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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금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면서 꼭 한 번쯤이라도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화두가 아닐까 한다. 그건 바로 죽음이다. 찬란하게 살 날이 무한한데 왜 우울하게시리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가 하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끝인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라고. 삶이 무한하다면 당연히 자연적인 소멸 상태의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을 테고 자유를 빙자한 인간의 방종은 통제권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테다. 하지만 삶은 유한하다. 유한한 삶을 유익하게 살기 위해 인간은 더욱 노력하고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도 이 때문에 파생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 남자와 한 여자, 이들을 통해 이언 매큐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건 도덕성과 죽음과 같은 한 인간을 결정짓고 판단하고 마무리하는 단계이다. 사실 이 책이 부커상 수상작인지는 몰랐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이 수상 소감에서 '흡인력' 운운한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의 자신만만했던 수상소감과는 달리 나는 이 책을 참 느릿느릿 읽어나갔다. 몰입이 잘되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중년 남자의 삶을 바라보는 내 시선과 가치관에서 비롯한 문제였던 듯하다. 가장 큰 이유는 나와는 적잖게 간극이 있는 남자들의 삶이라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가 곧 내가 살아가게 될 머지않은 미래의 날들이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클래식 작곡가 클라이브와 신문사 편집국장 버넌이고 이 둘은 신실한 우정으로 이어진 친구들이다. 이들의 중심엔 몰리라는 죽은 여인이 있고 이들은 한때 그녀의 애인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몰리의 남편 조지, 정부인 외무장관 가머니 등이 클라이브와 버넌의 도덕성에 잣대를 들이대는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살아가다 보면 타인이 나를 어떤 기준과 잣대로 바라보고 판단하는가 같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엄밀히 따져보자면 한 개인이 한 개인을 규정할 권리는 애당초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살아감의 연속 안에서 누구나 개인 대 개인을 규정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며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 소수에 의한 규정은 곧 집단, 다수로 이행되고 그에 따라 한 개인의 재정립이 이루어진다. 나 또한 내가 속한 집단 안에서는 규정되고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회자되는 평판이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재정립된 나는 그들만의 이미지로 생성된 또 하나의 '나'가 된다. 그러나 또 하나의 나 역시 '나'인 것은 분명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닌 이상은 이중적인 모습 안에 내재한 원초적인 자신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평판은 곧 나의 이미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른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애쓴다. 예의범절이라는 도덕성에 부합하는 각자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두고서 말이다. 그리고 가끔 도덕성에 금이 갈 때면 땜질을 하려 분투하는 사람들의 범람에 휩쓸리기도 한다.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이 동반한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두 남자가 현실인식과 존재가치, 죽음 사이에서 어떤 괴리를 느끼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재치 넘치고 활기차며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던 건강했던 한 여인의 발병과 죽음은 남겨진 남자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제대로 살아왔는가, 앞으로 살아갈 날은 얼마나 남았는가 같은 결코 수치적으로 정확한 답이 없는 의문들 속에서 삶은 연명 된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만큼 노화한다는 것이다. 노화한다는 것은 외적인 측면도 있지만 정신적인 부재가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가장 취약해지는 것이 '기억'이다. 자연적으로 기억의 신호가 끊어질 때가 종종 있지만 완전히 단절된 암흑으로 들어가버린다면 주변인들의 경악과 공포와 아픔은 말로 다하기 어려울 테다. 몰리가 겪은 기억의 부재는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 개개인에게 저마다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삶을 향한 열의의 상실이다. 언젠가는, 불현듯, 갑작스럽게, 나에게도 저런 일이 닥쳐올 거라는 경각심에 삶과 존재 자체를 허무하게 들여다보고 기억의 단절이란 병마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던, 무기력해져 버렸던 그녀의 삶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반추하는 중년 남자들의 모습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각자의 존엄성과 가치, 삶에 대한 열의를 전염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잃어버린 삶에 대한 열의를 독자인 나는 갖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죽음을 통해 사회적 관계, 더 깊게는 두 남자의 우정을 재정의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사랑했던 한 여자, 만인의 연인이라 부를 수 있었던 그녀의 주위에는 남자들이 넘쳐났다. 클라이브와 버넌 두 남자의 우정 안에는 몰리에 대한 사랑도 나란히 내재한다. 그리고 이 두 남자와 적대적, 정확히는 버넌과 더 적대적인 연장 선상에 놓인 한 남자의 성적패러다임을 통해 우정에 금이 가는 상황을 겪게 된다. 적대적 관계에 놓인 남자는 몰리의 정부였다. 아니 몰리가 그 남자의 정부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정치인인 가드머이지만 사회에서 통용되는 모습이 아닌 진짜 본모습의 그를 직시한 일간지 편집국장 버넌이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킬 정보를 입수하면서 클라이브와 버넌, 두 남자의 우정은 금이 가게 되는데 한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 공인이라는 이유로 이슈가 되고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자유를 외침과 동시에 억압을 공공연히 강요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적나라한 현실을 인지하게되고 가드머의 성적 취향은 편협한 세상에 정면돌파하는 일탈인가, 그로부터의 해방인가, 아니면 또 다른 위선인가 같은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언 매큐언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부조리한 모순으로 그득찬 사회 속에서 약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모습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가드머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공유했던 몰리와의 관계는 사회적 관계의 방편이었는지 아니면 인간 대 인간의 적나라한 교감이었는지가 하나의 사유거리로 던져진다. 나는 이 둘 중 어느 쪽에도 전적으로 속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위장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이면서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이면서 인간 대 인간의 동행이지 않았나 싶다. 나이 들어갈수록 외로워진다. 나는 혼자이길 즐기기 때문에 스스로 고독해지는 쪽을 택했다는 게 맞다. 실제로 그러한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듯한 공허감에 고독을 절실히 통감할 때가 더러 있다. 그래서 누군가 동행할 이가 있다는 건 인생에서 값진 금광석을 캐낸 것과 같다. 홀로 고독하게 걸어가는 이 발걸음 뒤에 따라오는 그림자 하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삶이다. 가족이 있고 대중의 중심에 있던 가드머였지만 자신의 은밀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동행은 몰리였다. 여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시선은 그들을 부정한 관계로 인식해버리고 말았던 것이겠지만.
