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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경제를 바라보는 두 관점(고전학파, 신고전학파) 중 하나의 편을 섣불리 들지 않는다. 단, 경제학이 어떤 역사와 어떤 논쟁을 거치며 신고전학파의 관점을 주류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중립적인 태도로 설명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왜 경제학의 '우울함'이 외면되고 해명되지 못하는지 지적한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주류 경제학이 깊게 다루지 않는 경제적 ‘우울함’은 무엇인가? 본래 ‘우울한’ 이라는 표현은 칼라일이 식량자원보다 인구의 증가속도가 빨랐던 당대의 경제학을 ‘우울한 과학’이라고 칭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저자들은 그 우울함의 실체를 “결국 모든 것이 수요·공급의 논리로 굴러가게 마련이라는 냉담한 주장밖에 하지 못하는 경제학의 어리석음”으로 분석한다. 내가 책을 읽으며 느낀 경제학의 ‘우울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력과 능력만으로는 타고난 부를 가진 이들을 쫓아갈 수 없는 구조적 현실에 경제학이 답할 수 없는 것 or 답하지 않는 것. 둘째, 미래의 한 시점, 즉 언젠가는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활력도 읽을 것이라는 전망(ex-정체상태 ; 고전학파가 전망한 미래로, 성장이 멈추고 이윤율이 0으로 수렴하며 인구조차 증가하지 않는 미래). 그러므로 이 책에서 '불평등'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왜냐하면 불평등은 경제학이 가진 '우울함'의 근원이자 핵심이면서, 동시에 경제학자들이 그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믿음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성장을 위해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것, 더 나아가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시키는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불평등에 답하지 않는 경제학의 ‘우울함’을 설명하며 피케티의 주장을 끌어들인다. 프랑스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그는 이제 소득과 부의 지나친 집중/상속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능력주의’ & 사회정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는 정도까지 커졌다고 지적한다. 즉, 주류 경제학은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근거로 불평등의 존재를 정당화하며 능력주의를 내세우나, 이제는 부의 집중이 과도해진 나머지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능력주의’마저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저자들은 ‘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불가피하다’는 주류 경제학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으나, 이제는 그 불평등의 정도가 지나치게 커졌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이 이어지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넘어서게 될 것이고, 상속받은 부가 평생 노동으로 축적한 부를 압도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능력주의 가치까지 부정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들은 불평등한 사회는 성장 국면으로 접어들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기간이 짧다는 연구 결과를 통해, 재분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주류 경제학의 시선이 과연 현재도 유효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더 이상 주류 경제학이 '우울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한다. 이렇게 주류 경제학이 불평등이 일으키는 문제를 외면하는 현실을 지적할 때, 저자들은 철저히 '경제학'적인 관점을 적용한다. 저자들이 불평등을 비판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틀려서도, 불평등함을 겪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서도 아니다. 그저 그 불평등이 경제의 성장을 막는 정도까지 심해졌기에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완전히, 경제학 도서가 맞다. 내가 이 특별한 책을 읽고 느낀 것을 정리해보자면,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도 불평등이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 그간 나는 경제학이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이유로 불평등의 필요성만을 주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 경제학의 의견에 해당하며 여러 비주류 경제학은 불평등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불평등이 정당화되었던 그 이유가 정확히 반대로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즉, 경제학적으로도 과한 불평등은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러므로 경제학은 더 이상은 경제학의 ‘우울함’, 불평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만능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건강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대화 방식이 있다. 그건 ‘네가 OO이 아니라서 그런거지?’라는 비꼼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학벌주의를 비판할 때 ‘네가 명문대생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거지?’ 라고 대응하는 방식같은 것. 이는 그 비판의 중요성을 한번에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그 내용에 경청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사실 능력주의를 근거로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대응 속에는 ‘네가 명문대학생이 아니라면 학벌주의를 비판할 자격이 없어=능력주의의 혜택을 누릴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라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능력주의를 비판할 때조차 능력주의에 먼저 인정받아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문보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조차 능력주의에 대한 여러 시각이 있다. 우리가 능력주의를 어떤 비판도 없이 찬미하려 하면 그로 인한 문제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것이고, 이는 결국 우리가 능력주의를 통해 이루려 하는 ‘성장’까지 막을 수도 있다. 건강한 비판은, 필요하다. 사회에는 다양한 ‘주류의 시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시각만을 받아들이면 그 시각이 담지 못하는 어떤 것들은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주류와는 조금 다른 시각/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부자되는 법’을 알려주는 경제학 책이 인기인 요즘,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특별하다. 평소 경제학에 무지했던 사람, 경제학이 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한 사람, 경제학의 다양한 관점을 알고 싶은 사람, ‘부자되는 법’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제학을 읽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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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늘 들어왔지만 요즘처럼 체감하게 되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외면하고 개개인의 노력부족으로 모든 것을 돌리니 무한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린다. 열심히 하면 핑크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생각하며 무작정 달리지만 현재는 암울하다. 특히 요즘은 수저계급론이라든지 포기한 게 너무 많아서 N포 세대, 해탈 세대라고까지 불리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요즘 애들은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해. 내가 옛날에는......"으로 시작하는 어르신들의 타령을 듣기에 민망해진다.
