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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하나 갖고 절절매는 나에게는 이런저런 학문들을 횡단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기함을 넘어 경외감 비슷한게 느껴진다. 저자인 홍성욱씨 또한 그런 경우인데, 그 '횡단'이란게 인문학 분과내의 횡단 뿐 아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에서의 횡단이란 측면에서 더욱 놀라웠고 신선했다. 책은 파놉티콘에 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파놉티콘은 '공리주의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벤담이 구상한 감옥인데, 이 감옥은 중앙의 감시공간에서 간수가 죄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포착할 수 있음에도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지닌다. 간수는 언제든 눈을 돌려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의 행동을 보지 못하기에 언제나 자기감시를 통해 규율을 내면화하게 된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파놉티콘이 다시 논의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였다. 푸코는 이러한 파놉티콘의 논리가 오늘날 사회전반의 통제와 규율에 쓰여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책은 이러한 논의와 다른 학자들의 반박을 소개하며 과연 그렇다면 현대 사회 권력의 '감시'와 '규율'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기계' 그 자체에 의해 작업장을 감시, 통제했던 포디즘의 시대를 지나 개개인에 대한 정보수집을 강화하여 '과학적'인 통제를 하는 정보파놉티콘 시대의 권력은 범위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는 그 '정보수집'의 특이성으로 인해 규율사회를 지나 통제사회로 나아갔고, 이를 사례별로 자세히 고찰해주는 저자의 언급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심지어 피감시자가 감시자에게 직접 정보를 제공해주는 '수퍼파놉티콘'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저자의 언급과 실제 사례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시는 감시와 같은 방법으로 역감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해방의 공간을 제공한다. 생각만 바꾸면 권력의 감시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피감시자 전원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 또한 가능하고, 실제 그러한 사례들도 종종 있었다. 언론이나 인터넷, 시민단체를 통한 참여와 권력에 대한 감시는 다른 한편으로 대중의 권력통제 기능을 그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강화시켜 결국 권력의 감시를 권력에 대한 감시로 전복시키고 있다. 아울러 감시 그 자체 또한 사회복지 시스템의 정립이나 작업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기술과 사회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저자의 주장, 그러하기에 정보접근의 비대칭성을 도모하는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그 권력을 감시하고자 하는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한가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은 든다. 정보를 공유하고 접근하는 문제는 그렇다쳐도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자 하는 자유, 즉 프라이버시권은 어쩌겠냐는 것이다. 저자 말마따나 프라이버시권은 문제제기조차 힘든 권리이다. 일단 사람들은 단기간의 이익을 위해 너무도 쉽게 그러한 권리를 포기하며, 피해를 입기 이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아울러 개개인 또한 자신의 정보는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남의 정보를 일정정도 알고자 하는 욕구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사생활 관련 뉴스가 나올때마다 제기되는 공인의 정보공개와 프라이버시 침해의 기준문제 또한 이와 연동된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 또한 무시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고, 저자 또한 마지막 장에서 어느정도 지적은 하고 넘어갔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빠뜨린 것 같다. (물론 역시나 그 대안은 '사회적 합의'라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ㅋ) 아무튼 책은 오늘의 '정보 사회'에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유출되고 있는지 고발하며, 그러한 정보유출은 어떠한 문제를 낳는가, 우리가 진정 정보를 통해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함께 얻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괜찮은 책이고,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들 덕택에 자칫 지루할수도 있는 주제를 지루하지 않게 잘 풀어내고 있는 듯 싶다. 일독을 권함.^^ |
| 이책의 제목에서도 나오는 파놉티콘은 무엇일까? 이책을 집어들고 파놉티콘이라는 대상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책을 펼치고 보니 파놉티콘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죄수를 교화하기 위해 고안된 원형감옥이란다 그런데 이 원형감옥은 중앙은 어둡고 가장자리 부분은 밝게 되어 있다 이런 구조의 원형감옥은 중앙의 감시 공간을 어둡게 처리하여 죄수로 하여금 스스로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였고 점차 규율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들었다 이점에 주목하여 푸코라는 자는 파놉티콘에 구현된 감시의 원리가 사회전반에 파놉티시즘으로 탈바꿈되었다고 밝힌다 그러고 보니 현재 우리는 집의 대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엘리베이터, 주차장 또는 길거리에서 CCTV를 마주한다 알고서 감시당하기도 하지만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감시 당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개개인을 감시하는 체제가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18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소지하고 있을 주민등록증(제)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만 우리의 생활이 감시받고 있는 것이고 인터넷 사이트의 회원관리제도 우리에게 개인적인 정보들을 요구하고 접속 기록 이라든지 이런 저런 것들을 수집해간다 물론 이런 제도들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데 유용하겠지만 우리가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다 이책은 분량은 굉장히 얇지만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이책이 비록 2002년에 출간되었지만 현재와도 맞아 떨어지는 상황을 논하고 있고 깊게 생각해보야 할 문제를 지적하고 있어 읽어볼만 한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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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을 좋아한다. 조금 어려운데 읽고 나면 뭔가 똑똑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 최근에는 사회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는 책을 좀 더 많이 접하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통찰력을 좀 넓혀준 책이 이 책인 것 같다.
