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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손에 잡는다. 소파에 삐뜨름하게 누워서는 책을 읽을 때 나의 새벽은 서서히 아침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루중에 가장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이다. 글을 쓰고자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말 못할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젊은 날에 한번이라도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학과는 담쌓고 있었던지라 사십이 다 되어서 쓰려고 하니 이것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늘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유의 느낌이 좋았고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무언의 언어들에 취할 정도로 좋았다. 그런 사유의 바닷 속 을 헤험쳐다니다 보면 때론 장애물이 와서 부딪히기도 하고 누군가 던진 돌에 맞기도 하지만 사유의 힘은 그 아픔마저도 잊게 해주는 것 같다.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다.
이 책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작가 아홉 명이 풀어놓은 자신의 삶과 책 이야기이다. 아직 책읽기와 글쓰기의 낯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9人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란 무엇일까? 김용택시인은 책을 통해서 사는 게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 알았다고 한다.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인생이 시작되었고 책을 따라가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삶은 허망한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별것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이기를 버린다는 것을 알았다.(p29)
도종환 시인은 글을 쓰게 되면 우리의 눈은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간파해 내는 눈을 갖게 된다고 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대상 하나하나와 긴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하며 대상과 나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며 내 앞에 있는 장미꽃이 나와 새로운 관계를 갖기 시작하는 장미꽃이 되는 것이다. 이에 나자신도 그러한 눈으로 바라보게 될 때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 어느 날 문득 일상 속에 묻혀 사는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사물, 일을 만나고 그것들이 그 일상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게 하고, 그 거리에 서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 그것이 글인 것이다.”
서정오 작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될 때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고 한다. 공연히 어려운 말로 젠체하는 글이 아니라, 삶 속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내 생각과 내 느낌과 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글을 써야한다고 한다. 말과 글에 진심이 담기면 저절로 쉬워진다고 한다. 따라서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작가들은 사회가 어떻게 병들어가는지 , 어디서 허물어져 가는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서 그것을 대중에게 두루 알려주어야 좋은 사회가 된다고 한다.
안도현 시인이 말하는 글쓰기는 "나’라는 인간을 하나씩 뜯어고쳐 가는 일이었으며, 문학에 의해 변화된 ‘나’가 흔들릴 때마다 문학은 초발심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매서운 매의 역할을 했다. 문학은 엄하고 무섭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문학을 가르쳐 준 세상에 대해 고맙다고 생각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읽고 쓰는 것, 그것은 이 세상하고 연애하는 일이라며 문학은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번도 글을 써 본적이 없으나 40대가 다 지나서야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서 썼다는 우애령 작가의 이야기 또한 인상깊다. 사회복지원에서 만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의 영혼을 자신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욕구가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녀는 지금도 인간이란 운명에 맞서 싸울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한 무력한 존재인가? 하는 의문에 답을 하고자 절망에서도 일으켜 세우는 사랑과 삶의 의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의무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책속의 것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오롯이 내 것이 되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럴때면 머릿속에 무언가 강한 울림이 퍼지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을 토해내는 것이 글쓰기이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이 책을 읽는 것은 삶의 풍요를 위한 훈련이라고 했듯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며 그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마음속에 싹이 틀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풍요로와진다고 한다. <내 인생의 글쓰기>의 9人의 작가들은 책읽기를 통한 그런 감동으로 남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서정오 작가는 온 국민이 글을 쓰는 나라가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라고 한다. 글쓰기의 민주화는 쉬운 말과 글에서 시작된다. 