소멸은 새로운 탄생이 유예되는 게 아닌, 사그라짐 그 자체다. 무엇을 하든 즐길 필요성이 있다는 걸 느낀다. 불평하든 앓는 소리를 하든 그것 자체로 삶의 유한성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일 테니까 말이다. 이 소설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죽음, 죽음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누구라도 소멸 앞에서 초연해지기는 쉽지 않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삶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간은 한정돼있고 마찬가지로 시간에 속해있는 삶이란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소멸의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일 테다. 나에게도 이런 불안이 가끔 엄습해온다. 이 땅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형에서 무형으로 바스러질 때의 허무한 내적 분열 상태에서 번민한다. 소멸이 극히 자연스러운 순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나이가 들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지만 몰리의 경우처럼 기억을 잃고 존재를 망각한다면 클라이브와 버넌이 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곧 누구나의 진지한 고민이 된다. 그녀를 사랑했던 두 중년 남성은 몰리와 같은 소멸을 바라지 않았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며,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고 누구를 만나는지,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른 채 무책임하게-책임의식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지만-연명해가는 삶을 견뎌낼 수 없을 거라는 걱정에 차라리 서로에게 부탁한다. 정신을 놓게 되면 마지막을 정리해달라고. 기억을 놓은 채 스스로 죽을 수도 없을 테니 대신 생의 마무리를 해달라 말하는 이들을 통해 '안락사'라는 비합법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해본다. 여전히 논쟁이 끊이지 않는 사회,윤리적 쟁점이다. 인도적 차원의 환자와 보호자라는 틀 안에서만 보았을 때 어느 쪽의 입장이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생명의 고귀함, 존엄성만 놓고 보자면 절대 행해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책의 카피이기도 한 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그 문제는 지극히 뒷전이 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때는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삶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 한 나라다. 자신의 페르소나에 의문을 품고 삶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두 남자의 행보는 내 삶에서 과연 무엇이 결여돼 있으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지 절실하게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때로 자의식 과잉은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의 걸림돌이 된다. 이는 이타적인 인간이 되라는 사회적 메시지와는 대립하는 경계선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안에서 클라이브는 이타적이지만 버넌은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 둘은 곧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친구이나 상반된 가치관을 보이는, 지극히 고루하고 평범한 규범적 인간과 보다 원초적인 인물의 가치관 정립을 통해 투사되는 것은 바로 나의 모습과 같다. 사사건건 이타심과 자기 과잉을 저울에 올려놓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삶의 가치는 끊임없이 생성해나가는 것이다. 혹은 창조 하는 것이다. 클라이브는 창조적인 직업으로 대변되고 버넌은 대중의 눈에 덧씌워진 장막을 해부하는 논거와 증언과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의무를 부여하는 직업으로 표현된다. 그야말로 극과 극인 대척점에 있는 사이였다는걸 가머니의 스캔들 노출로 점차 인지해나간다. 의무적인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버넌과 그 또한 세상의 규범에 예속된 인간의 위선이고 가식이라 치부하는 클라이브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허점투성이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미움보다 강하니까.-147p
소설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이 구절은 위선적으로 비친다. 그리고 이 구절은 당연한 듯 귀결되는 삶의 진리라 해도 어떤 상황, 장소, 때에 따라 절대성과 위선 그 이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어떤 소설에서든 삶에서든 '사랑'이라는 인간 고유의 절대성을 가진 감정의 대두는 그럴듯하게 먹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란 허점투성이를 넘어서 오류를 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감정에 지배되는 날 것 그대로의 살아있는 인격체이므로.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서 기인한 규범적 테두리 안에서만 존속 가능한 것일 뿐이다. 이 소설의 끝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두 남자가 맞이하는 인생의 마지막을 통해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마음을 다독인다. 이 삶은, 어떻게 살아가든 끝은 오기 마련이니까. 나를 믿고 나아가는 것만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문득 삶이 무의미해지는가. 문득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는가.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 남루하게 느껴지는가. 그건 오늘을 달리지 않아서 파생되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겁먹지 말고 그저 달리면 된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외쳐주겠다. 오늘을 위해 달리는 당신의 인생에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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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2013)는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엇갈린 욕망이 그 여자에 대한 ‘평가’로 변질되는 과정을 응시한다. 선희(정유미)의 동기이자 영화감독으로 갓 데뷔한 문수(이선균), 선배인 영화감독 재학(정재영), 대학 영화과의 최교수(김상중)는 모두 머뭇거리면서도 집요하게 선희의 주변을 맴돈다. 마침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품었던 욕망을 외면하면서 각자 선희를 ‘평가’한다. 선희는 말야…… 착하고, 지적이고, 고집이 세고, 사회성에 문제가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매력적이고, 가끔 도발적이고……. 남자들은 텅 빈 웃음을 지으면서 함께 걷는다. 홍상수는 욕망에 휘둘리는 수컷들의 언어와 행동을 카메라에 담지만, 결코 끝까지 가지 않는다. 다만 지식인들의 기만적인 언행들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우스운 풍경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할 따름이다. 씁쓸한 웃음이 가득한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웃음을 제거하고 수컷들의 사소하면서도 절실한 욕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이내 한 소설이 떠올랐다. 1998년 부커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박경희 옮김, media 2.0, 2007)이다.
