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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기 이전에 모든분들이 너무나 좋은 평가를 내려주셔서 사실 어떻게 해야되나? 라고 몇번 망설였다
책리뷰에도 별 다섯개가 주를 이루고 거기다 대부분의 평가가 수작이다 라는게 주류인지라...
본인 느낀바 그대로를 쓰자면
첫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부터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했다
과연 이책이 기행문인가? 아니면 단지 자신의 주장을 풀어놓는 여느책과 다를바 없는가? 등등
책에 대한 의문이 많이 생겼다
저자가 쓴내용 그대로인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것인지 아니면 이런 내용묘사에 내가 익숙치
않아 서인지 읽는내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항상 잔상 남듯이 머리속을
떠나질 않았다
리뷰어에 당첨이 되었기에 더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잘 읽히지 않을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읽기
까지 해보았으나 종반부 아주 약간의 분량을 남기고서는 책을 덮을수밖에 없었다
문체라 해야하는지 형식이라 해야하는지는 잘모르겠으나 저자가 말하고자하는바를 찾는게
마치 불꺼진방에서 형광등 버튼찾기보다 더 힘든것 같다는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예로 책의 한부분을 들자면 62페이지 '태양이지다'
옥수수에 대한 중대한전환점을 언급하며 질산암모늄이 나온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큰 수혜자는
옥수수였다고, 그리고 다시 합성질소의 변화가 모든것을 변화시켰다는 전제와 함께 다시
프리츠 하버를 언급하고 느닷없이 지리학자 바클라프 스밀의 책을 근거로 질소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리곤 갑자기 프리츠하버에 대해 들어본적이 없다며 그와 관련된 폭탄제조와
아내가 피스톨로 자살을 하고 종국엔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고 말한다
그리곤 카를스루 대학교에는 그를 기리는 현판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프리츠 하버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며 그 이야기가 과학의 역설을 보여준다는 말과함께...
본인이 예로 들었다는 62페이지에서 시작하는 부분의 요약을 보시고 무슨말을 하는거냐?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으실거다 책을 읽으며 느낀바를 말하고자 책의 한부분을 잠시 빌려온거다
그리고 간략하게 부분, 부분만을 발췌해서 나타냈다 역설적으로 예로써 든 저 요약한내용과 같이
책의내용 또한 혼란스럽다 한단락, 챕터가 끝날때쯤에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너무 그 중간중간에 불쑥 불쑥 찾아드는 내용들은 책을 읽는내내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과연 중간중간마다 인용하는 부분들과 그 양적인면에서의 적합성이 타당한가? 라는 의문을
심각하게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
좀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독자들에게 더 많은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저자의 욕심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너무나 저자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목적지까지 가는동안 지나치는 경유지마다 직접 내려서 가가호호 방문하고 구석구석 살피는게
그 목적지까지 가는 최상의 여정이 아니다 경유지마다 내려서 다 살핀다면 과연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어디인지 종국엔 잊어버리지 아니할래야 아니할수가 없지 않은가?
분명 내가 가고자하는곳이 저곳인데 목적지를 망각할만큼 경유지마다 자세하게 살펴보니 그럴수밖에...
첫부분에 언급한것처럼 다른분들이 너무나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이런 리뷰쓰고 과연 무사할지(?)
사실 본인또한 인간이라서 걱정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심은 없기에 걱정은 되지만
부끄럽진 않다(다들 좋은평가를 내리시는데 나같은이도 있어야... - 그렇다고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니라는 점 알아주시길)
내용적인 측면에선 뭐라 단정하지 못하겠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만족할만큼 내가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다른 여느저서보다 좀더 전문적이고 높은수준의 지적수준을
요할만큼은 아니다
타켓이 서로다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론 음식혁명, 희망의밥상, 육식의 종말등이 읽기에는 좀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시간이 흐린뒤에 다시이책을 들고 씨름한뒤 본인도 다른이들과같은 평가를내렸으면 좋겠다
양서가 아닌책이야 발견을 하든 못하든 무슨상관이겠냐 만은 양서였다면 발견치
못하고 지나침이 너무나 후회스러울거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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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울에서 근무할 때, 가장 고민스러운 일중 하나가 점심에 무얼 먹을까 하는 것이었다. 회사 주위에 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했지만 막상 먹을 것을 고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이곳 공장에 내려와서 점심을 선택할 필요가 없어지자 고민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1년을 넘기지를 못했다. 아침과 저녁을 식당을 대어놓고 먹다 보니, 이제 그 음식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또 다시 무얼 먹을까 하는 똑 같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다만 점심이 저녁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매일 고민 없이 먹는다는 것은, 혹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검증된 것을 먹는다는 것과 같다. 맛이나, 영양소 그리고 식품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안심하고 고민 없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를 못한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지구상의 모든 삶은 녹색식물이 포획하여 복잡한 탄소분자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태양에너지를 두고서 생물종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초식동물들은 그런 태양에너지를 식물에게서 취하고,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을 통하여 취한다. 그러기에 초식동물이나 육식동물들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먹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 단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잡식동물인 인간은 식물과 동물은 물론 음식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까지 섭취하고 있다. 즉, 우리와 같은 잡식동물들은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또 자신이 선택한 음식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필연적으로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무엇을 먹을까 하는 문제는 잡식동물만이 갖는 딜레마라고 한다. 현대에 사는 인간들이 먹는 음식은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수렵과 채집을 통한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순환에 의거한 초유기농 음식이며,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현대산업 음식으로써, 그것은 가공식품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폴란은 잡식동물인 인간이 먹는 오늘날의 음식 시스템과 그것을 생산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여 음식이 갖는 자연, 환경, 그리고 생태적 관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기 전에는 수렵과 채집을 통해 음식을 마련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잡식동물에게 있어 축복이자 저주였다.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지만, 그 가운데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는 것은 저주가 되었다. 소나 코알라에게 있어서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천성이지만, 인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복잡한 감각수단과 정신적 수단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를 기억하고 일관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했다. 이렇듯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대개 확인의 문제로 귀결 되었다고 한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간이 농업을 발견한 것은, 인간이 최초로 경험한 자연상태로부터의 타락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음식사슬에 있어서는 공생을 주제로 한 순환적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학비료의 발견은 두번째 타락이 되었으며, 인간들의 음식사슬을 산업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슈퍼마켓에 있는 음식물들은 놀랄 만큼 생물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산업음식물들의 음식사슬을 추적하면 그 끝은 거의 똑 같은 장소라고 한다. 