일신 하느님께서 이러한 행동을 원하시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꾸란과 성경은 귀중한 내용의 말씀이긴 하나,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전해지는 와중에 그 뜻이 잘못 해석된 부분이 있는 채로 전해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예전에 그런 내용의 글을 종교 신문에서 읽었던 체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거대한 건물을 지닌 종교집단에 대해선 살짝 거부감이 드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과연 이런 것인지 판단하지 못함이다. 각 종교는 세력 확장에 전념하는 자세를 지양하고, 진정 종교인 본연의 자세가 무엇인지 인식하며 하느님과의 영적 만남을 추구해야 할 때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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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판단을 내리는데 선입견이란 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새삼스레 깨닫는다. 처음 이 책의 제목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만을 보고선 생각했다. 제목 중간에 끼인(?) "예수"보다는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겠군 하고.. 그러다 책의 앞날개에 나오는 글쓴이에 대한 간단한 이력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연세대학교 신학과",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 및~", "미국 [크리스천 헤럴드] 편집장을 역임했고," 라는 구절들을 보고는 "글쓴이가 크리스천이구나. 그렇다면 이슬람보다는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려나...?" 책을 덮고나서는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에서 검색된 글쓴이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일꺼라 마음대로 추측해버렸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쓴이의 모습은 누비한복에 뭔가 푸근한 인상.. 그리고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사회를 때로 불편케 했다. 2006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예수, 석가를 만나다’가 우수도서로 선정된 뒤, 한 신문에서 가졌던 인터뷰 기사가 꼬투리를 잡혔다. 보수적 기독교 계열의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가 인도박물관의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 대학의 총장은 다음날 전화를 걸어 와, “강의를 1년 쉬어 달라”며 떠날 것을 종용했다."(경향신문/2008년1월27일 인터넷기사) 는 기사를 보니 특정한 종교에 얽매여 본 적도 없고, 어느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와의 공통점 같은 걸 발견한 기쁨(?!)이랄까 뭐 하여간 그런 동족의식 같은 것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책 앞날개의 글쓴이의 간단한 이력을 보면서 "골수(?) 크리스천일 꺼다."고 내 마음대로 판단해버리고 책도 그런 방향에서 읽어나갔는데, 지금 다시 책의 내용들을 머리 속에 떠올려보니 그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가운뎃자리에서 객관적으로 혹은 둘 다 약간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00여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에 결코 가볍지 않은 종교라는 주제, 대충 훑어보아도 입문서 수준이 아닌 각주가 달린 어려운 책이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슬람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 때문이다. 어설프게나마 역사를 공부하면서 서양의 역사에 대해선 개론서나마 몇 권을 읽으면서, 아주 엷은 밑그림이나마 그리곤 했었는데, 무슬림 혹은 이슬람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서 일컫어지는 중동과 아프리카 일부에 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었기에 궁금했다. 그리고 제3자의 무관심과 나의 개인적인 무지로 인해, 국제뉴스란에서 종종 보이는 미국과 그들의 대립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했었다. 책은 1부 [무함마드와 예수, 무엇이 다르고 같은가]와 2부 [이슬람의 모든 것]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글쓴이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을 위한 대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주제에 대해 [꾸란],[하디스]와 [복음서]에서 무함마드와 예수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시각차를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는 신이고 무함마드는 "알라-하느님"의 메시야일 뿐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에 대해 신성을 부여하고 그를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 대해 이슬람에서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알라의 사도에 불과하다."고 그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라 혹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두 종교의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겠다. 그에 따른 자선의 강조도 두 종교의 공통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낙원(천국)에 대한 관점에서는 무함마드는 현재의 삶 다음에 오는 것으로, 예수에게는 신앙 속에서 이미 도래했다는 점과 내세에 장차 도래할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부에서는 내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두 종교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 글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읽는 재미가 덜했다. 2부 [이슬람의 모든 것]이 원래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이다. 이슬람의 성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지극히 세속적인 면이 다분한 나에겐 글을 읽지 못했고(그래서 문맹의 예언자라고 불리운다는 그), 어린 시절을 고아로 보냈다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또한 아랍어로 편집된 이후 약 500년 동안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꾸란에 관한 이야기도 관심이 갔다. 예전에 이슬람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중에서,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은행 이슬람은행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의아했었는데, 이슬람을 지탱하는 5가지 기둥 중 Zakat(자선) 부분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이 조금이나마 이해됐다. 