2.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몰리 레인. 아름답고 지적인 그녀는 평생 다양한 남자들과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겼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곁을 맴돌며 구애를 했지만 그녀는 한 남자에게 안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결혼을 한 뒤에도 여러 남자들과 연애를 했다. 남편마저도 그녀를 차지하지 못해 안달해야 했다. 몰리는 알츠하이머에 걸리기 직전까지 현직 외무장관 가머니의 정부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알츠하이머에 걸린 몰리는 몇 년에 걸쳐서 기억을 상실하다가 초라하게 죽는다. 『암스테르담』의 도입부는 바로 그녀, 몰리 레인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다양한 남자들이 모인다. 특히 몰리가 대학 신입생 시절에 사귀었던 작곡가 클레이브, 대학 졸업 후 몰리가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사귀었던 신문사 편집장 버넌은 몰리와 헤어진 이후에도 줄곧 그녀의 친구로 지냈던 막역한 사이였다. 클레이브와 버넌을 보면서 오랜 세월 동안 질투심에 휩싸였던 몰리의 남편 조지는 장례식장에서도 클레이브와 버넌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조지는 다른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만나는 아내 몰리를, 그녀가 병에 걸린 다음에야 비로소 홀로 소유하게 되었다. ‘몰리의 남자들’이 모여들면서 장례식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정신만 온전했다면 그렇게 가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사람이지…….” 버넌 핼리데이가 말했다. 그는 1974년 파리에서 1년간 몰리와 살았다. 버넌은 첫 직장인 로이터통신에 다녔고 몰리는 ‘보그’지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던 무렵이었다. 남자들은 서로 모욕을 주고받으면서 생전의 몰리와 자신이 제일 가까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자 한다. 클레이브는 외무장관 가머니의 보수적인 정책을 비꼬고, 가머니는 클레이브에게 귓속말로 모욕(“마지막으로 만난 날, 몰리가 그러더군. 네가 발기불능이라고. 전부터 늘 그랬다며.”)적인 말을 내뱉는다. 조지는 죽은 다음에야 온전히 자신의 차지가 된 몰리에 대한 독점욕을 과시하면서 연적(?)들에게 보복하려고 혈안이 된다. 버넌은 자신이 혐오하는 보수주의자이며 몰리와의 소중한 추억을 훼손한 가다머를 몰락시킬 계획을 짠다. 몰리의 화려했던 연애는 그녀가 죽자마자 음탕한 풍문과 인정투쟁, 보복으로 변질된다. 몰리의 남자들은 서로를 옭아매면서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3.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신문사 버넌은 몰리의 남편 조지로부터 엄청난 자료를 얻는다. 외무장관 가머니가 여성의 옷을 입고 찍은 적나라한 사진을 손에 넣은 것이다. 버넌은 가머니를 외무장관직에서 끌어내릴 절호의 기회로 여기면서 클레이브에게 달려간다. 클레이브는 밀레니엄을 기념할 교향곡을 작곡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밀레니엄 교향곡은 영원히 기억되는 음악가가 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승부수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업에는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몰리의 죽음과 버넌의 요구로 인하여 클레이브는 평정심이 잃어버린다. 가머니의 충격적인 사진을 신문에 실어서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지닌 가머니를 정계에서 끌어내리자는 버넌에게, 클레이브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가머니를 좋아할 수 없지만 몰리는 그를 좋아했어. 가머니는 몰리를 믿었고 몰리는 그의 믿음을 높이 산 거야. 이 문제는 그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이 사진은 몰리의 것이고 나와도 자네나 자네의 독자들하고도 아무 상관이 없어. 몰리는 자네의 이런 행동을 경멸했을 거야. 솔직히, 자넨 몰리를 배신하고 있어.”(94쪽) 가머니의 여장사진을 게재한 버넌의 신문은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버넌은 편집장 연임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가머니의 부인 닥터 로즈의 현명한 대처로 상황은 하루 만에 역전된다. 닥터 로즈는 불치병에 시달리는 환자를 돌보는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고 남편의 실수를 용서하는 발언을 하는 등 시청자들의 감성을 사로잡는다. 외무장관의 변태적인 면모를 규탄하던 여론은 순식간에 흑색선전을 내보낸 신문사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고 책임자인 버넌은 하루 만에 해고당하고 만다. 클레이브는 경찰서를 드나드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교향곡을 겨우 완성한다.
클레이브와 버넌은 교향곡의 리허설이 열리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재회한다. 암스테르담에서 두 사람은 모두 극도의 절망감에 휩싸인다. 클레이브의 교향곡은 완전히 실패작임이 드러났고 흑색선전의 대명사가 된 버넌은 이제 재기조차 꿈꿀 수 없는 상태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 그들은 사랑했던 몰리의 환상과 마주하지만, 몰리는 팔꿈치의 짧은 통증과 함께 사라진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안락사가 전면 허용된 국가인 네덜란드에서, 그들은 효율적으로 안락사 처리된다. 클라이브와 버넌이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예속되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죽는다.(그들은 서로의 술잔에 독약을 탔으며, 네덜란드 의사들은 그들의 고통을 간단하게 덜어준다) 가머니도 이미지의 추락으로 인하여 정치생명이 끝장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몰리의 남편 조지의 치밀한 ‘반격’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른 봄의 첫 잔디 깎는 기계 소리를 귓결로 들으며 조지의 생각은 엉뚱하게 기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가머니는 넘어졌고 거짓말쟁이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그의 외도를 부인함으로써 마누라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버넌은 갔다. 클라이브도. 몰리의 옛 애인들과의 전쟁을 통틀어 보면 성과가 그리 나쁘지 않다. 지금이야말로 몰리의 추도식을 고려해볼 만한 적기인지 모른다. (204쪽) 4. 이언 매큐언은 욕망의 엇갈림과 충돌을 (홍상수처럼) 분절시키지 않고 끝까지 간다. 이 짧고 강렬한 소설에 대해서 세세하게 언급한 것은 짙은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암스테르담』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차용한 장면이 많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상상하며 분노를 축적하는 남자의 모습은 ‘오셀로’와 닮았고, 사진을 폭로하다가 파멸을 맞이하는 버넌의 모습은 마녀의 유혹에 넘어간 ‘맥베스’와 흡사하다. 독약을 주고받는 장면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패러디다. 또한 버넌과 클라이브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몰리의 환영은 ‘햄릿’의 서두에 등장하는 유령을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굳이 셰익스피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암스테르담』의 인물들은 인간의 이면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허영을 충족하는 기회로 이용하는 버넌과 조지, 가머니의 모습과 도덕적인 태도로 버넌을 공격하면서도, 정작 바로 앞의 위기에 처한 사람은 외면하는 클레이브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셰익스피어가 ‘전형적인 인간’을 주로 다룬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암스테르담』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수많은 ‘클레이브’와 ‘버넌’, ‘가머니’와 ‘조지’가 아우성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대개 『암스테르담』의 네 인물 중 한 명의 속성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물론 네 인물들의 면모를 두루 갖춘 자들도 더러 있다) 상대의 약점이 담긴 ‘자료’을 건넬 시기를 계산하는 자(조지)와 그것을 신나게 폭로하다가 몰락하는 자(버넌), 변태적이고 기만적이지만 가족과 재력을 믿고 버티는 자(가머니), 갈등을 조정하는 포즈를 취하면서 양비론식 ‘물타기’로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자(클레이브). 최근 ‘찌라시 문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전을 보면 누가 어떤 인물에 대입되는지 가늠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몰리’는? 네 남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소유하고자 했던 그녀, ‘몰리’는 ‘기억’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몰리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몰리의 환영과 만난 두 사람의 죽음으로 끝난다. 소설 속의 남자들이 서로 파멸을 기획하는 곳은 (망각과 회상의 장소인) 장례식장이다. 여기서 몰리가 앓던 병이 ‘기억’이 파괴되는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망각하면서부터 타락하는 존재이지 않았던가. 클레이브와 버넌은 죽음의 문턱에서야 그 진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맥베스와 햄릿과 오셀로처럼. 셰익스피어와 『암스테르담』을 관통하면서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전달되는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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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건, 아마도 제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암스테르담’. 얼마 전에 다녀온 도시라서? 혹은 이언 매큐언이란 이름을 들어봐서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우선은 부커상을 수상한 이 책을 먼저 읽는 게 순서다.