파놉티콘, 너무 유명하다. 근데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잘 없는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파놉티콘은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이다. 이 원형감옥은 죄수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만 안을 볼 수 있다. 재밌는 사실은 감시자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엇 그럼 감시자가 없을 때도 있으니 죄수들이 좀 해이(?)해지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재밌는 사실은 죄수들이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이걸 사회로 확대시켜보면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말한 '빅 브라더'와 연결시킬 수 있다.
우리는 당신 빅 브라더를 감시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 홈페이지를 해킹한 사파티스타 반군 지지자들의 메시지(1998)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또 다른 재밌는 개념은 '역감시'다. 동일한 기술이, 권력이 우리를 감시하는데에도, 역으로 우리가 권력을 감시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의 권력 감시에서 출발한 역감시는 현재 시민사회에서 발달했다.
재밌는 책이다. 감시가 무엇인지, 내 삶에서 감시는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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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책 '투명사회'에서 접했던 파놉티콘을 큰 애가 읽던 책을 통해서 다시 들여다 보게 됩니다. 저자가 독일 철학자라서 그런지 가끔 한병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자인 저자가 파놉티콘이라는 인문적인 개념을 해석하는 게 이색적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게 이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겸비한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자는 권력이 대중을 감시하는 체제인 파놉티콘과 반대로, 대중이 권력을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역파놉티콘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을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지고 강력해진다고 하더라도 서로 간 권력이 가진 힘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역파놉티콘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권력은 감시하는 대중이나 단체를 무력화할 수 있고, 사실을 왜곡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파놉티콘이 파놉티콘과 동일한 조건에서 동작하게 하려면 사전에 그 힘의 크기나 조건을 동등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코 등이 근대사회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규정한 파놉티콘은, 한병철의 말처럼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는 현대의 투명사회에서는 사회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
|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아 우선 편하게 볼 겸하고 이 책을 사서 보았다. 이 책을 다 읽은 나의 느낌은 우선 지은이에게 고맙고, 짧은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의들을 생각해보게 되어 기쁘다. 이 책은 푸코의 파놉티콘이 나오게 된 원형을 벤담에서 찾고 있다. 즉, 벤담으로부터 논의된 파놉티콘이 각각에게 다른 시각과 의문을 던지는데 그 중에서 푸코는 이런 파놉티콘이 초창기 죄수를 교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에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규율사회로 변화하면서 이러한 모습은 감옥만이 아닌, 학교, 기관 등 여러 곳들이 파놉티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론뒤에 오늘날의 사례를 살펴보며, 우리가 흔히 넘기는 주민등록제, CCTV뿐만 아니라 역파놉티콘, 신파놉티콘을 논의하며 이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짧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이러한 파놉티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
| 파놉티콘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1791년 고안한 원형 감옥을 말한다. 파놉티콘(Pan+optiocon)은 '다 본다'는 뜻이다. 옆의 사진은 파놉티콘에 가장 가깝게 지어졌다는 미국 스테이트빌 교도소의 중앙 감시탑의 모습이다. 그러나 겉 모습만 그러할 뿐 실제 벤담이 생각한 파놉티콘의 핵심을 반영하지 못한 실패한 파놉티콘이다. 벤담이 원형 감옥을 구상한 것은 원형 감옥의 중간에 감시탑을 세워 한눈에 죄수들을 감시하자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죄수들의 방은 밝고 간수의 감시탐은 어두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지만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시선의 비대칭성이 핵심이다. 그러나 위의 스테이트빌 교도소의 감시탑은 죄수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간수가 죄수를 감시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죄수들도 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벤담은 시선의 비대칭성을 통해, 죄수들이 누군가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과거 영화판에서 흔히 말하던 '자기 검열'과도 같은 것이다. 이야기는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으로 시작해, 이를 재해석한 푸코의 견해를 소개하고, 나아가 제3장 〈공장의 파놉티콘〉에서는 감시의 방법이 '시선'에서 '정보와 기록'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즉 직접적인 감시에서 간접적인 감시로 변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4장 〈전자·정보 파놉티콘과 감시〉에서는 현대 사회의 주요 특징인 전자·정보 파놉티콘을, 5장 〈역감시와 시놉티콘, 역파놉티콘〉에서는 파놉티콘의 감시와 감시 기제들이 열어주는 역감시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감시 사회에서 '프라이버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떻게 지켜야하는지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짚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생소하고 무거운 주제인 것 같지만, 뜻밖에도 매우 흥미롭다. 파놉티콘의 역사도 흥미있지만, 이를 통해 역파놉티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저자가 주되게 말하고자 하는 바였던 것 같다. A가 B를 감시하기 위한 장치·기제들을 통해 결국 B가 A를 감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예는 주위에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역파놉티콘은, 가능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p.140)"하다. 기존에 힘을 가진 권력자가 다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감시하는 데 정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권력에 대한 역감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다. 따라서 정보 접근의 비대칭성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 파놉티콘 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권력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파놉티콘의 본질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 아내와 함께 처음 봤던 영화가 '트루먼 쇼'이다. 트루먼 쇼의 비밀이 벗겨질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