이슬람의 약사(史)까지 실려 있어,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종교적인 감각이 매우 부족한 "나"이지만, 읽기에 버겁지 않은 이슬람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승자의 편에 서서 내가 마치 미국인이라도 된 양 "미국은 좋고, 그에 대적하는(?) 이슬람은 악하고, 폭력을 일삼는 집단이다."라고 은연 중에 내 안에 자리잡은 가치관을 깨는 데도 도움이 된 책이기도 하다. 나만큼이나 이슬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읽어봐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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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일으키는 국가들중 많은 이들이 이슬람을 믿으며,알라신을 섬긴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김선일 씨도 바로 이슬람을 믿는 이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고, 그로인해 우리나라에서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이 팽배했었고, 나역시 이슬람하면 그다지 좋은 인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전에 이슬람에 대한 어느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테러리스트들의 이슬람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며 ,그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세계에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게 해서 그렇지 ,정작 이슬람 율법에는 평화를 사랑하라는 교리만 있다고 하는 내용이어서 ,이슬람에 대한 나의 인식이 많이 바꿔었었다. 바로 그런 나에게 이책은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리스도교와 함께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책의 저자는 신학과를 전공한 사람으로 무슬림복음서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등과 비교하며 ,무함마드와 예수에 대한 무슬림복음서와 그리스도복음서 에 적혀있는 글을 소개하며 자세히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 된다.
이책을 읽기전에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서로 상반대는 줄로만 알았었던 나에게,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서로 유사하며,이슬람의 근원이 그리스도교였다는 글에서는 많이 놀라웠다. 즉,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으며,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교리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같다. 또,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고,꾸란을 적은 것과 아브라함이 십계명을 받은부분이 비슷하며,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고나서,자신이 받은 계시가 그리스도교와 같음을 알게 돠었다는 부분도 참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렇게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많은 부분이 비슷하지만,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를 숭시하는 반면,이슬람은 유일신만 집착하는 일체설을 주장한다. 그리고,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와 하나님을 동등하게 보지만,무함마드는 예수를 알라-하나님의 사도요 예언자라고 인정하지만,예수를 알라-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는 어려울뿐만 아니라,진리를 왜곡하는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꾸란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유대교의 신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교의 신 하나님을 자신들이 믿고 섬기는 알라-하나님과 동일한 신임을 천명한다,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나아가서 신과 동일시될수 더욱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논쟁은 뒤로 하더라도 같은 유일신을 섬기지만 내용면에서는 알라-하나님 이외의 다른신을 절대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 무함마드의 주장이다]-P 52 이렇게 저자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며,서로의 논쟁이 되는 점들과 상반된 교리들을 이야기하지만,서로 상이한 문화권에서 자라난 종교인 만큼 ,더큰 주제를 갖고서 서로 공존하고 ,세계를 더욱 발전하는 길을 모색하자고 한다.
이책을 읽고나서,이슬람과 그리스도교,무함마드와 예수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되서 유익했고,비록 서로 많은 부분에서 상반되는 교리들이 있지만, 본래 신앙이 추구하는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은 다 같이 추구하는 바이므로 '서로 공존하는 윤리를 발전 시켜 지구의 평화를 위해 함께 사랑의 길을 가자'는 저자의 글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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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에는 내세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들이 믿어 의심치않는 믿음과 신앙의 끝에 이른바 '천국'이 펼쳐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그들이 각자 생각하는 천국의 모습들이 약간씩은 상이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천국이 언제 어떻게 도래하느냐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각각의 종교의 성격에 따라 입장과 견해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현재 지구상에 가장 대표적이고 많은 이들이 선택을 한 종교가 이 책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에 언급되고 있는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이다. 그 도입과 전개과정이 어찌됐든 개신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중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지만 이슬람교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이질적인 종교로 우리나라에서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그 연원은 미국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미국의 배후에는 소수의 유대인들이 경제를 장악하면서 이슬람의 중심지인 중동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팽팽히 맞서 있고 이슬람 역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세력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그들의 존재를 알리며 분쟁을 넘어 세계 분쟁의 씨앗으로 남아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뿌리깊은 반목은 이미 성서에서도 언급되듯 기나긴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2차대전 이후에 일어난 4차례의 중동전쟁이나 최근 몇년전 전 세계인을 경악에 빠지게 했던 911사태는 아마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문명의 충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른바 종교전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양대 문명의 충돌을 대결적 구도보다 평화적인 공존의 세게로 나아가는 근원적 방법에 대해 고찰해보는 책이다. 