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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심적 효과에 대해서는 시험 준비를 하며 느껴봤다. 도서관에서 다가오는 시험 때문에 불안하고 공부는 안 되고 할 때 서가에서 손에 잡힌 하루키 책을 읽고 있자니 적당히 현실감 없으며 시간 보내기에 너무나도 유익했던 경험. 지금, 불안하십니까?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가벼운 하루키 수필이나 단편이라도 읽어보세요- 같은 효과 말이다. 도피로서의 독서라고 해도 좋다. 하루키의 에세이집 중에서도 모든 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단 '재미가 있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의 힘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는 없기에.
(사진은 내가 갖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와 짧은 단편집 원서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와와 <하루키의 여행법>의 원서인 <변경·근경> 도 있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았을 때 책장에 있는 신경안정제라도 집는 마음으로 <무라카미 라디오 3> 같은 책을 읽었듯이 이번엔 전에 일본어 원서로 본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전자책으로 구매해 넘겨보았다. 전의 <우천염천> 이나 <먼 북소리>와는 좀 다르게 여기 모인 여행 에세이들은 독자에게 정보 상 도움이 되겠다는 톤으로, 잡지의 여행 란을 위해 쓰여진 게 거의 매 에세이마다 확실하게 느껴진다. 이전의 여행 에세이들이 좀 더 내향적이거나 내밀하고 또 문학적인 문체라면 이 책은 보다 가볍고 실용서를 읽는 독자를 의식한다. 오래 전, 1998년에 나온 <하루키의 여행법 (다른 출판 제목: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에서 여행에 대한 글을 좀 발췌해 본다.
정말 여행이란 분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정말이지 집에서 스크래블이나 하고 있는 편이 훨씬 정상적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여행을 떠나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힘이 이끄는 대로 비틀비틀 벼랑 끝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낯익은 부드러운소파에 걸터앉아 절실하게 깨닫는다. "아아. 뭐니뭐니 해도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안 그런가? 그것은 어찌 보면 병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어도 나의 경우엔) 서가에서 지도를 꺼내어 페이지를 열고 책상 위에 올려 놓은 후에 뚫어질 듯이 바라본다. 지도라는 것은 아주 매혹적인 것이다. 지도에는 아직 자기가 가 본 적이 없는 지역이 펼쳐져 있다.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도전적으로. 들어본 적도 없는 지명이 허다하다. 건너 본 적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있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지도를 펴놓고 자기가 아직 가 본 적 없는 곳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끌려 들어간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진다. 아드레날린이굶주린 들개처럼 혈관 속을 뛰어 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새로운 바람의 산들거림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 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실제로는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
훨씬 더 젊었을 때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에 대해 이렇게 유혹적이라는 글을 남겼지만 더는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더라도) 속성으로 여행을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은 자신의 나이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쓴 적 있는데, 그의 말을 빌려 여행에 관해서도 말하자면 자신의 나이를 벗어나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 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고, 예상했던 일이 빗나간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루키의 여행법>에서는 위와 같은 글도 있었다. 예전 책을 비교해 보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더 이상 혼자 여행을 한다거나 고생을 한 여행기를 적지는 않는 변화를 느꼈다. 또 가령 이전에 작가에겐 좀 더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취향도 확실하다. 91년에 갔다는 이스트햄프턴을 두고 ”아름다운 고장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작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별로 살고 싶지 않다. 그곳이 미국이든 일본이든 말이다. “ 라고 적었다. 하루키는 혹여나 사람들의 그건 좀… 하는 반응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자기주관이 강한 여행 취향 얘기는 이 책에는 거의 적지 않았다. 여행기는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했다고 작가 후기에도 적고 있다. 그런 그가 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하나의 책으로 묶게 된 이유는 ‘잊을 만하면 띄엄띄엄 청탁이 들어와 여행기를 쓰는 작업을 하다보니, 차츰 원고가 쌓여서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자가 어쩌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라오스에는 라오스에만 있는 것이 있었다고.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점은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철학(비슷한 것)이다.' 라는 태도 같은 것이다.