몰리 레인이라는 매력적인 여성의 죽음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고 몰리의 연인 관계를 가졌던 인물 넷, 클라이브, 버넌, 조지, 가머니가 있다. 그들은 몰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질투한다. 몰리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확인해 줄 이는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남은 건 현실뿐이다. 집착의 대상이 사라지자, 집착은 다른 곳을 향한다.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그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거의 천재적인 작곡가로, 한 사람은 일간지의 편집장으로, 한 사람은 출판 왕국을 거느린 부자로, 그리고 외부장관으로. 그러나 그 성공에는 확신한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대중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비아냥을 받는 작곡가였고, 편집장이 된 것은 우연찮은 사내 역학 관계 때문에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니고 있지 못했고, 훌륭한 정치 경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의 정치 노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성적 취향도 요상하다.
그들은 상대방의 성공에 숨은 취약점을 명확히 꿰뚫고 있다.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금방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다. 그들이 경쟁할 대상이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은 ‘암스테르담’에서 파국을 맺는다. 왜 암스테르담을 그런 장소로 택했을까? 이언 매큐언은 클라이브의 생각을 빌어 암스테르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이렇게 관대하고 열린 사고를 지닌, 어른스러운 장소가 있다니. 아름다운 벽돌과 조각이 아로새겨진 옛 목재 저장고들은 감각 넘치는 아파트로 개조되었고, 반 고흐가 그린 다리들은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시에서 설치한 거리 시설물은 부자연스레 튀지 않았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다소곳한 아이들은 태운 네덜란드인들은 지적이면서 개방적으로 보였다. 상점 주인들마저도 교수 같은 인상을 풍겼고 거리의 청소부터들도 재즈 음악가 같았다. 이보다 더 질서 정연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180쪽) 이 암스테르담에 대한 인상은 내가 받은 인상과는 매우 다르고, 또 이런 인상이 그들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되는 장소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이유로도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단서는 있다. 개방성.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 중 하나라는 암스테르담에서 자신에 갇혀 있는 이 폐쇄적인 사람들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자신의 잣대로만 타인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이들이 도덕성에 관해서 관대한 도시에서(정말 그럴까는 모르겠다) 서로를 확인하는 셈이다.
도덕이라는 게 그렇다. 인간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그리고 사람은 그 도덕을 자신의 잣대에서 평가한다. 함정은 거기에 있다. 참으로 고약한 상황이다. 이 정교하고 콤팩트한 소설에서 그걸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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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있다. 클라이브와 버논이다. 작곡가와 신문사 편집국장이다. 과거에 몰리라는 여인과 동거했었던 이 두 남자는 가장 친한 친구 사이이다. 내 한국적 사고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 여자와 살았던 남자 둘이 친한 친구라니. 몰리라는 여자는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여러 남자들과 동거를 했던 것 같다. 클라이브와 버논은 현재 몰리의 남편인 조지와 그 밖의 사람들과 몰리의 장례식에 와서 씁쓸하게 몰리를 보낸다.
클라이브는 몇 날 몇 일을 교향곡의 마무리에 매달린다. 마지막 부분을 완성하려고 영감이 떠오르기를 바라며 등산을 하기도 한다. 위대한 작곡가로 남고 싶은 순수한 음악적 열정이 자신을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논은 그 특종사진을 잘 기사화해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고 자신이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클라이브가 추구했다고 생각하는 음악적 열정과 버논이 생각했던 사회를 올바로 이끄는 언론인의 모습은 과연 진짜였을까? 이들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 줄 친구가 필요했다. 클라이브와 버논은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당연히 지지해줄 줄 알고 서로를 찾아갔지만 정반대의 얘기를 듣고 싸우고 만다. 그리고 올바른 길을 말해 준 친구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 나 자신보다 상대방이 나를 더 정확히 바라볼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럴 때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클라이브와 버논은 그렇지 않았다!
고아원에 대한 기사를 고위층에 대한 부담때문에 내보내지 않고 남편에게 맞아 남편을 고소하러 경찰서에 온 아내, 네델란드에서는 의사가 합법적으로 안락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 등은 이 소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이런 것들은 무엇인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왜 작가가 이런 것들을 언급했는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소설 초반에 몰리의 장례식에서는 그런 느낌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 무엇이 천천히 밀려오고 수면 위로 서서히 고개를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저그렇다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작가가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두 남자가 자신의 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는 것이다.
