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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겪는 청소년기의 방황을 약간의 단순화를 통해 심리학적인 관점의 논의를 시작해볼까 한다. 이런 분석은 획일화와 비약이라는 두가지 한계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이 작품을 설명하는데는 그리 무리가 없지 싶어서다. 이 작품을 전형적인 성장소설로 판단해서이거나 현 세태를 꼬집는 뉘앙스에 신선함이 떨어져서는 결코 아니다. 이 작품 속 등장인물, 즉 두 소녀와 한 소년의 사고 및 행동방식이 다소 극단적인 면은 있지만, 심리학적 관점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연성의 테두리 내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뷰어다"이벤트 참여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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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치고는 재밌는 이름이다, 김사과라니... (하긴 가까운 일본에는 바나나도 있으니까...) 그리고 소설 제목도 흥미롭다, 미나라니... 하지만 실제로 소설을 읽는 동안 몇 차례나 그만 읽을까, 하고 생각했던 걸 보면 소설이 그렇게 재밌었던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주인공들을 도발시키며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게 짐작이 가능하지만, 그러한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지도 그러한 도발에 수긍하도록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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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자주 올리는 작가 '김사과'는 이름에서 풍기는 의미처럼 범상치 않았다. 그러다가 한번 칼럼이 아닌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다. 시간이 좀 지난 소설이기는 하지만 역시 책 제목이 '미나'라는 점이 특별해서 읽었다. 그리고 제대로 절망을 느꼈다. 도대체 20대에 이 소설을 쓴 것이 맞는 것인가? 저저인 김사과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다만 한겨레 신문 칼럼을 참고로 유추해보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사실정도만 알 수가 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의 고통은 대한민국을 벗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주인공 수정이가 작은 검은 고양이를 감정에 못 이겨 죽여버렸듯이, 나 역시 그런 수정이를 영원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런 수정이에게 미나는 단 하나 남은 감정의 배수구였다. 수정이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교육열이 높은 부촌의 유복한 가정에서 좋은 머리와 멋진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그녀지만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방법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세상에 욕을 하고, 조롱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일탈도 자주 한다. 그렇지만 모범생으로서 그녀의 모습은 부지런한 성격과 눈부신 외모, 타고 난 머리를 이용해 꾸준하게 유지해 나간다. 끝까지 읽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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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는 26살 대학생이다. 그녀의 첫 작품 <미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 엿보인다. 때때로 이야기는 두서 없고, 문장은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책 <미나>는 김사과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소설의 기능 중 하나는 시대를 반영하고 사회를 담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기능에 더없이 충실한 김사과는 이 사회의 체제에 가감없이 채찍질을 가한다. 정이현이 체제순응적 인간군상을 소설 속에 등장시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에만 충실하다면, 김사과는 체제순응적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등장시킨 뒤, 신랄하게 체제순응적 인간을 비판한다. 또한 단문으로만 이뤄진 이 책은, 그래서 더욱 독자에게 팍팍 꽂히게 된다.
미나의 어머니는 시의 중심에 넓은 캠퍼스를 펼쳐놓은 값비싼 사립대학을 나왔다. 학창시절에는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에 열중했으며 지금은 당당한 전문직여성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녀의 교양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그녀는 단지 유행가를 따라 시대의 유행에 발맞춰나갔을 뿐이다. 그녀는 유럽산 가방 대신에 유럽산 철학과 혁명이 유행하던 시대를 살았고, 만약 지금이 그녀의 청춘기라면 그녀는 기를 쓰고 유럽산 가방을 모으며 누구보다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황혼의 나이가 다 되어서야 이런 아름다운 유행이 찾아온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면세점에 가득 쌓인 유럽 상품에 몰두했다. 그녀는 지금 천박한 졸부의 아내처럼 보이며 따라서 그녀는 행복하다. 그녀는 유행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유럽산 허브와 열대과일을 사용한 발가락만한 디저트케이크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따라서 인간인 나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서 당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정이 그런 모멸적인 훈련에 열광한 것은 수정이 수용소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좁은 은색 철장을 가득 채운 작고 부드럽고 하얀 쥐의 인간이며, 똑같은 색깔을 하고 좁은 공간에서 맛없는 것을 먹으며 딱딱한 곳에서 자는 삶을 사는 인간이며, 다시 말해 완벽하게 체제순응적인 인간이다. 도시는 점점 더 수용소의 담장을 높이 쌓아가고 있으며 수정은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빨리 세계의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서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모두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는 발밑에다 대고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수용소는 계속해서 수용소다워야 하며 학교는 계속해서 지옥의 입술처럼 붉고 뜨거워야 한다.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복종과 순응의 미덕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은 계속해서 무릎을 꿇는 자와 무릎을 꿇리는 자를 갈라내고, 그것을 육성하고 권장하고 보호하며 홍보해야 한다. 수정은 무릎을 꿇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릎을 꿇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수정은 아무에게도 아무런 명령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명령을 따른느 것이 뭔지 몰라서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수정은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질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 수정을 증오한다면 수정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수정은 그것을 안다. 아주 잘 안다. 그런데 마음 깊숙이 느껴지는 이 불쾌감과 수치심은 도대체 무엇인가.(중략)수정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학원의 시간이다. 죽더라도 몸을 일으켜야 한다.
