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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 줄리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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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읽다가 정독하게 되는 이상한 책이다. 시니컬한 문장이 많아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슬퍼진다.이 책은 유한한, 언젠가는 끝을 보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 끝인 죽음에 대해 가장 가까웠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이사람 저사람의 이것 저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는 책이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읽는내내 흥미진진했고 끝에서는 반전이 놀랍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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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읽다가 정독하게 되는 이상한 책이다. 시니컬한 문장이 많아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슬퍼진다.

이 책은 유한한, 언젠가는 끝을 보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 끝인 죽음에 대해 가장 가까웠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이사람 저사람의 이것 저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는 책이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읽는내내 흥미진진했고 끝에서는 반전이 놀랍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소설 자체가 탁월하다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소설가는 정말 하찮은 것들 속에서 탁월한 것을 뽑아내는 작업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소설가의 수필이 짱인 것 같다.

 

에세이지만 3시간 정도 읽었는데도 겨우 100쪽 정도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읽는데 한참이 걸린다. 언급되는 무수한 사람들과 인용문, 간단하지 않은 문장들 때문에 길을 잃기 쉽상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한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은 건너뛰었다. 다시 한번 읽을 것~

 

그래서 죽음이란 뭐고 어떻게 살아갈거냐고? 반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죽음을 항상 옆에 두고 계속 생각할 것, 신을 믿는 것이 행복하고 마음 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로 괴로워하면서 사는 길을 선택하겠다고

 

다시 깊은 밤에 독서를 하게 해준 책이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은 그립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게 하는 책이고 자기를 디스하는 것조차도 만만치 않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운명을 감당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운명처럼 무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군 그런거군 말함으로서. 그리고 발아래 놓인 구덩이를 응시함으로써 사람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이다.

 

죽음을 인식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는 몇가지 중에 하나는 언제나(거의 언제나) 자신보다 처지가 더 나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서머싯 몸]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흔하고 평범해서 영생이라는 거대한 실상에 걸맞지 않게 느껴진다. 열정도 부족하고 미덕은 차치하고라도 악덕조차 부족해서 일상적인 세계에는 적당히 어울릴지 몰라도 불멸의 개념은 그토록 협소한 구조에 던져진 존재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광막하다.

 

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하고 있듯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가서야 우리가 과거에 속수무책으로 얽매여 있음을 기실 과거에서 벗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가 뇌를 이해하기 위해 동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뇌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죽음은 인생을 정의하는 섬뜩한 사실의 하나다. 죽음을 줄기차게 의식하지 않는 한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는 첫발을 내디딜 수 없다

 

작가들은 과연 예민하고 직관력이 있고 현명하고 보편화와 특화를 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상에 앉아 있을 때에만 자기들이 쓴 책 안에서만이다.

 

당신은 당신이 이제껏 행해온 바다. 당시이 이제까지 행한 바는 당신의 기억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기억하는 것이 당신이라는 사람을 정의한다.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잊을 때, 당신은 설령 아직 죽지 않았다해도 이미 끝난 존재다.

 

[플로베르]

내겐 모든 교리가 그 자체로 혐오스럽다. 그러나 나는 교리를 인류의 가장 시적인 표현으로 가공해낸 기분을 헤아린다. 나는 교리가 우매와 허위라고 일축해 온 철학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교리에서 발견한 건 절박함과 본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예수성심앞에서 가톨릭식으로 무릎꿇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물신에 입맞춤을 하는 흑인을 존중한다.

k*****7 2019.11.20. 신고 공감 10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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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3] 웃으면서죽음을이야기하는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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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기에 더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더 진실하니, 이 기쁨에 찬 증식은 마주 놓은 거울 사이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소설가인 작가가 죽음에 대한 자신의 사색의 결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들춰보면서 쓴 어떠한 챕터 구분도 없이 장장 400페이지에 걸친 에세이다. 그러니까 목적도 없이 빙빙 돌아다니는 글이지만, 그게 바로 인생의 모습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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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기에 더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더 진실하니, 이 기쁨에 찬 증식은 마주 놓은 거울 사이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소설가인 작가가 죽음에 대한 자신의 사색의 결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들춰보면서 쓴 어떠한 챕터 구분도 없이 장장 400페이지에 걸친 에세이다. 그러니까 목적도 없이 빙빙 돌아다니는 글이지만, 그게 바로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에 빙빙 돌아다니며 본 것, 들은 것, 한 생각 그 자체들 전부가 다 의미있는 것이면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쓰여진 무의미한 에세이이기도 하다.  