| 파놉티콘에 대해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독일정신사’라는 강의를 들으면서이다. 독일 사상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는 마지막 강의 시간에 프랑스 철학자인 미셸푸코를 소개해 주셨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시피 미셸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고 처음 접한 그의 사상과 사회에 대한 해석에, 깊이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료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미셸푸코가 제시한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셸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다 썼던 것이 벤담이 주장했던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체계이다. 파놉티콘은 일종의 원형감옥인데 중앙에 각 감방보다 높은 감시탑이 있다. 감방은 부채꼴 모양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감시탑에서 간수가 각 방을 감시할 수 있다. 감방은 환하고 감시탑은 어둡고 감방보다 높이 있기 때문에 수감된 죄수들은 간수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므로 항상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죄수를 감시하는 것은 저 감시탑에서 감시하고 있는 간수가 아니라 죄수 내면에 내재하게 되는 무엇인가이다. 간수가 보고 있는지 안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죄수로 하여금 항상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도록 만든다. 벤담이 노렸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로부터 철학에서는 ‘시선’이라는 것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도 가능하겠지만 효과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시선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행위는 앎으로 귀착되며, 이성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파놉티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선의 비대칭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간수가 죄수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죄수가 간수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효과적인 ‘감시’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성은 현대에 들어서 정보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인터넷, 정보매체 등이 발달하면서 정보의 공유가 쉬워졌고 정보 파놉티콘(몰래카메라, 주차장이나 편의점 등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 등)과 역파놉티콘(시놉티콘 등 정부 정책에 대한 시민운동이 가능하게 하는 것들)등이 나타났다. 정부나 기업의 감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정부 기업에 대한 감시도 나타나게 된 반면 현대사회에서 정보 유출에 대한 (합의적이든 아니든)프라이버시 침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물론 역이나 편의점 같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는 일종의 합의된 감시를 위한 도구이다. 그를 통해 안전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전자 주민카드 같은 것들이 겉으로는 허울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국민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될 때 우리는 국가에 속박되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파놉티콘이라는 단어 자체가 감옥의 이름으로써 효과적 ‘감시’라는, 조금은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정보 파놉티콘이라는 것 역시 정부나 기업 등에서 시민을 감시, 통제 하는 데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시민단체에서 정부나 기업에 대해서 하고 있는 많은 활동들이 시놉티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과거에는 서로 어떤 것을 알고 있는지 파악이 가능했던데 비해 현재는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에 무서운 것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무심코 인터넷 사이트 어딘가에 가입하기 위해 내 정보를 기록한 것이 ‘상품’이 되어 여기저기에 팔린다는 것, 지우기 힘겨울 만큼 많이 오는 스팸 메일, 그리고 언젠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더 무서운 일들 때문에 정보를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놉티콘을 잘 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원래의 파놉티콘에서는 감시당하는 사람은 죄수뿐이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는 권한과 역량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이런 시점에서 여전히 감시만 당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철저한 감시를 통해 잘못된 부분은 올바르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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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Panopticon)을 권력의 감시를 죄수가 내면화하게 됨에 따라 실제적 감시 없이도 그의 영혼까지 규율할 수 있는 자동 기계로 보았다. 간수만이 죄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할 수 있는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착안된 파놉티콘이 죄수들에게 늘 감시당하고 모든 행태가 노출되고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여 규율에 순응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 한다는 것이다. 비록 벤담이 제기한 파놉티콘은 실현되지 않고 의미도 퇴색되어 버렸지만 푸코에 의해 부활하여 다시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정보 사회가 다양한 감시 통제 방법으로 개인의-죄수가 아닌 일반인들까지도 포함하여- 정보를 부당하게 수집하고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상황, 곧 정보 감옥으로 화하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면서 파놉티콘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 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감시자 빅 브라더를 연상하면서 말이다.