책은 조그마하고 얇지만 그 안에 들어가있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많은 배움이 있는 책이다. 문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작가의 선한 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주옥같은 그들의 생각은 두고두고 곱씹어 삼킬 만한 교훈들이다. 바른 책읽기와 바른 글쓰기를 하고자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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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꿈을 꾸는 나이는 지났다고 자신을 비하시키기에 나이든 삶은 아픔이 있다. 그래서 장년기의 남녀는 눈물이 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며 그들은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아니야 늦지 않았어, 얼마든지 난 새롭게 비상할 수 있어?”라며 자신을 격려하며 주문을 건다. 그 주문이 통하는지 나이에 상관없이 꿈을 꾸는 순수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서드에이지’의 보너스 인생을 살고 있는 장년기의 삶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다시 비상할 수 있다.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이라는 프로를 보며 눈물을 글썽인 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들을 이겨내고 다시 꿈을 이루어 가는 모습이 주는 감동 때문이다. 어느 인생이 경부고속도로처럼 언제나 반듯하고 쾌속질주만 했을까?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나 혼자만 가장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한다. “맞아!, 누군들 힘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힘든 이야기를 들으면 혀를 찰지는 모르지만 감동 하지는 않는다. ‘내 인생의 글쓰기’라는 얇은 책을 읽으며 몇 번씩이나 행간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이유는 글 쓴다는 것이 아픔으로, 아니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20대 시절을 추억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괜찮은 추억은 술에 관한 것이다. 술 자체만의 추억이라면 주당이라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겠지만 글을 쓰기 위한 아픔으로 위장하면,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감동한다. 그러기에 20대 시절의 무용담은 자랑거리고 자신을 포장할 수 멋진 소재가 된다. 정말 한 때는 내 인생이 글을 쓰기 위해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무늬는 비슷했지만 호박과 수박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호박에게도 수박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는데 그것이 꿈이다. ‘내 인생의 글쓰기’는 이 분야에서 한가락 한다는 문인들의 지자랑 으로 가득한 책이다. 그러나 역겹지 않은 것은 글이 자신의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주의해서 행간을 읽어본다면 지자랑은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가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진실한 자기고백이 글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글쓰기’가 정겹게 다가온 이유는 나 자신이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갈 때쯤이면 이들도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며 그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절망의 시간들을 벗어났을 때 그들의 이름은 순차적으로 밤하늘의 별처럼 하나씩 하나씩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덧 우상처럼 숭배 받는 존재로 바뀌고 말았다. 한때는 나 자신도 그들을 우상으로 섬긴 시절이 있었기에 그들의 내적인 고백을 읽으면서 내 젊음의 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외할머니의 집에서 이광수의 ‘사랑’을 이불속에서 몰래 읽으며 플라토닉 사랑에 꿈을 꾸었던 것처럼 김용택 시인도 이광수의 소설을 읽으며 눈물지었을 것이고 박봉의 월급 때문에 월부 책장수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 당시 책 꽤나 읽었던 인물치고 월부책 구입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 자신도 ‘이어령이나. 김형석, 안병욱, 김찬삼’의 책들을 월부책으로 구입하고 그것을 값아 가면서 젊음도 늙어갔던 기억이 있다. 시대가 변하여 지금은 월부 책장사가 사라진 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그 시대는 매우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책에 대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더 아픈 것은 그렇게 힘들게 산 월부책이 하룻밤의 술값으로 사라졌을 때가 아닐까 월부책 장수로부터 책을 구입한 김용택 시인이 부러운 이유는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은 시작되었고 나는 책을 따라다니며 글을 썼다. 그 길고도 긴 인생의 길이 책속에 있었던 것이다.’ (30쪽) 자신이 읽은 젊은 날에 책속에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안 시인은 평생 섬진강을 떠나지 않고 책을 읽으며 평생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기에 지금도 시인의 얼굴에는 소년과 같은 맑은 미소가 있다. 세속과는 거리가 먼 삶이 부럽다.’ 한 장소에서 한 가지 일을 하며 자신의 내면을 성숙시키는 삶‘ 그 변함없는 깨끗한 마음 때문에 시인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 형님(김원일)의 그늘 때문일까 소설가 김원우는 대중들이 기억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글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만사에 철저히 무능해서 글쟁이가 되고 말았다면 믿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곧이들어도 무방한 사실이다.’ (33쪽) 물론 자신에 대한 겸손처럼 보이지만 한 줄을 더 읽어 가면 자랑이다. 자신에게 장기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책읽기’라는 것이다. 내일 집을 이사하기에 난생 처음으로 부동산 중계소에 가봤다. 