바로 옥수수농장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소원자들을 흡수해야 하고,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광합성뿐이다. 따라서 식물들이 담당하는 광합성으로부터 생성되는 유기화합물은 모든 음식사슬의 바탕이 된다. 옥수수는 다른 식물들에 비해 광합성이 효율적이고, 생산량이 많다는 이유로 유전학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조작되기에 이른다. 옥수수는 동물들의 사료로 쓰인다. 심지어 양식업자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어류인 연어조차도 옥수수를 먹고 자라게 만들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모든 청량음료와 주스 등 가공식품의 주원료는 옥수수이다. 우리가 직접 먹는 옥수수는 일년간 일인당 약25킬로그램에도 못 미치지만, 가공식품을 통하여 소비하는 옥수수는 일년에 일인당 1톤이 넘는다고 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여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물들이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방식으로 생산되거나 만들어지지 않고, 산업사회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 짐을 뜻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왜곡되고 은폐된 채로 전해진다. 음식은 이제 우리에게 풍요와 먹는 즐거움을 주는 대신 가시지 않는 의혹과 불안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선물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단지 현대의 식품산업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인간들의 음식사슬들을 끝까지 추적한다. 그의 추적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먹고있는 음식들이 얼마나 기괴하고 또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런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화석연료가 소비되고, 또한 얼마나 많은 오염물질들이 배출되는지를 알려준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금 먹고있는 음식들을 더 이상 이전과 똑같이 생각하고 먹을수 없게 할만큼 충격적이고 불편한 내용들이다. 저자는 소떼가 목초지에서 나와 사육장안으로 걸어 들어간 이유는 매우 많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과 음식시스템이 산업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주변부에서 대안적인 음식시스템이 성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유기농은 자연의 논리와 보다 조화를 이루고, 태양광에서 풍요와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생태계에 보다 가까운 음식시스템을 만들려는 운동이다. 그러나 슈퍼마켓의 요구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지를 묻고 있다. 유기농 제품을 전국에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산업화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논리와 자본주의의 논리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양에 대해 긴 시각으로 보자면, 우리는 수렵채집 생활에 맞는 음식을 먹도록 진화해 왔다고 한다. 자연선택은 우리 몸에 다양한 음식을 처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어 놓은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농업식품에 적응해 온지는 1만년도 채 안되며, 옥수수와 같은 소수의 곡물에 바탕을 둔 산업농업식품은 생물학적 신상품에 불과하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신상품이 오늘날 전세계의 식품산업을 좌지우지 하는데 있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발생되는 모든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우리가 오늘 먹고 있는 한끼의 식사 속에서, 우리와 우리의 다음 세대,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는 또 무엇을 먹을까? 잡식동물인 나의 딜레마는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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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인간이 사냥과 수렵으로 연명하고 살아가던 시절, 음식은 축복이고 감사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먹이만을 구할 뿐 모든 것을 자연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오만한 잡식동물이 되었다.
마이클 폴란은 인간의 뇌가 그토록 크고 복잡하게 발달한 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머리말에서 언급한다. 인간에게 잡식은 다양한 즐거움을 맛보게 한 동시에 수많은 음식의 해로움과 이로움을 구분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옥수수- 풀- 숲 이 순서로 나아간다. 인간의 음식문화의 발달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옥수수장에서는 현대의 산업적 음식사슬에 대해 추적하며 우리가 섭취하는 가공식품과 동물성단백질들의 맨 하부에 어디에나 옥수수가 있다는 이론을 편다. 현대인이 사실은 걸어다니는 옥수수와 같다고 했을 때 무척이나 의아했다. 현대인이 얼마나 다양한 먹거리를 먹는데 옥수수의 섭취가 그렇게 많을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나니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양한 형태로 가공하지만 사실 시작은 모두 수수인 것이다. 옥수수를 가공한 설탕, 옥수수에서 나온 당분을 이용한 알콜,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동물의 육류가공품. 그리고 패스트푸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옥수수를 생산하기 위해 농민들은 고군분투하고, 기업은 유전자를 개량한다. 다음 풀을 보자.저자는 이 장에서 유기농먹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각 장마다 저자는 직접 현장에 가서 체험하면서 저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장을 위해서 태양에너지를 함유한 풍부한 풀을 곧바로 먹고 자라는 송아지농장을 방문한다. 풀을 먹고 자란 소고기는 오메가-3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는데, 오메가-3를 보충받은 임산부들이 IQ가 더 높은 아이를 출산하며, 오메가-3가 적은 식사를 한 아이들은 행동장애와 학습장애를 일으키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음식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모든 소고기가 같은 소고기가 아니며, 모든 달걀이 같은 달걀이 아닌 것이다. 영양학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서 육체적 차이는 없다고 해도 이러한 필수지방산등이 인간의 정신건강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섬칫하다. 다음 숲에서는 저자는 최초의 인류처럼 스스로 수렵채집생활을 해보고자 한다. 직접 사냥하고 채집을 시도하면서 저자는 잡식동물이 된 인간의 음식에 대한 불안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다. 자신이 채집한 버섯이 진자 살구버섯인가 가짜살구버섯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은 버리고 만다. 저자는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고르면서 유기농을 고를 것인가, 혹은 어떤 식품첨가물을 고려할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 등의 각종 선택에 고민하는 것이 진짜버섯과 가짜버섯을 구분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음식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니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오히려 더 심화된 느낌이다. 저자는 이런 메시지를 던지며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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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드시고들 계십니까? [잡식동물의 딜레마]리뷰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유전학의 선택적 도움으로 음식선택의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없는 일단의 육식, 초식 동물들을 제외하고 인간을 비롯한 일련의 잡식동물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딜레마가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우리가 언뜻 무의식적으로 섭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음식물들이 실상 수없이 많은 갈등과 고민의 터널을 지나 우리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무엇을 먹을까 하는 문제는 모든 잡식동물들을 괴롭혀 왔다.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을 때는, 무엇을 먹을까 결정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불안을 일으킨다. 눈앞에 놓여있는 먹을거리가 병을 일으키거나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이 있을 때 특히 더 그렇다. 