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대학도 들어가기 한참전에...이 책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읽은 영원한 제국 덕에..이인화에게 반한 나는 조금 길기도 한 인간의 길을 읽고...나중엔 초원의 향기마저 보려하다,,길어서 포기했다 대학시절은 일없이 바쁘기때문에 책읽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기때문에 이 책을 발견치 못하고 졸업하였다 재작년 우연찮게 표지도 유치한 이 책을 읽게되었다. 그리곤 아주 오랜만에 잠시 멈짓했다. 그의 첫소설이였다는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려는데도 난 멈춤에서 깨지지 않더라. 주인공의 혼란이 나에게 확 덮쳐버린채로..소설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젊은 시절에..(짐도젊지만) 겪은 그 초조와 불안이 다시 느껴지는 소설같지 않은 소설이였다 단숨에 남의 순수를 읽어버린 후의 유쾌하지 못한 감정. 그렇게 느꼈던 거 같다 남의 가슴을 엿보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진실을 보았을때 느끼는 적잖은 흥분은 소설이 소설같지않을때 가지는 덤같은건가.. 말이 자꾸 꼬여서 이만 줄임- -; |
| [내가 누구인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제목의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비교적 쉽게 읽히는 소설이다. 의대를 나왔음에도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주인공 은우의 모습은 사회가 요구하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해 걸어가는 386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외의 등장 인물들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386세대의 전형들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이 10여년 전이기 때문일까? 지금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조금 낡은 느낌이 들지만, 그들의 신념, 절망, 고민등이 사회적 현상들과 맞물려 어떻게 표출되는지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의 구성은 개성있는 인물들을 향한 몰입을 방해하는 구석이 적지 않다. 액자 소설도 아니고, 이런 구성을 무어라고 하는지 학술적인 지식은 없지만, 소설은 소설일뿐, 제3의 인물인 작가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픽션으로써의 소설의 역할이 더 공고해졌으리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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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일컫어지는 현대사회에서 욕망하는 존재인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대상화되고 파편화된다. 이러한 개인의 분열은 분편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원자로 화한 개인의 모습이다. 환상과 실재는 이미 무너졌고 그 안에서 계속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가는 꿰뚫어보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환상인가? 실재인가? 욕망인가? 이 작품은 '소설쓰기에 대하여 쓴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 자신을 드러내며 현실과 허구를 동시에 넘나들고 있다. '어떻게 쓸 것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 있다. 작가의 자의식적 고뇌는 독자에게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된다. '소설이 안 돼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저자의 등장은 미메시스의 죽음을 인식한 현재를 사는 작가에게 드러난다. '소설쓰기'에 대한 고민을 여과없이 직접 투영함으로써, 독자에게 직접 손을 내미는 이러한 방식은 작가라는 위치의 지배적 권위를 해체하고 대중에게 한 발 더 다가서려는 전략으로 비춰진다.