이슬람에서 이야기하는 알라-하나님과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동일한 존재이기에 어쩌면 양 진영의 화합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자는 종교간의 반목을 지양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근간으로 하여 이슬람교의 '꾸란'과 그리스도교의 '성서'의 대화를 시도해 본다. 예수의 정신과 무함마드의 정신을 비교하고 분석해봄으로써 두가지 정신이 상통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내어 보이는 것이다. 책은 무함마드와 예수를 비교분석해보는 첫번째 장으로 시작된다. 앞서 언급했듯 무함마드는 알라-하나님과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동일한 존재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서로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존재는 사도가 아닌 삼위일체적인 신으로 숭배받고 있지만 이슬람의 시각에서는 알라-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기에 에수 역시도 사도 이상의 존재로는 보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유일신 알라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무함마드 역시 신이 아닌 신의 사도라는 것이 이슬람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알려졌듯 무함마드는 가난했고 어려서 부모를 잃게 되면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된다. 당시의 아랍세계는 다신론과 우상숭배라는 의식을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행하고 있었다. 카바로 대표되는 그들의 성지 안팎에는 360여 가지의 우상들이 세워졌고 이들이 신들로서 신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로서 섬겨졌다. 심지어 모세와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마저도 아브라함이 전한 순수유일신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으며 여러 종파와 파벌이 난립하는 혼란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게 된다. 글을 읽을수도 쓸줄도 모르던 그에게 "읽어라"라는 메세지로 계시는 시작된다. 이후 무함마드는 예언자로서 이슬람이라는 신정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당시의 혼란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전사적인 예언자로서의 길을 걷게 한다. 결국 무함마드는 무력적인 입장을 동반한 공동체의 지도자역할을 해야 했으나 그에 비해 예수는 그만의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귀신을 축출하고 병든자를 낫게 하는 등의 비범한 행위를 통해 그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던 차이를 보이게 된다. 두 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과 타락, 종말의 심판 등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구원의 주체, 구원의 중개자가 누구냐는 견해 즉, 메시아에 대한 견해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은 이후 타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고 심지어 적대적으로까지 변모해 간다. 아마도 그것은 이슬람과 다른 종교 사이의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이던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 이슬람역시 신앙적인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만들고 제시해나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대립은 신앙의 충돌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신자들이다" (꾸란 5장17절) 위 표현은 이미 두 종교간의 반목이 공존과 상생 보다는 분쟁과 파국이라는 모습으로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종교는 인간에게 구원의 필요로 탄생했다. 하지만 그 원론적인 본질을 넘어 모순과 갈등을 야기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지난해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아프카니스탄 인질사태 역시 그러한 종교와 문명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편안한 안식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 우리가 나약한 인간이기에 종교를 통해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투영되어 있기에 그러할 것이다. 상이한 문화권에서 태어났지만 각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려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상생이라는 인류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의 목표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이 될 것이다. 여전히 이슬람이나 무슬림은 멀게만 느껴지는 문화권이지만 그들역시도 사랑과 자비와 자선이라는 인류애를 실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와의 간접적인 비교를 해 보면서 그들의 사상과 입장을 이해하려 하는 시선을 가져보게 된다. 평화의 공존이라는 것, 그리고 꾸란과 무함마드의 근본적인 정신인 '진리에의 복종'을 존중하는 것 역시 신앙이라는 존재를 통해 그들과의 거리감을 좁혀보려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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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는 한국에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진 않다. 따라서, 한국인들에게 무슬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으며,유대교·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함마드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정리한 것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제도,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인 신도는 많이 없지만, 이슬람과 관련된 분쟁을 우리는 늘 뉴스에서 접하는 만큼 상식으로 알아두면 좋을 듯 하다.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무슬림 복음서'와 무슬림 예수에 관련된 책이 출판되었다.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코나투스,2008)은 첨예한 신앙 대립을 보이고 있는 이슬람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이해하게 한다. 두 종교 모두 하느님(GOD)을 믿고 있지만, 두 개의 상이한 문화와 세계관에서 각각이 발전하며 전혀 다른 종교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둘 사이의 논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정답을 찾기 위해선 가장 먼저 이슬람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책 속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슬람 세계에 대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가장 시선을 끄는 부분은 바로 이슬람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은 '오주'이다.