버논이 큼지막하게 특종을 터트렸다. 처음에 자신이 성공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신문사의 그 누구도 그의 편에서 멀어진다. 처음에 버논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 그를 피한다.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가머니와 조지가 비행기에서 대화하는 부분을 읽을 때 그들을 갈겨주고 싶었다. 그렇게 가식적으로 자신들이 죄를 감추고 고인들을 욕먹이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세상은 정말 그런 것일까? 정의나 사랑, 우정 같은 것은 우리 주변에 희박한 것일까? 클라이브와 버논은 서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것도 의심하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만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들은 복지증진, 사형제 폐지 같은 이상을 꿈꾼다고 자신했지만 그것은 허울뿐인 것이 아닐까? 작가는 정의와 사랑과 점점 멀어지는 현대 사회를 뇌사로 죽은 몰리의 장례식처럼 그린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정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려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게 아닐까?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속죄'였다. 여지없이 나를 강타한 소설이다! 두 번째인 '암스테르담' 역시 조용히 나를 흔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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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고지식 한 사람이구나. 한 여자를 서로 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의 지속적인 친구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요즘 말로 이런 걸 쿨한 관계라고 하는 건가. 21세기에, 도덕적이라는것이 고지식하고 가식적으로 받아들여 지다고 해도 내 눈에는 클라이브, 버논 그리고 몰리의 본능에 솔직한 삶이 더 속물로 보이는 걸.
그렇다고 내가 뭐 십계명처럼 따박따박 맞춰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그녀의 ,그들의 사는 방식을 인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불륜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뒤에 남겨진,버림받은 자의 불행을 나몰라라하고 떠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위선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그렇게 비난받아야하는 위선적인 행동일까. 나는,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결국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도덕적이다라고하면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나 연상할 정도로 거북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사는데 걸림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 편집국장인 버논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여장복장 드래그 사진을 신문 1면에 실어 가머니의 정치적 야망을 꺽으려고 한다. 버넌 자신이 혼외정사와 불륜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 가머니의 은밀한 혼외정사와 혼외정사 상대인 몰리와의 유희의 산물인 드래그 사진을 갖고 가머니의 총리 진출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는, 그와 친한 친구인 작곡가 클라이브와 충돌을 빚는다. 가머니의 사생활인만큼 정치적 의도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클라이브와 그 한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더 뚜렷히 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려는 버넌과의 갈등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격렬한 대결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이브 또한 버넌의 비도덕성에 제동을 건 만큼의 인물됨됨이가 안 된다는 것. 새천년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간 산에서 간강의 위험성에 있는 여성을 모른체 했던 것. 이래나 저래나 서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면서 비난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전에 읽은 선현경과 이우일의 <303일의 신혼여행>에서 " 이 곳을 왜 지구의 종말과 비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에서 동심을 그리는 운하을 보고 '지옥의 바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카뮈의 전락도 이해가 갈 만 했다. 썩고 있는 도시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고, 언제 썩을 지 모르느 도시의 건물들이 물 위에 떠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암스테르담(266p)"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곳. 현대파 소돔과 고모라. 이안 맥큐언의 암스테르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모든 금기가 해제 된 천국 같은 곳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뭘? 클라이브와 버넌은 자신들이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안락사가 인정된 암스테르담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만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암스테르담의 합리적인 법체계가 자신들의 살인을 합리화해주고, 도덕성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심은 구원받을 수도 회복될 수도 없을텐데.
도덕인 윤리니 뭐 고리타분한 사회적 규약을 지킨다고 시대에 뒤쳐지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욕망을 다스리면 타인에게 상처나 불행은 주지 않으니깐.
이 작품이 부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의 가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부커상보다는 부케정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흡입력도 있고 문장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 같은데, 오히려 거북할 정도로 장식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클라이브의 작곡부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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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은 comic-tragedy라는 부제에 맞게 씁쓸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몰리라는 한 여자의 죽음으로 모여든 네 명의 남자. 그녀의 장례식후에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지만 결국 그들은 '속 빈 일중독자들'이며, 그녀로부터 위안과 보호를 받은 서글픈 존재라는 것을 각성한다. 이들중 두 남자는 결국 암스테르담에서 죽음을 맞는다. 마약과 안락사가 합법화되어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개인적으로 '암스테르담'과 'tragedy' 라는 이 두 단어를 공통분모로 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예전에 근무한 회사에서 암스테르담시에 살고 있던 한 여자분을 알게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지금의 노보텔 엠버서더 호텔, 예전의 하이얏트호텔 지하의 머피에서 오닐사의 바이어들과 가볍게 레몬을 끼운 코로나를 마시는 캐주얼한 분위기로, 최대한 개인적인 얘기는 삼가면서 그렇다고 비지니스 얘긴 꺼내지 않는 그런 시시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대뜸 몸을 내쪽으로 틀어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걸어왔다. 그 목욕탕 울림 목소리+ 독일어를 하는듯한 쉭쉭거리는 억양으로 말이다. 자기 친구중에 '미옥'이라는 이름의 한국에서 입양된 친구가 있다면서 그 친구 얘기를 꺼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다들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몰두해 있어서 나와 이 여자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 가서 부모님을 찾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입양된 가정에서 힘들었었다. 양부모님이랑 사이가 안좋았다. 뭐 그런 서글픈 얘기를 하는데... 나는 입양아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을 뿐더러 너무 슬퍼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술이 약간 되어 삐리해진 나는 이 말만 계속 해 대면서 그녀의 얘기에 추임새를 넣을 수 밖에 없었다. " That's a tragedy..., that's a tragedy.."