작가는 이 작품에 여러가지 포스트모더니즘적 장치를 직접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작가의 세계인식과 밀접하게 맡닿아 있는 것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새로운 소설읽기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 반영적이고 메타픽션적인 특징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작품의 해석이나 접근보다는 어떻게 비평을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가진 소위 메타크리티시즘이 있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에도 '어떻게 소설을 쓸 것인가'에 대한 소설인 메타픽션이 있었으며 픽션도 자아 반영적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러티브의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소설을 쓸것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쓰기'에 대한 소설은 소설에 대한 고뇌의 정직한 반영일 수는 있어도 소설이 그려내야 할 궁극적인 진실에의 추구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목적은 인생을 예민하고 정직하게 그려내는 데 있다. 기법의 새로움이 내용의 새로움을 보장할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기법이 현재 우리의 삶을 포괄적으로 다 설명해내지도 못할뿐더러, 이것 역시 세계를 또 하나의 틀로 해석하려는 작업임을 감안해야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지평은 될 수 있으나 전체로서의 삶과 연결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은가 싶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면-을 과격하고 공격적으로 때론 희화적으로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인상깊은구절] 작품. 그것은 자기 존재의 우연성에 관한 변명이다. <나>의 존재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겐 여분의 것이고 따라서 우연적인 것이다. 작품의 완결성만이 <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삶에 있어 작품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울려퍼지는 힘찬 멜로디이다.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삶 속에 용해시키고, 흩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을 다시금 통일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멜로디이다. 그러나 만약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포기하다시피 끝내놓은 미완성의 작품과 우연과 오해로 가득 찰 인생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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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자꾸 떠올렸다. 등장인물 모두를 1인칭 화자 시점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곧 새롭지 않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언뜻 낯설어 보이면서 결국 낯설지 않았던 소설, 읽는 동안은 열심일 수 있었으나 읽고 나니 왠지 허전해졌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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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대학합격통지서를 받아놓고 한숨 돌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본고사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문학에의 갈증에 자리끼를 찾는 심정으로 집어들었던 책이었다.
그러나 이제 갓 스무살짜리가, 소설 자체의 존재이유를 묻는 이 난해한 소설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으랴. 그저 막연하게나마 진정한 자아란 '...가 되고 싶은 나', 아니 '...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무정형의 가능태로서의 자아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년이 지나 다시 읽게 된 이 소설엔, 그러나 나이의 벽을 넘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또다른 장애물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저 지독히도 암울했던 80년대를 온몸으로 견뎌온 386세대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코드들이다. 타협을 모르는 순수한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면 변절한 기회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던 80년대와, 철저한 리얼리스트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90년대의 그 극렬한 대비를, 어느 세대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엄청난 간극을, 그 시련을 견뎌야만 했던 386세대, 이 소설은 그 '잃어버린 세대'에 바치는 오마주였던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는 마치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소설 속 정임이 그랬듯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한 물음, 자아에 대한 탐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걸까.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 기계의 부속품과도 같은 우연적 삶이 이들에게는 지옥보다도 더 치욕스러웠던 걸까. 키에르케고어 식으로 말해서, '윤리적 인간'으로서만 평가받고 대접받는, '객관적 자아'가 절대명제가 되어버린 90년대 386세대의 아픔은, 그 90년대에 철저히 길들여 자라온 297세대인 나로서는 가슴 절절히 녹아들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제는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린 현실과 허구의 논쟁에서 허구의 손을 들어준, 작가의 그 위험한 발상이다. '소설 속 소설 속 소설...'의 무한개 액자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고의적으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나아가 현실의 허구로의 완벽한 흡수통합을 이끌어내고 있다. 현실의 작가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인우'라는 소설 속 작가의 이름과 그의 이력, 소설 속 '소설'과 소설 속 '현실'을 교차 편집시키는 방식은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허구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경계허물기의 구체적 장치인 것이다.