이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다. -P17 中 그러나 작가의 주장은 이 딜레마가 수렵과 채집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 받을 수밖에 없는, 즉 자연으로부터 제한적인 양의 음식을 얻을 수 있고, 그 음식에 대한 정보<즉 안전하냐 아니면 섭취자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가 하는>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 불안으로 고통 받던 저 먼 원시시대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풍부하게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음식산업의 수혜 속에서도 이 딜레마는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풍족해진 생산 덕에 고민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역설한다. “이 책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시작된 음식사슬의 산업혁명이 실제로 이 게임의 근본적인 규칙을 뒤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농업이 산업화 되면서 우리는 태양에 대한 전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새로운 에너지 공급원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석 연료로부터 대부분의 에너지를 제공 받는 음식사슬이 생겨났다. 이런 혁신의 결과로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음식 에너지의 양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것은 번식이 유리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은총이지만 완전한 은총은 아니었다. 음식이 풍부해진다고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풍부한 음식은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심화시켰고, 우리에게는 갖가지 걱정거리들이 생겨난 듯하다.” -P23 中 세 가지 음식사슬, 첫 번째 “옥수수” 이 책을 통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받기 전까지 우리의 식생활에서 차지하고 있는 음식 섭취의 많은 부분이 옥수수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즐기는 소, 닭, 돼지고기의 생산은 물론, 패스트푸드점의 수많은 메뉴들과 늘 마시는 술과 청량음료와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각종 식품의 첨가제로 들어가고 있는 이 옥수수의 무궁무진한 화학적 변이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가는 직접 대규모 옥수수 농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유전자 변이를 통해 더 많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는 옥수수가 어떤 변화를 통해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게 되는지를 역 추적하는 과정을 르포형식으로 우리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생산증대를 위해 뿌려지는 전쟁의 산물인 질산과 생산량을 초과해 투입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화석연료와 이후 가공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거대 산업자본과 정부의 정책, 그리고 수많은 스테인리스관을 통해 화학적 변화를 겪게 되는 옥수수의 운명을 우리들 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이 장을 읽는 내내 머리털이 뻣뻣하게 곤두서는 느낌과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을 여러 번 참아내야만 했다. “옥수수 낱알들이 도착하는 곳은 대개 공장식 농장이다. 이런 공장식 농장은 옥수수가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이곳에서는 한 때 가족농장과 목축장에서 살았던 수억 마리의 식용 가축들이 함께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옥수수들을 먹어치우고 있다. 여기서 옥수수는 고기가 된다. 소에게 엄청난 옥수수를 먹이는 일은 특히나 대담하고 단호한 노력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소는 원래 옥수수를 먹는 동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은 잉여를 싫어하기 때문에 옥수수는 기필코 소비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제 옥수수를 먹는 수송아지가 등장한다.” P90 中 "CAFO<집중가축사육시설>에서 이렇게 많은 가축들을 기르며 값싼 옥수수를 먹이는 것은 경제학적 논리로는 반박하기 어렵다. 예전에 고기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특별한 때에 먹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기가 매우 싸고 풍부해졌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하루에 세 번 고기를 먹는다. 그래도 이 값싼 고기의 배후에 있는 생물학적 논리는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CAFO는 이미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환경 문제와 건강 문제를 일으켰다.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독성의 폐기물을 방출하고, 새로운 치명적 병원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P94 中 “모든 CAFO에 특징적인 이 생물학적 부조리 외에도 소의 먹이와 관련된 두 번째 부조리가 있다. 자연선택에 의해 원래 풀을 먹게 되어 있던 동물이 이제 인간에 의해 옥수수를 먹고 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건강, 땅의 건강,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을 먹는 우리의 건강에 상당한 피해가 미치고 있다. 단지 옥수수가 가장 싼 가격으로 칼로리를 제공하고, 또 엄청난 양의 옥수수를 어떻게든 소비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 이유로 나는 곡물을 먹고도 잘 자랄 수 있는 닭이나 돼지가 아니라 한 마리의 수송아지를 통해 산업용 옥수수의 발자취를 취적해 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사육장에서 옥수수를 먹으며 살아가는 수송아지의 짧고 불행한 삶은 진화의 논리에 대한 산업적 사고의 승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P95 中 세 가지 음식사슬, 두 번째 “유기농” 대형할인마트의 식품 코너에 가 보면 요즘에는 거의 한 곳도 빠짐없이 별도의 유기농 코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좀 더 많은 금액의 지출을 감수하고서라도 선택하게 되는 유기농 식품들이 모인 곳이다. 작가는 대량생산 방식이 아닌 소규모의 유기농 농법을 통해 자연의 재순환을 유지하며 먹을거리를 키워내는 농장을 통해 그러한 인간과 자연의 노력이 조화되는 음식사슬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훈훈함은 잠시, 이 ‘유기농’이라는 단어가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식탁위에 거대한 위험을 뿌려놓고 있음을 지적한다. 산업자본에게 있어 이 유기농이라는 간판은 단지 자연친화적인 단어가 아닌 경제적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포장지에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거대 음식산업의 대량생산과 유통을 교묘하게 환경친화적으로 포장해 주는 유기농의 이름을 걸고 생산되는 위험한 먹거리에 대한 지적이 날카롭다. 이는 저자가 단지 책상 위가 아닌 비밀에 싸여 접근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수많은 산업자본의 근저까지 발품을 팔아가며 얻어낸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진실이어서 책을 통해 허위의 장막 너머를 들여다보는 독자들은 순간 ‘헉’하는 망막한 감정과 마주하며 그간의 음식선택에 있어 매일 사기를 당해왔다는 뭔가 껄쩍지근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산발적으로 유기농산물의 영양학적 우위를 증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농업 시스템에서는 모든 먹을거리가 똑같이 창조되었다는 허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2000년 미 연방 유기농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농무부 장관은 정도에서 벗어나 유기농 식품이 기존의 식품보다 나을 게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유기농 상표는 마케팅 수단입니다.>>농무부 장관 글릭먼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식품 안정성에 관한 표현이 아니에요, 유기농은 영양이나 품질에 대한 가치 판단도 아닙니다.>>” P229, P230 中 세 가지 음식사슬, 세 번째 “숲”-수렵과 채집 앞에서 작가가 살펴본 두 개의 음식사슬에 관한 르포는 우리들에게 경악과 허탈감을 제대로 전달해 주었다. 작가는 이제 그렇다면 안전한 음식, 건강을 위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먼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먼 야생으로의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직접 숲으로 들어가 야생의 풀과 버섯을 수집하고, 사냥을 배워 총을 메고 야생상태의 돼지를 직접 잡기도 한다. “나는 실상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이곳의 음식사슬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서 우리의 음식이 될 돼지를 창조한 에너지와 물질의 연결고리 전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양 아래 참나무가 서 있다. 참나무는 태양 광선으로 도토리를 만든다. 땅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는 돼지의 먹이가 된다. 돼지는 사진 속에 있는 한 남자의 손에서 우리가 먹을 음식이 된다. 그 남자는 이 음식사슬을 창조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오래전부터 포식자를 위해 준비된 역할을 떠맡았을 뿐이다. 그 남자가 뒤에 남겨둔 돼지의 나머지 부분은 그곳의 다른 동물들을 통해 땅으로 되돌아가고, 참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러면 참나무는 다시 다른 돼지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여기서 음식사슬은 태양-흙-참나무-돼지-인간으로 이루어진다. 이 음식사슬은 백만 년 동안 생명을 지탱한 음식사슬 가운데 하나다. 