오주(五柱)는 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를 말한다. 첫째, 신앙 고백(사하다,이만).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둘째, 공식 예배 또는 기도(살라트). 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넷째, 단식(사움, 라마단):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제9월) 주간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다섯째, 순례(하지). 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를 목숨처럼 여기며,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나쁜 시선만을 보낸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의 말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상이한 문화권에서 자라난 종교인만큼, 그들 고유의 입장을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겸허하게 상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다면, 다툼보다는 지구 공존의 윤리를 더욱 발전적으로 함께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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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전쟁, 테러를 볼 때마다 진정 그들이 말하는 신들이 원하는 것이 이러한 믿음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매체를 통해서 본 전쟁이나 테러는 이슬람계에서 일으킨 종교전쟁이나 테러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다시피해서 그런거지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자행한 종교전쟁 또한 어마어마한 핍박과 상처를 남겨주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묻고 싶다. 그들의 신들이 원하는 믿음이었고 행동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매번 그들은 무엇이 다르다고 서로를 저리도 뼈 속 깊이 원한 찬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종교의 무지했던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리도 다르고 바라보는 지향는 점이 다른 것일까하고 말이다.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은 그러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책이다. 우선 대다수일지 모르는 나와 같이 이슬람교에 대해서 재대로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는 좋은 설명을 해주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신학을 전공하였지만 객관적으로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예수와 함께 설명해주고 있다. 우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큰 차이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이슬람교는 예수를 무함마드와 같이 신이 아닌 사도일뿐이라고 하며 알라(하나님)외에는 신은 없다 이고 그리스도교에서의 예수를 포함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큰 차이점과 바라보는 시각차이가 환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예수 또한 그저 하나님(알라)가 사랑하신 선한 제자이자 사도였을 뿐 결코 신이 아니다라는 시각은 그후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삼위일체를 일체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스도교의 방향과는 큰 다름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으니, 예수의 고귀한 희생, 부활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기에 두 종교는 각기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외의 하나님과 야훼의 혈통과 사도들의 행적은 인정하고 있다. 결국은 종교적으로 밝지 못한 나는 같은 신을 향한 믿음이 이렇게까지 갈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되는 부분 또한 남아있다. 그저 단순한 생각에 그칠지 모르지만 서로 공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시간들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만이 남게 된다.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은 이슬람교 역사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고 있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던 세계를 이어준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성스런 계시를 받은 후 종교의 책이자 생활전반을 책임지는 꾸란, 하디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그후 후계자들인 칼리프가 이어온 이슬람교와 후계자의 전통성에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시각차이로 혈통적으로 정통성이 있는 알리만을 진정한 후계자로 하는 시아파와 3대 칼리프를 모두 포함하여 선출을 통하여 칼리프를 계승하고자하는 대다수의 순니파로 이어지게 된다. 꾸란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갈등과 투쟁 속에서 발전해왔고 개혁을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성에 대한 차별성은 큰 문제로 남아있고 그리스교의 지탄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는 서로 공존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은 분명 열려있다고 본다. 신을 향한 마음이라면 화합을 바라는 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까하는 순진한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저자역시 공존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 본다면, 종교 간의 이질적인 혐오감은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고 한다.