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어린 시절, 노인들은 대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이제 와서 그것은 '미래에 대한 미련'의 표정이었다고 깨닫습니다." 지금 어느덧 '노인'이 된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가슴을 아리게 할 줄은 읽기 전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미련'이라는 표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나는 미래, 폭력과 증오가 정당화되는 미래에 대한 작가의 미련은 (작가보다) 젊은 세대인 나에게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얼핏 작가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의 제목이 드러내듯 '인간이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할 리 없다'는 회복에의 신념이 책장을 덮으며 가슴을 두드린다.
결코 쉽게 읽히는 문장들은 아니었다. 어떤 문장들은 두어 번 읽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고, 특히 앞부분의 두서너 칼럼은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이해하는 데 좀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비문이 보인다거나 오역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있지는 않았다. 읽기 어려웠던 점이 번역가의 잘못일까? 먼저 리뷰를 쓰신 분은 번역가의 잘못을 지적하셨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해체하여 다시 잘 읽히게 구성하는 일이 이 책에서 의미가 있을까 싶다. 정보전달이 목적인 실용서가 아닌데... 오히려 수식어가 많고, 중간 성분들이 생략된 채 여러 문장들이 연결되어 있는 이 문체가 오에 선생의 특징적인 문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단숨에 읽는 것이 아닌 천천히 생각하며 곱씹어 읽게 되는 장점이자 단점이 생기는 것 아닐까. 내 일본어 실력이 원서를 보면서 평가할 만한 수준이 못되지만 일본 독자들 사이에서도 오에 선생의 글은 읽기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다 하고, 저자 또한 "저처럼 악문(惡文) 전설이 독일에까지 알려진 작가"라고 이 책에서 표현해 놓은 것을 보면 번역가를 탓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잘된 번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번역에 대한 판단으로 혹 내용이 묻히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에 오랜만에 리뷰를 써 본다.
자꾸 생각나는 내용... "머리에 이상을 지닌 채 태어난 지 한 달,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아이에 대해 번민하는 동안 저는 그 조그만 영혼을 진혼하자! 하는 생각이 들어 등롱(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등롱 들을 배에 실어 띄워 보내는 행사가 있다고 한다)에 아직 살아 있는 아이의 이름을 적었던 것입니다. 야스에 군이 거친 소리를 퍼붓는 동안, 저는 무력감과 센티멘털리즘에 사로잡힌 스스로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습니다. 그 윤리적 저급함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젊은 저는 고통스럽게 배웠고 그 후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장애를 지닌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번민으로 아이의 영혼이나마 죽은 것으로 하여 진혼하고자 했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 지금은 그 아이가 어느덧 중년이 되어 아버지의 벗이자 동료로 힘을 주고 있으니, 당시의 '등롱사건'은 한번쯤 치러야 했던 어떤 의식은 아니었는지...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괴로움이 잘 표현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 쥐 잡는 이야기('재미있게 이야기한다'). 저자가 '재미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
|
도대체 이 책의 내용에 별을 몇 개 주어야 한단 말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 개 이상은 줄 수 없을 것 같다. 최악의 번역과 편집에서 비롯된 비극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번역가라면 혹은 편집인이라면 내용보존과 전달의 책임이 본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절감할 터, 때문에 불운한 오에와는 전혀 무관하게 별 하나를 던졌다. 본인도 몹시 속상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오에가 대 작가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설마 일흔 네살의 오에가 노망을 부려 문장을 망쳤단 말인가. 혹시 그랬더라도 나는 대뜸 번역가의 자질을 의심하고 나서겠다. 읽는 내내 서은혜, 그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읽는 중간에 책을 뒤적거려 <옮긴이의 글>을 찾아 그녀가 과연 한국어는 제대로 구사하는 인간인가 검증까지 하고자 했었다. 부사와 형용사의 위치, 심지어는 주어의 위치까지 뒤죽박죽, 행간 사이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마치 일문학과2~3학년들이 전공수업에서나 범했을 직역의 오류에서 헤어나고 있지 못한 듯 하다.이력을 보니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기에 더욱 경악을 금치못했다. 듣기치욕스럽겠지만 최신 버전 번역기에 돌려도 이 정도의 글은 나온다. 그렇다면 번역가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편집자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다. 원고를 넘겨받고 그 흔한 '검토'도 안해봤단 말인가? 아니, 이건 기만이다. 서은혜 그녀는 첫 장부터 나를 실망시켰다. 그런데도 편집자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편집자 역시 그녀와 같은 한국어 구사 불능자거나 검토 없이 출판을 감행한 것이다. 혹시 이들은 오에에 대한 눈꼽만큼의 애정도 없이 네임밸류만을 믿고 출판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너무 화가나서 흥분한걸까. 환불요청을 해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이건 아니다, 회복될 수 없는 문장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
|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오래 전 일이지만, 그 작품을 끝까지 읽어낸 경우는 손가락을 꼽는다. 의도적으로 리듬을 깨버린 듯한 문장, 거칠고...때로는 읽는이를 주늑들게까지 하는 문장! 어떤 소설은 여러 차례 읽기를 시도했지만 아직도 다 읽지 못한 채로 내 책장을 장식하고 있다. 필요없는 물건들은 언제든 과감히 잘도 버리는 내가 이미 오래 전 추억처럼 가물가물하게 기억되는 대학시절부터 40대를 향해 가는 지금까지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도 오에 겐자부로의 다 읽지 못한 책들을 내 책장 한가운데 여전히 간직하고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책 <회복하는 인간>을 보면서 그 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나는 어렵사리 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노 작가의 복잡한 심경과, 단답형 질문과 달리 그 정답을 쉬이 찾을 수 없는 섬세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까... 이 책은 요즘 서점가를 장식하는 그런 책들처럼 쉽게 읽어 젖히는 책이 아니다. 