작가의 지식이 상당해 보인다. 신문사의 구조와 언론 플레이를 묘사하는 대목, 작곡가 클라이브가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하는 배경과 곡에 대한 평가, 정치판의 어둡고 더러운 세계를 묘사하는 대목, 위선적인 지식인을 냉소하는 목소리로 묘사하는 대목... 곳곳에 이러한 지식과 심미안 그리고 날카로운 판단이 필요한 주제를 멋드러지게 다루어주는 그 솜씨가 대단하다. - 이 작품으로 1998년 부커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요 사건은 몰리가 찍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은밀한 사진의 공개이다. 그것을 공개한 신문사 편집장 버넌과 이를 적극 말리는 클라이브, 등산을 하다가 악상이 떠올라 작곡을 하는 데 심취한 나머지 성폭행을 당하는 여자를 모른척한 클라이브와 이를 경찰에 고발한 버넌... 여론 플레이에서 처참히 져 권고사직 당한 버넌이 (한 여자의 목숨이 달릴뻔한) 작곡한 곡을 연주하러 간 클라이브를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왔다가, 한 여자를 사랑한 이 두남자 결국 이들은 사이좋은 친구마냥 같이 죽는다. 직업 세계의 묘사와 사회 풍자의 방식이 직접적이지 않고, 독자가 그 묘사를 '느끼게끔' 해주는 이 소설, 썩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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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sterdam :: Ian McEwan 대선을 전후로, [도덕] 에 관한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그것을 네가티브로 적극 활용한 쪽이 "○○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라는 우스갯소리에 밀려 처참하게 완패하자, 당사자들은 물론 상황을 지켜본 다수의 사람들마저 "도덕" 에 대한 혼란, 재해석에 들어갔다. 도대체 "도덕" 이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의 도덕이란 그저 구태적 습관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덕이란 승리한 당선자의 말마따나 각자 나름의 해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일견, 맞다. 분명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의 도덕 관념, 기준이 있다. 심지어 "절대적 가치" 라고 생각 되어지는 것마저 국지적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가령 나는 A를 중요시하고 B를 도외시 하는 반면, 저 이는 B를 중요시하고 A를 도외시한다. 쓰레기 무단투기 하는 사람이 무단횡단은 거리낌 없이 하고, 신호를 착실히 지키는 사람이 분리수거에 게으른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세상 모든 "도덕적 기준" 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어도 나는 그러한 짓은 저지르지 않는다" 며 손쉽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맹렬하게 타인의 비도덕을 비난한다. 타인의 소유물을 도둑질 하는 것은 나쁘다고 하면서도 사회적 불균형으로 발생한 불로소득에 자책감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다. 공중 도덕을 어기는 자에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환경을 파괴하는 소소한 행위들에는 무감각하다. 비도덕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만한 "살인" 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분명 "타인을 생명을 인위적으로 앗아가선 안된다" 에 절대 다수가 동의하지만 사형 제도에 관해선 유보적이거나 강경한 태도를 갖는 이가 적지않다. 이미 살인자들이 도덕을 어겼으니 절대 도덕을 어긴 형벌을 가하는게 마땅하다는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일까. 그것을 "정의" 라 이름 붙히고 뿌듯하게 만족할 수 있다면, 자신은 모든 비도덕에서 벗어나는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인가. 혹은 마음을 정화 시킨다는 "기도" 로서 당위의 착각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인가. 타인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자 날카롭게 한 손가락을 찌른다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겠는가. 물론 횡행하는 비도덕을 지적할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설령 도덕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내어 부딪히게 해야만 도덕의 정의가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대체로 일괄하여 "법" 이라 부를테지만, 법 역시도 사람이 정한 것이라 늘 절대적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지구를 둘러싼 하늘 아래 법으로 사형을 허가한 나라도 있고 그러지 않은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대수롭지 않은 일을 어느 나라에선 철저하게 금기시 하는 일도 많다. 중동 국가에서 히잡을 쓰는 여인들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비도덕하다고 한다면 그 누가 동의할 수 있을까. 그러니 "법" 은 결코 도덕을 온전히 붙잡아 제어할 수 없다. 그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실용적으로 편리한 약속의 기준이라 부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이를 비난하고자 할 때, "위법적이다" 라고 단언할 수는 있어도 "비도덕적이다" 부르는 것은 보다 더 신중해야 한다. 국지적인 제한 아래 다수가 이것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을 어겼으니 비도덕하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준법 정신과 도덕심은 별개로 보아야만 한다. 법과 도덕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면, 혹은 어떠한 일에 대한 판단이 법의 경계를 넘어가는 일이라면, 도덕의 기준은 과연 어디에 두어야만 할 것인가. 내 개인적인 생각엔 "가장 이타적인 마음" 에 있지 않나 싶다. 이러이러한 행위가 개인 혹은 소수의 이기를 위해 작용하는지, 저너머 타인, 다수를 위해 작용하는지를 타진하는 마음에서 도덕의 참다운 정의가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행위이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외면하려 할 때 비도덕의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런지. 버려진 쓰레기를 보고 투기한 자를 비도덕적이다 말하는 이가 그 쓰레기를 직접 치우려 하지는 않을 때, 그는 과연 스스로 도덕적이다 떳떳할 수 있을까. 기득권의 이기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세태를 비난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무리 준법적이라 할지언정 비도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비도덕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우리 자신에 대한 자책 역시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는가. "도덕" 을 운운한 무리가 참패했을 때 우리는 그들 역시 참회가 없었다며 또한 비판하지 않았던가. 아직 그 네 손가락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최근 [속죄(어톤먼트)] 로 재각광 받고 있는 이언 매큐언의 또 다른 수작 [암스테르담] 은 도덕의 기준이 각자 다른 두 남성의 비도덕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중요해 범죄를 목격하고도 외면한 음악가 클라이브와 어느 정치인의 인권을 무시한 사적인 사진으로 부수를 올리려는 신문사 편집장 버넌은 각자 나름대로 저지르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저지르는 비도덕은 도덕이 되면서도 상대의 행위는 비도덕하다 가차없이 단정 짓는다. 오히려 상대의 비도덕을 맹공격함으로 자신의 도덕에 대한 당위성이 더 확보된다는 착각에 빠진다. 스스로를 정의의 자리에 매김하기 위해 어떤 명목을 덮어 씌워서든 누군가를 비도덕의 자리에 대척점으로 둬야한다는 사명감, 혹은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서로를 소멸시키고 제 3자가 어부지리를 본다는 우스꽝스런 결말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오늘도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흠집을 비난하며 자신의 안온한 위치에 흐뭇해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도덕적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발언할 권리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도덕 기준으로 권리를 획득했다가도 타인의 도덕 기준으로 박탈 당하기를 반복하니 권리 여부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결국 자기 기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우리가 도덕을 이야기할 때, 자아성찰을 전제로 해야 관념으로서의 도덕이 아닌 행위로서의 도덕이 실현되지 않을까. 자신이 "안 하고" 있는 행동으로 스스로의 도덕을 판단해야 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으로 비도덕의 모습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늘 우선일 수 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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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시상식과 98년 맨부커상 수상작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아카데미 수상작이라고 모두 재밌을 리 없다.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중 하나인 크래쉬 같은 영화만 보더라도 그 평범함에 치가 떨린다. <킹스 스피치>, <슬럼독 밀리어네어> 음 뭐 그렇다. 미국 정치 사회논리에 영향에 수상작이 선정되는 경우가 허다해 과거의 권위를 되찾기 힘들어 보인다. 대중들은 이제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에 대한 피로감이 넘치기 직전까지 차 있는듯하다. 관객들은 오히려 페이스북의 좋아요 횟수를 더 신뢰한다. 시상식은 그저 심심풀이 땅콩으로만 예측해볼 뿐이다. 예술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칸과 베니스, 베를린 등 해외영화제 수상작이 작품의 품질보증마크가 되지 못한다. 비평의 기준과 개개인의 취향이 충돌하는 현재의 상황들을 넘어 영화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지경이 되었다.