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 서로를 편견어린 시선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새로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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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9억년 전 지구의 하루는 18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달도 지금의 달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훨씬 가까이 있어 지금보다 몇 배의 큰 달로 보여 지금처럼 아름답고 은은한 동경의 대상인 달이 아니라 두려움의 달이었다고 한다. 그 때의 원시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현대인들처럼 하루 24시간의 시간도 모자라 조급하거나 허덕거려야 하는 삶이 아닌 돌도끼 들고 나가 사냥 나갔다 돌아 오면 하루치 삶은 충분했던 시절. 먹을 것 입을 것 저장해 놓고 살지도 못했지만 근심도 걱정도 저장해 놓을 일이 없었을 시대… 그런 시절의 단순함을 우리 유전자 속에서 꺼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종교생활은 마음의 평화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들으며 성경구절을 읽고 공부하며 하나님이 말씀 속에 있는 삶의 지헤와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특정 종교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갖고 있지는 않고 있다. 어떤 종교를 보아도 결국은 사랑, 평화, 존중…의 메시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은 다른 전쟁과 다를 바 없다. 불쾌하고 치졸한 붉은 피로 가득한 철철 넘치는 피의 싸움이었다. 이 책은 한 쪽의 편협한 종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주 불편한 책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바라본다면 조금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을 신심이 깊은 친구에게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책에 대해 말을 꺼냈었다. 하지만 친구는 이슬람교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은 그리스도교의 초심자인 나에게 설득하려고만 했을 뿐… 그래서 더 이상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에필로그에 나온 말처럼 종교가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남긴채… 이슬람 그리스도 두 종교는 모두 알라-하나님으로 대표되는 같은 신을 믿고 있다. 이슬람교의 근본 정신은 ‘알라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 사도이다. ’란 귀절 속에 나타나 있다. 곧 무함마드는 사람이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신 알라의 가르침을 완전히 전한 위대한 최종 예언자로 본다.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는 신(信)과 행(行)의 두 가지가 있다. 信은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유일신 알라, 성전, 천사들, 예언자들과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는 것 등이고 行은 신도가 해야 할 의무이며, 이슬람의 오주이다. 고백, 예배, 희사, 재계, 순례 등이다. 그 밖에 성전(지하드)이라고 하여 이교도나 불신도와 싸울 의무를 제6주로 삼는다. 또한 성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음식에 대한 규정, 도박 및 고리 대금 금지를 비롯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일체의 행사에 대해 교도가 지켜야 할 규율이 규정되어 있다. 이슬람 교도에게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른 독특한 생활과 풍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교단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다처제가 그 한 예인데 이것은 무함마드에 의해 일어난 포교 운동 중 희생자가 된 남자들의 처자를 부양하기 위하여 다른 남자가 4명까지 과부를 거느릴 수 있게 허용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후 대외 발전과 인구 증가책으로 이 제도가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여성은 외출할 때 몸을 거의 감싸서 다른 사람에게 얼굴이나 몸을 보이지 말아야 하며 가정 안에서도 여성의 거주 구역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풍습이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한편, 토착문화와 전통에 대한 폭넓은 수용과 절충으로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사방으로 전파하였다. 이슬람이란 단어는 평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교리는 단순하고 명료하여 이슬람은 비잔티움과 더불어 고대의 학문을 계승하고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여부 등과 같이 교리상의 차이와 해석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벌어져 갈등과 반목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대결과 갈등 그리고 비극을 되풀이해 왔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종교와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적인 정치적 권력과 어울어져 종교와 권력을 동일시하는 세력에 이용되어 더 큰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 해 왔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 이전만 해도 무슬림과 그리스도교도들은 교류가 있었고 관용적이었었으나 636년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7세기 중엽부터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공격하여 계속 영토확장을 하였다. 그런 중에 팔레스타인에게 아랍계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고, 중동전쟁 후 유대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쫓겨나야 하는 억울한 신세가 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아랍과 이스라엘은 미국 그리스도교계의 반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듯 얽히고 섥힌 대결구도 속에서 계속되는 싸움만 되고 희생과 파괴만 반복된 전쟁. 과거엔 분쟁과 파괴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맞이할 시대는 공존과 상생의 시대이다. 저자는 말한다. “꾸란에서 말하는 ‘진리에의 복종’과 ‘기도와 자선’을 더 깊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실천하고 예수의 사랑과 휴머니티를 다시 발견하고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충실히 건설해 나간다면 공존과 사랑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