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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를 일컬어 로마의 융성기를 이끈 5현제라 칭한다. 100년 가까이 되는 긴 기간 동안 로마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지중해 지역에는 그로 인한 평화가 찾아 들었다. 본 소설은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힘의 정치보다는 철학에 능통했던 이 황제는 <명상록>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콤모두스는 네로 못지 않은 잔혹함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막스 갈로의 소설들은 언제나 제 3의 화자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곤 했다. 본 소설 역시 선왕 아우렐리우스의 보좌관으로 설정된 인물인 ‘프리스쿠스’라는 자가 자신의 시선에서 모든 것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버지를 모시던 자의 아들을 향한 시선에는 경멸감이 그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로마의 평화가 이 인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 전부터 이미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한 고심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새로이 즉위한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탐할 뿐 나날이 해이해져 가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는 좁쌀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인 박해는 자신이 가진 잔인함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서 그에게 작용하였다. 칼로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내부의 장기를 적출케 하고, 급기야 맹수에게 그 시체를 던져주는… 이와 같은 죄인 처단법은 딱히 유흥거리가 없는 고대 사회에서 민중들의 흥미 유발을 위한 장으로써 적절히 활용되었으며, 동시에 황제의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적절한 기제로서도 작용되곤 했었다. 아니라 아우렐리우스, 피우스, 하드리아누스 등 팍스 로마나 구축에 앞장섰던 인물들 역시 기독교에 냉랭한 시선을 던져왔기에, 기독교 박해는 콤모두스의 잔인함을 보다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요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작가가 본 작품을 통해 가장 초점을 맞춘 부분은 다름 아닌 프리스쿠스라는 인물의 심리인 듯했다. 아우렐리우스를 받들며 그는 반 기독교적인 정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로마 귀족으로서 노예 위에, 남성으로서 여성 위에 군림하는 그의 태도는 그 당시 로마 귀족에겐 보편적인 정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는 콤모두스에 대한 반감 탓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의 마음은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 차츰 열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에 대해 보였던 태도에 대한 깊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민중들이 흘리는 피를 외면코자 했던 아우렐리우스. 하지만 그도 기독교 및 유대인 박해자라는 지위만은 버리지 않았다. 로마의 법에 따라 이단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는 그의 입술이 떨렸는지 여부는 알 길 없으나, 프리스쿠스는 콤모두스의 잔인함이 다름 아닌 성인으로 추앙 받아도 무방할 정도로 평화를 사랑했던 아우렐리우스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불경한(?) 생각마저 품는다. 선한 얼굴 뒤에 숨기어진 잔인함, 그것을 두고 작가는 아우렐리우스의 두 얼굴이라 칭한다. 극과 극에 속한 듯한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가 알고 보면 같은 지점에 서 있다니, 이러한 작가의 해석에 대해 다른 이들은 어떠한 평을 할지 궁금하다. 소설 속에서는 콤모두스를 아우렐리우스의 적자가 아닌 사생아이기에 그토록 잔혹할 수 있었다는 식의 설명도 나오긴 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콤모두스가 누구의 핏줄을 계승했는지에 대해 좀처럼 명확히 밝히질 않음으로써 프리스쿠스의 생각에 좀더 무게를 실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독자에게 사고의 자유로움을 허락하고 있었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가 어떠한 관계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악함이 서로 다른 인간에게 각기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사고할 것이 많기에 이 소설은 결코 한 번 읽고 놓아버릴 수가 없다. PS… 소설 속에서 기독교는 현실을 초월하는 위대함을 보이고 있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숭고하게까지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철학을 가장 심오하게 따른다고 알려져 있는 불교마저도 현실 세계에서의 권력에 집착하지는 않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