나는 요즘도 앞으로도 아마 여행은 거의 하지 않을 듯한데 그런 사람으로서 여행 에세이를 읽는 행위는 어떤 종류의 탁상여행, 대리만족 여행이다. 라오스에는 가 보지 않았고 이 곳에 나온 모든 여행지를 아마 복권 당첨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갈 일이 없을 듯하다. 맨 마지막 장 쿠마모토 편에는 한 독립서점의 귀여운 흰 고양이 사진이 있다. 우와, 너무 귀여워, 실제로 보면 더 귀여울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해도 쿠마모토까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전의 토스카나에 대한 짧은 에세이 ‘하얀 길과 붉은 와인’ 에서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이야기와, 한 단편에 토스카나의 루카라는 소도시의 와인에 대한 언급을 해서 와이너리의 주인도 책을 보고 알게 되어 도쿄까지 와인을 보내준 적이 있으며, 이 에세이 투고를 위해 다시 같은 와이너리를 취재해 와인도 맛보고 또다시 빈티지 와인을 선물받았다는 (유명 작가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을 듯한) 부럽고 멋진 일화도 있다. 백야를 경험할 수 있는 비슷한 시기에 나도 핀란드에 가 보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운영하는 바나, 시벨리우스가 살던 집에는 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여행기는 여행을 앞으로 하고 싶은 사람과 별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읽는 태도가 다를 것 같다. 난 ‘나도 다음에 가면 여긴 꼭 가봐야겠어.’라는 생각은 안 하고 단지 흠, 재밌겠구나나 저런 곳도 있구나 하는 대리 호기심 충족으로 여행기를 읽는 셈인데 분명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여행은 평범하지 않고 20년 전의 여행기 같은 땀흘리고 고생하는 여행기도 아니다. 간 모임에서 옆에 앉아있던 소탈한 중년 여성이 알고 보니 그 나라의 전 대통령… 같은 경험은 보통 사람들이 할 만한 경험은 아니다. 저명한 세계적인 작가로서 하는 여행 경험을 읽는 것이 어느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사진이나 동영상에 붙여진 여행기와 분명히 다른 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는 여행을 할 일이 그다지 없을 독자에게도 20년 전쯤의 것이 리얼하고 마치 맥박이 느껴질 듯 에너지 넘치고 생생하다. 98년의 <하루키의 여행법> 에 실린 작가 후기에는 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는 것이 현실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때도 있다고도 썼다. 원래 여행기를 읽는 게 실제 여행보다는 안전하게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독자 한 명으로서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의 후기, 맨 마지막에는 ‘여행은 좋은 것입니다. 때로 지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습니다. 자, 당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든 떠나보세요.’ 라는 문장이 있다. 진심은 진심인 것 같은데 책 전체에서 본다면 조금 편리하도록 모호한 문장이다. 하지만 어느 여행책에나 마감의 문구로도 왠지 적당해 보인다. 론리플래닛이든 여행사의 광고문구든 여느 여행블로그의 포스트 말미에도. 이 여행에세이 컬렉션은 그 정도의 온도의 여행기, 여행이 ‘떠나고 싶은 강한 유혹’이 아닌 여행이라, 글쎄, 가성비를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들어가기 좋은 온천 물처럼 편안한 페이지터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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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가 소설의 연작 형식으로 구성되었다면, <흰>은 생각의 연작 형식을 글로 풀어냈다. 모든 <흰>것들의 사명이 마치 죽은 것들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불러내는 회소곡이면서 그들을 애도하고 함께 생각하는 만시의 장인 듯.
어떤 부분은 앞에서 본 듯한 이야기가 다시 재생되기도 한다. 자신 이전에 있었던 누군가의 흔적이 이미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항상 되내이게 되는 것으로. 그래서, 마치 죽음의 연작을 들여다보는 듯 하다. 그 죽음이 그저 운명이든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위안이 되든, 한 사람에게는 수많은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해도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는 본질이 된다. 그렇다면 괜찮았을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달라졌을까?