홍성욱은 여기서 파놉티콘에 근거한 정보화 사회의 역기능적 측면에만 비관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전자 매체가 지닌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즉 전자 정보 매체가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역으로 시민 사회 측에서 감시 주체들을 역감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그 가능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홍성욱은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감시의 시선과 역감시의 저항적 눈길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시놉티콘(Synopticon)에 주목하고 있다. 시민 운동 단체들의 다양한 역감시 사례들이 이미 그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시의 시선에 비해 역감시의 수단은 법적, 기술적 제약에 의해 아직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시놉티콘이 이루어져 빅 브라더를 역감시할 수 있으려면 시민 사회의 역량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측면과 관련하여 시놉티콘의 성패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역학 관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감시를 주도할 시민 운동 단체의 활성화와 이를 뒷받침할 시민 의식의 성숙 및 시민 운동의 합법적 보장을 위한 제도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홍성욱은 구체적으로 NGO들의 권력, 기업 및 언론 등에 대한 감시와 정보 독점 통제 반대 운동 전개 등과 더불어 프라이버시법 제정과 정보 공개권의 확대 요구 등이 파놉티콘을 역감시의 기제로 무력화시키고 시놉티콘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고있다.
이처럼 정보 사회에서의 정보 통제와 프라이버시 침해 등을 우려하여 비관적인 정보 감옥만을 연상하고 있는 우리의 암울한 시선을 오히려 역감시를 통한 주권 확보의 기회로 파악하여 시놉티콘의 가능성을 제기한 홍성욱의 탁월한 안목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가 권고한 역감시 주체들의 세력 결집과 그들의 체계적인 운동 필요성에도 공감하며 가능한한 동참하리라 생각해 본다. [인상깊은구절] 최초의 인터넷 게릴라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해킹에서 해커들이 내세운 모토는 바로 조지 오웰의 <1984년>의 이미지와 정반대 되는 것, 즉 감시를 담당하는 빅 브라더가 이제 감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감시와> |
| 제레미 밴덤이 원형감옥 팬옵티콘(panopticon의 정확한 표기는 '모두 다 본다'는 의미를 고려할 때 파놉티콘보다는 팬옵티콘이 맞을 듯 싶다)의 개념을 제시한게 1791년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났다. 그 무시무시한 감옥은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의 팬옵티콘이 되고 말았다. 적어도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말이다. 실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상황은 푸코가 진단한 것보다 더 안좋다. 범죄 예방을 이유로 구석구석에 폐쇄회로가 설치돼 있고, 쿠기 파일은 내가 인터넷 서핑을 어디어디 다녀왔는지까지도 다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 FBI는 카니보어라는 가공할 소포트웨어를 통해서 전세계 전자메일을 모두다 검색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술의 진보와 대중화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감시자로 만들고 있다. 여관방에서 애인과의 한바탕 정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에서 공공연히 돌아다니는가 하면, 교통위반 신고 포상금제가 시행되면서 아무리 급해도 신호위반 하나 편히 못하고 있다. 무서운 세상이고 각박한 세상이다. 그러나 저자인 홍성욱 교수는 이공계 전공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새로운 가능성, 그것도 밝은 가능성에 주목한다. "기술의 궤적에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힘의 관계이지, 기술의 초기 디자인에 각인된 발전 방향성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는 교통위반 신고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경관의 흑인 폭행 사실을 고발해 LA 폭동을 야기하기도 한다. 전세계 NGO는 인터넷을 통해 OECD가 추진하던 다자간투자협정(MAI) 체결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결론은 다시 저자의 말에서 얻어진다. 요컨대 '사회세력 사이의 힘의 관계'가 요체인 것이다. 과연 이 사회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냉정하게 볼 때, 이 사회가 감옥인지 아닌지도 자명할 것이다.감시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