그것을 이 단 한 장의 사진에서 볼 수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일례라 하겠다.” P458 中 결국 숲에서의 수렵과 채집은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인간의 위치와 그로인해 감내해야 할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정서적 스트레스와 채집한 버섯의 위험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재확인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자본의 영역에서 벗어난 식재료로 차린 식사에는 그 만큼의 오랜 시간과 육체적 노동<즉 에너지의 소모라고 하는>이 수반됨을 보여준다. 결국 먼 길을 돌아 우리는 지금 현재의 식탁 위라는 원래의 출발점에 앉게 되는 것이다. 맺음말, 우리는 지금 잘 먹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현대의 음식산업을 통해 생산되는 먹거리와 수렵과 채집이라는 원시적인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먹거리를 놓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쪽의 손을 높게 치켜들어 승리를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어느 정도 불가항력적인 힘이 작용하는 현대의 식탁에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우리가 산업식품을 먹을 때 초래하는 엄청난 빚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물리적, 지적, 정서적인 비용을 지불하면서 식사를 차리고 음식을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패스트푸드와 내가 준비했던 슬로푸드를 비교해 보면, 자연의 경이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자연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똑같은 일을 해 냈다.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 말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식사 모두 비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다라서 우리는 책임 있는 사회 과학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할 만한 일들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방식의 식사를 모두 실생활의 바깥에 존재하는 예외로 규정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좀 더 나은 방법으로 순수한 의식으로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계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517 中 이 책의 리뷰를 위해 꼼꼼히 책을 독파하는 틈틈이 오래전에 읽었던 제레미 리프킨의 [쇠고기를 넘어서]라는 책을 중간 중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초식동물인 소가 어떻게 세계 곡물 소비량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같은 맥락에서 진지한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조금 많은 글의 양이지만 작가의 체험이 녹아있는 현장르포식의 글쓰기는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주지 않았고, 견고한 양장의 책 만듦새와 멋진 책등과 표지 디자인은 책장을 넘기는 동안 시각적, 촉각적 즐거움을 나에게 선사해 주었다. 오늘도 식탁에 올릴 음식들로 고민 중인 가정주부들이거나 혹은 모든 음식물의 섭취주체인 인간들이라면 한 번쯤 진지한 마음으로 손에 들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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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가을까지 아이들 할아버지께서 텃밭이라고 하기에는 좀 큰 밭에서 여러가지 채소를 가꾸신다. 그중에서 가장 히트 상품은 여름철 옥수수이다. 아이들 할머니, 아이들 엄마, 7살난 하은 2살된 하진 모두 옥수수에 열광한다. (펭귄가족이라고 하던가? 우리집은 호칭부터 아이들 중심이다. 아이들을 늦게 낳은 후유증이다.) 특히 방금 딴 옥수수는 모두들 머리를 들이대고 먹을 만큼 맛이 있다고 한다. 맛이 있다고 한다라는 간접화법 표현을 쓰는 것은 내가 먹을 차례가 안 오기 때문이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순서에서 완전히 밀리기 때문에 자주 먹지를 못한다. 여름 한철 먹는 옥수수가 쌀자루로 몇가마 되니 자루수로 따지면 몇 백 자루를 먹는 것 같다. 참고로 갓 딴 옥수수가 맛이있는 것은 옥수수는 수확하자 마자 전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따자 마자 다 먹을 수 없으면 바로 찐 다음 얼려서 먹고 싶을 때마다 냉동고에서 꺼내 찌거나 전자렌지에 데워 먹으면 된다. 부작용은 수확한 옥수수를 다 먹고난 요즘도 2살난 하진군은 냉장고에 항상 옥수수가 있는 줄 알고 달라고 한다. 그 때마다 다른데서 사다 먹는데 역시 맛이 떨어진다. 한번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 주었는데 먹다가 나한테 넘긴다. 난 그럴 때나 옥수수 먹어 본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여름 별미인 옥수수가 지구평화를 위협하는 주적이었다. "육식의 종말", "음식의 제국"이후로 머리에 깊이 박힌 소고기주적론이 위협당하는 순간이었다. 두 책에서는 인간이 특히 아메리카 합중국 국민들이 소고기를 산업화 하면서 이 지구행성의 많은 환경과 건강문제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곁다리 식으로 옥수수사료 이야기를 했지만 소고기만큼 주적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는 우리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주적으로 옥수수산업을 들고 있다. 하지만 옥수수는 주적이 아니다. 맛있는 별미이자 남미, 아프리카에서는 훌륭한 주식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옥수수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옥수수산업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번영을 누리는 방법을 깨달은 모든 생물종 가운데서 옥수수만큼 더 많은 땅과 인간의 몸을 식민화하는 데 탁월한 성공을 거둔 생물종은 없다. 옥수수는 자신의 몸을 길들인 인간들을 길들였다. 그렇다 우리가 옥수수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옥수수 유전자가 인간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DNA 를 이 지구행성에 퍼트리고 지배영역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옥수수에 취해 이 지구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옥수수DNA에 입맛과 영양분에 있어서 식민지되어 가축산업과 옥수수 산업을 합치게 되었다. 옥수수, 소고기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이 서로가 탐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융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즉 옥수수와 소고기산업화가 완성되었다. 그 후 생긴 문제로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채식주의가 유일한 길인가 생각하면서도 옥수수가 주재료인 각종 음식을 손에서 떼어 놓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채식주의 말고 다른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1부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옥수수 산업의 역사와 결과를 보여준다. 2부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유기농농장을 중심으로 반산업화된 농장을 대안적 음식문화로 보여준다. 3부 수렵채집 음식사슬에서는 저자가 직접 채집과 사냥을 하면서 육식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갈등한다. 철저하게 미국중심이라서 철마다 고사리,버섯,쑥 등을 캐러 가는 문화가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오버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점점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소파에 누워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 선물받은 '건강을 생각하는 간식'이라는 한과를 먹고 있었다. 궁금해서 뒷면을 보니 고과당옥수수시럽으로 맛을 냈다고 써있다. 맙소사! 아메리카 합중국 아이오와주의 옥수수가 한과에도 영역을 뻗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놀랄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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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유쾌한 문장으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농축산 정책과 음식사슬에 대한 문제점을 근원적이고 실천적인 고찰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에서 인류 문화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는 수작(秀作)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저술은 우리가 노출되어있는 경제적 효율이 우선시 되는 오늘의 음식산업 실체에 대한 고찰과 유기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농업의 체험을 포함하는 산업시스템에 대한 자연시스템의 사유, 그리고 수렵과 채집생활을 통한 인간의 시원적(始原的) 본성을 통한 태생적 딜레마와 음식문화의 종합적 통찰,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제1장은 음식문화도 오늘에는‘생산성’이라는 산업효율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실증적 사례들과 저자의 취재 및 체험을 기반으로 그 실체를 발가벗기고 있다. 오늘날 우리를 “옥수수 인간”이라 표현하는 대목에서 작가적 상상력에 공감과 깊은 이해를 표하게 된다. 