허구와 환상의 대표주자격인 소설에 대한 소설, 영화에 대한 영화는 결국 가상현실에 대한 그것일 수밖에 없다.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이라는, 꿈과 현실 사이의 불명확한 경계는, 수천년전 장자의 이야기를 굳이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미 학계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그리고 가상현실에 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실체에 대한 물음,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논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래에는 개체구분의 기준으로서, 물리적 현존으로서의 '몸'의 우월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육체와 정신, 현실과 허구와의 화해와 타협을 그려도 시원찮을 판에, 허구의 완벽한 승리라니, 더구나 진정한 자아란 허구의 이미지라니 이런 넌센스가 어디 있는가. 나비의 꿈을 꾼 장자를 나비라고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메타포와 이미지와 꿈만으로도 배부르던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가 진리이고 필연이고 구원일 수밖에 없는 '심미적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결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른 선택일 수밖에 없어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현실세계에는 '심미적 인간'이 있는가 하면 '윤리적 인간'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도 있으니까. 이 소설처럼 '소설을 반영하는 현실'을 그린 소설이 있는가 하면, 여타의 평범한,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도 있으니까. 작가 개인은 진정한 자아를 열심히 창조해내는 일로써 행복을 느낄지 모르나, 현실의 그는 어쩌면 한갓 과대망상을 노정한 구름잡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상깊은구절] 진정한 작품이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정임의 육체, 정임의 물리적 현존이 아니라, 내가 작품 속에 그려낸 정임의 이미지에 정임의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계 속에 너무나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실재의 세계를 보는 데 필요한 거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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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어렸을 적부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왔다.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대학생이 되고 이런 책이 있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한 교수님을 통해서 였는데 그 교수님께서는 이 책은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미 상실의 시대라는 글로 유명하죠?)사람의 작품을 베껴서 쓴 글이라고 하셔서 더 눈길이 쏠렸습니다.보통 글을 베낀다고 하면 그 작품의 작품성을 의심하곤 하는 데 이 작품은 달랐습니다."제1회 작가세계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이니까요.사실 남의 작품을 베꼈고 거기다가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이미 이 책의 저자인 "이인화"의 장편소설인 "영원한 제국"을 읽고 난 후였던 나에게 조금은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그런데 내용도 읽어보지도 않고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나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도대체 어떤 글이길래 베꼈을까? '하는 생각에 읽어보기로 결심을 하고 책을 사게 되었습니다.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 마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습니다."내가 누구인지 말할수있는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만 자기가 창작해 놓은 것이라고 그 교수님께선 비판했었는데...'정말 이게 일본의 작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내용이란 말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제목만 들으면 '어이쿠 이거 저알 고리타분한 철학 서적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끔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저만 그랬는지 다른 독자 분들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이 그다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습니다.아무리 평소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했다고 치더라도 그런 고리타분한 글을 읽고 싶지는 않았기 땜누이었죠.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의상과는 딴 판이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고, 흥미 진진하고, 나중에는 무슨 탐정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도 받았을 정도니가요. 정말 박완서라는 작가의 평대로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의 흡입력을 가진 작품이었습니다.정말 특기할 만한 점은 많은 등장인물을 번갈아 가면서 일인칭으로 서술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특이한 구성을 접해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처음에는 조금 헷갈리기도 하는 이 기법이 오히려 재미를 북돋아줬던 것 같습니다.
완전히 베낀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이 작품의 본래 주인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단하다고 해야 할 지, 이 글을 쓴(?) 이인화를 대단하다고 해야 할 지 아리송한 작품이었습니다. 베낀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인상깊은구절]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다음에 올 사회를 이야기 해 주던 삶의 좌표들, 인간에 대한 이상부의적인 이해와 역사의 발전의 합목적적인 법칙을 이야기 해주던 이론들이 사라진 거대한 사상의 빈 터 위에 나는 서 있다.앞이 보이지 않는다.차분히 뒤를 돌아보고 삶을 정리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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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 건 92년, 책이 나오자마자였다. 작가세계 문학상 1회 수상작이기도 했지만, 당시 언론의 각광을 상당히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의 제목은, 몇 년 뒤에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그랬던 것처럼, 심장을 찌르르~ 하게 만드는 바 있었다. 대학교 3학년 씩이나 되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감 못잡고 있었던 것.
당시 이 소설은, 작가세계 문학상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박완서 선생의 말을 빌어, '흡인력이 대단한 문장'을 과시해 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박완서 선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일단 읽기 시작하자 딴 생각할 겨를 없이 끌려들어갔다. 여러 등장 인물이 번갈아 화자가 되며, 인물 중 한 사람인 은우가 쓰는 소설이 그대로 이 소설이기도 하다, 이것은 당시의 내겐 낯설어서 신기하지만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설정이었다.