학창시절에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에 열중한 미나의 어머니는 사실상 유행을 좇은 것에 불과했고, 너무나도 체제순응적인 미나의 친구 수정은 안하무인적 인간이다. 이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이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거의 대부분이 곧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의 소비수준을 감당해내기 위해 노동한다. 실제로 그들의 소비수준을 여유롭게 감당할 수 있는 수정과 미나의 부모 같은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의 최소한의 기준인 양 자랑스럽게 시청 앞 광장 전광판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으며 부모들은 그 새겨진 숫자들을 쓰다듬으며 괴롭고 힘들어서 운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감당할 수 없다면 적어도 감당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이 진정한 P시 시민의 자세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정은 아무런 슬픔도 놀라움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뇌 한구석에서 뭔가 아주 하찮은 것이 하나 붕괴된 느낌이다. 하지만 사소한 붕괴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어차피 아무 쓸모없이 퇴화된 어떤 것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지극히 체제순응적인 P시의 시민들과 수정은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에게 '사소한 붕괴'로 일침을 가하지만, 그들은 그 사소한 붕괴마저도 '어차피 아무 쓸모없이 퇴화된 어떤 것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시험문제로 압축되는 수동성의 세계를 벗어나자 미나와 수정에게 펼쳐지는 것은 자살 아니면 살인의 공간이다. 수동성의 공간이 세계를 향해 뻗은 감각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죽음이란 감관의 퓨즈를 끊어버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나한테 공부만 잘해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대학은 성격순이 아니다. 성적순이다. 게다가 훌륭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부적응자에 정신병자에 성격장애였다. 나는 적당한 인간이 될 생각이 없다. 나는 적당히 똑똑하고 잘난 인간이 될 생각이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이 될 거다.
죽일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생각해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위대하다는 것은 사람을 죽일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갖지 못하면 위대해질 수 없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죽일 권리,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평가할 권리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그들을 어떠한 잣대로 서열화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괴상한 행동인가.
김사과는 이렇듯 시종일관 냉소적인 문체로, P시의 시민들로 상징되는 현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 '지금 너의 삶은 올바르게 굴러가고 있는가. 이 사회의 체제는 과연 올바른가. 너는 체제순응형 인간인가, 아니면 체제비판형 인간인가.' 이러한 김사과의 물음에 우리는 뭐라 답할 수 있을까.
한편, 미나는 사회적 시대상을 담아낸 소설임에 동시에 미나를 향한 수정의 '미친' 사랑 노래다.
수정은 다시 미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온통 장밋빛으로 달아올라 우는 미나는 아름답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수정을 팔을 뻗어 미나를 껴안는다.
너한테 대단히 실망했어, 오늘.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니 어쩔 수 없네. 너는 나를 이해하지 않아. 너는 나를 너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아. 너 때문에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 왜 내 마음을 몰라주니. 울고 싶어. 아니, 죽고 싶어.
'친구의 자살소식을 전해들은 여학생'의 완벽한 상징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미나. 자신에게 결여된 감정을 연출하는 그녀를, 수정은 질시하고 또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저 체제가 원하는 대로, 체제의 꼭대기 그 이상으로 올라가려는 수정을, 미나는 사랑할 수 없다.
미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수정은 이내 공고한 자신의 벽 안에 자신을 가둔다.
나 혼자만 진짜 나를 진짜 사랑할 수 있다. 나를 진짜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다. 잊어버리면 안된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도피적이야. 벽장 속이 좋아봤자 벽장 속이지. 벽장 속에서 행복해봤자 벽장 밖에선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알아야 하는데. 미나. 젤리가 되고 싶었니."
갑자기 수정은 자신이 더이상 미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이 비밀스러운 이유는 비밀만이 사랑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나의 비밀을 손에 넣었으니 수정은 이제 더이상 미나를 사랑할 수 없다.