문학으로 눈에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4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파트릭 모디아노는 수상 직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실 그가 무슨 죄가 있을까. 그에게 상을 준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시스템을 의심해볼 뿐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많은 팬을 거느린 훌륭한 작품이지만, 과연 이 작품이 올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 말이 필요 없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영미문학의 터줏대감 필립 로스 같은 작가들보다 더 받을만했는가 질문해보면 답이 안 나온다. 이건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아닌 다수의 취향을 무시한 처사라는 분개에 가깝다. 심사의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평가했겠지 뭘 시끄럽게 하느냐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월드컵 개최지 선정도 아니고 지역별 분배논리가 작품의 수준보다 더 우선에 있다는 게 실망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노벨상 수상작가들 중 사실상 듣보에 가까운 작가들이 수두룩하다는 점도 이 우려를 설득력 있게 한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올해 14년 노벨상 수상의 영광과 함께 출판사 문학동네의 대대적인 마케팅과 함께 판매를 하고 있다.
내가 도서수상작 중 신뢰하는 상이 있다면 그것은 영국의 부커상이다. 매년 영국연방 국가에서 출간된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주는 문학상이다. 이 상은 그간 영국과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작가들만이 대상이었으나 올해부터 미국인 등 다른 영어권 작가들에게도 개방됐다. 노벨상처럼 세계 대륙을 분배하지 않고 심사위원과 독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상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과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지만, 두 문학상과는 다르게 인지도는 높지 않다. 우리가 알만한 작품으로는 대표작 《속죄》로 한국출판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가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영화화 되어 유명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가 있다. 그밖에도 최근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살만 루슈디의 걸작 《한밤의 아이들》이 있다. 남아공 출신의 작가 존 쿠페(존 쿠체)는 《마이클K》(1983)《추락》(1999)로 최초로 두 번 이 상을 수상했다.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소설 탑 10 중의 대부분의 작품이 부커상 수상작들이다. 영국의 대형출판사인 부커사가 주관하는 이 상의 특징은 바로 대중성에 있다. 문학적 실험정신과 대중적 호소력을 같은 잣대로 심사한다. 왠지 밀어주면 더 잘 팔릴 것 같은 책을 발굴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커상 수상 작가는 자국 내의 명성에 머물러 있다가 수상 이후 전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대중성이 큰 몫을 차지하다보니 한국출판사들도 부커상 수상작이라면 믿고 출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98년도 부커상 수상작인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을 최근에야 읽었다. <속죄>와 <체실 비치에서>를 읽고 이언 매큐언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진 상태였다. 암스테르담은 다른 소설과는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좀 얕게 평가하자면 일종의 습작처럼 쉽고 빠르게 읽혔다. 5막의 250페이지의 짧은 분량 안에서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작품에서 언론, 예술, 정치, 기업 각 분야에 종사하는 남자들은 한 여자를 둘러싸고 헛된 자존심 싸움에 한창이다. 말다툼과 법적 분쟁, 치열한 자존심 싸움이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서로 자신이 가장 그녀를 잘 아는 남자라며 수컷으로서 위용을 과시하려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에겐 작가의 사랑을 못 받는 멀찍이 떨어진 존재다. 서로의 영역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자기기만의 늪에 빠져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이 작품은 끝내 두 명의 남자를 죽이며 끝을 내지만, 필연적인 구조적 희생이었을 뿐이다. 작품에 그득한 조롱과 멸시에 분위기는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지구에서 가장 태평한 도시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귀퉁이 골목에서 안락사로 처리되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언 매큐언은 이들에게 단 한 치도 애정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발자국 물러서서 마치 인터뷰를 하듯 인물의 가슴과 눈이 아닌 허위에 가득 찬 위선을 조망하고 있다.