 

 

h*****p 2022.06.1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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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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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죽음이란 게 완전히 소멸될지도 모르는 세계를 누릴 내 나이대에, 다시금 죽음에 대해서 상기해 본다는건 재밌는 일이다.죽음. 언제나 있고, 매일 있고, 늘상 우리 주변을 감싸지만, 내게는 도저히 없는것 같은 그것.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 한다라.삶의 고통속에서,  하루에 한번씩,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스스로 생을 마칠 생각을 해보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는 어떨까?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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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죽음이란 게 완전히 소멸될지도 모르는 세계를 누릴 내 나이대에, 다시금 죽음에 대해서 상기해 본다는건 재밌는 일이다.


죽음. 언제나 있고, 매일 있고, 늘상 우리 주변을 감싸지만, 내게는 도저히 없는것 같은 그것.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 한다라.


삶의 고통속에서,  하루에 한번씩,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스스로 생을 마칠 생각을 해보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는 어떨까?


매일 죽는 소리, 앓는 소리를 하는 우리는 진정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r***8 2018.11.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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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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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목숨에도 끝이 있는 법. 길 위를 구르는 저 잎새들처럼.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명제들. 그래도 그것은 진실.” - 김동률, ‘고별’ 가사 中 ‘죽음’에 대한 성찰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고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죽음’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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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목숨에도 끝이 있는 법. 길 위를 구르는 저 잎새들처럼.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명제들. 그래도 그것은 진실.” - 김동률, ‘고별가사

 

죽음에 대한 성찰은 역설적으로 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고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죽음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교훈을 얻을 목적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결코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반스식의 영국 유머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옮긴이가 번역에 공들인 건 충분히 느껴지는데 애석하게도 제목은 명백하게 틀렸다. 심지어 원제(Nothing To Be Frightened Of)와도 달리 저자인 반스는 일관되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견이지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낙타고기를 한 번도 안 먹었지만 메르스가 두렵고, 신종 플루가 두렵고, 치과 의사가 두렵고, 주사 바늘도 두렵고, 모기 알렉산더 대왕이 모기에 물려 죽었다는 설이 있다. - 도 두렵고, 심지어 사랑하는 마누라도 무서울 때가 있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거짓말이거나 허세거나 둘 중 하나다. 이순신 장군도 죽음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사즉생 생즉사’) 삶이 지나치게 고통스럽거나 지루한 사람들은 죽음이 그리울 수는 있겠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없으므로 죽음에 대해서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다. 그런데 죽음을 웃으면서 이야기하다니? 그건 공자도, 예수도 못한 일이다. (공자는 죽음을 애도(哀悼)’의 대상으로 봤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예수는 죽기 전날 밤 두려워하며 기도했다.) 대수술을 앞두고 의사가 웃거나, 전투를 앞두고 병사가 웃는다면 그건 정말 웃을 상황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저자를 인정하고 싶은 건 죽음이라는 테마로 이렇게 이야기하기란 그것도 무려 400페이지 분량을 넘겨가면서까지 결코 쉽지 않다는데 있다. 문학, 철학, 종교를 종횡무진하며 죽음수다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완독할 때까지 큰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마치 나만큼 죽음에 대해 천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고 자랑하는 것 같아서, 나도 그래. 당신 정말 유식해. 하지만, 당신 형의 표현대로 질척해’.”라고 감상하였다. 그의 방식을 흉내 내서 나도 (의식의 흐름대로) 죽음에 대해 아무 말 대잔치 해볼까 한다. 웃으면서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 질척거리는 것만큼은 흉내내보려고 많이 노력했다.

 

                                                                ***

 

2017625. 고종사촌 누나(작은 고모의 딸)가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다. 평소 지병이 있어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호흡 곤란으로 인한 의식불명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얘기는 충격이었다. 201771. 바쁜 일정을 쪼개 시간에 맞춰 면회를 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중환자실 면회는 면회 시간과 인원이 엄격히 정해져 있다.) 어머니는 면회를 가기 전 아마 이생에서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마주한 누나의 눈에 초점이 없고 누나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누나의 몸 곳곳과 다양한 선으로 연결된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이름 모를 바이탈 체크 기계가, 누나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있음을 숫자와 소리로 증거하고 있었다. 누나는 분명 살아있었지만 분명 죽음에 더 가까웠다. 내가 누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외과의사인 사촌형님(큰 고모의 아들),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친동생도 아무 것도 못했는데, 내가 전공한 윤리학 따위 죽음 앞에서 완전 무용지물이었다. (그 때 느낀 나의 무력감은, 윤리학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조차 그렇게 유용하지 못한 학문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해 주었다. (과라서 죄)송합니다. 근데 이과도 죽음 앞에선 별 볼 일 없구나.)