아내가 돈을 건네주며 11시에 계약을 하라기에 가서 돈만 건네주면 되는 줄 알고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더니 중계인 아줌마가 놀래며 “일찍 오셨다!”고 한다. “예” 하며 주섬주섬 돈을 꺼냈거니 상대방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웬 상대방!” 계약이기에 반드시 양자가 함께 앉아 서류에 사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하나 배웠다. 그런데 김원우의 글을 읽으면서 화가 나는 것은 나는 글쟁이도 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인생의 글쓰기’에는 ‘자신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글을 써야만 하는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펼쳐놓은 책이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친구들 대부분은 나름대로 자신의 독서력에 대하여, 또 글쓰기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도취되는 나르시스와 같은 욕구가 없다면 애당초 블로그에 글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호수의 백조처럼 우아하지만 속으로 숨찬 힘찬 발걸음을 계속하는 이유는 한편의 글을 통해 나 자신이 백조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쓰는 것이 아닐까
그 이름 때문에 친숙한 문인들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은 인생의 본질에 눈뜨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왠지 내 삶이 너무 통속적이고, 너무 가벼운 삶이란 생각이 들 때 부끄러움이 찾아온다. 왜냐하면 아직 이 시대는 외로움을 친구로 삼아 홀로 깨어 문학의 숲으로 들어가는 글쟁이들이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은근히 부럽다면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 이 시대에 외롭기 때문에 글쓰는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외로움은 삶의 본질에 눈뜨게 되었을 때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 삶은 최소한 우리 시대가 소망하고 있는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다는 증거다. 소수가 가는 길에 자신도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은근히 자부심으로 다가 온다면, 또 블로그에 어쭙잖은 글 하나 올리기 위하여 밤을 새우다 시피 한다면 당신은 글쟁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 자신도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구나?” 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에 글쓰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일독을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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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맴도는 ‘소리’를 가슴에 은밀히 쌓아둔다는 것. 작정하고 발음하면 금세라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소리, 소리들. 해서 그 무수한 소리아름 주변을 나는 얼마나 알짱거리며 맴돌았던가. 새 것일 때 받았던 관심이 슬며시 그 밖 언저리 어디쯤으로 밀려날 때의 상실감과 비애. 지금은 헌 것이 되어 막연히 누군가의 펜 부림을 기다리는 노트 몇 권. 방바닥에 엎드려 그 중 한 권을 펼쳐놓고, 쌓아두었던 소리들을 모조리 쏟아냈을 때의 희열. 이건 기다림에 지친 헌 노트와 묻혀 골동품이 될 뻔한 내 가슴속 소리에 대한 벅찬 보상이라 할 것이다. 물론 헌 노트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그 옛날 유년시절처럼 지속적인 건 아니다. 몇 자 끼적이다 결국 몇 분도 안 돼 컴퓨터 앞에 앉고 마니까.
몰랐다. 글쓰기란 무엇이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이며 내가 이토록 글쓰기에 매달리게 될 줄은. 어려서부터 밀리고 밀린, 발음하지 못했던 그 수많은 소리들의 몸부림이 이런 형식, 즉 글쓰기란 형식을 통해 사정없이 폭로될 줄은. 때늦은 깨달음은 끝없는 후회를 하게 만들었고, 다행히 그것조차 글로 휘갈길 수 있게 돼버렸다. 이렇듯 현재 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대변하는 이 놀라운 소일거리(글쓰기)가, 요즘 ‘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렇다. 상당한 두통을 수반하는 이 미친 즐거움이 나는 좋다. 앞으로 더했으면 더 했지 덜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해도 좋다. 이래미치나 저래미치나 매 한가지라면 원 없이 미쳐 끼적여보자는 생각이다.
글벗이란 말을 참 즐겨 사용한다. 얼마나 예쁘고 고운 우리말이던가. 글벗이 선물한 [내 인생의 글쓰기]란 책이라서인지 이유 없이 사랑으로 충만해져 버렸다. 만약 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생이란 게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글무더기에 빠져버릴 거다. 그때 몇 명의 글벗이 함께 빠져준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으리. 아홉 명의 글쟁이들의 글쓰기 인생을 살짝 들여다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중엔 나와 비슷한 삶을 걸어온 이도 있고, 너무 달라서 오는 이질감에 대한 묘한 호기심도 발동했다. 대부분은 미친 듯이 책읽기에 주구장창이었던 글쟁이들의 예상된 운명에 백기를 든 케이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에야 흔하디흔한 종이책에 E북에 각종 매체가 흔전만전하지만, 그들의 피 끓는 영혼이 살았던 때는 책이 귀했던 시절이지 않은가. 여튼 그런 경로와 상황 하에 시인, 소설가, 모 출판사 편집자나 신문 기자 등등. 진로의 방향이 조금 틀어지는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의 S극이란 영혼이 또 다른 S(글)극을 향해 고속질주한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만사에 철저히 무능해서 글쟁이가 되고 말았다면 믿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곧이들어도 무방한 사실이다. 더욱이 이 엄연한 사실조차 세상살이가 갈수록 시드럽고 따분할뿐더러 역겨워지는 최근에서야 깨달았으니 역시 내 무지몽매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어릴 때부터 얼마나 얼치기였는지 새삼스럽게 열거해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듯하다(P33).