미국 농산물시장의 주류를 형성하는 옥수수가 우리의 식단을 얼마나 점령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찰에서는 충격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식물의 다양성을 파기하고 오늘날 옥수수가 주류 농산물로 존재하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 옥수수라는 단일종의 진화론적 인간사회에의 영합은 가히 비열하기까지 한 미국의 농업정책과 종의 선택이론이 어울려 불안감이 밀려들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우리 인간의 오만함이 항상 기저를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생산성이라는 자본주의 논리와 옥수수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비료의 발견으로 과잉 생산된 옥수수의 처리는 '집중가축사육시설(CAFO)'의 사료로 전환되고 이는 미국정부의 절대적 지원과 육성으로 이어졌으며, 반추동물로서의 소의 섭생에 치명적 결함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추적하고 있다. 풀을 먹는 소에게 옥수수를 중심으로 한 인위적 사료는 반추위의 생물학적 진화에 직접적인 거스름으로서 필수적으로 광우병 등을 야기하고 인간의 음식 사슬상에 극단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저자는 이를 “진화의 논리에 대한 산업적 사고의 승리”라고 오늘의 음식산업과 정부정책을 조롱한다. 또한,“산업적 음식사슬”로 표현되는 오늘의 음식산업의 영악함을 고발하고 있다. 인간의 “양이 정해진 위”를 극복하기 위한 맥도날드식 에피소드는 소비자인 우리들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맥너깃에 포함된 물질에는 옥수수에서 추출한 성분만도 13가지나 된다. 또한 산화방지제인 알미늄 인산나트륨을 비롯해 소포제로서 발암물질로 의심되는 디메틸폴리실록신, 호흡곤란, 이명은 물론 사망에까지 이르게 하는TBHQ물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통해 패스트푸드, 가공식품들의 가공할 만한 위험을 지적하기도 한다. 제2장에서는 산업농산물에 대한 유기농산에 대한 고찰이‘폴리페이스 농장’에서의 체험과 시선을 통해 진지하게 그리고 진정성을 가진 성찰로 사유되고 있다. 특히 초기 유기농업이 산업유기농이라 하는 대량산업으로서의 불가피성과 초유기농이라고 까지 표현할 도리가 없는 자연방목을 근간으로 하는 목가적 농업의 대안농업으로서의 지위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또한 미국 정부(농무부)의 대기업과 산업적, 자본주의적 시각의 단편으로서 “목초지 접근 권한”이라는 웃지 못 할 축산업 규정은 그 허위와 기만성으로 보여지고 있기도 하다. 이들 정책과 산업이라는 거시적 측면으로 출발하여 대안농업이 우리 인간의 음식문화에서 그 중요성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는 장인(匠人)재배와 모델의 예시를 통해 음식의 지역성, 다양성, 계절성이 갖는 생태학적 측면의 당위성과 산업경제와의 차별적 요인에 대한 설명으로서 “포터-네이션”이론이 소개되기도 한다. 좁은 집합농장에서 옥수수와 동물지방을 먹고 성장한 산업시스템 하에서의 소와 넓은 초지에서 풀을 먹고 성장한 소중 어느 것이 인간의 건강에 유익할 것인가? 와 도시와 농촌의 거리상의 문제, 현실적인 경제적 환경하에서 모든 육우를 방목하여 키우는 것이 진정 가능 한 것인가 하는 문제로 우리들이 고민하고 해결하여야 할 과제로 던져진다. 그리고 3장에 이르러 인간의 진화론적 본질로서 잡식동물이 식생과 마주해야하는 딜레마를 이야기 한다. 특히 독자들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그리고 흥미로운 인간진화의 또 다른 지식의 장으로서 읽힐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먹는 음식이 제한되어 있는 생물의 경우 ‘위’가 그리고 다양한 음식중 취사선택을 하고 사고하여야 하는 동물인 인간이 ‘뇌’가 발달했다는 설은 흥미로운 고찰이기도 한다. 또한 잡식동물서의 인간이 네오포비아와 네오필리아의 동시 만족과 같은 내면의 일치를 통해 인간의 식욕에 대한 성찰이 생존에 대한 생물학적 동인으로서 지적하고 있기도 하며, 지역, 민족, 국가마다 오랜 기간 지배되어온 음식문화의 가치에 대한 높은 지혜와 대비하여 오늘날 일면의 입증에 불과한 과학의 오만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영양학 정설에 반기가 얼마나 우려 할 만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경고하기도 한다. 특히, 동물권리 옹호론자들의 다양한 논리와 육식을 하여야하는 우리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실증적 반박과 통찰은 가히 철학적 위업으로까지 생각케 할 정도로 대단하다. 인간이 동물을 죽이고 먹이로 한다는 것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체계 속에서 ‘고유한 삶의 형태’이며, “생물종 간의 공생 관계”로서 인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식은 도덕이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생의 문제다.” 그의 돼지 사냥과 버섯사냥에 대한 일기는 무경험인 우리들에게 경험자가 자연의 경이에서 느끼는 새로운 감성을 오늘의 우리 음식문화와 함께 멋지게 사유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저자는 잡식동물로서 인간의 생태적 속성에 대해 자연선택이론과 생물간의 공생관계로서 반대론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산업화된 농업시스템의 폐해에 대해 지속가능한 섭생시스템으로서 지역유기농업과의 대안적 조화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저술의 제1장에서 소개되는 미국 농무성의 농업경제 정책에서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음식으로서 심각한 본질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농산물 특히 쇠고기의 수입은 우리 한국인들의 식문화에 심각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또한 우리 농축산가의 생존에 자본주의적 산업시스템의 또 다른 희생자가 될 것 같아 답답함의 응어리가 치켜든다는 것이다. 미국인들 자신의 농축산업의 보호와 지지, 그리고 국민의 음식문화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대안 농업에 대한 저자와 같은 성찰과 노력이 부럽기도 하다. 보편성과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왠 뜬금없는 소리인가? 할 수 있겠으나 우리의 토착적인 선조들에 의해 오늘까지 지지되어온 음식재료와 그 기반인 농축산업, 그리고 식품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고찰이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할 때 아닌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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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심야시간에 방영되는 리얼 체험 프로젝트 <인간의 조건>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야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이미 우리네 삶에서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문명의 이기를 배제한 삶을 통하여 그 소중함을 느끼게 하거나, 생각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생활패턴에 제약을 두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원산지와 생산자가 확인되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을 먹을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만약 한 차원 높여 스스로 얻은 식재료, 혹은 스스로 얻은 식재료로 교환한 음식만을 먹을 수 있도록 한다면 한 끼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요? 당장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를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수렵이나 채집을 해야 끼니를 해결하게 될 터인데, 들이나 산에 나가 채집한 식재료가 독이 없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굶는 도리밖에 없겠습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우리가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식품의 재료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제공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유칼립투스나무잎만 먹고사는 코알라와는 달리 인간은 식물, 동물에서 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품을 먹을 수 있습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나무잎의 모양과 냄새만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면 되지만, 채집과 수렵시기의 인간들은 비슷한 모양이나 냄새를 가진 다양한 것들 가운데 독이 있는 것을 가려내야 해를 입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면 먹을 수 없다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경기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식물을 길러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고, 산업사회에서는 식품분야의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yes24.com/document/6188673>에서 밈(me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지식의 축적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판단과 기억을 공유하는 문화라는 이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하여 축적한 음식에 관한 풍부한 지혜를 문화로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는 금기, 의식, 조리법, 예절, 전통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 안에서 지혜로운 식사규칙을 규범화해놓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식사 때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19쪽).