디테일한 직업적 묘사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재미다. 특히 언론사의 생태계를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해내는 탁월한 대사들은 긴장감과 함께 특유의 동력을 불어넣는다. 이것은 그의 소설 <속죄>에서 전쟁에 끌려간 남자주인공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언 매큐언은 부가적으로 보였던 것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고 오는데 절묘한 솜씨를 보여준다. 언론사에서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현 외무장관의 동성애 스캔들을 도마 위에 올릴 것인가를 두고 판매고와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려하는 말다툼이 흥미롭다. 언론이라는 사회적 지팡이 노릇을 하는 기관이 어느 지점까지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나머지 하 축인 음악가 친구에 대한 묘사가 별 감흥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잡지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이언 매큐언에게 신문사 편집장에 대한 직업묘사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란 사실을 예측해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죽은 몰리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녀에 관해 한마디씩 보태며 그리움을 표출한다. 그녀는 남자들의 입으로만 형상화되는 사자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오히려 산 자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 한때는 세계적인 작곡가 클라이브의 연인으로서, 또 신문사 편집국장이자 클라이브의 절친인 버넌의 동거녀로서, 그리고 외무장관 가머니의 정부로서, 죽기 전에는 출판재벌 조지의 아내로서 그녀는 살았다. 그녀는 줄곧 거기에 없었지만 그 곳의 공기를 부유하는 유령이었던 셈이다. 그녀를 향한 추억과 회한이 작품 전체를 감싸 앉는다. 끝에서는 범죄의 동력의 살인의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언 매큐언은 지극히 사회 풍자적이고, 다소 들뜬 분위기의 이 소설을 통해 말과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남자들 간 일종의 헤게모니 다툼을 중계하고 있다. 그 천진난만하고 바보 같은 쇼맨쉽들을 통해 인간 감정의 복잡 미묘한 양상을 소설을 읽는 백미로 만들고 있다. 이런 형식적 실험과 도발을 겁내지 않는 공격성은 부커상이 추구하는 참신한 발굴과 잘 어울려 보인다. 역시 부커상에 실망은 없다.
소설은 제목처럼 암스테르담에 이르러 끝이 난다. 비극도 희극도 아닌 필연적인 귀결처럼 보이는 결말에 허망해 하지 말 것. 암스테르담의 물길이 도시 곳곳의 핏줄이 되어준 것처럼 삶의 종말은 암세포처럼 퍼져나간다. 얼굴을 만져봐야만 부재감을 떨칠 수 있는 남자와 직업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살인마저 방관해버리는 이기적인 도시. 섬뜩하고 치열한 이 느낌들이 내 감정에 큰 상처를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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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년 암스테르담 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인터뷰에서 서너시간만에 읽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두께감도 없는 책이었건만 쉽게 몰입이 안되었다.
몰리의 장례식장에서의 4명의 친구 아니 애인들
저마다 탄탄한 앨리트 계층들.가머니의 한장의 사진으로 몰고온 파장
버넌과 클라이브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서로에게 최후를 맞이하도록 돕고.
가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고
조지는 몰리의 추도식을 생각하고
몰리의 4명의 애인들 중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가머니? 조지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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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성격이 못되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블랙코미디 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주인공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장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회가 가진 모순이 충돌해서 발생한 것이거나, 인간 본성의 약점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블랙코미디는 어쩌면 소설이라는 일종의 허구를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하게 했던 힘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은 인간 본성에 숨겨진 추악한 양면성과, 그 양면성이 사회적 위치와 결합되어 나타난 도덕이나 사회적 모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그야말로 신랄하게 까고(!!!) 있는 시원한 작품입니다.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사회적 현상 뿐만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이란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고 있는 도덕 역시 교묘하게 ‘구성되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죠. 착하게 살아야 하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만합니다. 그런데 ‘국민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살아야 한다,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오면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군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나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데모나 파업은 나쁜 것이다’라는 도덕에 오면 이것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도덕이나 사회적 규범이란 이런 것입니다.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또 누가 그것을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모두 ‘비도덕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고, 또 이지메 현상에서 보이듯이 단순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 폭력이 가해지는 광기로 치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암스테르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도덕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도덕의 위대함은 다른 상대방이 가진 도덕의 정당성 앞에 빛을 잃게 되고 위선으로 몰락해 버립니다. 클라이브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세계,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따라서 각자의 다른 취향을 인정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라는 대중매체로 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하는 버넌의 행각은 부도덕합니다. 그럼 클라이브가 행한 일, 즉, 강간미수범을 신고하지 않은 일은 개인의 취향이라는 도덕성으로 가려질까요? 버넌은 언론인으로서 공인인 외무장관의 독특한 취향을 알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도덕적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황색저널리즘으로 비하하거나, 불의를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이런 버넌의 고상한 도덕성 이면에 외무장관 개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죠? 조지에게 아내인 몰리와 과거에 사귄 남자들은 모두 부정직한 사람일 수 있겠죠. ‘결혼의 신성성’이라는 신화와 같은 도덕율을 어기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조지가 취한 사진의 공개라는 조치는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 재력을 바탕으로 한 특수관계를 이용해서까지 말이죠. 외무장관 가머니는 자칫 사회적 생명을 잃을뻔한 위기를 아내의 도움으로 일단 극복합니다. 클라이브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그의 취향은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지나 아내인 로즈 앞에서는 어떨까요? ‘남의 아내와 놀아난 놈’이라고 비난한다면 가머니는 무엇이라 답합니까? 자신과 관련없는 아내의 힘으로 자기의 책임을 모면한 것은 고도의 이미지전술이 아닐까요? 그리고 버넌을 배신한 프랭크나 버넌의 성공을 배아파하며 떡고물이라도 기대하다가 일순 도덕의 투사로 변신하는 다른 언론사들도 자신이 외치는 도덕의 그림자 속에 지저분한 자기합리화와 자기정당화를 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지막 배경으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것에 대해 서평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 지적대로 네덜란드는 안락사, 낙태, 동성애, 매춘 등이 허용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안락사, 낙태, 동성애, 매춘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어떻습니까? 전통적인 도덕에서 이런 일들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그야말로 ‘비도덕적’인 일들입니다. 입으로 지고지순한 도덕을 외쳤던 사람들이 ‘비도덕적’인 곳에 들어가서, 가장 비도덕적인 방법인 ‘살인’을 통해 자신의 솟구치는 분노와 복수심을 해결하여 했다니... 역설적이지만, 그 도덕은 근거가 얼마나 허위적인 것이었나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이든 일정 기간이든 ‘비도덕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게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명저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배척 이상의 ‘변화’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마음과 행동만은 잊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