결국, 수정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미나를 죽일 결심으로 미나의 아파트를 찾아간다. 김사과의 소설은 대개 결말이 그로테스크하다. <미나>의 결말은 그로테스크할 뿐만 아니라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이 결말이 독자에게 던지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은 <미나>의 노란 책장을 다시 펴봐야겠다.
http://www.cyworld.com/hyangslibrary ⓒ Hyang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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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소설의 사이코패스 같은 잔혹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잠시 학창시절을, 특히 가장 무서웠던 순간(매일이라면 할 수 없지만... 사실 난 매일이다)을 떠올려보자. 우울할테지만 어디 그것이 일개 학생의 문제일까. 우리 학창 시절이 우울하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는 극소수일 것이다.(물론 기쁜 일과 추억들도 있겠지만 그것만 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지옥과 같은 입시만 없다면 행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학생들도 친구보다 더 나은 성적을 욕망하도록 요구 받는다.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 고통의 시간을 '대학 입학'이라는 해방의 날만 기다리며 감내한다.(물론 대학은 해방이 될 수 없다. 당시의 착시일 뿐) 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일탈을 해봤자, 어른들은 이 행동을 ‘사춘기’ 내지는 ‘방황’이라고 깔보며 미래에 ‘너는 분명 타락할 것’이라고 겁을 준다.(어른들도 이게 최선이리라) 이에 겁먹은 학생들은 이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정상의 궤도로 되돌아오지만, 공부가 오지게도 하기 싫은 용기 있는 학생들은 미래에 ‘정말로’ 실패하기 일쑤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 원칙이며, 그들은 게임의 규칙 자체를 파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입 없는 자’로 여생을 살게 되어버린다. 이 게임의 참여자로서 이 무서운 현실을 거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외부의 원조가 절실하다.
김사과는 소설 ‘미나’로 이 같은 현실의 병적인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반항한다. 적절하게도 주인공은 고등학생들이다. 아직 20대인 작가는 마치 접신 한 것처럼 이야기 속 ‘그들’의 일상과 내면을 세세히 묘사한다. 제목이기도 한 ‘미나’는 등장인물이기도 한데, 주인공이라고 할 순 없다. 바로 ‘수정’이라는 인물이 부각되기 때문인데, 작가는 스토커와 같이 ‘수정’을 쫓아다니며 그녀를 대변해준다. 수정은 모범생이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녀는 학교 교육이 나누어주는 영양소를 독점적으로 끌어안은 친구이다. ‘수정’ 자체가 제도 순응의 결과인 것이다.(이것이 전제인 점이 흥미롭다) 그녀는 배운 대로 지극히 합리적인 이성을 갖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 해주고, 수정은 수능 문제지로 세상을 다 알겠다는 선언을 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성장하게 된다. 그녀는 모범적인 모델에 근접한 것이다. 모두가 열망하는 자리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수정에게도 결여감은 있다.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 평화가 가짜일지 모른다는 감정을 느끼고 환멸감에 젖어 제어할 수 없는 없는 감정과 씨름하다가 결국은 친구 ‘미나’를 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제도가 인정해주는 특권적인 정상성을 담지했던 수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열증적인 실패의 모습을 보이며 박수쳐주는 세상을 배반한 것이다.
수정의 분노는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갈수록 출구를 찾지 못해 누적되길 반복하다가 그 크기가 너무도 커져버려 살인이라는 돌발적인 극단으로 그 분노 에너지를 소진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이야기도 끝이 난다. 이러한 극단성은 수정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삶을 부정하고 바깥의 삶으로 도약하기 위해 기존의 현실의 강제 종료-제스처이다. 그런데 이 살인이 끝이 아님은 계속 암시 된다. 김사과의 이전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수정은 세계의 ‘언인스톨’까지 나아갈 것을 외친다. 분노는 응집되어 책을 덮는 독자에게까지 전해진다. 이 현실에서 수정과 같은 인물이 있다면 ‘절대 악’으로 규정되겠지만, 가상의 그녀는 이해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대리 만족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수정은 현실의 부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동종요법’의 수행자이다.