인구가 늘고 식품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딜레마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빵과 파스타를 삼가면 고기를 많이 먹으면서도 체중을 줄일 수 있다는 로버트 엣킨스박사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황제다이어트로 알려진 다이어트법의 이론적 바탕이 된 연구이기도 합니다. 엣킨스박사의 주장은 건강의 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스테이크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반면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던 빵과 파스타는 도덕적 오명을 뒤집어쓰고 수많은 빵집과 면류제조회사가 파산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엣킨스박사의 주장은 몇 가지 새로운 역학연구결과로 지지하는 분위기를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국가적 섭식장애라고 표현하고 식문화를 통하여 극복했던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사례로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이 이념적 주장 때문에 식품으로서의 안전성이 의심받았던 2008년 광우병 파동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에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입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미국산 쇠고기 혹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하여 땅에서 식탁까지 식재료가 어떻게 생산되고 식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음식사슬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음식사슬은 태양광선으로부터 에너지를 합성할 수 있는 식물로부터 그런 능력이 없는 종들에게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시스템입니다. 식품이 발전해온 과정을 보면, 수렵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해결하던 시기로부터 유기적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길러 먹거리로 이용하던 시기를 거쳐 농작물과 가축을 산업적으로 생산하여 먹거리로 만드는 시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먹거리가 발전해온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가면서 음식사슬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제 1부에서 산업적 음식사슬을 먼저 설명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2부에서는 저자가 전원적 음식사슬이라고 부르는 산업농업의 대안방식(유기농, 지역농업, 생물학적 농업, 초유기농 등)으로 생산되는 음식사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 3부에서는 후기 구석기적 음식사슬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렵·채집 음식사슬입니다.
저자는 이들 세 가지 음식사슬 모두에서 경험이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농가에서 옥수수재배와 관련된 노동을 직접하고 축산농가에서 공장식(?)으로 키우는 소를 키우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였는데, 닭을 키우는 농장이나 공장식 도축시스템을 적용하는 도축장은 보안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직접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유기농 기법으로 경영되는 농장에서 밭작물과 가축을 키우고 도축하는 과정은 직접 경험한 것들 입니다. 마지막으로 맷돼지를 사냥하고 버섯과 소금을 채집하는 경험을 직접하고 그렇게 얻은 식재료를 가지고 직접 조리를 해서 특히 사냥과 채집을 도와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조그만 파티로 음식사슬을 탐구하는 저자의 긴 여행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 가지 음식사슬 가운데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는 단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후 간식시간에 구수한 냄새가 딱 좋은 찐옥수수를 먹을 수 있는 계절입니다. 강원도 옥수수가 간식거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만, 옥수수에 숨어있는 놀라운 비밀을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중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1492년까지 구세계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인데, 옥수수가 우리의 땅과 몸을 점령해온 이야기는 식물세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스토리 가운데 하나라고 저자는 단정합니다. 1621년 봄, 원주민 스콴토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운 미국 최초의 청교도 이주민들은 구대륙에서 들고 온 밀이 혹독한 신대륙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전적 변이성이 뛰어나 새로운 환경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옥수수야말로 답이었던 것입니다. 옥수수의 풍요로움 덕분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옥수수씨 한 알을 심으면 150알 이상, 많게는 300알까지 생산되었는데, 1950년대 개발된 화학비료가 더해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여기에 유전자재조합방식으로 개발된 신품종은 대단한 생산량을 보장하게 된 것입니다. 병충해 뿐 아니라 밀식재배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 1920년 아이오아에서 1에이커당 평균 20부셀(미국도량형으로는 35.2리터) 생산되던 옥수수는 1950년대 70~80부셀로 늘고, 지금은 200부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옥수수가 자라는 일은 언제나 태양광선을 포획하여 이를 음식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는데, 이제는 상당 부분이 화석연료를 음식으로 바꾸는 과정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67쪽)
미국대륙에서 옥수수가 넘쳐나게 된 것은 각종 보조금을 포함한 정부 정책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산된 옥수수 가운데 사람들이 직접 먹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가축사료의 원료가 되거나, 옥수수를 증류하여 에탄올을 만들고, 그리고 옥수수로부터 고과당옥수수시럽을 포함한 다양한 식품첨가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블레어목장에서 송아지를 사서 입식하는 방식으로 소를 키우고 도축되는 과정도 뒤쫓았습니다. 소와 같은 반추동물은 풀을 양질의 단백질로 바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의 반추위는 용량이 45갤런이나 되는 발효탱크로서 그 안에 사는 박테리아가 풀을 셀룰로오스로 분해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진화된 것입니다. 이런 소에게 엄청난 양의 옥수수와 단백질 및 지방보충물,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약물을 투입하여 불과 14개월 만에 80파운드에서 1,100파운드로 만드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만해도 4~5년 걸리던 일입니다. 농축칼로리라고 할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는 금세 살이 찔 뿐 아니라 고기의 마블링이 좋아서 소비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인데, 풀을 먹도록 진화된 소가 옥수수 사료만 먹게 되면 고창증과 산중독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이번에는 항생물질을 사료에 첨가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소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하여 동물성 단백으로 만든 육골분을 사료에 첨가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광우병이 발생하고 인간에게까지 전달되는 불행한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작은 풀입니다. 저자는 닭과 소, 칠면조, 토끼, 돼지에다 토마토, 단옥수수, 딸기류까지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들을 키우고 있는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에서 초유기농 농산물과 고기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생산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100에이커의 목초지에서 4만 파운드의 쇠고기, 3만 파운드의 돼지고기, 1만 마리의 영계, 1,200마리의 칠면조, 1,000마리의 토끼, 42만개의 달걀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하여 목초지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풍요로워지는데, 풀은 더욱 무성해지고 땅은 더욱 비옥해지고 건강해지는 것은 지렁이 덕분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주 셀러틴은 우리가 먹을 음식을 생산하는 일이 제로섬 게임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먹을거리를 거두어들인다고 해도, 자연이 꼭 더 많은 것을 빼앗긴다고-표토가 줄어들거나 생산력이 줄어들거나 서식 생물이 감소한다고-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무와 풀, 야생동물 그리고 가축이 모두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방식의 농장경영을 통하여 농장폐기물을 줄이고 인공화학물질의 투여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의 또 다른 특징은 이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은 대부분 농장 인근 지역에서 소비된다는 점입니다. 