두 경제학자가 뭉쳤다. 이 책은 류동민, 주상영 공동저서이다. 류동민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설사를 강의하고 있다. 주상영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 경제학과에서 화폐이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거시경제학과 화폐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다.
서로의 전공영역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불문율을 고수하던 지은이들의 관심사가 수렴되기 시작한 것은 부쩍 어려워진 자영업자들의 처지 그리고 '삼포'니 '오포'니 하는 젊은 세대의 우울한 전망을 깨닫고 함께 고민하면서부터였다. 영세 자영업, 비정규직 노동, 부의 대물림 등에 관해 문제의식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소득분배율이나 임금주도 성장, 이윤율 저하 등의 주제를 얘기하게 되었다. 하나는 조금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조금 오른쪽으로 움직여 중간지점에서 만나면 의외로 많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중간지점에서 부족하나마 몇 가지 공동연구를 수행할 가능성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8쪽)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이야기할까? 이 책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을 통해 주류경제학자와 비주류경제학자가 불평등을 고민하여 이야기한다니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두 경제학자가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친구일 뿐만 아니라 같은 경제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전문적인 연구자로서 활동한 지난 20여년 동안, 적어도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할 무렵 이전까지는 그 많은 경제 관련 세미나나 학회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고 밝힌다. 이들이 어떤 계기로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고 어떤 방식으로 책을 구성해나가는지 서문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지은이들에게도 강렬한 지적 자극을 주어 피케티에서 근대 경제학의 초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의 문제를 짚어보게 된 것이다. 충분히 이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이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1장과 2장은 류동민, 3장과 4장, 5장은 주상영이 쓴 원고를 서로 돌려읽고 의견을 제시한 뒤 각자 책임지고 수정하여 이 책이 완성되었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내용은 1장 '분배에 관한 몇 가지 이론', 2장 '정체 상태', 3장 '성장인가 정체인가', 4장 '피케티의 등장', 5장 '불평등을 넘어'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경제학자라면 주류든 비주류든 모두 합해 '경제학자'라고만 알고 있던 나에게 세세하게 짚어주는 경제 이론과 경제학자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공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낯설었지만 이내 적응하며 읽어나가다보니 경제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접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두 지은이의 관점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경제라는 것이 절대진리가 아닌 이상, 이 책으로 알게 되는 경제 이야기가 오히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서 좋았다. 관련 전공자들에게는 이 책이 경제학의 역사를 훑어보고 경제학을 쉽게 접하며 토론을 벌일 소재가 되기에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반인들에게도 치우치지 않은 경제학을 접할 기회를 주기에 추천한다. 경제라는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읽지 말 것을 권한다. 하지만 우울한 경제학이 암울하지만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단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꼭 읽어보고 함께 생각해보아야할 점이라는 것이 이 책의 존재 이유이다. |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에 대한 각기 다른 해답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다름아닌 '경제학자 개인의 정치적 견해'로부터 기인된다는 것이죠. 뭐 그런 판단의 주체일 수 있는 권리가 오직 경제학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들 각자의 정치적 견해, 더 나아가 (개인들의 총합이 만들어 낸) 시대적 상황 등도 또한, 해당 사회의 다수들이 성장을 선택하게할 수도, 혹은 분배를 선택하게할 수도 있을 겁니다. <주류경제학자와 비주류경제학자, 불평등을 이야기하다>란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바로 --- 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위와 같은 '정치적' 면모의 (사회적) 변화, 즉 "경제학이 분배와 성장에 관해 과거 200여 년 넘게 지녀온 '의식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p9)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3 ……………………………………………………………………………………
미시경제학 교과서 속에는 이처럼 '평화로운' 세계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란 다름아닌 '능력주의'를 의미하고 있거늘,
「21세기 자본」을 통해 토마 피케티는 "권력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기여를 제대로 주장하기 어렵"(p67)기에, 그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란 것이 미시경제학 속 구절들처럼 자연스럽게 성립되지는 않는다라고, 오히려 능력주의란 것이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p74)로서 작동하게 된다라 주장합니다. --- "이러이러한 것을 능력이라 부르자며 판을 짤 수 있는 힘"(p57)이 결국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어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결국 "모든 것이 수요·공급의 논리로 굴러가게 마련"(pp29~30)이란 냉담한 주장만을 계속하고 있는 경제학은, (맬서스 시대의 인물인) 칼라일의 '우울한 과학'이란 지적을, 그렇기에 21세기에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 · ·
이 책의 내용은, 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시작하는, '성장이론'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24년 전 쯤인 그 어느 한 때, 제가 저의 전공으로 삼고도 싶어했었던) 정치(delicate)한 이론 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성장론에 대한 (경제학을 전공했다하더라도 성장론을 수강하지 않았다면 쉬이 이해되지 않을/이해하기에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내용을 이 책도 역시 담고 있지요.5 어쨌든 --- '성장의 이론' 그 자체에 문제가 있어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건 아닙니다.