몇 달 후, 이 소설은 표절 시비에 휘말렸고 포스트모던 미학 논쟁 뭐 이런 것이 그 뒤를 이었다. 내게 아주 인상적이었던, 은우네 집 부엌을 보고 느끼는 정임의 찬탄, 이 대목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에서 따온 것이라는 등등의 지적을 보면서, 나는 어쨌거나 속았다는 괘씸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바나나는 내게 금시초문인 작가였는데, 바나나의 '키친'을 알게 해주었다는 것으로 당시의 그 치졸했던 논란에 고마움이라도 느껴야할 것같기도..)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이 인용인지 표절인지를 하고 있는 다른 작품들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 대목은 '외로운 남자'에서 봤던 것같군. 이 대목은 정말 '상실의 시대'를 완전히 갖다 놓았군.... <전적으로 인용문으로만 이루어진 글을 쓰고 싶다>는게 혹시 이인화의 생각이었을까? 어쨌거나, 그가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게 나는 불쾌하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모두 자기의 고뇌밖에 모른다.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친 자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강렬한 힘이다. 하지만 남들에겐 나라는 것은 결국 내가 한 일, 내가 쓴 글, 지금 내 목을 죄고 있는 이 장편만이 나의 전부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의 대상화되는 존재다. 그들은 내가 쓴 글을 보고 나를 심판하는 인간들이다. (p. 20) |
|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책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고, '상실의 시대'를 매우 좋아합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부류에 넣고 싶군요. 하지만, 점수는 썩 잘 주고 싶지 않네요. 인간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갈등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촛점을 맞춘 것같아서요. 제가 알기로 이인화님이 이 책으로 유명해지셨는데, 후속 장편 소설 (갑자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이 훨씬 좋았어요. 하지만 이 글 역시 대중적인 글이라 쉽게 쉽게 읽히더군요. 이 책을 읽고서 감명을 받으신 독자시라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상실의 시대'을 강력하게 추천하오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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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시점의 도입이란 작가가 그의 소설 속에 스스로를 비판 또는 합리화한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게 92년쯤이었다면. 그러나 지금은 피카소의 그림 혹은 다다이즘 같은 시점의 전환이 일반화되었다. 영화 오! 수정도 그런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이 영화는 같은 사건을 놓고 기억하는 깊이와 해석의 방법이 다른 한 연인의 시각을 잘 보여주었다. 사실 여러 시점을 도입하여 효과적으로 재미있게 글을 전개하는 것은 내가 써 보고 싶은 소설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한 두 시점이 아니라 연루된 많은 이들의 시점을 돌아가며 택해 전개한 것은 나름대로 특이하다면 특이하기는 하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일고 덮었을 때는 누구의 시점도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렇게 많은 시점을 도입한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시점에서는 나름대로의 참신함이 엿보였지만 액자식도 아닌, 마치 사방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영상이 반복되는 것 같은 구도는 그다지 좋았다고 보기 힘들다. 소설속의 소설을 쓰는 주인공이 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이었다, (물론 끝은 다르지만 ^^) 라는 것은 게다가 그 속에 비평가와 소설가가 소설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끼워넣음으로써 혼자 비평하고 변명하고 다 하는 것은 독자의 역할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서 왠지 불쾌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아프다지만 갑자기 발작적으로 반응을 하는 주인공의 심리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먼저 보지 않고 이 책을 먼저 봤다면 아마 다른 책은 보고 싶지 않았을 것만 같다. [인상깊은구절] 또 한 모금의 독액을 들이켰을 뿐이다. 죽음에 한 모금 더 중목되었을 뿐이다. 시간은 우리의 입에 독액을 털어넣고 조금씩조금씩 죽음으로 끌고간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좀 초조해야 하지 않은가 황량한 인생의 한 켠에 죽음으로 부려지기 전에 점음을 어떻게 써 보려고 한껏 노력해야 하지 않은가 인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욕망의 모델이 존재하고 그 모델을 흉내낼때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