너무 감정이입 해버렸다. 수정의 임무는 끝이 났다. 지금부터 우리는 김사과식 분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녀는 이전의 소설에서도 ‘묻지마 살인’의 향연을 맛보게 해준 무서운 작가이다. 그가 꾸며 놓은 무대(작가가 만들어 놓은 배경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는 항상 어이 없는 폭력과 살인의 스펙타클이 난무한다. 이로써 출구 없이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맴도는 분노 에너지를 외설적으로 가시화 된다. 특히 사회 시스템과 제도의 평범한 수행자의 내면에서 길러지는 공포와 분노가 변환되어 폭력으로 전환되어 표출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는 거짓 위안에 머무는 다른 소설의 방식과는 다른 김사과식의 배반의 리얼리즘이다. 나는 그가 만들어 놓은 기존 질서의 와해와 전복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자, 폭력적이게도 그녀의 소설을‘규정’하자면, ‘과도한 사례를 통한 현실의 폭로’라고 할 수 있겠다. 분노는 우리의 공통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의 표출을 허락 받지도 교육 받지도 못하였다. 일상에서 분노는 종종 ‘욕설하기’와 같은 행위로 손쉽게 만족과 교환되는 듯 보이지만 이러한 물화된 해결 방책은 결코, 근본 원인을 근절하지는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후에, 사그러들지 않는 분노감은 물리적인 폭력으로 변경되어 피해자에게 분노를 전가하는 식으로 해소되기도 한다. 이러한 욕설, 폭력 등의 대중화 된 분노 해결 방책은 분노를 배출할 적합한 도구의 부족을 알려주는 징후다. 나는 이 결여를 김사과의 글쓰기를 통한 개입이 보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봤다. 김사과가 만들어 놓은 ‘살인’이라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노의 실체를 추적하기 위한 길잡이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분노의 원인조차 알쏭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것이 분노에 의한 물화된 반응의 확장을 불러와 ‘폭탄 돌리기’식의 분노 전가를 중단하고, 머리를 맞대어 '원인'이라는 현실의 조건을 고민하는 단초가 되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배반의 윤리가 구축되는 것이다. 갈수록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자를 배출하는 이 시대의 불완전성, 하지만 문화는 독소가 없는 매끄러운 것들만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사회 현실 속에서 김사과의 등장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동시대의 '이질성'을 긴 호흡으로 깊게 들이마셔 한 뭉텅이의 이질감을 배설하는 김사과의 소설은 어디까지 현실의 반영이자 반작용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자. 우리는 수정의 살인으로 인해 실체 없던, 의심 받기 싫어하던 분노의 대상과 원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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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김사과의 지면 인터뷰에서 그녀가 청소년 시기에 관심이 있다는 구절을 읽었다. '진짜 쓰고 싶었던 것은 이 사회에 대한 것, 이 아이들이 이처럼 슬프게 된 이유와 그들의 부모 세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 인터뷰가 내게 <미나>를 읽게끔 만들었던 계기다. 전형적인 부, 혹은 가난의 대물림 양상이 조용하게 그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다양한 종류의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범람해서 누가 진짜 귀족이고 누가 천민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기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혜택받지 못한 부부의 자녀가 중세 예술에 대해 공부하고, 그 문화를 향유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귀족인가. '진짜'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전혀 아무런 것도 향유하지 못하는 천민적 배경에서 태어난다면? 가짜인 사람들이 진짜인 척 하고 진짜를 향유하고, 정작 진짜인 사람들이 가짜의 배경 아래 놓여지게 된다는 것. 아니, 애초에 진짜와 가짜란 건 무엇으로 판단한단 말인가. '진짜'라는 것은 후천적으로 학습이 되는가? 나는 이 모든 요소들이 엉망진창으로 섞여서 도대체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현실이, 그리고 그 아래 놓여있는 인간 군상들의 위치가 부당(unfair)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김사과의 지면 인터뷰를 봤을 때, 나는 그 답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어떤 힌트, 혹은 그 화두에 다시 질문을 던져주는 날카로움을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복권 당첨으로 졸부가 된 가정의 딸, 미나. 프티부르주아적 문화를 향유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처벅처벅 잘 발라진 싸구려 염료같은 느낌을 주는 '가짜'스런 문화인의 고품격 문화생활을 하는 부모. 그리고 그들의 딸 미나 -부모의 부로 인하여, '진짜'를 아무런 노력없이 향유할 수 있는 혜택을 얻고 사는 순수한 어린 양!-. 그런 미나를 지켜보는 친구, 수정. '현대에 꼭 들어맞게 만들어져버린' 자신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미나에게 열등감을 갖기도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여고생.
이 장편 소설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려다가 멈추고 아예 다른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너무 큰 기대를 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덮으려 했던 적도 많으나 결국은 끝까지 읽었다.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특히 스물넷의 어린 나이를 강조한 띠지 광고처럼, '용서될 수 있다고 여겼든지', '스물넷의 특징을 되려 강조하자고 생각했든지'간에, 필요 이상으로 피상적인 대화체의 나열은 이 책을 읽을 필요성을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최악의 요소였다. 독자들에게 쿨한 척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솔직하게 나열하지 않아도 좋았다. 하고싶은 이야기와 세계관을 더 치열하게 밀어붙였다면 좋지 않았을까. 만족보다는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작가다. 풀어놓은 이야기보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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