<흰>의 흰 이미지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아차 싶은 순간에 멈칫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시 제자리로 온다. 천사처럼 밝고 아름답거나 솜사탕처럼 가볍고 날아갈 듯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책의 가벼움과는 상반되는 문단의 망설임과 진행은 <흰>을 모직물이나 견직물과는 다른, 무명이나 삼베처럼 날 것 그대로의 것으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이게 한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p.120)." "흰옷이 그렇게 허공에 스미면 넋이 그것을 입을 거라고,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가?(p.124)" "상처투성이의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중략)...나는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p.17)."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게 되는 <흰> 것들, 생각속에 항상 존재하는 <흰> 이미지들. 그것들 안에 삶의 범주에 기꺼이 넣을 수 있는 존재와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과 그것들을 기억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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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기엔 조금 무거웠던 내용이 많아요. 함부로 그감정을 무시할수 없고 함부로 다가갈수도 없는... 무거움의 무게가 무거워서 왠지 모르게 읽으면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신이 맨붕일때는 왠지 읽으면 안될것같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감정이 되어서 스며들어 책의 내용에서 전하고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나의 감정인지 구분이 안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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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산문집에 가깝다. 서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소설이라고 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책 페이지수도 작고 한 페이지당 글이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2시간이면 다 읽는다. 뭐 분량이 대수겠나. 그리고 한강의 소설들은 길지 않았다. 여운이 길었을 뿐. 한강이란 작가를 좋아하기 힘들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난 레이먼드 카버나, 챈들러 문장의 건조함과 무뚝뚝함을 좋아한다. 한강의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 자꾸 자기안으로 들어가 언어를 찾아낸다. 그 언어들이 건조할리가 있겠는가. 한강의 문장들은 서늘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좋아하기 힘들다. 한강을 지나치고 싶다. 그러나 그럴수 없다. 무심코 아니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 지나치더라도 그 자리에 한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와 한강을 읽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와 한강을 읽을 일은 없을 듯하다. <흰>의 109페이지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 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강의 안으로 들어가는 그 문장들과는 전혀 딴판인 글이다. 이건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이성의 언어다. 서늘하고, 위로하는 문장들로 누군가를 단죄하는 것이다. 그 감정의 언어들로 누군가가 잘못됐다고 단정짓는 건 온당치 않다. 잘못됐다면 왜 잘못됐는가를 분명히 이야기 해야한다. 감정을 벗어던지고 분명하게 얘기해야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강은 그렇지 않은듯 하다. 그리고 이 글에서 누군가를 탓하는 분노가 느껴진다. 그녀의 얼굴과 이 글을 동시에 떠올리자 불현듯 무서워졌다. 그녀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니 또 무서워진다. |
|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 특히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예전엔 그의 소설이 좋았는데 이제는 에세이 그 중에서도 여행관련 된 에세이가 좋습니다. 그 나이의 외국인 바라 본 외국. 그 시대의 느낌 그런 것들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대리 여행을 유튜브 보다 더 즐겁게 합니다 |
| 하루키의 소설도, 수필도 좋아하지만 역시 수필로 먼저 접해봤기 때문에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하루키가 여행했던 곳들의 이야기들을 편하게 볼 수 있네요. 지금은 또 이 책을 썼을 때보다 시간이 지나 그 때와 같을 수는 없을테지만 히루키의 생각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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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 진눈깨비 중에서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를 처음 읽고 큰 충격을 받아서 작가님에 대해 찾아보고, 다른 작품들도 알아 봤어요. 채식 주의자는 제가 읽기에는 아직 아닌 것 같아서 흰을 구매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한강 작가님은 저한테 믿고 보는 작가님이에요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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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와 소년이온다까지 완독후 읽게된 한강의 에세이집 흰
한강작가 특유의 어두운 아우라가 소설에이어 에세이까지 계속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흰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본적없는 생각해본다면 나에게는 깨끗한 순결한 느낌의 것이었는데 책의 내용은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이책은 완독하는데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에 마음이 들떠있고 복잡한 생각이 들때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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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들에 대한 단상.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에 있는 이 글은 함박눈과도 같다. 읽다보면 어느새 흰 것이 어깨 위에, 머리 위에 두껍게 내려앉아 있는 것이 느껴진다. <흰>은 한 단어에 얽힌 이야기가 짤막하게 얽혀있다. 기존의 소설 형식을 과감하게 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산문집이나 아포리즘에 가깝게 써진 글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짤막한 '흰 단어'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큰 서사를 갖추고 있다. 생략된 묘사와 글로 인하여 독자는 그 서사의 완전한 모습을 글에서 찾을 수 없다. 대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이야기를 극히 일부만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글에서 전체를 그려내기 위해 독자는 자신의 상상으로 글을 메꿔야 하며, 각 단어에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찾아모아야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한편의 연작 시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나의 이야기가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가슴 속에 남는다. 그 세계는 위태롭고 불안하며, 기울어져있다. 은은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슬픈 감정을 쌓아올리도록 만든다. 어느새 무거워진 흰 눈에 독자의 감정은 희게 무너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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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 상을 수상하여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한강 작가의 흰 입니다. 작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번 책도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책장이 넘어가기가 쉽지 않네요. 다만 소설이 주는 묵직한 그 무게감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도 합니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도 정말 인상깊게 읽었는데 이번 책도 마찬가지로 큰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추천 합니다. |