역시나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는 이것이 결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중세시대의 소작농이 지녔던 욕망과 현대 시대 우리가 맘 속에 품고 있는 욕망의 차이(gap)가, 경제 성장의 결과 즉 두 시점의 GDP의 차이보다 더 크다한다면6 이는 (정당성이야 어쨌든7)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욕망의 지나친 급성장 때문이 아닌 오로지) 경제성장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들이 중세시대의 소작농들보다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와같은 불평등한 분배가 왜 / 어찌하여 / 누구에 의해 발생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어늘,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까지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가 곧 --- 그 책이 묻고 있는 질문이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저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어지간해선 읽어볼 엄두까지는 내지 못하고 있는) 「21세기 자본」 --- 출간 당시의 열풍 덕분에(?) 직접 읽어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관심이 있기만 하다면) 그 내용을 대충은 알 수 있게 되었죠. 앞서 읽었었던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의 저자인 저스틴 폭스는 HBR의 article <Piketty's "Capital," in a lot less than 696 pages>8에서 (article의 제목도 사치스럽다 느껴질만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① ('r > g' 라는 유명한 공식9으로 표현되고 있는) 자본의 증식 속도가 전체 경제의 성장 속도보다 빠르다는 점과 ② 자본 소득의 분배의 불균등이 노동 소득의 불균등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 쉽게 말해 --- "일해서 돈을 보는 속도로는 결코 돈이 돈을 버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p10) …… "'이마에 땀 흘려' 돈을 버는 이보다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이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재산을 늘릴 수 있다."(p18) 라는, 결국 이 논리의 끝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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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라는 것을 떠올려 볼 때 개인의 능력이 반영되는 비중이 (자본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클 수 밖에 없는 노동소득에의 불평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저항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 "시장은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과 개인들에게 더 많은 구매력(돈)으로 투표함으로써 우수한 경제 주체들에게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데, 그런 경제적 불평등이 부 창출 경쟁을 유인한다"10라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주장을 비판하는 측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또한 감성적으로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능력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에만/있기에 그 정당성이 발휘된다라 할 때,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인, '이 불합리하게 조성된 불평등의 교정'에, 경제학이 일조를 할 수 있어야 비로소 --- "음울하고 무감각하며 우울하다"(p105)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 · · "성장으로 파이를 키워서 분배한다는 경제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낡고 틀에 박힌 패러다임이다"(p306)란 저자들의 주장이 옳을 수도, 혹은 "파이를 키우면 공정하게 나누지 않더라도 더 많은 파이를 가질 수 있다"11라는 주장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의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1953년 28%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6년 12%까지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역사적으로 계속 줄어왔다,란 사실(史實)은 (일정 수준의 단순화를 허한다면) 결국, (우리가 '돈' 자체를 식량으로 삼을 수 없듯이, 서비스 산업이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을 만들어주지 못하듯) '더 이상은 파이를 키우는 것이 어려워졌다'라는 암울한 사실(事實)을 말해주고 있다라는, 그리하여 이같은 불평등이, --- 체제의 강요가 아닌, (합리적인) 체제 속 구성원들에게 현재와 같은 상황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design된 mechanism 자체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무기력한 불안의 일면을 이 책,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신념을 실행으로 옮겨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어떻게든 생겨난다라는, 이게 어쩌면 '종교'가 권하는 믿음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는, 그와 비슷하게라도 --- "원래 경제학은 …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본질"12이란 점을 우리가 잊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낼 수만 있다면,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p308) 이 책 본문의 마지막 문장인 위와 같은, 일종의 자기 최면적 잠언이,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인류가 정체과 불평등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길은 있다"(p308)라는 바람을 실행으로 옮겨낼 수 있는 동인이 되어줄 것이라, (뭐 어쩌겠습니까, 이제 고딩인 제 아들 종원군과, 아직은 상상 속의 존재인 종원군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모습일 것이라 희망적으로) 믿어봅니다. ※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드리는 책 - 경제 성장 이론에 관해 알고 싶다면 : 「지식경제학 미스테리」 - 주류 경제학에 관해 알고 싶다면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 조금 다른 경제학에 관해 공부하고 싶다면 :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 경제학의 철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면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애덤 스미스 구하기」 - 자본의 힘 : 「금융의 지배」,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 「불편한 경제학」 - ...금연 372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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