산업적 음식사슬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이오아주에 있는 옥수수농장으로부터 캔자스시티의 사육장과 포장공장을 거쳐 이곳저곳에 산재해있는 식품가공업체로 흩어진 식재료가 마린 카운티의 맥도날드 매장에 이르기까지 대략 1,500마일을 이동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대단히 짧은 식품마일리지라고 하겠습니다. 이 농장에서는 농장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팔거나 농민장터, 대도시의 구매클럽, 인근의 소규모 상점, 혹은 원하는 레스토랑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농장의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신선하다는 점과 도축과정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오래 전 방문했던 도축장에서 소와 돼지가 도축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짐승을 도축하는 모습을 보면 그 고기를 먹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자가 다루지 않고 있는 공장식 도축시스템에 관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게일 아이스니츠의 <도살장; http://blog.yes24.com/document/2298916>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면서 ‘알고는 먹기 어렵겠네요’라고 제목을 붙였던 것을 보면 저 역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세 번째 주제 ‘수렵과 채집의 음식사슬’은 내가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고, 재배한 식재료들로만 저녁식사를 준비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런 방식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사냥감, 야생식물이나 버섯도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잡식동물의 축복은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데 있는 반면 잡식동물의 저주는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365쪽)”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고르든 그것이 산업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주어진 은총이라는 것을 더 이상 애써 떠올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라는 마무리 글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되새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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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국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가 갈수록 높아만 가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오면서, 미국의 소식을 훨씬 더 빨리 접할 수 있고, 책들은 거의 간격없이 번역되어오는 수준이고, 영화는 동시개봉, 미드는 거의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수준이지요.
하지만 그나마 먹거리가, 가장 영향을 뒤늦게 받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우리는 대부분 쌀밥을 먹고, 미국에서는 혐오 식품으로 구별될 것을 별식으로 먹고 있으니까요. 물론, 수입식품을 통해서 충분히 서양스러운 입맛을 추구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미친듯한 먹거리 문화 현상을 구경하노라면, 참 강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저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우리도 언젠가는 저래야 하나 싶기도 하구요. 십여년 전에는 그 열풍이 '스시'였고, 최근 몇년간은 '두부'인 모양입니다. 별 고민 없이 그런 걸 먹고 살았던 동양인 입장에서는 좀 쑥스러워요. 10년 입은 고쟁이가 갑자기 유행이 된 느낌이랄까요.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바로 이런 미치광이 같은 미국의 식생활 변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책입니다. 아, 스시나 두부 얘기는 괜히 꺼냈군요. 그런 동양적인 식습관을 후회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식탁의 풍요가 몇백년 동안 이어져온 척 하지만, 사실은 2차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습관에 불과하며, 그것도 단지 살이 조금 더 찌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이면이 있다는 것을 파헤치고 있는 거지요.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육류를 특별히 애호하는 미국인들이지만, 몇십년 전만 해도 적어도 매일 같이 고기만 먹고 살 정도로 고기가 남아돌지는 않았다는 거지요. 분명히 몇십년 동안 무언가 미국의 식품 공급에 혁명적인 일이 일어났고, 그것을 분명히 추적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취지입니다.
저자의 추적은, 오늘날의 풍요의 상징이 된, 슈퍼마켓에서 시작됩니다. 정말 먹을 것이 넘쳐나지요. 고기도 산더미, 과일도 산더미, 빵도 산더미, 과자도 산더미,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묘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먹는 것은 대부분 옥수수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주식으로 삼는 것이 그 사람을 정의 한다면 우리는 밀인간 또는 소고기 인간이 아니라, 옥수수 인간으로 정의될 것입니다.'
그리고, 책 전편에 걸쳐, 그들이 과연 어떤 것을 먹느냐와 (우리는 그중의 일부밖에 해당이 안되니까요) 그것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냐는 것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소, 돼지들이 콘크리트 위에서 자라며, 항생제 범벅이라는 것 정도는 상식이겠죠?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상입니다.
식품업계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입니다. 자동차업계가 하나의 거대한 고리인 것과 비슷해요. 하나의 생산품은 바로 소비재가 될 수도 있고 중간재도 될 수도 있어요. 물론 여기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요. 나사는 다음 공장에 가기 위한 용도로 설계되고 디자인 되지만, 식품의 주요 생산품인 식물과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말은 100년 전에야 유효한 말이었을 꺼에요. 물론 그때는 자동차도 없었지만, 그때는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지, 무엇을 먹이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강력한 산업논리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먼저, 제일 처음에, 옥수수가 자리합니다. 옥수수는 원래 16세기에 아메리카가 정복당하기 이전에는, 서양인들이나 누구에게나, 서양인들이 죽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옥수수의 우수한 생산력은 그런 편견같은건 날려버렸지요. 옥수수는 순식간에 미국 전역을 장악하고, 2차세계대전이후의 잉여 연구력을 등에 업고 더욱 강력하게 거듭납니다.
20세기 초에만 해도 다양한 작물과 가축들이 자라나던 농장들이, 엄청난 생산력 덕분에 옥수수하나로 통일되어 갑니다. 옥수수의 생산력이 아무리 엄청나도, 단품에만 의존하면 경기등의 영향을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런 부분은 모두 정부 지원이 해결해줍니다. 옥수수가 지나치게 풍작이어도 가격을 보전해주는 정책덕에, 농민들은 풍작이거나 흉작이거나, 오로지 '더 많은 옥수수'만을 꾀하게 됩니다. 콩과 옥수수의 이모작, 송아지와 닭이 공존하는 마당, 이런 것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남을까요? 영원히 지속될 제로섬 게임인 농업과, (어차피 손해를 세금으로 보전하고 있지만, 충분히 가격이 낮아져서 대박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단 하나, '엄청나게 많은 옥수수' 뿐입니다.
가장 효율적인 생산을 꿈꾸다 보니, 나오는 것은 옥수수뿐입니다. 하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지요. '옥수수가 많을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옥수수'의 차이는, 실제 옥수수는 어떻게든 소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옥수수는 또한 많은 연구의 결과로 다양하게 거듭납니다.
