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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반열에 끼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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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자기 수준보다 한 두 치수 높은 책을 읽는 법이다. 절대로 수준 이하의 책을 읽지 않는다. 지적 수준이 수준이상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다. 요즘처럼 세상읽기가 힘든 때도 없다. 현상의 불확실, 논리의 불명료성…. 이 것인가 하면 저것이고, 저 길인가하면 이 길이고, 도대체 정의가, 선(善)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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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자기 수준보다 한 두 치수 높은 책을 읽는 법이다. 절대로 수준 이하의 책을 읽지 않는다. 지적 수준이 수준이상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다.


요즘처럼 세상읽기가 힘든 때도 없다. 현상의 불확실, 논리의 불명료성…. 이 것인가 하면 저것이고, 저 길인가하면 이 길이고, 도대체 정의가, 선(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고 헷갈리기만 하는 세상이다. 핸드폰, 디지털, 컴퓨터, 자가 운전, 고화질, MP3, 세상 겨우 십여 년 산, 어린 애들이 나 보다 더 많이 세상을 알아버렸으니, 내 꼴이 말씀이 아니다. 식당이 거실로, 화장실이 안방으로 들어온 것은 이미 식상한 이야기다. 식당, 집회, 운동장, 어디를 가도 온통 여자들 세상이며, 예상치도 않았던 김대업 사건이 이회창을 낙마 시키고, 확정적 사건이 될 뻔 한, 김경준의 BBK사건은 불발탄이 되고, 서해교전의 무의미성은 무엇인지. 사회 이슈에 대한 주제의 확정된 정의조차 없다. 이현령비현령, 주도권을 잡는 논객의 전유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게 패러다임의 이동이라는 건가. 가치의 붕괴일까. 이렇게 급변한 시기는 없었고, 다시없을 것이다. 최소한 내 생각엔 그렇다.

그러나 불행한 시대, 이해할 수 없는 시대라 엄살떨건 없다. 비슷한 때가 있다. 120년 전1888년에서 1918년까지. 서구사회의 이념 ― 합리주의가 몰락해 기존 질서가 무너지던 시절. ‘1888년․파제노 혹은 낭만주의’를 시작으로 15년의 격차를 두고 ‘1903년․에슈 혹은 무정부주의’, ‘1918년․후게나우 혹은 즉물주의’, 이렇게 삼부작으로 쓰여 진 소설이 있다. 해설조차 ‘가치붕괴 시대의 인간상’이다. 3권의 책은 각각 따로 논다. 내용이나 인물이나 서로 섞이는 구석은 한 군데도 없다. 페제노가 1권의 주인공으로 3권에서 중요인물인 소령으로 나오고, 에슈가 2권의 주인공이며 3권의 중요인물이며, 베르트란트가 1권의 중요인물로 2권의 조연이지만 그들은 각각의 권에서 전권과 연결되거나 의미의 전이, 상징, 은유조차 없다. 완전 별개의 소설들이다. 은유, 낭만, 뜨뜻미지근한 연결고리를 차단한 냉정성이 깔끔하다. 


작가 브로흐의 철학적 역사해석을 보면 근대이후로 시민사회를 운영해 온 이성은 그 자체로 절대화 되어 몰락하고 현대의 위기를 자초한다. 기존의 가치 체계들이 자율성을 얻어 절대화 되면서 기존의 의미는 사라지고, 선험적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새로운 총체적 세계상을 찾아내고자 한다. 도달점은 신화로서의 문학이다.  

이처럼 무수한 개별가치체계들이 공존하는 현대를 박물주의 시대라 하며, 이러한 시대를 담는 소설이 박물소설이다. 박물소설이 많은 개별가치들의 부분적 지배에 대한 등가물일 뿐, 그것으로 가치분열이 없는 절대적인 통일체로서의 신화세계에 도달할 수는 없고, 오직 신화 문학만이 신화의 세계를 예감할 수 있다고 본다. 신화는 인간이 근본조건을 통찰하는 힘이며 꿈이다. 꿈은 절대적 총체성을 반영하여 인간이 갖는 실존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시켜 역사철학은 문학에 이르게 된다. 작가의 주장이다. 읽기 전 최소한 이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한다. 


1부. ‘1888년․파제노 혹은 낭만주의’ 요하임 파제노는 장원을 가진 귀족의 둘째 아들이다. 맏이 농장을 경영하고 둘째가 군대에 입대하는 세속관례를 따라 사관학교에 입대한다. 그의 친구 베르트란트는 사관학교를 중도하차하고 사업가로 변신 출세한, 요하임 파제노 세상살이의 자문역이다. 루체나는 도시 화류계 여인으로 위 두 사람과 연인관계에 있다. 에리자베트 주인공 요하임의 이웃 장원 귀족의 청순한 여인으로 요하임의 아내가 된다. 요하임은 루체나를 사랑하지만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고, 엘리자베트는 베르트란트를 좋아하지만 애정관계는 실패한다. 이들은 기만적이고 거짓으로 연결된 잘못된 가치관, 부적절한 결정체들이다. 주인공들은 구세대의 가치에서 해방된 세대들이다.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 모순됨이 삶의 규범으로 새로운 가치를 찾지만 새로운 것은 다시 무가치한 것으로, 다시 새로운 것과 무가치한 것으로의 순환의 소용돌이가 연속된다. 지동설, 망원경의 발명, 천체 탐구의 시작,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자들이 생겨나고 부르주아적 계급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시대의 인간상이다.


