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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조직으로부터 협박을 받는다고 가정하자. 조직은 나에게 다른 사람을 죽이라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나는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 경우 내가 끝내 살인을 했다면 나는 정당방위를 외칠 수 있을까. 일반적인 정당방위의 상황을 살펴보자. 상대방이 지금 나를 죽이려는 상황이다. 그때 나는 살기 위해 그 사람에게 총을 쏜다(영화처럼!). 상대는 쓰러진다. 이때는 나를 죽이려는 상대를 물리친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정당방위가 인정된다. 하지만, 다시 앞의 경우를 보면, 나는 살기 위해서 나 자신을 협박하는 조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제3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죽는 사람은 (조직에 어떤 원한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와는 무관하다. 그는 그저 희생자일 뿐이다. 쉽게 말해 나의 죽음과 그의 죽음을 택하라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내 생명이 죽은 사람의 생명보다 더 무겁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도덕적인 선택은, 조직에 저항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이처럼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을 상정한 후 자유의지, 정체성, 책임 등 관념의 의미를 묻는다. 가령,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 빨간 신호등이 켜졌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 등의 상황을 제시한다. 으레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개념들의 의미를 다소 극단적인 상황 하에서 묻고 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의미가 모호해지고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불안해 할 필요 없다. 이 과정을 즐기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