오늘날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탄산음료를 마시죠. 건강을 생각해서 쥬스등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을꺼에요. 하지만 어떤 마실 것에도, 옥수수과당이라고 하는 설탕의 대용품이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먹는 것은 사실 옥수수가 되는 거죠. 그렇다고 옥수수가 설탕을 밀어낸 건 아니에요. 설탕도 여전히 많이 먹습니다. 그냥 마구 먹는 양이 늘어난 것 뿐입니다.
소, 돼지에게 먹이는 여물 역시 옥수수 입니다. 이들이 원래 옥수수를 먹도록 자연에 의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희미한 사실에 불과합니다. 먹이면 먹는거에요. 심지어 광우병 소란이 있기 전에는 소의 시체의 지방까지 떼어 먹였으니까요. 굉장히 산업적으로 엄격한 논리입니다. 많은 영양분이 필요해? 값싼 옥수수를 먹이자. 지방 함량이 많아야 고기에 마블링이 생기나? 그러면 지방을 먹이면 되지. 화학적으로 따져서,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요.
이런 웃기는 순환의 고리를, 저자는 뭐 특별히 해결해야 된다든가, 무찔러야 된다든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것 같아요. 같아요라고 한 것은, 사실 제가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제가 먹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좀 의미가 없는 일이지요. 저는 너무 많은 고기를 탓하기 전에, 훨씬 더 유해한 것들을 먹고 있는,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뱅이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전혀 저에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술술 풀어가는 작가의 말솜씨 덕에, 이딴 책을 왜 봐 그만 봐야지 하면서도 반 넘게 봐버렸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 가면, 아직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식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피학적인 쾌감을 주진 못하더군요.
재미난 것은, 인간의 유물론이 마르크스와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타고 더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거겠지요.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건처럼 취급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질색을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두 세기가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스스로를 상품처럼 굴리고 있군요. 인간성이란 단어가, 이번 세기 말에 다다르면 어떻게 읽힐지가 궁금해서라도, 100살 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마지막 충고, 뭐 먹을때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뭐 어차피 우리는 먹고 똥싸는 기계에 불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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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일단 수퍼마켓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인스턴트 음식과 음식 재료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근원과 실체를 알기 위해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면서 생산 현장으로 간다. 역사적으로는 역순으로 책이 시작된다. 현재 산업사회의 음식 생산 시스템에서 시작해서 수렵채집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처럼, 현대 농산물은 대규모의 단일 생산으로 가능하며, 육류도 역시 동물의 본능과는 상관없이 공장식 사육시설에서 대규모로 키워진다. 저자는 자신의 송아지를 한마리를 구매하여 이런 사육시설에 월 사료비를 지불하며 키우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정작 도살되어지는 현장까지는 참가하지는 못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모든 농작물과 육류는 단일 작물인 옥수수로 연결되는 경이로운 사실이 놀랍다. 이런 산업식 반발로 유기농 농작물 역시 그 실체는 우리가 아는것과 사뭇 다르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면서 자신이 느껴야 하는 동물 살인에대한 고민은 먼 였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왔던 음식문화와 의식들과 연결되어 진다. 예전에 읽었던 패스트푸드에 대한 견해도 생각해 볼 만 했다. 몇 년전에는 채식을 하는 것이 환경에 대해서 이롭다고 생각하다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사냥한 고기와 채소로 이런 음식여행에 도움 준 사람들과의 만찬으로 끝이 나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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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3년 살았을 때 닭을 길렀다.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인 닭이나 좁은 닭장에 갇힌 닭을 먹기 싫어서 였다기 보다 그냥 남은 음식쓰레기를 처리해 줄 동물이 필요해서였다. 거기다 달걀요리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7마리 정도 키웠는데 점심이 오기 전 따끈한 달걀을 꺼내는 일은 늘 즐거웠다. 닭이 자라면 닭죽을 써 먹었다. 자기가 기른 짐승을 잡아 먹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매일 봤던 닭을 잡을 수가 있는가? 이런 딜레마에 빠져 본 적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정 붙이고 살았던 개도 잡아먹으면서 자랐던 탓일 것이다. 비록 고기를 싫어해 먹지는 않았지만...
시골을 떠난 뒤 아이가 닭죽을 달라고 했다. 마트에 가서 6천원 주고 사온 닭으로 죽을 쒔다. 아이는 '엄마 이거 말고 할머니 집에서 먹던 그 닭죽을 해 줘. 그 맛이 안나'라고 한다. 비싸지만 다시 마트에서 만오천원주고 토종닭을 사왔다. 아이는 '여전히 그 맛이 안나. 다음에 할머니 집에 가서 해 줘'란다. 동물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먹잇감을 먹고 자라느냐에 따라 맛도 영양도 엄청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첫번째 장은 산업적 음식사슬인 옥수수에 대해 파헤친다. 옥수수가 어떤 방식으로 현대인의 음식인 패스트푸드나 즉석조리음식에 광범위하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천연 딸기향은 향기가 딸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합성물질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옥수수에서 만들어 진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음식사슬에 옥수수가 들어 있다. 미국인들은 옥수수를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규모 옥수수 농장의 폐해, 풀을 먹는 소가 옥수수를 먹으며 자라는 것에 대한 폐해 등등
두번째 장은 풀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시작된다. 풀이 그 시작이다. 풀이 자라고 초식동물이 풀을 먹고 그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이 먹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음식사슬이다. 지금은 이 자연의 과정이 왜곡되고 축소된다. 급속도로 자연을 거스른 이런 모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산업유기농이 허상과 대비된 자연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에너지를 얻는 유기농 폴리페이스농장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남편 은퇴하면 야트막한 산자락을 빌려 여러 종류의 가축과 채소를 기르며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번째 장은 숲에 관한 이야기다. 숲에 사는 버섯을 사냥하고 각종 열매을 채집하고 육식동물인 야생돼지도 사냥한다. 숲은 내버려두어도 수많은 동물과 식물에게 에너지를 준다. 인간은 그저 음식사슬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자로서 할 일만 하면 된다.
500쪽이 넘는데다 소설책도 아닌데 재밌게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저자인 마이클 폴란은 행동력 때문이다. 자료만 공부해서는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이클 폴란은 자료를 뒤지고 직접 찾아가 확인하고 경험한다. 옥수수 농장을 찾아가고, 군수복합산업체와 어떻게 연결됐는지 찾아내고 폴리페이스농장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건초를 만들고 닭장을 옮기고 닭까지 잡아본다. 버섯을 따러 하루종일 산을 헤매고 야생돼지를 사냥하기 위해 사격술을 배운다. 마지막은 직접 수렵 채취한 다양한 먹을 거리로 상을 차려 음식에 대한 사고를 하게 했다. 몸으로 쓴 글이라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