201779.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에 찾아갔다. 신앙의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그간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실망과, 바쁘다는 핑계로 찾지 않았던 교회를 거의 4년 만에 방문했다. 학교에 가지 않던 학생이 오랜만에 다시 학교에 가려니 얼마나 어색하고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겠나? 침례교와 달리 장로교는 낯설었지만 상관없었다. 신과 11로 대면하고자 하는데 장소나 교파는 상관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은 무소부재하니까. (그래도 교장을 만나려면 일단 교장실로 가야지.) 기도했다.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무신론자들은 기도하는 행위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딘가 있지도 모를 외계인을 찾기 위한 SETI 프로젝트랑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면 SETI 프로젝트의 지지자들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해) 확신 중 (자신이 외계인을 찾을 수 있을지 그 믿음에 대해) 의심한다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지) 의심 중 (신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확신한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겠지. 더구나 기도는 엄청난 돈이 드는 SETI와는 달리 돈도 들지 않으면서 심리적 위안을 준다. (물론 심리적 위안을 얻고자 기도한 건 결코 아니었다. 기도할 당시 마음 상태는 매우 무거웠다. 1999년 수능 100일 전 친구의 죽음, 2005년 한 대학 후배의 죽음, 201761일 갑자기 찾아온 누군가의 죽음이 모두 계절의 시기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타나토스(thanatos)는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 방문하는 것으로 내게 인지됐다. 나의 기도는 SETI와도 같이 나로서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는, 그러나 신의 존재만큼은 확신을 가정한 불완전한 기도였다.) 기도한 내용은 정확히는 기억은 안 나지만 비슷하게 복기하면 다음과 같다.

세월호 때는 직무 유기하셨지만, 저는 당신께 기회를 한 번 더 드리기로 합니다. 아니, 저 스스로에게 당신을 믿을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누나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을래요.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으니까요. 다만 저렇게 죽는 건 너무 초라합니다. 누나는 당신을 정말 성실하게 믿었거든요. 죽을 때 죽더라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지금 생각해보면 발칙하기 짝이 없는 다소 변태 같은 기도였다.

 

                                                                  ***

 

2017916. 언제 오려나 걱정했던 통풍과 첫 조우했다. 가족력이 있었으므로 예정된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1999, 동생은 2004년에 첫 만남을 가졌으니 나는 좀 늦은 편이었다. 요산 수치 10을 찍고 2016년에 미리 병원에 갔을 때 통증이 아직없다는 사실에 의사가 놀라워했었다.) 201792일 서태지 데뷔 25주년 콘서트에 갔었는데 스탠딩 석에서 4시간동안 서서 뛰었더니 오른 쪽 발목을 삐끗했나보다. 그 부위가 점점 붓더니 통증이 심해져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도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 부위로 통풍이 찾아왔다. 2017916일 밤에 겪었던 고통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 중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고통이었다. 누군가 내 발을 오븐에 넣고 굽는 것 같았다. ‘정말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루 밤 동안 과장 않고 100번도 더 한 것 같다. 아무 상관없는 서태지를 원망했다. 그러고 보니 서태지는 죽음에의 열망을 가사에 담은 뮤지션 중에 가장 성공한 가수였다. ‘아무도 모르게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 거야.’ (‘필승가사 ) 통풍은 아무도 모르게 내 속에서 날 죽이고 있었다. 출산의 고통이 이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큰 고통이라면 난 아내를 위해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 원죄의 저주치고는 너무 심합니다. , 주여! 저 좀 살려주세요. 만약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건 너무 창피해서 비참하다. 나는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아이처럼 밤새 부르짖었고, 주일인 다음 날은 교회가 아닌 병원 응급실에 있었다. 고통 속에 밤을 꼬박 새우고 응급실에 가면서도 날 치료할 의사가 고() 신해철을 치료한 의사가 아니길 바랐다. (내가 지금 살아있으니 다행히도 아닌 것 같다.) 의사가 놔준 진통제 두 방에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통풍이 삶이고 진통제가 죽음이라면 누구라도 죽음을 택할 것이다. 반스와는 달리, 나의 르 레베일 모르텔은 죽음을 향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후, 날 구원해준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그때야 생겼다. (죽는 게 뭐라고의 저자 사노 요코는 자신의 책에서 의사는 성직자라고 기술했다. 역시 이과야. 문과는 소용없어!)