실용서나 술술 읽히는 일본 소설과 같은 문장을 기대하고 이 책을 들었다면 다소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진지하게 몇 장을 읽어 가다 보면 너무나 쉬운 책을 기대하고 이 책을 들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작가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무게에 대해 잠시 조그만 실례를 범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를 향해 계면쩍은 미소를 짓게 된다. 마치 우리 뇌를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주름처럼 굴곡과 미로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노 작가의 문장에는 쉽게 살아가고 많은 걸 그냥 잊고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삶에 무언의 메시지를 준다. 그런 매력이 있기에 오에 선생의 책들은 여전히 내 책장의 중심에 놓여 그 존재만으로 내게 말없이 조언을 해오고 있었음을... 이 책 <회복하는 인간>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됐다. 오랜만에 정신을 집중하고 문장을 곱씹으며, 저자의 생각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읽은 책... 십 몇 년 전 자취방에서 창비의 어려운 리포트들을 밑줄 그으며 읽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 책, 오랜만에 책을 읽는 야성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 책... 이 책으로 나는 더 진지해지고, 책 읽기에도 추억이 있음을 알았고, 더 행복해졌다. |
|
개인적으로 아주 선호하는 일본 작가 중 한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거장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집. 장기간에 걸쳐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던 컬럼과 기타 강연 내용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런 이유로 글 자체가 그다지 길지 않아 좀더 깊은 생각을 듣고 싶은 독자로서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하지만 평화에 대한 그의 일관된 의지는 주목할만하다.
|
|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희망을 통찰하는 오엔 겐자부로의 소설들을 무척 좋아한다. |
|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다. 에세이의 형태이지만 문학 작품이라고 보긴 좀 어렵다. 신문에 기고한 글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기 아들의 콘서트에 대한 내용이다. 신문에 관한 글은 주로 시사적인 내용이고, 당시 고이즈미 정권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장애를 가진 아버지로서의 삶과 가치관을 닮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시사 이 글이 나온 시점에서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 버렸다. 그때보다 우경화가 훨씬 심하게 된 일본이니까 이 책을 읽어 무슨 도움이 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몇가지로 정리해본다.
a) 교육기본법 교육기본법의 대한 개정이 진행되는 시점인 것 같다. 일본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교육기본법이 어떻게 개정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점이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개정되는 시점이다. 즉 보수주의 혹은 국수주의 역사 교과서가 편찬된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이런 경향에 대해서 반대한다.
작가는 전후에 소위 평화헌법이 제창되는 시기에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교육 기본법의 취지에 대해서 공감한다. 아마 새로운 교육 기본법에 대해서 일부 나이 많으신 완고한 교사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새로운 일본의 교육기본법으로 잘 적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내부와 외부(외국인, 예로 중국과 일본)으로 나누는 등의 내셔럴니즘의 색채를 강하게 뜨고 있다.
b) 일본 헌법 9조 일본 헌법 9조에 대한 개정에 대해 반대한다. 일본 헌법 9조가 평화 헌법의 골격으로 아마도 외국 파병에 대해서 허가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헌법9조회를 만들어서 헌법을 지키려고 한다. 이런 태동의 시기에 신문에 발표된 내용이다.
c) Edward W Said 사이드와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2003년 사이드가 병투병 끝에 돌아가시는데 그와의 우정과 그의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나는 그가 팔레스트인 사람인 것을 몰랐다. 그리고 책에서 한 자도 오리엔털리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나는 오리엔털리즘=사이드 인데 ...
2) 가족 작가의 장남은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장남 히카루(光)에 대한 내용이 작가 인생의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회복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바로 장남인 히카루에 의해서 인간이 회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듣고 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장남이 어느날 새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알아내고 그에게 음악으로서 소통한다. 결국 장남은 미약하지만 음악에 의해 반응한다.
결론으로 이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 책을 읽을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선전하는 만년의 사색 이런 내용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
|
'나의 나무 아래서', '새로운 사람에게' 등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집을 좋아하는 독자다. 새로 나온 에세이집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구입했는데, 책을 넘기는 첫장부터 어색한 번역들이 눈에 띈다. 일본어 번역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한국어와 일본어가 비슷하기에, 오히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번역하는 경우가 잦은 것 같다. 그래서, 한국어는 한국어인데, 일본어 같은 한국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번 작품도 일본어 오역의 대표적인 경우인 것 같다. 번역한 이의 이력을 보니, 일본어책을 많이 번역하신 분인 것 같은데, 일본어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바꾸려는 노력은 소홀히 한게 아닌가 싶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나로선 당황스러운 표현이 많아서, 아무리 에세집이라지만 좀 화가 날 정도다.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저자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세심히 가다듬었을 노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장 좋은 번역은 독자가 번역했다는 것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다'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번역이 거슬려서, 술술 읽혀야할 에세이집이 속도가 안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