개인적으로 소설가 김원우 씨 인생단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은 눈매며 단단한 고집스러움으로 똘똘 뭉친 듯한 입술모양새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글쟁이의 보편적 자긍심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얼핏 심드렁한 자백처럼 들리지만, 본서에서 발췌한 위의 문장은 영혼의 중력이 이미 활자사랑이란 우주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그를 내던져놓은 결정적 단서로 보여진다. 자, 이제 네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지켜보겠어, 라는 말과 함께 그의 ‘자아’는 스스로의 향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공부도 내팽개치고 남독의 세월을 만판으로 즐겼으며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외국영화를 감상하는 등등의 탈선행위 말고는 어떤 다른 취미를 찾을 염도 안 생겼다(P37)는 문장으로 봐도 꼭 그렇지 않은가.
고통과 상처를 동반하는 심신의 가난이 깊고 넓을수록 글쟁이들의 영감은 꿈틀댄다. 허니 그것들이야말로 글감의 훌륭한 재원인 게다. 그래서인지 설령 상식과 도덕에 벗어난 사고방식일지언정, 나는 그들의 고독한 한눈팔기와 탈선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사고의 전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거다. 이 너무나도 쉽고 통속적인 사고의 방향키를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한눈팔기는 ‘전체보기’가 되면서 ‘통찰력’이 되는 것이고, 탈선은 ‘독특한 경험’이 되면서 ‘다양성’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평범의 기준과 범위를 규정한다는 게 애매모호하지만, 적어도 글쟁이에겐 평범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는 걸 전제하면 글쟁이란 자고로 어떤 틀이나 형식에 부응하기 보다는 개혁이나 혁명의 폭탄을 늘상 안고 산다는 것이다. 그 잠재된 꿈틀거림의 이상적 발화가 자신과 더불어 사회나 국가, 나아가 세계란 대로를 뚫었을 때 그들의 진가는 발휘된다.
조금은 궤도를 이탈한 듯한 그들의 인생역정이 곧 먼훗날의 내 모습이며 현재 나에게 힘찬 용기와 진한 위로가 된다 생각하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확신은 없다. 뭐가 되어야지라는 생각이 자아실현이란 이름표라면, 아직도 난 그 이름표를 포기 못하고 있다. 무지에 대한 자책과 신세한탄으로 허송세월을 흘려보내는 것마저도 활자로 기록할 수 있음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조금은 진짜 어른이 된 듯하다. 더불어 곁에서 늘 파이팅을 외쳐주는 벗들이 있어 행복한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거나한 즐거움이 아닐쏘냐. 자주 옆길로 새는 글쓰기면 또 어떠랴. 그냥 이대로가 좋은 것을. 나 또한 현재를 즐기는 모든 벗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며 마쳐야겠다. 무엇이 되지 않은들 어떠하리. 그대들이여, 충분히 울고 아프고 상처 받고 미쳐라, 그 만큼 성숙할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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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글쓰기 】 김용택 외 / 나남
이삼년 전부터 ‘글쓰기’ 열풍이 불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책도 많이 나오고, 글쓰기 강좌에도 수강생들이 몰리고 있다. 아울러 손 글씨 쓰기도 한 몫 한다. 이 모두가 IT 기기들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손안의 컴퓨터 ‘스마트 폰’은 우리 삶의 양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엄지족 시절엔 문자나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으나, SNS 시대엔 글 쓰는 솜씨도 빛이 나야 ‘좋아요’를 한 번이라도 더 받는다. 좀 더 욕심을 내면 블로그를 만들어서 파워 블로거 소리도 듣고 싶다. 더더 욕심을 내면, 나도 책 한 권내고 싶다 라는 마음까지 이어진다. 좋은 현상이긴 하다. 글을 쓰겠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단 그 내용이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는 마음의 칼날을 꺼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앞서 상황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이름 석 자 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은 시인, 소설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글을 쓸까? 그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초대 손님들은 시인 김용택, 도종환, 신달자, 안도현 그리고 소설가로는 김원우, 성석제, 안정효, 우애령 등과 서정오 아동문학가이다.
김원우 작가는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숱한 고행과 쉼 없는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 도종환은 ‘글을 쓰게 되면 내 앞에 있는 장미꽃이 나와 새로운 관계를 갖기 시작하며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난다’고 한다. 아동문학가 서정오는 ‘두려움을 덮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부탁한다.