 

                                                               ***

 

저자인 반스가 한국인이었다면 죽음수다에서 군대 이야기를 안했을 리가 없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자신의 할아버지 얘기를 한 것으로 볼 때, 반스 역시 군복무를 했다면 충분히 군대와 죽음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어 자신의 책에 적었으리라.) 20011211일에 입대했을 때 군대라는 곳의 비주얼 이미지는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람 죽이는 무기와 사람 죽이는 기술, 그리고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해.’라는 판에 박힌 멘트. 그러면서도 죽음으로부터 살아남는 생존 기술에 대한 가르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럴 바엔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을 정도의 극한 스트레스가 공존하는 이상한 곳. 나의 방심 또는 누군가의 악의가 상황과 맞아떨어진다면 (반스의 표현대로) 언제든지 개처럼 죽을 수 있는 곳. 그 때의 나는 신체적으로 가장 건강해서 생존 가능성이 높았지만, 분명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도 군대는 통계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훈련 중 사망하는 군인보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민간인의 숫자가 훨씬 많았으니까. 군대는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사회는 이미 전쟁 중이랄까?) 여러 이유로 그곳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나는 (베르그송의 표현대로) ‘생에의 의지가 강했으므로 (야스퍼스의 표현대로) ‘한계상황속에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연애다운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그 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충동을 군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다. 주적은 (보이지 않는,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운) 북한군이 아니라 같은 내무반에 있었다.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후임들을 괴롭히고 모욕하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같은 어떤 고참을, 그가 사회에 나가면 분명 범죄자로서 뉴스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 나는 확신했다. 피해자보다 범죄자의 인권을 더 존중하는 헬조선에서는 분명 모자이크 화면 처리에 음성 변조할 것이 뻔해서 저 고참이 TV에 나와도 못 알아보겠지만. 그렇다면 정의의 사도로서 내가 저 인간의 탈을 쓴 야수를 사냥해주는 것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사회 전체에 훨씬 이로울 것이라고 상상했다. 히틀러가 범죄를 짓기 전에 히틀러의 존재를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상만으로도 죄를 진 것이라면 난 이미 살인죄를 진 셈이다. 하지만 사람 정확히 라는 사람 - 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난 속으로 생각했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전혀 없었다. 너처럼 진짜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을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한다며 소심하게 정신 승리를 외쳤다. 그리고 인내의 시간이 흘러 허술한 군대 시스템은 그 짐승을 걸러내지 못하고 사회로 무사히 내보내고 말았다. 대신 나는 그 사람의 전역을 그 사람의 장례식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볼 수 없다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편안하십시오.” 뭔가 뉘앙스가 이상한 인사여서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그 고참은 제대의 기쁨에 취해 내 인사를 받긴 했다. 끝까지 축하한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 축하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 고참 제대 이후 TV에서도, 실제로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안녕.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미워했던 사람. R.I.P

 

                                                                ***

 

고종사촌 누나는 201710월 어느 날 퇴원했다. 들리는 바로는 그 병원에 유사한 증상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사람 중에 누나가 유일하게 살아서 나간 사람이라고 했다. 신께서 나의 기도가 아닌 작은 고모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믿는다. 고모가 차라리 자기를 아프게 하는 대신에 누나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누나 퇴원 직후 고모는 장에 천공이 생겨 두 달 간 병원에 입원했다.) 누나가 퇴원하긴 했지만 뇌 손상은 돌이킬 수 없어서 누나의 언어는 어눌해졌고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뭐랄까 어린 아이 같아졌다. 생존의 대가로는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고모와 (누나의 딸인) 오촌 조카들은 누나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역시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런 뜻인가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통풍 약을 먹고 있다. 통풍 전문가인 동생의 말에 따르면 통풍은 완치가 없다고 한다. 약을 통해 요산 수치를 꾸준히 줄이는 수밖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꾸준히 약을 먹고 있다. 약한 척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티를 내지 않으면 내 스스로를 죽음에 가깝게 몰아넣는 과로를, (나의 시간을 빼앗을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부과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 덕분에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타임 킬링을 하면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따위 업무가 교육의 본질과 무슨 상관이야!’라고 투덜대면서.