2부. ‘1903년․에슈 혹은 무정부주의’ 주인공 에슈의 일상적인 삶의 단면들, 우연한 만남, 우연한 사랑, 우연히 생긴 직업, 우연한 투쟁, 몽유병자처럼 배회하는 인생들. 애매모호한 생각들과 불명료한 이념들 속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은 좌충우돌 천방지축 놀아나는 현대인의 생활상과 흡사하다.

소설바탕에 깔려있는 작가의 심중은 가치몰락의 시대에 인간이 다시 종교적 영원성과 절대성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희생, 헌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내면 밑바닥 비이성성이 종교이념으로 발전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작가의 의도를 따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왜냐. 그 후 일단의 문예사조의 흐름 ― 카프카의 ‘성’, 밀란 쿤테라의 ‘불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소외되고 구제될 수 없는, 대책 없는 인간으로 치닫고 있으니까.


3부. ‘1918년․후게나우 혹은 즉물주의’ 주인공은 세상물정을 제대로 읽는다. 윤리, 종교적 가치 및 질서관념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기 이익에 첨예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란 걸 알아버렸다.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상업적 이윤추구만이 있을 뿐.  공동체의 이념은 사라지고 개인만이 남는다. 후게나우에게 이성은 완전한 자율성을 얻어 악으로 치달아 에슈의 아내를 겁탈하고 에슈를 살해한다. 나쁜 놈.

브로흐는 현대의 인간군상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닌지. 부모 살해범, 유아유괴 납치범, 부녀자 연쇄 강간 살인범. 잡아도 잡아도 하염없이 재생하는 인간 말종들. 그러나 이 흉악범들이 천벌을 받아 경천동지하는 날벼락 맞는 일 없듯 후게나우 또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승승장구한다. 이게 현대인의 생활상이다. 중세의 종교관, 이념, 도덕이나 윤리는 무너졌다. 새로운 모럴을 찾는다. 그것이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힘들게 읽었다. 1부는 쉬운 편이다. 구조도 간단하고 필치도 그저 그렇다. 가치붕괴 초기단계라서 그럴까.

2부에서 글은 분화하기 시작한다. 개인들은 개인으로, 몇 개의 이야기들은 개체로 독립해 별개로 따로 논다. 연관성이 없다. 기존의 사고의 틀, 필연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개인들과 개체들은 우연을 강조한다. 현대화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일까. 불필요한 스트라이크를 말리러 갔고 거기서 불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다 체포된 가이링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금된다. 이 일련의 사고에 대한 책임자 베르트란트 살해 기도를 세우지만 주변에서 극구 말리고 기실 만나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어이없는 그의 자살. 이 일련의 사건들과 주인공 에슈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일회성이고 연관성이 없는 우연에서 우연으로 흐를 뿐이다. y=f(x)란 필연의 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이다. 이쯤에서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왔을까.

3부는 복잡다양하다. 문체도 지적이고 유려하며 다양하다. 소설의 길이만도 위 두 편을 합친 분량 400여 쪽이다. 작가는 이 3부에서 자기의 역량을 몽땅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도 지적 역량을 다해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해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베를린의 구세군 소녀 이야기’나 ‘가치들의 붕괴’를 완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가치 몰락의 철학과 역사 철학을 소설로 써서 몽매한 대중을 계몽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이 책을 쓴 뒤 소설 보다 칼럼을 더 많이 썼다고 한다. 아마 소설이 읽히지 않는다는 걸 알아 챈 걸까. 이렇게 어려운 소설을 누가 읽겠는가.

그러나 세상 바로 읽으려면, ‘글줄이나 읽는 사람’이란 말 듣자면 이 정도 읽기는 필수 아닐까.


일전 꽤 두꺼운 책을 산 적이 있다. 일본인 작가로 내용은 서평과 독서일기다. 그런데 수준이 말씀이 아니다. 책 이름에 홀려 산 건데 아니올시다. 그런 책, 왜 번역하고 인쇄를 하고 양장 제본을 했을까. 국력 낭비에 simple한 people 제조해 보자는 건가. 선진국으로 간다는 이 조국에 이런 맹추들 허다하다.

한국인의 독서 수준. 업그레이드할 때다.

x*****k 2008.05.1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