글쓰기와 독서는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김용택 시인이 잘 표현해줬다. “헌책을 사서 읽기를 몇 년, 내 생각은 푸른 나무처럼 자라났고, 산처럼 솟았다.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은 복잡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하니, 자연히 그 복잡한 것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의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왜 헌책인가? 아주 작은 산골 마을 초등학교 선생님인 김용택 시인의 젊은 시절은 헌책이 유일한 벗이었다.
역시 책을 읽다가 글을 쓰게 된 소설가 안정효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변(辯)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내려온 비행사의 얘기를 내 손으로 써보고 싶었다.(...)나는 산티아고 노인이 바다에 나가서 겪는 시련을, 그리고 패배를 통해서 승리를 맛보는 상황과 순간을 나의 상상력만 가지고 마음의 허공에 그려보고 싶었다.” 『치유의 글쓰기』를 쓴 셰퍼드 코미나스가 생각난다. 50년 넘게 일기를 쓴 사람이다. 젊은 시절 편두통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일기 쓰기는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글쓰기로 발전했다. “글쓰기는 자기 안에서 기쁨을 찾아내게 해주는 한편, 슬픔과 갈등의 경험과 직접 대면하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을 써야만 글이 아니다. 내면의 울림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단지 그것을 공개로 할 것인가, 비공개로 할 것인가만 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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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연구의 일환으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수필의 원전을 찾아 보았다. 김용택의 '책을 따라 다니며' 는 중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박영사(송하춘) 교과서에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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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글을 쓰게 된 동기의 체험 이야기가 대개 비슷했다. 좋은 글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학가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 축복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써서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마음을 치유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성석제 씨가 마지막에 한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모래밭 이야기 그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일까? 어디에서 읽은 것일까? 마치 꿈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좋은 꿈은 꿈 이야기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고요하고 잠잠하게 만들어준다.
그 지방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출구가 없고 입구도 없다. 그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그 지방에서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변두리에서 태어나 차츰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최후에는 가장 안쪽에서 죽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바깥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금기다. 남처럼 변두리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들처럼 죽기 위해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다가 어느 날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 산과 하늘밖에 없는가. 살거나 죽는 일밖에 없는가.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왜 출구가 없는가. 왜 아무도 오지 않는가. 입구가 없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왜 당연한가.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밖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산으로 갔다. 산에는 '입산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는 팻말을 거꾸로 돌려 '지금 산으로 들어감'이라는 뜻으로 바꿔놓았다. 산에 올라서자 바다가 보였다. 바다다! 그는 바다라는 말을 몰랐지만 그게 바다인 줄은 알았다. 그는 잠깐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주름이 잡히듯이 천천히 안으로 밀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다시는 그곳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 가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공처럼 산을 굴러 내려갔다. 몸 어딘가가 긁히고 부딪히고 깎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바다에 이르렀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갔다. 그는 두 손을 번쩍 치켜 들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 숨을 헐떡거리며 바닷가를 뛰고 뒹굴기도 했다. 파도는 밀려오고 밀려갔다. 파도가 밀려와 그의 구두를 적셨다. 그의 양말을 적시고 발목을 덮쳤다. 문득, 그의 몸은 가벼워졌고 또한 무거워졌다. 발목 아래가 모래로 변했던 것이다. 파도는 그의 발목과 함께 밀려갔다. 다시 파도가 밀려왔다. 그의 무릎 아래가 모래로 변했다. 그는 꿇어앉은 것처럼 보였으나 이미 무릎이 없었다. 그는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와 그의 배를 적시자 그는 모래밭에 파묻힌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가슴이 모래로 변했다. 마지막 숨을 쉬기 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래밭은 자신처럼 산에서 뛰어내려운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그는 모래로 변해 모래밭에 섞였다. 파도는 밀려오고 밀려갔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 책을 통해 이 이야기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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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합니다. 나는 쉬운 여잡니다. 쉽게 빠져듭니다. * 얼른 반납하고 주문해서 새로 읽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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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는 말이 있는 것은 한번쯤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 글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렇더라도 한번쯤 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했던 것을 자랑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비슷하게 쓸 때가 많아서 그런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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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구경하다 눈에 띄어 빌려온 책이다. 정혜연 피디님의 <침대와 책>을 읽을 때에도 독서에 엄청 자극을 받았었는데. 비슷한 느낌이다. 결국 좋은 글쓰기란 좋은 독서력에서 나온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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