. 교회는 열심히 다니고 있다. 그 교회에 출석한지 몇 달도 안 되어 누나가 퇴원했기 때문에 나는 약속을 지켜야 했고, 영발 좋은 그 교회에서 나는 신께 영광과 찬양의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했다. 물론 나의 통풍의 통증이 분명 조만간 다시 찾아올 것처럼 - 그 사이 조금만 방심하면 몇 차례 찾아왔다. 첫 고통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 , 누나의 죽음은 유예된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나사로는 분명 다시 죽었을 것이다. 다시 죽을 나사로를 살린 것처럼, 다시 죽을 누나를 살린 것은 분명 그 분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 언젠가 뚜렷하게 알게 될 것을 믿는다. 그래서 내겐 웰빙(Well-Being)보다 웰다잉(Well-Dying)이 훨씬 중요하다.

삶은 일시적이고 죽음은 영원하다. 언젠가 반드시 죽겠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신앙을 유지하는 힘이 되었다. 다만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죽음은 (통풍과의 첫 만남처럼) 여전히 두렵고, 죽음의 형태가 (통풍과의 첫 만남처럼) 너무 고통스럽지 않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죽을 때 모르핀이 되어 줄 듣고 싶은 음악도 미리 선곡해 두었다. 반스의 말대로 죽음 앞에서는 책보다는 음악을 찾을 테니까. 처음엔 나를 클래식 음악의 세계로 인도해 준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선택할까 했는데, 지나치게 장엄하고 지루할 만큼 길다. 그 음악을 듣다가 죽는다면 빨리 죽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할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J.S.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와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두 곡을 골랐다.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욕심이지만 못 고를 것 같다. 두 곡의 러닝 타임을 합쳐봐야 10분도 안 된다. 이 두 곡을 듣는 그 사이에 죽을 수 있다면 그건 다행스런 죽음일 테니까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합리화해본다. 그리고 죽을 때 예수처럼 다 이루었다.’라고는 결코 못하겠지만, 칸트처럼 이것으로 좋다.(Das ist gut)’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죽는 순간까지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처럼 살려달라고 외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의 형태는 거의 비참하다. 우리 솔직해지자.) 만약 신이 나를 축복하셔서 죽음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면, 심포지움에서 제자들이 왁자지껄 토론하며 수다 떠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데아를 동경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던 플라톤의 죽음이 가장 이상적인 죽음 같다. 나도 (플라톤과는 다른 의미겠지만) 영원불멸의 이데아를 추구하고 있으니 조금은 기대하고 있다. 참고로 반스가 자신의 책에서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미처 모르고 있는 모양인데, 반스의 철학자 형이 임종 시 남길 유언인 잊지 말고 베커의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벤에게 줘.’는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오마주(가 아니라면 패러디)한 것이다.

 

2018715. 191113, 14, 15...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죽음과 마주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살아있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과 동의어임이 확실하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분명한 건 지금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스스로 단축시킬 생각은 없다. 다만 시간을 붙잡을 수도 없고 재활용할 수도 없으니, 하고 싶은 욕구’, 할 수 있는 능력’, 해야 하는(또는 하지 말아야 할) ‘의무사이에서 후회하지 않는 일회용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나의 욕심을 위해 세상에 가급적 의도적으로 미움은 남기지 말고. 군대에서 미워했던 고참처럼 나의 죽음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지 말고. 그리고 나의 개인적 혹은 가족 이기주의 때문에 내 수명(시간)을 벌어보겠다고 나의 할 일을 남에게 미룸으로써 (또는 할 필요 없는 일을 인위적으로 만듦으로써)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죽음을 앞당기지 말고(=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지 말고). 어쨌든 누군가는 어차피 어떻게든 죽을 거 여전히 질척거린다.’고 하겠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처럼 의연하게 (나라는 인간은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안 되는 줄 알지만 흉내라도 내면서, 그래, 그렇지. 반스보다 유식하지 못해도 난 윤리교사잖아.), 내일 당장 죽더라도,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YES마니아 : 플래티넘 s*******1 2018.07.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